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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초석: 교회신문 > 제 805호 너는 최선이냐, 차선이냐? (마22:37~40)
목회 30년 동안 제게 차선은 없었습니다. 최선이 있었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오직 승리를 위해서였습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성경구절이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눅16:10)는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차선을 간구하는 자는 피하고 후퇴할 생각을 먼저 갖게 되고, 또 핑계와 변명을 주머니에 넣고 있기 때문에 절대 최선을 다하지 않습니다. 그런 자에게 승리와 성공은 외면하게 되어 있습니다.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어떤 일에 덤비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을 힘, 곧 사력을 다하는 것이며, 더불어 작은 것까지 섬세하게 점검하고 점검하는 것을 말합니다. 밀림의 제왕 사자가 토끼를 사냥할 때 사력을 다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여러분이 성공하지 못하고, 승리하지 못하고,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최선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안 되면 내일하지’, ‘이거 안 되면 다른 일 하지’, 이런 마음이 습관화되었기 때문에 안 되는 것입니다.
습관이란 놈은 “나는 너희를 가난하게 만들 수 있고, 부자로도 만들 수 있고, 성공시킬 수도 있고, 실패시킬 수도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라고 당당하게 말합니다. 대충이 습관 되고, 차선을 간구하는 것이 습관화 되면 그 습관이 당신을 실패자요, 낙오자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부터 매사 최선을 다하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마가복음 2장에 중풍병자를 예수께 데리고 온 네 친구의 이야기를 저는 좋아하여 자주 인용합니다. 그들이 병든 친구를 고치기 위해 예수님 곁에 가려하였으나 사람이 너무 많아 근처에도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네 명의 친구는 ‘다음 기회를 노리자’고 한 것이 아니라 지붕을 뚫어 병든 친구를 매달아 예수님 앞에 내려놓습니다. 이것이 차선을 버리고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하고자 하면 아이디어가 떠오르고, 하나님이 지혜를 주실 뿐 아니라 천군과 천사, 그리고 사람을 들어 도와주십니다.
얍복 강가에서 밤이 새도록 하나님의 사자와 더불어 씨름을 하다 환도뼈가 위골되는 지경에 처한 야곱, 날이 밝아오자 하나님의 사자가 떠나기를 청했으나 야곱은 축복을 받기 전에는 보낼 수 없다고 사력을 다해 하나님의 사자를 붙잡습니다. 이 정신 앞에 하나님의 사자도 두 손을 들어 야곱을 축복하고,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어주지 않습니까(창32:22~32)?
엘리야는 3년 6개월 동안 닫혔던 하늘 문을 열기 위해 갈멜산에 꿇어 엎드려 그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비가 내릴 때까지 최선을 다해 기도했고(왕상18:19~46), 수로보니게 여인도 귀신 들린 딸을 고치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와 자존심을 짓밟히면서도 최선을 다해 강청했으며(막7:25~30), 소경 바디매오는 반드시 눈을 뜨고야 말겠다는 생각으로 목청을 다해 예수를 불러 소원을 이뤘습니다(막10:46~52).
또한 누가복음 11장에 나오는 친구에게 떡을 구하는 자나 누가복음 18장에 재판관을 찾아간 과부의 결말도 최선을 다해 이룬 쾌거입니다. ‘죽으면 죽으리라’고 고백한 에스더의 고백이 최선을 다하는 자의 일성(一聲)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성품을 살펴보면 매사 최선을 다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분은 당신의 아들을 우리에게 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는 것에도 최선을 다하셨고(3:16), 축복을 하셔도 흔들어 눌러 넘치 도록 하셨습니다(눅6:38).
그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일생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그가 이 세상에 인자(人子)로 오셔서 공생애를 살기 전까지도 목수의 아들로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그리고 공생애의 기간에는 기도를 해도 땀방울이 핏방울로 변할 정도로 최선을 다하셨고(눅22:44), 귀신을 내쫓는 일에도 최선을 다해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눅13:32)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순간에도 최선을 다하십니다. 자기 곁에서 죽어가는 사람까지도 구원하시고, 최선을 다해 자기 사명을 이루십니다. ‘다 이루었다’(요19:30)는 말은 최선을 다한 자만이 할 수 있는 멋진 말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도 매사 최선을 다하여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22:37)고 하시고, 네 이웃을 사랑하는 것도 대충이 아니라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22:39) 하셨으며, 예배도 얼렁뚱땅 드리지 말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요4:24) 하셨고, 찬양을 할 때도 시편 150편에 모든 악기를 동원하여 최선을 다해 찬양하라 하셨습니다.
예물을 드릴 때도 과부가 두렙돈을 드린 것처럼 억지로나 인색함으로 말고 즐거이 내라 하셨고(고후9:7), 세상의 일을 할 때도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3:23)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은 상대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릴 때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고, 일을 대충하면 사장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우리 손자를 중국으로 유학 보낼 때, “네가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너를 보낸 할아버지를 무시하는 것이다.”라고 말해줬습니다.
열왕기하 13장에 보면 죽음 직전의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 요아스에게 화를 내는 장면이 나옵니다. 최선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는 죽기 전에 요아스 왕을 축복하려고 활과 화살을 가져오도록 하고, 요아스 왕에게 동쪽을 향해 활을 힘껏 쏘라고 합니다. 또 엘리사는 요아스 왕에게 화살을 한주먹 손에 쥐라고 하고 그 화살로 땅을 힘껏 내려치라고 합니다.
그랬더니 요아스 왕은 세 번만 칩니다. 이에 “하나님의 사람이 노하여 가로되 왕이 오륙번을 칠 것이니이다 그리하였더면 왕이 아람을 진멸하도록 쳤으리이다”(왕하13:19)했습니다.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을 무시한 것이라고 엘리사가 화를 낸 것입니다. 만일 요아스가 최선을 다하는 믿음으로 반응했더라면, 이스라엘은 아람제국을 거뜬히 이기는 강대국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최선을 다하는 자를 쓰십니다. 밤새 그물질을 한 베드로를 그의 제자로 삼으사 ‘사람을 낚는 어부(막1:17)’가 되게 하셨고, 예수의 도를 좇는 사람들을 잡으러 다메섹까지 쫓아갔던 사울을 택하사 사도가 되게 하셨습니다(행9).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 사로잡힌 후로도 복음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이 정신으로 그는 험한 파도를 넘어 유럽에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엘리사도 처음 소명을 받을 때에 소 12마리를 끌고 최선을 다해 밭갈이를 하고 있었습니다(왕상19:19). 그는 엘리야의 후계자가 되기 위해서도, 후계자가 되어 선지자의 삶을 살 때도 정말 최선을 다해 살았습니다.
예루살렘 성벽을 쌓기 위해 최선을 다한 느헤미야처럼,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해 이국땅에서 총리대신이 된 요셉처럼, 삼촌 집에서 밤낮을 무릅쓰고 최선을 다해 거부가 된 야곱처럼, 우리도 매사 최선을 다합시다. 그 최선이 당신을 성공의 길로 인도할 것이고, 천국의 길로 안내할 것입니다. 매사 최선을 다합시다. 할렐루야!
물은 고여 있으면 썩고 머리는 쓰지 않으면 녹슨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자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 은혜로운 찬양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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