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국환 시인의 첫 시집 『고요한 세계』(푸른사상 시선 156).
사람들이 살아가는 소박한 삶의 모습을 바라보는 데서 나아가 동학혁명, 4․3항쟁, 5·18민주항쟁 등 한국 근대사를 따라가는 시인의 역사의식과 연대 의지는 고통받아온 민중들의 아픔을 견고하게 감싸 안는다. 2022년 4월 30일 간행.
■ 시인 소개
부산에서 고등학교까지 나왔고,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공부했다. 2020년 5・18문학상 신인상과 『푸른사상』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오랫동안 꿈꾸었던 시인이 되었다. 현재는 창작에 힘을 쏟고 있으며 대학에 출강하고 있다.
■ 시인의 말 중에서
올봄에 베란다 ‘백량금(百兩金)’에 싹이 돋더니 삭정이에 잎이 달리기 시작했다. 말라 죽은 줄 알았더니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뽑아버리려다 살아나라고 주문을 외며 몇 년째 물을 준 정성을 저버리지 않았다.
동취(銅臭)에 빠져 허우적대던 시절, 시는 영양실조를 견디다 못해 스스로 관 속에 누웠다. 몇십 년 동안 잠에 빠져 있었다. (중략)
이데아에 대한 믿음이 사라진 시대에 시를 부둥켜안고 가는 일이 어떤 의미인지 여전히 고민스러우나, 이데아에 대한 믿음이 있던 자리에 시가 뿌리내리도록 일조하는 일이 부질없는 짓은 아니리라 자위하며.
■ 작품 세계
그의 탐색은 이제 두 가지 경로를 밟는다. 그중 하나가 시간의 종축을 따라 자기 시가 가닿아야 할 역사적 근원을 확인하려는 노력이다. 두 번째는 시간 여행에서 얻은 인식을 바탕으로 내 가족을 넘어 이웃의 목숨 가진 모든 것들에로 관심을 확산하는 횡단 탐색에 해당한다. (중략)
아버지의 아버지, 그리고 그 아버지의 아버지(「도보여행」)를 통해 유전되어 내려온 가난의 역사를 추적하던 끝에 그는 「고요한 세계」로 만나는 5·18, 「촘항 속의 개구리」 「하귀리 가는 길」 「영모원에 부쳐」와 같은 4·3의 흔적을 붙들기도 한다. 그러다가 마침내 「부활하는 집강소」 「어긔야 어강됴리」에 이르러 동학농민운동의 발발과 좌절이야말로 이 땅 민중, 민족 모순의 기원이자 뿌리라는 점을 확인하기에 이른다.
- 이명찬(문학평론가・덕성여대 교수) 작품 해설 중에서
■ 추천의 글
유국환의 시는 ‘대지(흙)의 역사, 역사의 대지’ 위에서 태동하는 노래들이 많다. 가령 텃밭에서 생명하거나 열매를 맺는 것들에서 출발하는 그의 시는 단순히 자연적인 것만을 보여주지 않고 사람들이 살고 있는 소박한 풍경 속에서도 삶의 깊이를 드러내 보인다. “쑥부쟁이 혼자 지키기에 너무 무거운” 목포항 ‘은금동 꼭대기 집’이나 “강과 강은 바다에서 합일하기 위해 지독한 세월을 견뎌”온 낙동강 하구가 보이는 아미산 ‘갈맷길을 걸으며’ 그의 시는 다져져온 것 같다는 생각이다. 특히 시집 후반부를 뜨겁게 달구는 ‘역사의 대지’ 위에서 펼쳐지는 그의 소박하고 단순한 미학, 시편들은 1894년 동학혁명, 몽골군에 대적한 제주 항파두리성과 4·3의 이야기를 토속성 짙은 목소리로 담아내고 있다. 오월 광주에서 숨을 거둔 귀머거리 장애인 김경철의 넋을 불러와 다시 그를 살려내는 시 「고요한 세계」 또한 그의 시가 결코 고요한 세계만을 그리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 김준태(시인)
진즉 시인이 되었어야 했으나 이제야 본격적으로 시인의 길로 접어든 유국환의 첫 시집 『고요한 세계』는 회한과 관대, 질서화되지 않은 욕망과 시대에의 동참 의지 등 공존하기 힘든 다양한 정동들의 집결지이다. 그런 만큼 『고요한 세계』에는 역사의 흔적들과 새로운 시대적 징후들에 대한 응시는 물론 쓸모없는 실존으로 격하된 온갖 사물들에 대한 교감이 넘쳐난다. 그중에서도 특히 인간 중심의 근대가 세상 바깥으로 추방했던 비인간적인 존재들에 대한 유국환 시의 진지한 관심과 연대 의지는 ‘객체들의 민주주의’가 절실하게 요구되는 요즘 시만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그러므로 앞으로의 시가 가야 할 길이 어디인지 암시하기에 충분하다. 역사의 뒤안길에서 돌아와 이제 시의 거울 앞에 선 유국환의 시인으로의 귀환을 환영한다.
― 류보선(문학평론가, 군산대 교수)
■ 시집 속으로
고요한 세계
― 김경철을 기리며
유국환
들을 수 없어도 나는 보았지요
꺼칠한 손으로 애교머리를 쓸어내리는 여동생의 꿈을
말할 수 없어도 나에게도 꿈이 있었지요
기와를 굽더라도 어무이 배곯지 않게 하겠다고
갸가 어릴 때 경기가 왔는디
나가 뭘 모릉께 마이싱을 많이 맞아부렀제
그 이후로 귀가 먹어버렸어
사람들이 유행가에 어깨를 들썩이는 날이었지요
강물은 흘러갑니다 제3한강교 밑을
당신과 나의 꿈을 안고서 흘러만 갑니다
너 데모했지, 연락병이지?
어디서 벙어리 흉내 내?
손사래질 위로 햇살보다 몽둥이가 먼저 쏟아졌습니다
까마득한 곳에서 어무이 말소리가 들렸지요
내일하고 모레면 부처님 오신 날인디
갸가 기와를 굽다가 가운데 손가락이 짤려부렸어
다들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데 요래조래 찾아봉께
가운데 손가락 없는 애가 눈에 딱 들어오던걸
올해로 마흔 번 아들을 죽였다고 말하지만
울 어머니가 아들을 쓰다듬을 때마다
시커먼 땅속에서는
파란 잔디와 뜨거운 햇살이 살아난다니께요.
첫댓글 유국환 선생님 첫 시집 출간을 축하드립니다. ^^
축하드립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