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와 전복, 그리고 혁명
- 젊이에게 2.
2023년 2월 4일, 입춘(立春)
시간의 배열에서 입춘대길(立春大吉) 만사여의(萬事如意), 이 표현이 생애에서 열여덟에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삶의 터전에 세상만사(世上萬事) 유덕후(有德侯) 이듯이, 금수강산(錦繡江山) 유별종(有別種)이 이루어지나니.
*
나이든 소크라테스가 젊은이를 만나려고 김나지움[중고등학교] 앞에서 기다리며 말을 걸었다고 한다. 소크라테스 두 가지를 벗어나야 한다고 한다. 하나는 전래적 신화를 믿는 구습에서 나온 황제(참주)제와 같은 제도에서 벗어나야 하고, 다른 하나는 젊이가 스스로 깨우쳐 새로운 공동체를 열어야 한다고 한다. 루소는 누구나 자유롭게 태어났다고 하는데, 제도상으로 열여덟까지 살았던 가족관계와 같은 제도에서 벗어나, 다음 나이에는 인류애 또는 세계시민사상(코스모폴리탄, libertaire)으로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한다. 현실에서 제도상 일반교육을 통하여 열여덟이면 시민의 덕목과 지식을 갖춘다. 그리고 세상에 나가 한 인격체로서 활동을 시작한다. 들뢰즈는 태어나서부터 그대로 가족관계(la filiation)에 매여 사는 경우가 있고, 삶의 터전에서 달리 배치하는 동맹관계(l’alliance)가 있다고 한다. 공자의 열다섯에서 학문에 뜻을 두었다고 하고, 루소의 열여덟 나이는 생물학적으로 성인이 되는 시기이다. 이런 시기에 가족관계와는 다른 배열을 그리고 배치를 만나게 된다.
동양의 전통에서 교육에서 배워야 할 것으로, 세상이라는 터전에 나아가 행동할 때 필요하기에 예악사어서수(禮樂射御書數)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예(禮)는 기존의 제도와 체계 안에서 질서라는 배열일 것이고, 실행에서 터전에 따른 배치가 있다. 배열이 기능적이라면 배치는 소질(역량) 쪽이라 할 수 있으며, 이런 위상적 지위를 갖게 되는 것은 학문과 실천에서 배워야 할 것들이다. 더불어 세상의 음율을 숙고하여 지각하고, 공격과 방어에 필요한 활(총)과 말(자동차)에 대해 익혀야 할 것이다. 순서로 보아 뒤에 문자(입말)와 수(통계)등은, - 플라톤이 말하듯이 35세에서 50세까지 - 관리로서 익혀야 할 것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과학과 기술의 발달 이전에 상식을 기준으로 하는 사항들은 약간의 편차가 있다고 하더라도, 생물학적인 나이에 비추어 성장 과정은 큰 차이가 없다. 이 과정에서 열여덟의 젊이는 살아온 과거와는 다른 방식의 사회적 활동이 있음을 느끼게 되고, 이는 기성제도가 유지하려는 저항에 대해 새로운 창안을 하려는 노력과 실행에서 뭔가 부딪히게 됨을 깨달음으로서 ‘저항에 저항’을 의식하게 된다. 이 저항의 저항은, 방법적으로든 논리적으로든, 고대인들이 부조리 또는 모순이라고 말하는 것과 반대 또는 다른 방향과 경향들이다.
물론 맑스는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모순과 소외에 대해 설파하였다. 그리고 벩송은 고착적 사회가 말과 마차를 뒤바꾸어 놓고 사고하는 것을 사고의 전도(l’inversion)라고 하였다. 들뢰즈는 제국주의를 이어받은 제국의 논리가 상층과 심층 사이에 거꾸로 된 사고라고 하면서 사유의 전복(la subversion)을 주장하였다. 20세기 크고 작은 전쟁들을 겪으면서 제국의 사고는 고대의 참주적 사고, 르네상스 이래로 인간중심주의[이기주의]의 주체화의 사고를 덧보태더니, 19세기 여러 실증과학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인간(주체화)이 모든 지식을 통일할 수 있다고 여겼다. 여기에 논리실증주의가 지식으로 삼신성에 협력하여 패거리를 형성하면서 제국을 형성하는데 기여하였던 것같다. 21세기 임에도 한 늙이가 “칠십이종심소욕불유구(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를 젊이에게 하는 것이, 과거의 회귀나 복원으로 가자는 것도 아니고, 인류의 생장과 전개과정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그리고 젊이의 ‘저항, 봉기, 항쟁, 혁명’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공동체를 창안할 젊이에게 바램일 것이다.
사람은 생명체로서 총체적 과정을 – 현재 통계적으로 78세를 산다고 치자 – 즉 평생을 사는 과정에 대한 사유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 과정의 어느 한 부분을 강조할 수 있지만 그 부분을 따로 떼어내어 단위를 설정하는 것은 제국주의와 제국의 논리에 말려드는 것이다. 과정은 하나의 총체적 단위이며, 벩송이 말하듯이 총체적 단위 자체가 흐름이며 운동이며 변역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 사회주의자 카베(Etienne Cabet 1788-1856)가 “각자는 자기의 능력에 따라, 각자에게 자기의 필요에 따라(chacun selon ses capacités, à chacun selon ses besoins)”라고 말했듯이, 리베르테리앙(인성자유주의자)은 만인평등과 코스모폴리탄으로서, 노동력이 없는 어린시절과 노년시절에는 “필요에 따라”, 청장년기에 노동력이 있을 때는 능력에 따라 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사유에서 어린시절과 노년시절에 중요한 것으로 교육과 의료는 무상이어야 한다는 사유에까지 전개되고, 구체적 실천적 활동으로 맑스, 레닌, 마오, 호치민 등이 실행에 옮겼던 것이다.
삶의 과정에서 생애 길이의 차이가 있다하더라도 죽지 않는 인간은 아직 없었다. 그리고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학파 이래로 죽음 이후를 이야기하는 자는 근본적으로 사기꾼이며, 중기 스토아학파에서 재림(réincarnation)이라거나, 부활(résurrection)등을 말하는 것이 얼마나 부조리하고 파라독스가 많은지를 끌어내면서, 그 말들 또는 용어들이 망상 또는 착란이라고 한다. 입말은 기본적으로 상식(sens commun, 5감)에 기초하고, 현상의 과정을 한계까지 밀고 나아가 추리하는 양식(bon sens)에 의존한다. 망상과 착란은 상식을 확대하고 양식의 추리를 초월에까지 끌고가 허구를 실재성이라 억지를 부린다. 그런 이야기가 왜 전승되는가에 대해 들뢰즈는 여섯 살 앨리스의 이야기를 들어보라고 한다.
상식으로 이야기하는 의식주(衣食住)를 생각해 보라.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의식주를 순서적으로 중요도를 말하는 것은 무의미한 말이 아니다 옷, 치장, 포장을 앞세우는 것이 무엇을 지칭하며 어떤 터전에서 사는지를 숙고해 보면 알 수 있다. 생명체로서 인간의 삶에서는 배열과 배치를 달리하고 살아간다. 그 다른 터전의 삶을 서로가 모르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럼에도 인간이 산다는 점에서는 또는 사는 것이 먼저다라는 점에서는, 식주의, 즉 먹거리, 잠자리, 옷거리이다. 상식적으로 의식주라고 하는 것이 전통적 전례 방식으로 보아, 유교에서 온 것이라고 하는 것은 상식에 양식을 보탠 것 정도일 것이다. 제도 속에서 나아가 체제에서 제복과 복장의 중요성은 강조되었다. 그런데 삶에서 먹거리의 자주, 잠자리(거주지)의 자치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생태계 그리고 경제적 문제로서 부동산에서 보아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식주의(食住衣)라고 말하지 않는 입말은 구습에 있는 것이지, 유교문화 또는 전통문화 때문만은 아니다. 달리 생각하고 달리 말하는 것, 전도된 사고에서 벗어나 전복적 사유는 젊이의 특이성이자, 고유한 덕목이다.
젊이가 열여덟이 넘어서 세상이라는 넓은 터전에서 만나는 장면들은 삼신성의 가족관계가 아니라 리베르테리앙(동지애, 까마라드리)이다. 그럼에도 사람들마다 젊이 시절을 보냈는데, 왜 사회의 변화와 혁명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고, 구태의연하게 살아가는 자들로 채워져 있는가? 서양 철학사에서도 많은 철학자들이 자유에 대한 담론을 전개하였지만, 스피노자가 말하듯이, 인간이 스스로 자기 삶의 과정을 만들어간 이는 드물다고,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기가 어렵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벩송이 말하듯이, “혁명은 간헐적이고 또는 폭발적으로 솟아 오른다”고 한다. 왜, 그 이유는 구습에 젖은 사고가 현상을 누르고 있다고 하더라도, 혁명적 사유가 끊어진 적이 없이 심층(深層)에서 죽 이어져 왔다고 한다. 그리고, 인류 역사상으로 그런 의식 활동의 지속(la durée, 持續)을 말한다. 요즘말로 지하운동의 저항은 끊어진 적이 없고, 게다가 간헐적으로 봉기와 항쟁이 있어왔고, 또한 혁명의 불씨는 아직도 타오르고 있다는 것이다.
젊이가 소유하지 않고서 산다는 것, 스스로 벌어서 소유하기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벌기위해 살지 않고, 스스로 덕성을 완성하려고 산다는 것을, 요즘 사람들은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있을 수 없다고들 한다. 제도상으로 “각자는 자기의 능력에 따라, 각자에게 자기의 필요에 따라”라는 사회 제도를 만들면 그런 걱정이나 사고를 할 필요가 없을 텐데. 인류가 나아갈 새로운 환경(생태) 그리고 인간이 누구나 자유와 평등을 누릴 수 있는 체제를 만든다는 것은 어렵고, 또한 역사상으로 드문 것이지만, 인간이기에 그런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유토피아(이상사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인간의 노동력과 기술이 충분히 만인평등과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 수 있는 시대에 와 있다. 전지구적 총생산량은 넘치고 있다고들 한다. 그런데 인간들이 그런 사회가 안된다고 할까? 그리고 자신의 미래를 하늘나라라는 망상과 착란에 빠질까?
인간은 어느 누구든지 삶을 떠날 때, 하늘나라로 올라가는 경우가 없다. 누구든 이 지구 이 땅, 젊이가 살아온 터전에서 있다가 떠난다. 그 터전에 사는 또는 살아갈 사람들이 과거의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듯이, 또한 젊이가 한 평생(생애의 총체) 사유하면서 살아간 과정을 다음세대도 이야기할 것이다. 이야기는 입말을 통해 전해진다. 우리 터전에서 입말(한글)이 심층에서 흐르고, 다음 젊이가 또 길어 올릴 것이다. 새로운 터전을 만드는 것을 어렵고 드물지만, 인간이 스스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한 젊이가, 특이성을 가지고 공동의 터전에 나와 활동할 때, 적게는 저항, 여럿이 모여서 항거, 조직화를 거치면서 항쟁, 그리고 새로운 제도를 창안해내는 혁명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반항, 소요, 민란, 반역이라 말했었다. 새로운 시대를 젊이가 만든다는 점에서 저항, 항거, 항쟁, 혁명은 훌륭한 인격을 갖추기를 노력하는 과정과 나란히 갈 것이다. 그 나이에 시작하여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에 행복과 기쁨이 있을 것이다. 그 나이는 삶의 총체성 가운데 가장 참신하고 가장 열정적이며, 가장 뛰어난 창조력을 갖는 시기가 아닌가!
모든 권력은 국민(인민)으로부터 나온다고 한다. 이 말은 국민이 근본심급 또는 일차심급이며, 최종결정에서도 인민의 동의를 받아서 발현된다는 측면에서 최종심급이기도 한다. 그 열여덟 나이에 진솔한 노력을 하는 방책을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 스피노자가 말하던 시대에 어렵고 드문 경우일지라도, 규소의 시대 즉 디지털의 시대에는 17세기만큼이나 어렵거나 드문 경우가 아니라는 것이다.
(3:12, 56MKB) (3:37, 56MKC) (4:01, 56MK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