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소통하기>
1)시와 소통하기 위한 문법들
(1)시를 구성하는 요소들
완성된 문학작품은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여러 부분들이 구조적인 통일을 이루고 있다. 이 구성요소들은 이해를 위해 떼어내 논의할 수 있지만 분리하여 존재할 수 없다. 한 편의 시 속에서 시어나 리듬만 따로 떼어서 이해하거나, 이미지나 시적화자만 독립으로 논의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구조의 개념을 이해하는데 매우 유익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들어보자.
부분들의 구조적 통일은 그들 중 하나라도 위치가 변하든가 제거되었을 때 전체가 흩어지고 교란될 그런 성질의 통일이다.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로 아무런 뚜렷한 변화를 가져오지 않는 부분은 전체에 대한 유기적 부분이 되지 못한다.
시의 구성요소는 시어, 리듬, 이미지, 시적화자 語調, 구조 등이다. 한 편의 시를 처음 대할 때 시의 連行이 가장 먼저 들어온다. 이어서 시적화자의 어조, 리듬 및 이미지 등이다. 이어서 시어와 이미지까지를 이해하게 되면 마침내 작품의 구조적 특징과 주제를 공감한다.
(2)시적 화자와 語調
모든 글과 말에는 화자가 있고, 제재가 있으며, 청자가 있다. 즉 담화는 특정한 인물이 특정한 어조로 특정한 사물이나 현실에 대하여 특정한 사람에게 행해진다. 따라서 말과 글의 의미는 여러 요소들의 상호연관 속에서 파악해야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시가 주관적 경험의 자기표현이라는 점에서 청자 또는 독자의 기능이 약화될 수 있는 면이 있지만 완전히 排除되는 것은 아니다. 시에서 청자의 문제는 일반적인 말과 글이나 서사나 극에서의 청자와는 엄연히 구분된다.
서정문학은 화자가 일방적으로 우위에서 자아를 세계화하는 주관적 장르다. 시에서 의미와 분위기는 화자의 태도에 의해 지배된다. 설사 청자가 존재한다고 해도 다른 양식의 글과 달리 청자는 화자에게 심리적으로 종속될 뿐이다. 이처럼 시의 청자는 화자의 정서와 태도에 알맞은 인물로 동화되기 마련이다.
소설과 같은 서사는 독자에게 설명하고 말해주는 양식이다. 극은 대화를 통해 말해주는 양식이다. 그러나 시는 작가와 작품은 존재하지만 청중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가정한다. 청자는 화자에 종속될 뿐이다. 소설은 경험되고, 희곡은 관람되고, 시는 엿들어진다. 시의 청중은 화자의 발언을 단지 엿듣는 자일 뿐이다.
따라서 시를 담화의 한 형식으로 보면 실제 작가와 구분되는 시적 화자와 이 화자의 목소리인 어조가 연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시적 화자의 어조의 선택은 곧 시인이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이나 주제에 가장 적합한 태도나 입장을 취한 결과이다.
시적 화자의 종류에는 학자에 따라 분류가 다양하다. 김준오는 실제의 시인과 독자는 텍스트 밖의 인물이라고 보고, 텍스트 내에서 ①표면에 나타난 화자와 청자 ②현상적 화자 ③현상적 청자 ④나타나지 않는 청자 등 네 가지로 분류하였다. 기타 다양한 분류가 있다.
시적 화자와 어조는 선택의 문제이다. 시인은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과 주제에 가장 합당하다고 믿는 태도나 입장에 따라 시적 화자나 어조를 취한다. 시적 화자의 선택은 자율적으로 얼마든지 다양한 형태일 수 있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점은 시적화자의 유형이 아니라 한 편의 작품에서 나타난 ‘시적 화자의 양상과 어조’가 그 작품의 내용과 주제를 향상하는데 얼마만큼 유효적절한 선택이었나 하는 점이다.
우리가 시적화자와 어조의 문제에 대하여 어떤 유형화를 필요로 한다면, 시적화자가 쓰고 있는 탈, 즉 페르소나를 유형화하기보다는 시인이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이나 의도를 어떤 형태의 목소리를 통해서 나타냈는가에 관삼을 갖는 편이 오히려 유효하다고 본다.
(3)자아와 세계의 동일성
서정시란 본질적으로 어떤 대상의 기술이나 재현이 아니라 주관적 경험의 표현이다. 시인이 선택하여 형상해내는 대상과 현실의 새롭고 낯선 모습들은 결국 시인의 내적 세계를 표현하는 題材이다. 시에 나타난 표현은 시인이 현실을 보는 안목이며 인식이다. 사물과 사물을 연관지우고 인간과 세계 사이에 새로운 매듭을 만드는 일, 그것이 바로 시적 인식이다. 이 인식행위는 내가 세계가 되고 세계가 내가 되는 이른바 同化(Mitteilung)에 몰입하는 행위이며, 시로 승화된 새로운 세계는 곧 몰입양상의 구체화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을 겪으며 시인이 재창조한 새로운 세계질서를 통해 우리는 시인의 내적이고 잠재적인 인식을 읽어내며, 그것을 감동적으로 재체험한다. 한 편의 시작품은 바로 시인의 대상이나 현실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자아와 세계가 함께 나누어 갖는 일을 어떻게 수행하여갔는지를 보여준다.
이처럼 시적 지식은 과학적 진리와 지식으로 알게 되는 일상적 인식의 세계를 부정하고 항상 새로운 세계로 지향한다. 이점이 시적인식이 지니는 가장 큰 속성이다. 한 대상에 대한 어떤 지식도 그 대상이 있는 그대로의 대상의 모든 모습에 대한 지식일 수는 결코 없다. 오히려 반대로 한 대상의 여러 면이 무시되고 어떤 특수한 면만이 개념적으로 추출되었을 때만 지식은 성립한다.
달을 대상으로 시적으로 생각한다면 공해로 사라져버린 도시의 달, 고향의 보름달, 공적인 의미로서의 달이 아닌 개인적 의미로써의 달을 구체화시켜야 한다. 개인적으로 체험된 달의 의미는 일상적인 달이라는 언어기호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으며, 자신만의 독특한 기호체계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이처럼 개성적이ㅣ고 구체화된 내용이 시적 인식이며, 한 편의 시작품은 결국 그 인식의 표현이며 양상이다.
이에 대하여 David A White는 시적으로 생각하기(poietizing)와 일상적인 생각하기(thingking)는 아주 다르다. 시적으로 생각하기는 그 대상에 이름을 부여하는 것이다. 일상적으로 생각하기는 전체를 말해주고 시적으로 생각하기는 그 전체를 지배하는 부분-특정한 시기에 그 전체 안에 잇는 모든 실체에 유일성을 결정하는 부분-에 이름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시 말해 시적 인식이란 우주의 어떤 대상이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세계를 자아화하여 여태 본 적이 없는 그 무엇인가를 새롭게 보아내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인식이다. 시인의 세계를 자신의 내부로 끌어드려 그 세계를 同和의 방법을 취하든, 자신을 상상적으로 세계에 투사하여 일체감을 이루는 投射의 방법을 따르든, 이는 대상에 주관적 감정을 이입하는 활발한 활동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 감정이입은 자아와 세계의 활동적인 교류를 의미한다. 곧 세계가 내가 되고 내가 세계가 되는 함께 나누어 갖기의 활동이다.
이 시적 세계관은 한마디로 자아와 세계의 동일성 또는 일체감이다. 카이저는 이를 ‘대상성의 내면화’라 하였고 시의 본질이라 했다. 이 동일성으로 만난 자아와 세계가 각기 특수한 성질을 보유하고 하나의 새로운 동일성의 차원으로 승화되었을 때 미적 체험이 된다.
시적 인식과 세계관은 무엇을 대상으로 했느냐가 문제가 아니고 그 대상에 어떻게 일체화하면서 반응했느냐의 문제이다. 하여 시란 결국 시인이 우주의 현실과 대상을 어떻게 인식하고 반응하였는가 하는 그 시인의 현실대안을 보여준다. 동일한 대상이나 현실에 대해 수없이 다양한 시적 인식이 나타나는 것은 곧 시인의 서로 다른 대현실안의 차이 때문이다. 이처럼 시의 세계는 동일한 체재가 시간과 공간에 따라, 시인이 의도하고자 한 동기와 주제에 따라 각기 다양한 의미로 변형되고 재창조되는 세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