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한봉의 「봄의 속도」낯설게 읽기>
봄의 속도
배한봉
봄은 어떤 속도로 오느냐는
아이의 물음에
과학자는 지구가 자전하는 속도라 말하더군.
며칠 내내 부풀기만 하던 분홍빛 꽃봉오리가
한꺼번에, 온통 눈부시게 터져
미세먼지 뒤덮였던 하늘이 드맑게 눈을 뜨는 아침.
이걸 보았다면 과학자는
그 꽃나무 옆 시냇물이
구름을 타고 여행 갔다가 돌아와
하늘의 금모래 같기도 뱀 비늘 같기도 한 별 이야기를
꽃망울들에 들려주는 속도라 말하지 않았을까.
사람에게 스며든 꽃향기가
사람의 숨결로 어디 까마득한 데 여행가는 때
먼 옛날 나였던 꽃나무가
지금은 사람이 되었다고,
꽃나무가 사람이 되는 속도로 봄은 온다고 들려주면
아이는 시시한 마법이라고
순 거짓말쟁이라고 나를 놀려대겠지.
그러나 먼 훗날의 아이가
나무 안에서 분홍빛 꽃눈으로 자라는 것을 우리 모두가 안다면
봄의 속도는 차츰 줄어들고 또 줄어들어
오늘을 잊어버리고 내일도 모레도 잊어버리고
드디어는 고요에 가 닿는 영원이 되어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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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은 속도 속에 살고 있으면서도 속도를 모르고, 그러면서도 모든 것을 속도로 느끼고 싶어하는 속도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만 하더라도 자전과 공전을 통해서 엄청난 속도로 우주 속을 질주하고 있다. 그 결과로 계절의 변화, 일조 시간의 변화 등과 같은 자연현상이 생긴다. 그런데 인간은 엄청난 속도로 달리고 있는 지구에 살면서도 지구의 속도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 지구의 공전 속도는 음속(331m/s)의 1000배 정도라고 한다. 실로 놀라운 속도로 지구는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는 것이다. 과학으로 알고 있는 지식과 우리가 몸으로 느끼는 체감의 차이는 실로 크다.
배한봉 시인은 과학에서 이야기 하는 ‘봄의 속도’와 시인이 생각하는 봄의 속도의 차이를 시적 주제로 삼고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 과학적으로 봄의 속도를 말하면 지구의 자전과 관계되어 있어서 ‘지구가 자전하는 속도’라고 정의할 수 있겠지만, 시인의 눈은 전혀 엉뚱한 상상력을 통해서 봄의 속도를 이해하고 있다. 시인은 “며칠 내내 부풀기만 하던 분홍빛 꽃봉오리가/한꺼번에, 온통 눈부시게 터”지는 모습에서 봄의 속도를 느끼고 있다. 시인은 이러한 모습을 과학자가 보았다면 과학자조차도“그 꽃나무 옆 시냇물이/구름을 타고 여행 갔다가 돌아와/하늘의 금모래 같기도 뱀 비늘 같기도 한 별 이야기를/꽃망울들에 들려주는 속도라 말하지 않았을까”라고 상상하고 있다. 하지만 조금은 동화적으로 느껴지는 이러한 상상도 과학자의 상상이 아니라 시인의 상상이다. 이처럼 과학적인 눈과 시인의 상상은 근본적으로 엄청나게 다르다.
2연에서 시인은 한층 상상력을 증폭시켜서 사람에게 스며든 꽃향기를 통해서 꽃나무가 사람이 되는 상상력으로까지 나아간다. 그것은 “사람에게 스며든 꽃향기가/사람의 숨결로” 여행을 간다는 진술을 통해서 구체화된다. 즉 사람과 꽃나무가 꽃향기(숨결)로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꽃나무가 사람이 되는 속도로 봄이 온다”는 시적 진술을 도출해낸다. 이러한 경지는 전통 시학에서 말하는 ‘물아일체(物我一體)’를 통한 상호교융(相互交融) 상태에 이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이러한 상상력은 역으로 사람이 꽃나무가 되는 것도 가능하게 해준다. 이 시에서는“먼 훗날의 아이가/나무 안에서 분홍빛 꽃눈으로 자라는 것”이라는 표현에 이러한 상상력이 나타나있다. 그런데 사람이 꽃나무가 되고 꽃나무가 사람이 되는 속도야말로 일상적인 시간을 넘어서는 무아(無我)의 경지가 아니고서는 경험해 볼 수 없다. 시인은 이러한 상태를 “봄의 속도는 차츰 줄어들고 또 줄어들어/오늘을 잊어버리고 내일도 모래도 잊어버리고/드디어는 고요에 가 닿는 영원”의 상태로 표현하고 있다. 이처럼 시인이 느끼는 ‘봄의 속도’는 과학적 사실을 넘어선 매우 주관적이고 직관적인 차원에서만 가능한 속도임을 알 수 있다. 이 시는 이런 관점에서 과학과 시적 상상력이 어떻게 다른 지를 보여주는 좋은 표본이 된다.(박남희 /시인)
*계간<시인시대>2020년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