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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삼국사기/백제본기> 동성왕 10 년(488년) 기록이다.
魏遣兵來伐 爲我所敗
위나라가 보낸 병사가 우리를 공격했지만 우리에게 패했다.
위 기록의 위魏는 대체 어디에 있는 나라였을까? 백제 강역을 대한반도 중앙 지역이라고 이해해 온 대한인들로서는 납득할 수 없는 기록일 것이다.
위는 서국 중앙의 북부 지역이 근거지였던 탁발선비가 세운 나라로 역사에서는 조조가 세운 조위曺魏와 구별하기 위해 북위北魏 또는 원위元魏라 불리는 나라다. 북위는 3 세기 초 흉노 유연을 격파하고 음산 일대를 장악하고 315 년 대代를 세웠으나 곧 쇠락하였고 이후 384 년 동진과 전진이 대결한 비수대전에서 전진이 패한 틈을 메꾸며 화북지역을 차지하고 승승장구하여 동북쪽으로는 고구려와 국경을 마주한 서국의 대국이다.
고구려 장수왕 시기인 서기 432 년 한 시기 요서군 유성현 지역을 차지한 북연을 격파하였고 이 지역에 남아있던 조선민을 요서군 비여현으로 옮겨 조선현을 다시 두었었다.
<위서/지형지>
평주 북평군
朝鮮 二漢晉屬樂浪 後罷 延和元年徙朝鮮民於肥如 復置 屬焉昌新 前漢屬涿 後漢晉屬遼東 後屬 有盧龍山
한편 북위의 동북 방향 끝 지역이며 평주 북쪽에 설치된 영주의 동쪽은 고구려 영역이며 그 경계는 요동 지역을 흐른 대요수다. 당시의 영주에는 창려.건덕.요동.낙랑.기양.영구 등 6 개 군이 속해 있었다. 이러한 북위가 동쪽으로 대요수를 건너 고구려 영역을 지나 백제 건국지인 대방고지 또는 마한 영역을 공략했다는 기록은 동.서국 어느 시기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단지 위 <삼국사기> 기록과 같이 북위가 백제 지역을 침입한 것이 전부다. 그러면 북위를 격파한 그 백제 병사는 대체 어디에 있었을까?
그 답의 실마리 역시 아래의 서국 정사 및 정사급 기록들 뿐이다.
<진서/재기/모용황>
句麗百濟及宇文段部之人皆兵勢所徙非如中國慕義而至咸有思歸之心今戶垂十萬狹湊都城恐方將?國家深害宜分其兄弟宗屬徙于西境諸城撫之以恩檢之以法
고구려.백제 및 우문.단부의 사람들은 모두 병세를 옮겼는데 의를 내세워 중국에 온 것이 아니니 모두들 고향으로 돌아갈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지금 호가 10 만이나 도성에 몰려 좁을 지경이니 장차 국가에 깊은 해가 될까 두럽습니다. 마땅히 그 형제종속을 나누어서 서쪽 경계의 여러 성으로 옮겨 이들을 은총으로 위무하고 법으로 단속해야 할 것입니다.
위 기록은 서기 344 년 기록이며 선비 모용외를 이은 모용황의 연燕 도성은 요서군 유성현이고 용성현으로 고치고 그 도성은 장수왕 시기 장수 갈로맹광이 도륙하고 불태운 화룡궁이다. 또한 봉유의 봉표 2 년 후인 346 년에도 백제가 나타난다.
<자치통감/ 진기/ ?종성황제 하 영화2년>
永和二年 春 正月...初 夫餘居于鹿山?百?所侵部落衰散 西徙近燕 而不?? 燕王?遣世子俊?慕容?慕容恪慕?根三?? 萬七千??夫? 俊居中指수? 事皆以任恪 遂拔夫?? 其王玄及部落五萬?口 而? ?以玄????? 妻以女
346 년 봄 정월...처음 부여는 녹산에 거주하였으나 백제가 침범하여 부락이 쇠산하여져, 서쪽으로 연나라에 가까운 곳으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방책을 설치하지는) 못하였다. 연왕 (모용황이) 세자 모용준으로 하여금 모용군,모용각,모여근 등 세 장군과 만 칠천 기병을 거느리고 부여를 습격토록하엿다. 준은 영내에서 지시를 하였고 군사의 일은 모용각에게 일임하여 드디어 부여를 소탕하여 그 왕 현과 부락 오만여 구를 사로잡아 돌아왔다. 모용황은 부여 현을 진동장군으로 삼고 자신의 딸을 주었다.
결국 북위가 요서군 북쪽 지역에서 남쪽 지역으로 옮긴 조선민은 부여.고구려.백제 백성임을 알 수 있다.
- 1900 년 전후 양수경이 편찬한 <역대연혁지도> 중 <북위형세도> 부분도
그러면 선비 연국 모용황 도성에 포로로 끌려온 백제 병사는 활동지는 과연 어디였을까? 우선 아래의 서국 정사급 기록들로 그 대략을 파악할 수 있겠다.
<송서/고구려전>
백제국은 원래 고구려와 더불어 모두 요동의 동쪽 천여 리에 있었다. 그 후 고구려는 요동을 빼앗아 차지하고, 백제도 요서를 빼앗아 차지하였다. 백제의 치소를 진평군 진평현이라고 하였다.
<양서>
마한에는 54 개 나라가 있었는데 백제는 그 가운데의 한 나라이었다. 나중에 점차 강대해져 여러 작은 나라들을 겸병하였다. 그 나라는 원래 (고구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에 있었다. 동진 때 요서.진평 2 군을 빼앗아 차지하여 백제군을 스스로 두었다.
<북사/백제전>
처음에 백가가 바다를 건너왔기 때문에 나라 이름을 백제라 부르게 되었다. 백제의 임금 성은 여餘씨다. 그 나라의 도성을 거발성이라 부르고 또한 고마성이라고도 한다.
<구당서>
백제의 땅은 장안의 동쪽 6200 리 되는 곳에 있다. 동북쪽은 신라에 이르고 서쪽은 바다를 건너 월주越州에 이르고 남쪽은 바다를 건너 왜국에 이르고, 북쪽은 바다를 건너 고구려에 이른다. 그 나라의 왕이 사는 곳은 동.서 두 성에 있다.
<통고>
진나라 때 고구려가 요동을 빼앗아 차지하자 백제도 요서.진평(당나라 유성과 북평 일대다)을 빼앗아 차지하였다. 진나라 이래로 여러 나라를 병탄하고 마한의 옛 땅을 차지하였다. 남쪽으로 신라와 접하고 북쪽으로 고구려와 1 천 여 리 떨어져 있다. 서쪽으로 대해를 한계로 하여 소해의 남쪽에 자리하고 있다.
<태평환우기>
백제는 남쪽으로 신라와 접하고 북쪽으로 고구려와 천여 리 떨어져 있다. 서쪽으로 대해를 한계로 하여 바다 건너 월주에 이르고 소해의 남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남쪽으로 바다를 건너 바로 왜국에 이른다. 진 이래 대대로 번국의 작위를 받았으며 백제군을 스스로 두었다.
즉 백제는 동진이 쇠망하는 서기 300 년 전후 고구려와 동시에 고구려가 차지한 요동군의 남쪽 요서 지역으로 진출하였음을 알 수 있고 그후 전장에서 패해 포로로 끌려가는 시련도 겪었지만 결국엔 유성과 북평 혹은 요서.진평 2 군 지역의 어느 곳 차지하여 백제의 자치 군郡인 낙랑군.대방군.조선군.서하군.광양군.성양군 등을 설치하였었고 서쪽 도성 거발성도 설치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현 한국사학계는 백제 흥망지를 대한반도 내 지역으로 추정하기 때문에 백제가 한 시기 요서군 지역으로 진출하여 백제군 또는 진평군 진평현을 설치하였다는 남북조 시기의 남조 정사인 <송서>.<양서> 등의 기록을 불신한다. 즉 김기섭은 1997년 백제의 요서 진출설 재검토 - 4세기를 중심으로 <한국 고대의 고고와 역사>에서 근초고왕이 영동장군령낙랑태수 호로 피봉된 것이 요서경략설의 진원지이며 백제의 과장 제스처를 남조에서 사실로 착각한 것이며 화북경영설은 언급이 없었다고 하였다.
하지만 앞 글에서 밝혔듯이 백제는 요서 지역으로 진출하는 것 자체가 그리 어렵지 않은 지금의 란하 하류 동쪽 강안 지역에서 흥망하였다. 즉 <송서><양서> 등은 물론이고 <삼국사기> 등의 요서백제 경략 기록은 실수가 아니라 정확한 것으로 보아야 하고 따라서 더 깊은 연구를 해야 하는 의무를 느껴야 할 것이다.
다음은 백제가 요서 지역에 설치한 백제군 위치와 관련된 기사다. 거란.요국 시기의 지리를 기록한 정사 <요사/지리지>중경대정부 서문이다.
中京道大定府 虞爲營州夏屬冀州周在幽州之分 秦郡天下是爲遼西 漢爲新安平縣漢末步奚居之 幅員千裏多大山深穀唨險足以自固魏武北征從兵大戰 降者二十餘萬 去之松漠 其後拓拔氏乘遼建牙於此 當饒樂河水之南溫兪河水之北 唐太宗伐高麗 駐蹕於此 部帥蘇文從征有功 奚長可度率衆內附 力量饒樂都督府 咸通以後挈丹始大 奚族不敢復抗 太祖建國...중략...有七金山馬盂山雙山松山土河統州十縣九 大定縣白( )故地...
중경도 대정부 땅은 우 시기에는 영주, 하 시기는 기주, 주 시기에는 유주라 하였고 진 시기의 군제 하에서는 요서군이라 하였으며 한 시기에는 신안평현으로, 한 말에는 해족이 거주하였다. 폭원이 천 리에 이르고 큰 산과 깊은 계곡이 많고 험하여 지키기가 쉬웠다. 위나라 조조가 북벌하여 큰 싸움에서 20 여만 명을 포획하니 송막으로 도망하였다. 그 후 탁발씨가 지휘소를 세웠으니 요락하수의 남쪽이며 온유하수의 북쪽 땅이다. 당 태종이 고려를 침공할 때 주필하던 곳이 이곳이였고 당시 부의 우두머리 소문이 이 전역을 종군하여 자못 공이 있었다. 해족의 장 가도가 족속을 이끌고 내부하니 살펴 요락도독부를 맡겼다. 함통(860~873) 이후 거란이 세력을 키우니 해족은 다시는 항거하지 못했다. 태조(907~925)가 건국하고....중략....칠금산.마맹산.쌍산.송산이 있고 토하가 흐르며 10 주와 9 현을 통할한다. 대정현은 옛 백( )의 땅이다...
사실 위 기록과 같이 거란.요국의 중경 대정부 지역은 한 시기 요서군 신안평현 지역이 아니다. 굳이 기록하겠다면 요서군 유성현 지역이라 해야 옳다. 조조가 백랑산에 올라 요서군 유성현에 주둔한 오환족 답돈 군사를 보았고 그 오환족이 내쫓긴 곳은 당연히 유성현의 북쪽 지역이여야 하고 또한 마땅히 백랑수 곧 송 이후 대릉하의 북쪽 지역이여야 한다. 그 북쪽 지역이 거란의 중경 대정부 지역이며 요락수 곧 청 시기 영금하와 온유하 곧 청 시기 노합하가 흐르는 사이 지역이라는 곳이며 바로 그 지역이 중경 대정부 대정현이고 白( )故地곧 백? 옛땅이라는 소리다.
요서군 유성현 북쪽에 축성한 용성과 화룡궁이 고구려.백제.우문.단부의 병세 곧 포로들로 미어터질 지경이라는 봉유 봉표에 나타난 백제百濟가 아니라면 대체 어느 종족.국가가 `백( )`이란 호칭으로 불렸다는 것인가? 위 `大定縣白( )故地` 원문의 괄호에는 `濟`가 놓일 수 밖에 없다.
- 조작도 <일본황조도>
- <지리도>부분도, 1137 년 송인 황상이 각석함
한편 후금.청국을 세운 만주족이 연경을 차지하고 천하 제패에 취해 편찬한 <만주원류고>에는 <통고><당회요><구당서><신당서> 등을 인용하여 백제 강역을 아래와 같이 설명하였다.
흠정만주원류고 부족3 백제
<통고>에는 또 `남쪽으로 신라와 접해 있다`고 하고, <당회요>에 `동북쪽으로 신라에 이른다`고 하였는바, 백제의 지경을 상고해 보니. 서북쪽으로는 오늘날의 광녕.금주.의주로부터 시작해서 남쪽으로 해.개에 걸쳐 있고, 동남쪽으로 조선의 황해.충청.전라도의 제도에서 끝이 나, 동서가 좁고 남북이 길쭉하다. 따라서 유성과 북평을 기준으로 신라가 있는 곳을 따져보면 신라는 백제의 동남쪽에 있게 되지만 경상과 웅진을 기준으로 이를 따져보면 신라는 백제의 동북쪽에 있게 된다. 또 북위 때 백제가 물길과 공모해서 힘을 합해 고구려를 취하려고 했던 것을 보더라도 동북쪽이 역시 물길과 인접해 있었던 것이다. <흠정만류원류고> 장진근 역주 146 쪽
즉 청국 영역인 봉천성 금주부의 광녕.금주.의주는 요서백제의 추정 영역이고 해.개 즉 해주.개평은 봉천성 봉천부 지역이지만 한 시기 요동군의 동남쪽 지역인 패수.대수.한수가 흐르는 지역이다. 또한 동남쪽으로 조선의 황해.충청.전라 3 도라는 것은 고려 시기의 3 도 명칭이고 이조선 시기엔 아마도 황해 1 도 지역이였을 것이다.
하지만 청국인이 추정한 요서백제지는 약간 어긋난 것으로 보인다. 요서 지역의 백제가 흥성하던 당시인 전연.북위 등이나 송.거란의 기록으로는 아래와 표시와 같이 고구려.백제 포로가 있던 전연의 용성.화룡궁은 <수경주/대요수> 기록에 의하면 유성현의 북쪽이고 동북류하는 백랑수 곧 대릉하의 남쪽이라 하였으니 백?고지가 기록된 <요사/지리지.중경대정부> 기록과 연계하여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의주.광녕.금주 지역은 <요/지> 대정부 기록의 요락수.온여수와는 거리가 멀다. 게다가 광녕은 한 시기 요동군 무려현이고 금주 지역은 백랑수가 대요수로 합류되는 한 시기 요동군의 방현이라 보아야 하기 때문에 백제가 요서 지역으로 진출할 그 즈음에 고구려도 진출하여 약유하였다는 요동군 지역으로 보아야 한다.
또한 당시 백제 영역과 관련하여 언급된 대해大海.소해小海는 대한반도 내가 아니라 당연히 지금의 란하 하류 지역을 말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즉 요동군.요서군 위치가 지금의 서국 하북성 동쪽 끝 지역을 흘러내리는 지금의 란하 하류의 서쪽 유역이였고 백제 건국지인 대방고지.마한땅은 하류 동쪽 강안지역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해는 마땅히 란하 본류의 최하류를 말하는 것이고 소해는 란하 최하류의 동쪽 지류 곧 낙랑군을 흐른 820 리 열수의 하류이며 이조선 시기의 압록수 하류를 말할 것이다.
또 월주越州는 <청사고/지리지.직예.준화직예.풍윤> 기록과 같이 지금의 란하 최하류를 서쪽으로 건너 지금의 당산 부근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그 근거는 아래의 <청사고/지리지> 직예성 준화직예주 기록이다.
豊潤 ... 海南二百裡 ... 薊運河自玉田緣界계에 속한 풍윤현에서 남쪽으로 100 리 떨어지고 대사大使가 駐 곧 머무른다는 월지장越支場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단편에 머무른 조각 기록들 뿐이지만 지리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나면 백제가 요서 지역에 진출한 것은 백제가 흥성기이기도 했지만 그 요서 지역이 주인이 없는 공백 상황이였고 동시에 백제 흥망지에서 서쪽으로 바다, 정확하게는 대요수.염난수.소요수.패수 등이 합류한 이후의 최하류를 건너기만 하면 도착할 수 있는 극히 가까운 지역이였기 때문이다.
한편 아래는 드물지만 요서백제에 대한 이 땅의 선학들 인식이다.
신경준 (1770년 與地考)
최치원이 당나라 대사시중에게 보내는 시에 나오는 백제가 대륙 동해안을 뒤흔들었다는 것에 근거하여 백제의 백제의 요서 영유는 사실이며 삼국사기에 기록되지 않은 것은 누락된 것이라고 봄
신채호 (1931년 조선상고사)
근구수왕때 중국의 요서 산동 강소 절강 등의 지방을 점령하였던 것이며 북조계의 사서에 기록이 없는 것은 북조사관들의 태도 때문임. 백제가 멸망할 때에도 요서에 백제군이 있었다고 봄.
김세익 (1967년 력사과학 , 1991년 북한의 우리 고대사 인식)
백제의 요서진출을 3세기 말로 보고, 6세기 초중엽에 걸쳐서 요서지역에 진평군을 두고 다스렸고,
백제군의 위치는 대릉하, 소릉하의 하류유역에서 란하의 하류유역으로 봄.
첫댓글 백제가 진(晉) 시대에 진출한 진평현(晉平縣) 위치와 송(宋) 시대에 진출한 진평군(晉平郡) 위치
https://blog.naver.com/hsg8689/221537683221
A.D 488년에 백제(百濟)와 북위(北魏) 간에 왜 전쟁이 벌어졌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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똘팔, 이 등신 뭐지?
쓰레기글 주소를 왜?
자신 있으면 글로 올려!,
무식한 매국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