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가 생겨나고 사람들이 일어섰으나 아직 질서가 잡히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
생과 사도 제대로 구분이 안 되고, 짐승과 나뭇잎들이 말을 하고, 귀신이 말을 걸면
사람이 대답하고 사람이 부르면 귀신이 대답하던 시절이었다.
하늘에는 해와 달이 둘씩 있어 낮에는 사람이 더워서 죽고, 밤에는 추워서 죽었다.
모든 짐승과 초목들이 말을 하고, 귀신과 인간의 구별이 없어서 사람이 부르면 귀신이
대답하던 시절을 무엇이라 이름 붙일까?
계절은 늘 봄이고 ‘마고성’으로 상징되던 신선들의 옥답에서 나는 과일이 도처에 풍성하여 사람들이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일할 필요가 없었던 시절, 마고시대의 선경을 지나서 이제 톨킨이 이름한 대로
‘중간계’(영국의 소설가 존 로널드 톨킨이 창조한 가상세계로 ‘반지의 제왕’의 무대다)로 왔다고나 할까?
아니면 그리스신화의 황금시대를 지나 철의 시대로 왔다고나 할까?
우리는 이제 본격적인 신화여행의 길을 나선다.
마고신화는 민중들 사이에서 전해지는 이야기 속에 조각난 채 흔적으로만 남아 있으나, 천지왕신화는
신녀들의 노래 속에 남아 기승전결의 구조를 갖춘 이야기로 전해 내려온다.
천지왕신화는 창세신화와 천지개벽신화의 성격을 함께 갖고 있다.
부계사회와 전쟁의 시대를 열고 스스로 ‘하늘땅신’이 되었던 남성신격으로서의 천지왕이
마고의 창세신화에서 마고를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면서 창세신화의 성격을 이어받아
천지개벽시대의 신화를 만들어나간 흔적이 아닌가 한다.
그 첫 이야기가 바로 천지왕과 쉬맹이의 싸움이다.
신을 무시하는 쉬맹이
<< 이때 땅에는 천하 거부로 잘사는 쉬맹이라는 자가 있었다.
욕심 많고 방자한 쉬맹이는 하늘을 향해서도 큰소리를 치곤 했다.
거드름이 잔뜩 실린 쉬맹이의 목소리가 하늘에 쩌렁쩌렁 울려퍼졌다.
“세상에 나를 이길 자 누가 있으랴!”>>
짐승과 초목들이 말하던 시절에는 사람들도 신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물론 천지개벽으로 신의 위상을 새롭게 세우고자 하는 천지왕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평정하기 어려운
큰 혼란이었음이 분명하다.
권력은 혼란을 만들고 그 혼란을 진정시키는 과정에서 탄생하게 마련인가?
어느 날 천지왕은 하늘에 떠 있는 해와 달을 하나씩 삼키는 꿈을 꾸었다.
이 꿈이야말로 세상을 바로잡을 옥동자를 얻을 꿈이 아닌가?
천지왕은 조만간 천생배필을 맞으러 땅으로 내려가리라 생각하고 있던 차에 저승왕한테서 쉬맹이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다.
<< 섣달 그믐날.
명절을 맞은 저승의 귀신들은 제사를 받아먹기 위해 모두 이승으로 바삐 올라갔다.
그런데 어디선가 슬피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서 옥퉁소를 부는 소리가 들리느냐?” 괴이하게 여긴 저승왕이 물었다.
“쉬맹이 아버지가 그의 아들이 제삿밥을 챙겨주지 않아 이승으로 갈 수가 없다고
우는 소리입니다.”
“쉬맹이가 제사상을 차릴 수 없을 만큼 가난하단 말이냐?”
“쉬맹이는 천하 거부로 하녀를 두고 아버지를 병풍을 치고 모셔두고 밤에 중식까지
먹이며 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가 60세가 되자 ‘사람 한 대가 30년인데
아버지는 두 대를 살았으니 너무 오래 살았습니다’ 하고는 그때부터는 밥을 한 끼만
주었답니다. 그래 그 아버지가 ‘왜 그러냐? 배고파 못 살겠다’며 죽은 후에 제사상을
안 받는다는 조건으로 살아 생전에 밥 세 끼를 받아먹었다고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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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새와 짐승, 초목들이 말을 하던
시절의 호랑이.
천지왕은 쉬맹이의 행동에 분노했다.
“쉬맹이, 이놈! 괘씸하도다! 괘씸하구나.
쉬맹이, 이놈!”
서둘러 일만 군사를 거느리고 지상으로 내려오던
천지왕은 혼잣말을 되뇌었다.
‘하늘땅의 질서를 잡을 때가 온 것 같구나.
해와 달을 삼키는 꿈도, 쉬맹이를 징치(懲治)하는
것도 지금의 혼란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음이야….’
천지왕과 총명 아기씨의 만남
<< 지상에 내려온 천지왕은 바구왕 집에 머물렀다.
천지왕이 저녁상을 요구하니 바구왕이 “저녁 지을 쌀밖에 없어서 상을 못 차리겠습니다”라고 한다.
이에 천지왕이 “이 고을에 쉬맹이라는 큰 부자가 있지 않습니까?” 하고는 바구왕의 딸 총명이를 시켜
쉬맹이에게 쌀 한 되를 꾸어 오게 한다.
쉬맹이는 쌀 한 되를 꾸어주면서 흰 모래를 섞어서 한 되를 채워주었다.
총명이는 쌀을 열 번이나 깨끗이 씻어서 저녁밥을 짓고 첫 밥상을 차려와 천지왕과 마주앉았다.
총명 아기씨는 월궁선녀처럼 아름다웠다. 천지왕이 기쁜 마음으로 첫 술을 뜨는데 바로 돌을 씹었다.
천지왕이 물었다.
“총명 아기씨, 이게 어찌된 일이오?”
“쉬맹이는 가난한 사람이 쌀을 꾸러 오면 흰 모래를 섞어주고,
좁쌀을 꾸러 오면 검은 모래를 섞어줍니다.
작은 말에 담아 주고는 큰 말로 돌려받아 부자가 된 사람입니다.”
“허, 인간 세상에는 거꾸로 일어나는 일이 많고도 많구나!”
천지왕이 개탄하자 총명 아기씨가 말을 잇는다.
“쉬맹이의 딸들은 가난한 사람에게 일을 시킬 때 점심을 먹이면 고린 간장을 먹이고,
그 아들들은 마소에 물을 먹여 오라 하면 말발굽에 오줌을 누어서 물통에 들어섰던 것처럼 보이게
해서 마소까지 굶기는 자들입니다.”
“괘씸하다, 괘씸해! 쉬맹이가 괘씸하도다!”
쉬맹이의 파렴치한 행동을 다시 확인한 천지왕은 노하여 ‘쉬맹이를 잡아오라!’고 일만 군사를 보냈다. >>
천지왕신화에 나오는 쉬맹이는 3800년을 살았다고 해서 ‘수명장자’라고도 한다.
천지왕 시절에는 해와 달이 각각 둘씩 있어서 낮에는 뜨겁고 밤에는 얼어붙어 사람이 제대로
살 수 없었던 때다. 이때에 이미 많은 곡식과 재화를 가진 쉬맹이가 존재한 것이다.
그러므로 쉬맹이가 평범한 인간적 존재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현대까지 남아 있는 탐라신화의 ‘천지왕 본풀이’ 노랫말을 중심으로 이야기하고자 한다.
신과 인간과 짐승이 서로 말을 나누던 시절,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이야기이므로….
쉬맹이는 천하 부자다. 그리고 곡식을 많이 가지고 있는 지주이자 오래된 화폐인 쌀을 되로 꾸어주고
말로 받는 고리대금업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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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를 보냈으나
천지왕이 쉬맹이를 징치하고, 천생배필을 맺기 위해 땅으로 내려오고 있다
한편 쉬맹이를 잡으러 간 일만 군사들.
군사들이 쉬맹이네 집에 도착해보니 짖는 개도 아홉이고, 무는 개도 아홉이고,
차는 말도 아홉이고, 찌르는 소도 아홉이라 들어갈 수가 없었다.
<< 군사들이 천지왕에게 돌아와 “쉬맹이네 집에 조금도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하고 이르니, 천지왕은 그만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천지왕은 직접 쉬맹이를 처벌하려고 달려갔다.
그러나 쉬맹이네 집 어귀에 도착하자마자 개들이 짖기 시작했다.
달려들어 물려는 개들이 있는가 하면 말들은 발길질을 하고 소들은 뿔로 받으려 했다.
쉬맹이네 대문도 두드려보지 못한 천지왕은 올래 밖 멀구슬나무 가지 위에 올라앉아
군사들에게 열두 가지 흉험을 내리도록 했다. >>
하늘땅의 신인 천지왕이 ‘물고 차고 받아버리는 개와 말과 소’ 때문에 인간세상의 쉬맹이네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상황은 오늘날의 사람들로서는 참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설정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하여 쉬맹이나 쉬맹이네 집을 지키는 짐승을 구태여 ‘신적인 존재’로 이해할 필요는 없다.
아직 신에게 권위가 없었던, 인간과 짐승과 신이 그렇게 큰 차이가 없던 시절, 거꾸로 신화시대의
인간은 오히려 오늘의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능력을 가졌다고 해석하는 편이 더 재미있다.
<< 쉬맹이네 부엌에는 갑자기 개미 떼가 덮쳐서 들끓기 시작했다.
여자 하인이 놀라서,
“솥 앞으로 개미가 무수히 기어다닙니다.”
“그게 뭐 대수냐? 아무것도 아니다.”
이번에는 갑자기 집이 폐가가 되어 습기가 차고 용달버섯이 무수히 생겨났다.
“솥 뒤에 용달버섯이 났습니다.”
“허허, 반찬이 떨어져가니 초기버섯 대신 용달버섯이 나는구나. 그건 흉험이 아니다.
볶아 반찬으로 만들어라.”
쉬맹이 기세가 꺾이지 않으니 천지왕은 ‘큰 솥아! 걸어다녀라!’고 말했다.
“큰 솥이 밖에 나가 걸어다니고 있습니다.”
“부잣집에서 매일 불을 때놓으니 더위 먹어 식히러 나갔을 것이다.”
쉬맹이가 끄떡도 하지 않자 천지왕은 가축들을 미쳐 날뛰게 했다.
“황소가 지붕 위를 넘나들고 있습니다.”
“부잣집에서 잘 먹이니 힘이 넘치는 모양이구나.” >>
천지왕이 쉬맹이에게 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주는 열두 가지 흉험 가운데 가장 먼저 나타나는
것은 솥 앞의 개미 떼다. 제주도에서는 부엌에 개미가 꼬이는 것을 아주 나쁜 징조로 여긴다.
두 번째로 나타난 용달버섯은 폐가를 상징한다.
용달버섯은 습기가 많이 차고 썩은 곳에서 자라는 식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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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리 흉험을 내려봐도 끄떡을 않으니 천지왕은 급기야
쉬맹이의 머리에 무쇠철망을 씌워버렸다.
“아이구, 머리야. 아이구, 머리야. 큰아들아, 도끼를 가져와 내 머리를 찍어라!
머리가 아파 못살겠구나!”
쉬맹이는 아들들에게 도끼로 자신의 머리를 내리치라고 말했으나 아무도 감히 그리 할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종년을 불러 명령을 하니, 종년은 차마 주인의 머리를 찍지는 못하고 옆에 있는 대문의
문지방을 내리찍었다.
한편 올래 밖 멀구슬나무 가지 위에 올라앉아 이 광경을 내려다보던 천지왕은 도끼를 찍는 서슬에
놀라 혹시나 부수어질까봐 엉겁결에 무쇠철망을 확 거두어버렸다.
그러자 쉬맹이의 아픈 머리가 그만 다 나아버렸다.
천지왕은 끝내 쉬맹이를 잡지 못하고는 하릴없이 바구왕 집으로 가는구나. >>
아! 얼마나 허망할까? 하늘땅신으로서, 인간 하나도 어찌할 수 없는 천지왕이여!
이 이야기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다. ‘하릴없이 바구왕 집으로 가는구나.’
그렇다. 신이라고 별수 있간? 어디서? 부자 앞에서, 쌀(돈) 앞에서…. 아니, 돈을 향한 인간들의
끝없는 욕망과 타락과 투쟁에는 신도 두손 두발 다 들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냉엄한 현실이므로.
탐라신화의 첫 장을 여는 우리 천지왕 이야기는 이렇게 신화적 리얼리즘의 지평을 보여준다.
현실에 패한 신이 찾는 곳은 어딜까? 신도 인간과 마찬가지라고 옛사람들은 생각했다.
우리를 끝까지 지지해주는 버팀목. 그게 사랑이 아닐까?
천생배필 맺고 달콤한 5일 밤
<< 바구왕 집에 머무른 천지왕이 그날 밤 바구왕을 보고
“발이 시려 잠을 못 자겠소! 딸을 내 방으로 보내주시오!”
하니 바구왕은 대답을 안 하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 긴 한숨, 짧은 한숨을 쉬며 걱정한다.
“지금까지 가난한 사람들이 와서 내놓으라 하는 대로 내어 주었거늘,
하룻밤 자고 갈 손님이 나의 하나밖에 없는 딸을 달라고 하니, 이런 원통한 일이 어디 있으랴!”
바구왕이 대성통곡하자 총명 아기씨가 바구왕에게 묻기를,
“아버님, 무슨 일이에요?”
“저 방에 온 손이 너를 자기 방에 보내라 하는구나.”
“내 나이 이미 열여섯 아닙니까? 저 방에 온 손님은 천지왕이에요.
천지왕보다 더한 사위를 얻을 수 있겠어요?”
바구왕이 하릴없이,
“그러면 단장하고 천지왕을 잘 모시라”고 하였다.
총명 아기씨가 단장하고 천지왕 방으로 들어가니 천지왕이 말하기를,
“나비가 꽃을 찾을 건데 꽃이 나비를 찾는구나.”
그리하여 그날 밤부터 천지왕은 총명 아기씨와 천생배필을 맺고 달콤한 5일 밤을 보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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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덕진군 해명이의 등장
아, 그러나 이 불행한 돈 세상을 어찌 그냥 두고 볼 수 있으리오.
신의 이름이라도 빌려서 불벼락을 내리지 않고서는 못 견디는 사람들을 위해서,
우리 신녀들이 또 다른 이야기를 준비해두었다.
천지왕이 벼락장군 우레장군을 불러서 쉬맹이네를 불바다로 만들어버리는 내용의
다른 본을 소개한다.
천지왕이 무쇠철망을 걷고 난 다음부터 이야기는 계속된다.
<< 천지왕은 하는 수 없이 화덕진군 해명이를 불러 사람의 모양으로 변장하고
쉬맹이네 집으로 가게 했다.
“곡식과 옷을 준비하여 일 년 동안 밖에서 생활할 각오로 바람 위로 피난하라”고 말했다.
“대궐 같은 집을 버리고 어디로 간단 말이오?” 쉬맹이는 말을 듣지 않았다.
“그렇다면 칠대에 걸쳐 쌓은 재산을 모두 거두어가겠다. 불경한 죄를 단 한 번에 깨닫도록 하겠다.”
끝내 쉬맹이가 반성하지 않자 천지왕은 벼락장군, 우레장군을 불러들인다.
“당장 벼락장군을 내보내라! 벼락사자를 내보내라! 우레장군을 내보내라!
우레사자를 내보내라! 화덕진군, 화덕장군을 내보내라!”
궁궐 같은 쉬맹이네 집은 삽시간에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천지왕은 불탄 자리에 사람이 죽어 있으니 그 원혼을 위로하는 굿을 했다.
쉬맹이의 딸들은 꺾어진 숫가락을 하나 엉덩이에 꽂아서 팥벌레로 환생시키고,
쉬맹이의 아들들은 마소를 굶겼으니 똥소로기(솔개의 일종)로 환생시켜 비온 뒤에 꼬부라진
주둥이로 날개에 묻은 물을 핥아먹도록 하였다. >> |
류이/ 문화평론가·연출가 nonil@korea.com |
발행일 : 2003 년 12 월 04 일 (412 호) |
쪽수 : 72 ~ 74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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