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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 세례
김장을 조금만 담겠다던 아내의 구호는 올해도 빗나갔다. 매년 아들딸 넷 집 몫으로 백 포기를 담았다. 올해는 배추 알통이 작아 스무 포기를 추가했다. 찬 바람 내리는 초겨울, 주부들에게 가장 큰 고역이 메주 쑤는 일과 김장이다. 수능시험 추위와 김장 추위는 맵다. 온종일 차가운 물에 배추를 다듬고, 소금으로 절이고, 간을 빼고, 양념하다 보면 손과 발은 얼얼하고 볼기짝도 푸르스름하게 부어오른다.
살아오면서 한 번도 김장을 거든 일이 없었다. 왕손의 후예라며 뻐기고 양반의 가문이라며 거들먹거렸다. 부엌에 들어가는 것을 수치로 여겼다. 설거지나 청소를 하면 양반의 체통이 무너지고, 남자의 자존심이 꺾이는 줄로만 알았다. 남자는 하늘이요 여자는 땅이라며 호기롭게 읊어 댔다. 하늘과 땅의 오묘한 진리도 모르는 채 군림만 해 왔다. 김장값이라며 몇 푼을 던지고는 연방 양반 기침만 토해내지 않았던가.
아내는 배추를 소금으로 절일 때만큼은 신명이 잡히는 모양이다. 스트레스를 날릴 수 있으니까. 남편의 뻣뻣한 고집이 소금발 잘 받지 않은 딱딱한 배추의 푸른 잎인 양, 마음껏 홱홱 뿌려 댈 수 있을 터이니까. '이번만큼은 왕소금으로 확실히 숨을 죽여 기를 꺾어 놓으리라.' 몸통을 자랑하는 씨알 굵은 미꾸라지도 소금 몇 차례면 온몸을 뒤틀다가 고개를 처박는다. 말로는 하늘에 별도 따줄 듯 달콤하게 뱉으면서, 자기가 하는 일은 움쩍 않는다. 그러한 남편의 황소고집에 소금을 뿌리고 싶었을 것이다.
혹여 뿌려질 소금 세례가 두려워 김장을 돕고자 마음을 굳게 먹었다. 평소 지론이던 '남녀유별' '하늘과 땅' 같은 소리는 거둬들이기로 했다. 아내 따라 번개시장에 갔다. 새우젓·생강·마늘·청각 등, 들어가는 것이 왜 그렇게 많은지. 장바구니를 들고 성실한 수행비서처럼 밀착 봉사했다. "물건값은 내 카드로 결제해." 너스레를 떨어본다. 난전이라 카드 단말기가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빈말일 줄 알면서도 아내의 입술은 귓불까지 올라간다. 헛말이라도 가끔은 필요할 성 싶다.
자식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너희 엄마 김장하는 것을 뒤에서 지켜보니 보통 일이 아니더라." 은근히 압력을 넣었다. 큰딸은 서울에서 온라인으로, 가까이 있는 딸은 직접 봉투를 가지고 왔다. 양념 비벼 넣는 날은 며늘fl가 삽겹살을 들고 왔다. 김장을 끝내고 이웃과 둘러앉아 삶은 고기에 갓 무친 김치를 안주 삼아 막걸리 파티를 벌였다. 오늘따라 술맛이 일품이다. 나의 노력이 주효했는지 주름이 늘어가는 아내의 얼굴도 화사하게 피어난다.
'이 정도 봉사하면 소금 세례는 면하겠지. '기氣와 쇳가루가 동시에 떨어져도 내치지 않겠지.' 사선을 긋는 나이에 기력은 청년같이 팔팔하게 살아날 수는 없겠지만, 소금에 전 배추처럼 후줄근한 남편의 모습을 아내는 결코 용납지 않으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