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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南)으로 창(窓)을 내겠소. // 김상용(1934년 발표) 밭이 한참 갈이 / 괭이로 파고 / 호미론 풀을 매지요. // 구름이 꼬인다 갈 리 있소. /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오. /강냉이가 익걸랑 / 함께 와 자셔도 좋소.// 왜 사냐건 / 웃지요. |
그저 웃기만 하면 장땡입니까? / 빙그레 웃는 것이 인생입니까?
<모세의 정체성>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모세에게 여러분이 “모세여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질문해보십시오!
모세는 뭐라고 대답할 것 같습니까?
‘이드로의 사위’ ‘십보라 남편’ ‘게르솜의 아버지’라고 대답할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칭호들이 모세를 진짜로 드러내는 정답이 될 수 있을까요?
혹시 이렇게 대답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이 80되도록 자기 소유의 양 한 마리 없이 처가살이 하고 있는 주변머리 없는 노인네’
이 대답이 한 인간 모세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말일까요?
모세의 초년 40년은 야망의 삶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다음 40년은 무소유, 청빈의 삶이 되었습니다.
이때까지도 모세는 자기가 누구라고 그럴듯한 대답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진지하게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만날 때, 비로소 자기가 누구인지 알게 됩니다.
평생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은, 자기가 누군지 모르고 살다가 죽음을 맞이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모세를 우리는 누구로 알고 있습니까?
‘모세는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로서 노예인 자기 백성을 애굽으로부터 탈출시킨 사람’
이렇게 대답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대답도 모세를 드러내는 정확한 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고, 또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주셨다.
이쯤 되면 우리는 모세가 어떤 사람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만남으로써 자기의 정체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자기가 왜 이 땅에 살아야 하는지 하나님을 만남으로써 알게 됩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는 자기가 누구인지, 왜 살아야 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서 내가 누구이며, 나는 왜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지 하나님으로부터 확인하는 것을 우리는 소명이라고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부르심”입니다. 영어로는 “콜링(calling)”입니다.
(9~10절)『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
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
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이제 가라 이것이 콜링, 소명입니다.
나이 80이 되어서 모세는 이런 명령을 받았습니다.
드디어 하나님으로부터 쓰임을 받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쓰임 받기>
영원히 변치 않을 우리의 기도 제목은,
“하나님 저도 한 평생 하나님으로부터 쓰임 받기 원합니다.”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쓰임 받는 인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쓰임 받는 그릇입니다. 누가 쓰고 있건 간에 쓰임받고 있는 그릇입니다.
나를 누가 쓰고 있느냐는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 내가 나를 쓰고 있는 경우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중심적입니다. 자기 밖에는 알지 못합니다. 남이야 죽든 살든 관심 없습니다.
오직 자기만 챙기고, 자기만 먹습니다. 내 고집대로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니 떡 니가 먹고, 내 떡 내가 먹는데 무슨 상관이냐?’ 자기가 자기를 쓰는 사람들입니다.
둘째, 남이 나를 쓰고 있는 경우입니다.
여기서 ‘남’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일 수도 있고, 사회나 직장일수도 있고, 국가와 같은 단체
일수도 있습니다.
조직의 깍두기가 되어 ‘오야봉’의 ‘꼬봉’으로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직 직장 일에 매달려 헌신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녀가 나를 쓰는 경우도 있습니다. 요즘 기러기 아빠가 대표적입니다.
부모가 나를 쓰는 경우도 있습니다. 부모의 결정에 자기의 모든 것을 희생하는 경웁니다.
성적이 나를 쓰는 경우도 있습니다. 수능시험 성적이 자기적성과 무관하게 대학 학과를 결정합
니다.
내가 나를 쓰는 경우나, 남이 나를 쓰는 경우나 목적은 비슷합니다.
목적은 자기의 이익입니다.
내가 나를 쓰거나, 남이 나를 쓰거나 간에 그 열매는 자기의 이익입니다. 자기의 이익을 위해 사
는 사람들입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이 나를 쓰고 있는 경우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살아오시면서 누가 나를 쓰고 있었습니까?
자기 생각으로 살아오셨다면 뒤를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그 결과가 만족스럽습니까?
또 남이 내 인생을 좌우했다면 뒤를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만족스럽습니까?
자기 자신의 판단으로 인생을 살거나,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이 내 인생을 좌우하는 인생을 살았
을 때는, 지나고 나면 남는 것이 없습니다. 남는 것은 아쉬움과 후회와 회한뿐입니다. 그래서 평생
을 살고 나서 “인생은 허무하다. 인생무상”이라고 실토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들어 쓰시도록 해야 합니다.
초심자들은 “도대체 어떻게 하나님이 나를 들어 쓰시도록 할 수 있습니까?” 하고 질문합니다.
<모세의 경우 - 스토리 텔링 연결>
모세의 경우를 보겠습니다. 모세가 나이 80세에, 몇 세에요? 80세에.
양떼를 몰고 ‘하나님의 산’이라는 ‘호렙산’ 기슭에 이르렀는데, 기이한 광경을 목격합니다.
떨기나무에 불이 붙어서 활활 탑니다. 나무에 불이 붙으면 나무는 금방 ‘후르륵’ 하고 사라지게 마
련입니다. 그런데,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데도 나무는 그대로 있는 겁니다.
신기하잖아요!
그래서 가까이 다가가봅니다. 그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4절)『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마치 이곳에 아주 조그만 교회가 있었는데, 어느 날 보니까, 새로운 교회가 들어서 있습니다.
새로운 십자가가 들어서있습니다. 그리고 밤이 되면 빨갛게 불이 켜집니다. 그래서 호기심이 생
겼습니다. 슬며시 다가가 봅니다. 그러면 어찌 됩니까?
틀림없이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너는 예수를 믿어야 한다.”
“너는 이 교회에 나와서 무릎을 꿇어야 한다. 그래야 네 마음에 평강이 있다.”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이런 음성이 들립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완악하여 이 음성을 밀어냅니다.
그리고는 오히려 속으로 욕을 합니다.
“예수 믿는 것들 하나같이 엉터리야!”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교회를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특별한 이유가 없습니다.
사람이 그렇게 완악하면 안 됩니다. 교회의 종소리가, 교회의 빨간 십자가가, 길거리에서 나눠주
는 전도지가 자기 양심을 부르면 어찌해야 됩니까?
(4절 끝부분)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 얼른 무릎을 꿇어야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처럼 떨기나무 불꽃을 보여주면 나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핑계입니다.
교회가 집 옆에 있어도 예수 믿지 않은 사람이, 불꽃을 보여준들 믿습니까? 안 믿습니다.
모세에게 보여준 떨기나무 불꽃은 오늘날 교회입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 모세는 납작 엎드렸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다음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5절)『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하나님인 줄 눈치 채고 납작 엎드렸을 때,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사람들은 어렴풋이 짐작합니다.
사람들은 아무도 본 사람이 없더라도, 착한 일, 좋은 일을 하고나면 가슴이 뿌듯해집니다. 반대
로 아무도 본 사람 없어도 자기가 나쁜 일을 했을 때는 불안해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완악한 사람들은 계속해서 하나님을 부인합니다.
그리고 엉뚱한 곳으로 자꾸 갑니다. 이런 때 부인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이 말씀은 대략 두 가지로 해석합니다.
첫째는 과거와 단절하라는 말입니다.
이 당시 신발은 그 사람의 신분을 드러내는 상징입니다.
지금은 빈부의 격차에 따라 신발이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신분에 따라 신발에 차이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신발을 벗으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네가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을 다 버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하나님의 법, 생명의 법, 진리의 법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들어 쓰시는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거룩하신 분입니다. 세상에 하나님보다 더 거룩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없습니
다. 그러한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경외하는 마음으로 서야 합니다.
(6절 뒷부분)『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매』
모세의 이 태도가 모범이 됩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 경외하는 마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경외하는 마음으로 존경하며 두려워하는 마음입니다.
이렇게 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소명을 주십니다.
소명을 받으면 우리가 비로소 누구인가 말할 수 있게 됩니다.
아무개의 아빠, 엄마, 할머니, 할아버지, 아무개의 아들, 딸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명을 받아서 이 땅에서 그 소명을 완수하면서 사는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뜻에 합
한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갖게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소명을 받고, 하나님으로부터 쓰임 받는 인생이 되어 살았을 때에 말년이 되어
서 ‘인생이 허무하다. 인생 무상이다.’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소명에 내가 충실함으로써 내 인생은 아름다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소명을 받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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