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와 토끼 이야기 <순 담>
어린애를 좋아하는 아내는 친할머니처럼 옆집 애들을 돌봐주게 되었다. 농업진흥청 공무원인 젊은 부부는 생후 6개월짜리 첫 사내아이를 우리 집에 맡겨 키우면서 아예 우리 옆으로 이사를 왔다. 그리고 둘째로 딸을 낳아 군산외갓집으로 잠시 보냈다가 데려와 남매가 우리 집에서 한 동안 자랐다.
친손자를 일찍 보지 못한 아내는 할머니가 되어주고 나는 할아버지가 되어, 내 어린 시절 나의 할머니한테 들었던 토끼와 호랑이 이야기를 단골메뉴로 그 애들에게 들려주었다.
호랑이의 해가 가고 토끼의 해를 맞게 되니 그 시절이 그리워진다. 보고 싶은 생각에 상상의 나래를 펴고 그 시절로 돌아가 하빈이와 세아를 데리고 동네공원이며 낚시터를 찾아 놀다가 집에 돌아와 제2탄으로 옛날이야기를 꺼낸다. “애들아, 할아버지가 옛날이야기 해줄까”라는 말에 애들이 바짝 다가와 내 무릎을 서로 차지하려다가 양쪽으로 갈라져 눕는다.
“옛날, 할아버지가 어렸을 때 살았던 동네 뒷산골짜기에는 산토끼와 꿩이 흔했고 멧돼지와 노루는 물론 살쾡이와 여우도 살았단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살았던 그 시절보다 더 옛날 그 깊은 골짜기에는 호랑이가 살고 있었단다.” 어느 겨울 날 며칠째 사냥을 못해 굶주리던 호랑이가 먹을 것을 찾으러 계곡으로 내려와 물속의 돌들을 들추고 있을 때다. 마침 그 곳을 지나가던 산토끼가 “호랑이 아저씨 지금 무얼 하고 계세요”라고 물었다. 이에 호랑이는 “임마, 보면서도 모르겠냐, 배가 고파서 가재를 잡아먹으려는 거다.”라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영리한 토끼는 지나가는 소리로 “가재를 쉽게 몽땅 잡을 수 있을 텐데요”라고 호기심을 자극시켰다. 배가 고픈 호랑이는 토끼에게 가재 많이 잡는 방법을 말해달라고 통 사정을 했다. 토끼는 대단한 비법을 전수해 줄 것처럼 뜸을 드린 후에 입을 열었다. “호랑이 아저씨가 약한 토끼를 잡아먹지 않겠다고 지금 약속을 하면 그 방법을 가르쳐 줄게요”라는 것이다. 이에 호랑이는 가재를 많이 먹고 싶은 욕심에 “아, 그래, 그래, 절대로 안 잡아먹을 테니 빨리 좀 말해봐”라고 재촉했다. 토끼는 호랑이의 속셈을 뻔히 알면서 “그럼 지금부터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세요. 그러면 한꺼번에 가재를 몽땅 잡아 배부르게 먹을 수 있습니다”라고 하자 호랑이는 토끼가 시키는 대로 하기로 했다.
엄청 추운 날이다. 토끼는 호랑이에게 이렇게 말했다. 털이 많은 호랑이의 긴 꼬리를 밤새 물에 푹 담그고 내일 아침 내가 찾아 올 때까지만 기다리면 가재들이 호랑이 꼬리로 다모여 들게 된다는 것이다. 호랑이는 토끼가 시키는 대로 했다. 다음날 아침이다. 얼음이 두껍게 언 물가에서 벌 벌 떨고 있는 호랑이에게 토끼가 찾아왔다. “호랑이 아저씨 간밤에 엄청 추우셨지요.”라고 하자 호랑이는 “야, 야, 지금 창자가 등짝에 붙고 추워서 얼어 죽을 판이니 꼬리에 붙은 가재를 잡아 어서 배를 채우고 봐야겠다.”라고 성깔을 부렸다. 토끼는 호랑이 더러 “뭐, 쉬운 게 있는 줄 아세요. 가재를 많이 먹으려면 그 정도 고생은 해야지요.”라고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그럼, 이제 물에 푹 담가두었던 꼬리를 꺼내어 가재를 입에 털어 넣으시지요.”라며 지켜보았다.
호랑이는 물속에서 두껍게 얼어붙은 꼬리를 빼내려고 죽을힘을 썼지만 꼬리가 잘려질 것처럼 아파서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는 이야기다. 나는 수원의 민속촌이라는 샘내마을에 살면서 이 이야기를 여러 번 각색을 해가며 써먹었다. 하빈이가 초등학교 2학년이고 세아가 유치원에 다닐 때, 우리 집에서 멀리 떨어진 조원동 새로 지은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애들은 일요일을 손꼽아 기다렸다가 찾아와 응석을 부리면서 가끔 하루 밤씩 자고 갔다. 이렇게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자란 애들의 아빠 엄마는 근실한 모범공무원으로 선발되어 2년 전에는 부부가 아이들을 데리고 유럽을 다녀왔다.
그리고 작년에는 농업연구차 6개월간 온 가족이 미국으로 떠났다. 올 3월 중순 돌아 올 예정인데, 며칠 전 애들의 아빠엄마로부터 국제전화가 걸려왔다. “목사님과 사모님께서 우리 애들을 잘 길러주어서 고맙습니다. 하빈이와 세아가 미국에서도 교회 잘 다니고 공부도 잘해 하빈이는 자기 반에서 1등을 했어요.”라는 것이다. 멀지 않아 만나게 될 애들을 손꼽아 기다리는 아내와 더불어 나는 예전처럼 호랑이와 토끼 이야기로 덕담을 해줄 참이다.
이전에 일본은 우리나라를 토끼처럼 얕보고 침략과 약탈을 자행하고 무력으로 처 들어왔다. 한일합방을 이룬 후에는 식량과 좋은 물건들을 수탈해 가면서 깊은 산속에 사는 호랑이까지 다 사냥해갔다. 그랬던 일본이 요즘은 대 지진과 쓰나미로 상상을 초월한 피해와 핵 방사능 누출까지 겹쳐 있다. 엄청난 재앙의 늪에 빠져있는 일본의 현실이 얼음 속에 꼬리가 박혀 고통스러워하는 호랑이 꼴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미워도 다시 한 번’ 내가 태어났고, 우리 동포들이 사는 일본이 잘 복구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2011년 3월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