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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6월 24일 온고을교회 수요예배설교(황의찬 목사)
스스로 있는 자
출3:13~22
<오프닝~ 하나님의 이름 vs 자기 이름>
고등학교 다닐 때 아주 절친했던 친구가 있습니다.
그 친구를 전도하기 위해서는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선 자주 만나야 합니다. 자주 만나서 대화를 통하여 주님을 소개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자주 연락을 하는데, 그 친구는 저를 그렇게 달갑게 생각하지 않아요. 엊그제도 제
가 전화했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가 바빴는지, 자기가 다시 전화하겠다고 끊고서는 함흥차사입니
다. 아무리 기다려도 전화오지 않았습니다. 이런 일이 종종 있어요.
그래서 생각해봅니다.
▷ 나는 왜 이 친구에게 반기지 않는데 자꾸 전화를 할까?
▷ 왜 이 친구는 내가 목회자가 되기 전에는 안 그랬는데, 지금은 나를 피할까?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제가 자꾸 그 친구에게 다가서는 것은, 그 친구로 하여금,“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에 관심
을 갖고 시간도 투자하고, 노력도 기울이도록 권유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이 친구는 이것이 못 마땅한 겁니다. 그는 자기가 지금까지 해 온 일에 간섭받지 않고 하
고 싶어 합니다. 그가 지금까지 해 온 일은 무엇일까요?
그 친구는 돈 버는 일에 성공한 사람입니다. 지금은 상당한 재력가가 되었습니다.
그가 돈을 많이 벌기 전과 지금은 많이 달라졌습니다. 돈을 벌면 사람이 달라집니다.
그 전에는 그와 만나면 스스럼없는 친구사이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친구 사
이에서도 여간 거드름을 피우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는 친구들의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
다. 자기의 이야기만을 합니다. 이것이 돈의 위력입니다. 친구들은 그의 장황스런 말을 들어줍니
다. 왜 그렇습니까? 밥값, 술값을 그가 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와 만나면, 아무래도 제가 ‘네 이야기는 이쯤 해두고, 이제는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
게 해야 한다.’고 말하게 됩니다. 이 친구는 이것이 싫은 것입니다.
자기 주변에 있는, 자기보다 돈이 없는 사람들은 다 자기의 이야기를 열심히 들어주고 맞장구쳐
줍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들을 만나면, 자기 얘기를 듣기보다는 자꾸 예수님 이야기를 하려
고 합니다.
이 친구는 자기 이름을 높이는 데 재미를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자꾸만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자고 하니까 싫은 겁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15장)『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너희 조
상의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 우리가 높이고, 영화롭게 해야 할 귀하고 귀한 이름입니다. ///
<본문 스토리>
모세가 나이 80에, 미디안 광야 ‘호렙산’ 기슭에서 하나님과 만났습니다.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명령을 하십니다. 어떤 명령을 하셨습니까?
(10절)『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
하여 내게 하리라』
모세의 동족들은 지금 애굽에서 엄청난 핍박을 받는 노예 신세가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고난 중에 있음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을 구출해내려고 하십
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렇게 자기 민족을 구출해 내기 위해서 한 인물을 발탁해서 쓰고자 하십
니다. 발탁된 인물이 바로 모세입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불러서 하신 말씀입니다. “네가 가서 네 민족을 구출해라!”
그러자 모세는 대뜸,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그 일을 왜 내가 해야 합니까?”하고 질
문합니다.
할머님이 손주에게 심부름을 시키면 잘 합니까? 안 합니까?
“내가 그걸 왜 해야 돼?”하면서 안 합니다. 이런 때 손주에게 대답을 잘 하셔야 합니다.
“너는 이눔아 내 손주고, 나는 네 할미이니까, 당연히 해야지!” 이러면 됩니까? 안 됩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대답했는지 보고 배웁시다.
(12절)『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하나님은 “야 이놈아 나는 창조이고, 너는 피조물인데, 피조물 주제에 ‘내가 왜 해야 하냐’고? 이
버르장머리 없는 놈!”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만약에 이렇게 말씀하시면, 모세가 이랬을 거
예요. “하나님은 왜 저를 지으셨습니까? 왜 저를 낳으셨습니까? 누가 낳아 달라고 했나요?”
여기서 하나님은 그럴 줄 알고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참으로 하나님다우신 말씀이십니다.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동문서답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대답에는 토를 달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겠다는 데, 어떻게 합니까? 해야지요, 그러나 모세는 아직도 빠져나가고 싶
어 합니다. 다른 문제를 제기합니다.
(13절)『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
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
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참으로 세상 재미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일이 어려운 이유를 알 것 같습
니다. 모세도 지금 나이 80, 미디안 광야에서 아들 둘 낳고 네 식구가 그럭저럭 양치기 하면서 하
루 세 끼 밥 먹고 그냥저냥 살고 싶은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꾸 채근하십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놀라우신 대답을 해 주십니다.
(14절)『~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다. 영어로는 I am who(that) I am
여기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말은 대단히 충격적인 말입니다.
그 당시나 지금이나 사람들에게는 저마다 섬기는 신이 있습니다.
민족들마다 고유의 신이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종교 없는 민족은 하나도 없습니다. 사람들
은 끊임없이 신을 찾아 헤맵니다.
한국에도 많은 신이 있습니다. 한국의 산마다 산신령이 있습니다. 모악산 산신령, 지리산 산신령,
마이산 산신령. 아이를 낳게 점지해 주는 삼신할머니. 옛날 초가집에는 초가집을 지켜주는 업신
이 있습니다. 이 업신은 지키미라고도 부르는 커다란 구렁이였습니다.
집집마다 성주신이 있습니다. 또 조상신이 있습니다. 부엌에는 조황신이 있습니다.
장독대에는 칠성신이 있습니다.
그런데 과학이 발달하면서 이 신들은 다 근거가 없는 것으로 판명이 났습니다. 결국 이 신들은 다
사람들이 만들어 낸 신이었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또한 현대까지 남아있는 종교에서 섬기는 신들은 어떻습니까?
다들 신을 만들어서 그 신을 섬기고 있습니다.
일본에 있는 신들의 수는 8백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신들이 다 어떤 신입니까?
일본 사람들이 만든 신입니다.
이 당시 애굽에는 만신전이 있었습니다. 애굽의 신들의 숫자가 만을 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시에도 사람들은 이 신들이 모두 사람들이 만들어서 섬기는 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민
족마다 신을 만들어 섬기면서 전쟁을 할 때면 신을 내세웁니다. 그래서 이긴 나라의 신이 더 강하
다는 식으로 신 개념을 만들었습니다. 전쟁에서 패배하면 신을 바꿉니다. 이 신은 위력이 적으니
까, 더 강한 신을 우리가 모시자!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모세에게 하나님은 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사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스스로 있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신 뿐 만이 아닙니다.
하늘이 저절로 있습니까? 바다가 저절로 있습니까? 한국 땅이 저절로 있습니까?
높은 빌딩이나, 도로가 어디 저절로 있습니까?
저나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부모님 없이 우리가 있을 수 없습니다. 부모님은 또 조부모님 없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간에 저절로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모세에게 하나님이 자기를 소개하면서 하신 말씀이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모세는 감히 상상해본 일이 없는 대답입니다. 모세뿐 아니라 당시 사람들의 개념 속에 “스스로
있다는 존재”는 생각해 낼 수조차 없는 개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드러내십니다.
(15절)『하나님이 또 모세엑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너희 조상
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게서 나를 너희에
게 보내셨다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르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
<여호와>
여기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이름을 ‘여호와’라고 밝히십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밝히셨다는 것은 대단한 의미를 가집니다.
이름이 있어야 “관계”가 시작됩니다. 무엇이 시작된다고요? “관계”
사람 사이에서나, 사물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이름이 있어야 합니다. 이름이 없으면 “관계”가 맺
어지지 않습니다. 이름이 있어야 관계가 시작됩니다.
학생들이 연필을 씁니다. 그러나 연필에는 이름이 없습니다. 그러니 학생과 연필 사이에서는 관
계가 시작되지 않습니다. 쓰다 잃어버리면 그만입니다. 다른 연필을 사면됩니다. 그러나 친구를
사귈 때는 친구의 이름을 확인하고 기억하는 것이 가장 먼저입니다. 이름을 기억하면서 친구관계
가 시작됩니다. 부모가 자식을 낳으면 이름을 짓습니다. 이름이 없으면 부모 자식의 관계가 시작
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기의 이름 “여호와”를 밝히셨습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은 히브리어로 네 개의 철자로 쓰여집니다. 요드, 헤, 바브, 헤··· 이 네 문자를 히
브리인들은 거룩한 ‘신성 네 문자’라 해서 대단히 특별한 취급을 했습니다.
고대에는 인쇄술이 없기 때문에 성경을 필사했습니다. 성경 필사하는 사람들이 성경을 필사하
다가 이 신성 네 문자가 나오면, 목욕재계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고, 새 붓으로 바꿉니다. 그렇게
쭉 써내려가다가 또 요드, 헤, 바브, 헤 라는 신성 네 문자가 다시 나오면 또 목욕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고, 새 붓으로 바꿉니다.
얼마나 귀한 이름으로 취급했으면 그렇게 했겠습니까?
하나님의 이름과 관련해서 재미있는 전승이 하나 있습니다.
원래 히브리어에는 모음이 없습니다. 22개의 자음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전통적으
로 관례에 의하여 알맞은 모음이 붙여져서 읽혔습니다. 그러다가 안 되겠다 싶어서 모음을 만듭
니다. 그래서 마소라 사본에서부터는 자음 아래에 모음 부호가 표시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문
제가 생겼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인 신성 네 문자에도 모음 부호를 붙여야 되나 말아야 되나?
당연히 하나님의 이름인 신성 네 문자에는 모음 부호라도 붙이면 안 된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
서 신성 네 문자에는 모음 부호를 붙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신성 네 문자를 감히 ‘여호와’라는
원음으로 읽는 것도 경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로 읽지를 않고, 한국식으로 하자
면, ‘하나님’으로 읽는 것입니다. 히브리 민족에게 하나님이란 발음은 ‘아도나이’입니다. 그렇게
많은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러다보니 이 신성 네 문자의 원래 발음을 잊어버립니다. 모음 부호를 붙이지 않고, 하나님, 그
러니까, ‘아도나이’로만 읽다보니 모세에게 직접 말씀해 주신 원 발음을 잊었습니다. 그래서 어찌
합니까, 분명한 것은 신성 네 문자의 발음이 ‘아도나이’는 아니라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러나 자음만 네 글자로 남은 하나님의 이름을 어떻게 발음해야 할지 난감해졌습니다. 그래서
생각 끝에 ‘아도나이’라는 글자의 밑에 있는 모음 부호를 붙여서 읽기로 했습니다. 그 모음 부호를
붙여서 읽은 발음이 ‘여호와’입니다.
어쨌든 하나님이 자기의 이름을 밝히셨다는 사실은 확실하고 하나님이 오늘 본문에서 모세에게
이름을 밝히심으로써, 그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서 비로소 관계가 시작되었습니다.
출6:3『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
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가 바로 관계의 출발을 의미합니다.
창세기에서 이미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는 대단히 빈번하게 등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
에게는 전능하신 하나님으로써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고,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셨지
만, 진정으로 관계를 시작한 것은 모세로부터라는 뜻입니다.
이 관계가 무엇입니까?
3:7~8『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
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
려 하노라』
이렇게 하는 것이 관계라는 말입니다.
자기 백성이 고통으로 인해 부르짖을 때에 그들의 고통에 직접 개입해서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하나님, 그래서 하나님과 히브리 족속이 관계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 가운데 깊숙이 들어오십니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대충 살펴보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고통 깊숙이 들어오셔서 우리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이 된 우리들과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하나님이 내 삶에 섭리하시면, 우리의 고통이 기쁨이 됩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하나님이 내 삶에 설비하시면, 우리의 눈물이 기쁨이 되는 줄 믿고 체험
하고, 간증하는 우리 온고을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중간 정리>
① 참 신이신 하나님;
하나님은 자기를 “스스로 있는 자”로 소개하심으로서, 하나님만이 참신이라는 사실을 밝히십
니다.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것들은 무언가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만은 스스로
계신 분이고, 앞으로도 영원히 계실 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것은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습니다. 시작이 있으면 종말이 반드시 있습니다.
② 관계의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이름을 여호와로 밝히심으로써 우리와 관계를 맺기 시작했습니다.
그 관계는 하나님이 우리의 고통과 눈물 속에 거하심으로서, 고통을 해결해 주시는 분, 기쁨을
누리게 하시는 분이 되십니다.
③ 약속의 하나님
끝으로 하나님은 자기의 속성과 이름을 밝히심으로 약속의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십니다.
(16~17절) 『너는 가서 이스라엘의 장로들을 모으고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 너희 조상
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돌보
아 너희가 애굽에서 당한 일을 확실히 보았노라 내가 말하였거니와 내가 너희를 애굽의 고
난 중에서 인도하여 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햇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
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땅으로 올라가게 하리라 하셨다 하면』 『그들이 네 말
을 들으르니』18a
창세기 46장 4절에서 하나님은 애굽으로 내려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는 아브라함에게 이
미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게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하나님은 약속을 하고 안 지키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틀림없이 지키시는 분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성품을 표현할 때 쓰는 말이 미쁘시다, 미쁘신 하나님입니다.
이런 하나님과 우리가 어떻게 관계를 맺고, 그 분이 내 삶의 눈물과 고통을 어루만져 주시도록
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삶의 기준을 내 이름을 빛나게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빛나게 해야겠다는 다짐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열심히 돈을 벌어서 친구들에게 거들먹거리고, 자기보다 못한 자들 모아놓고 자기 이야기
만 잔뜩하는 그런 삶이 아니라, 내 인생, 내 생활, 내 생애를 통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빛나게 하라
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합니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삶이 그렇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명령을 듣습니까?
열심히 교회 생활함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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