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고개와 질고개/ '실'과 '질'은 글자가 희미하면 오류를 범하기 십상이라 한자를 물어보려 했으나
마을회관의 노인네는 물음 자체를 거부해서 말 한마디 걸지 못하고 고개를 넘었다)
잘 갖추면 하동군의 새 랜드마크가 될 수 있으련만 미리 해놓은 기반시설(위 아래)만 풍상에 낡아가고 있으니. . . .
인책하는 사람과 관계 없이 혈세를 바친 군민들의 속이 짠하겠다.
옥종면 정수리(하동군) 삼거리, 이 곳(표석)이 백의종군로 셈하는데 중요한 지점이다.
합천에서 여기까지는 불변의 길이지만 이 곳에서 화개로 가는 길은 관계자들이 아무리 우겨대도
백의종군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순신이 백의종군하기 위해 합천으로 갈 때인 6월 1일에 이용했을 뿐 백의종군한 적이 없다.
7월 18일~8월 3일 아침까지의 백의종군 기간에 이용한 길은 노량 길 뿐이니까.
영당교(위)와 동곡교(아래)
누군가(어느 단체?) 착한 일을 했다.
그러나 리본이 있어야 할 곳은 산길인데 산 어디에도 없으니.
동곡교 반대편 후평마을 앞(위) 후평마을 회관과 경로당(아래)
이 지점에서 이순신은 왜 다시 이희만의 집으로 갔을까.
손경례의 집에 갈 것이라면 바로 가면 되는데 하룻밤 자고 3일이나 이웃인 이흥훈의 집에 있다가
손경례의 집으로 갔으니.
거쳐서 갈 집과 일정을 미리 정해놓은 대로 실행한 것인가.
그렇다면, 곤양에서 미리 보낸 보고서의 내용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도원수와의 다음 회동도 없이 즉각(8월3일) 자기의 임지로 갔는데(왕명이니까) 원균의 사후 싫든
좋든 자기가 다시 불려갈 것을 미리 점치고 있었던가.
육지에서는 크고 작은 전투가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데 강 건너편 불 구경하듯이 한가롭게 여행
다니듯 하다니?
여러 사람을 만나 여러 의견을 나누었다지만 알짜배기는 없고 하나마나한 이야기들이었다.
백의종군의 신분이기 때문에 도원수를 돕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도원수를 멀리 하고
있다면 아무 일도 하지 않겠다는 것에 다름아니다.
손경례의 집에서도 다시 부르는 왕명만 기다리며 무작정 있을 작정이었던가.
전날(8월2일) 일기에도 "이날 밤 꿈에 임금의 명령을 받을 징조가 있었다"고 했으니까.
추동마을회관(경로당/위)과 추동마을 팜스테이(Farm stay)단지(아래)
수곡면 다운타운 길(위)과 창촌교(아래)
<선조25년(1592) 임진왜란 때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군사를 훈련시켰던 곳>
<장군이 두번째로 삼도수군통제사 임명장을 받은 후 군사들을 훈련시켰다고 전하며>
내가 진배미에서 보내는 동안에 청년은 하우스 밖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나.
안내된 하우스 안에서 그의 부인(?)으로 부터 초코파이 2개, 금방 딴 딸기 1접시와 음료수가
담긴 쟁반을 받았다.
젊은 부부의 남은 간식을 통째로 내놓았고 나를 위해 무리하게 따온 딸기로 보였다.
나는 예의 차릴 겨를 없이 단숨에 먹어치운 후 비로소 이리 된 경위를 화제로 올렸다.
토끼 잡으러 갈 때도 범 사냥 처럼 준비해야 한다고 유비무환의 일상화, 생활화를 입에 달고
살면서도 이따금 무비유환을 자초하는 나.
오늘도 준비할 기회였던 곤양과 곤명의 다운타운을 무심코 지나쳐버린 결과다.
궁벽한 산골까지도 편리 일변도의 각종 가전제품과 차량들이 대형마트만 상대하는데 나처럼
준비하지 못한 사람을 위해 구멍가게가 살아남아 있겠는가.
까미노(Camino/이베리아 반도) 보다 훨씬 불편하다.
까미노에서는 가게가 없더라도 웬만한 마을에는 빵 공장이 있고 더 궁벽한 소규모 마을에는
매일 배달하는 빵 배달차를 만나게 되므로 얼마든지 구할 수 있으니까.
뻬레그리노스(순례자)를 위해 마을마다 출구에 다음 마을 정보를 알리는 안내판이 비치되어
있으므로 준비를 빠뜨릴 염려 없다.
체력으로 버티던 때보다 환경이 더 열악해 가는데도 준비성마저 퇴화한다면?
명약관화한 결과를 걱정하며 '진주원계의 딸기꾼'으로 기억되기를 바라는 이 젊은 부부.
진배미 땅에 또 하나의 인연을 심어놓기 위해서 그 분이 만든 작품이라면 차라리 좋겠다.
공복에 급하게 먹은 탓인지 속이 불편은 해도 한껏 상승된 기분으로 그들과 작별했다.
이순신 백의종군로 안내표석(위)의 화살표 따라 절로 걸어진 5km 전방에 있는 이충무공 진배미 유지 안내판(아래)
'李忠武公軍事訓鍊遺蹟碑'(위) '진부원계 딸기꾼 부부'와 딸기하우스(아래)
이해되 않는괴이쩍은 일들
진배미에서 250m쯤 되는 위치에 자리한 검은 와가의 개량 한옥.
한달 새에 2번째 방문하는 손경례의 집이다.
쪽문만 열려있는 비철금속 대문의 좌측(밖에서는우측)가장자리에는 우편함과 '이순신 백의
종군길' 명함판 포스터가, 그 문기둥에는 '15 덕천로504번길' 새 주소판이 각각 붙어있다.
사랑채의 층이 진 앞마당에는'忠武公李舜臣將軍三道水軍統制使再受任史蹟地' 비석과 '명량
회오리바다를 향하여 必死則生必生則死(필사즉생필생즉사)'를 음각한 널판 기둥이 서있다.
안채로 들어가는 벽 모서리 기둥에 문패 '손창수'가, 마루위 안방 머리에는 '又溪書室', 다른
방 이마에는 '藏書室' 등 편액이 각각 붙어있다.
잠겨있는 문틈으로 비췬 방안은 잡물들로 어수선하다.
사랑채의 뒷쪽, 마당이 있는 안채에는 건조중인 곶감꾸러미들이 주렁주렁 걸려있는 것으로
보아 사용중인 집인 듯 한데 2번 다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
이순신은 이 두채의 집 중 어디에서 유했는가.
여러명의 수하를 거느리고 다녔기 때문에 사랑채 하나로는 부족했을 것이다.
더구나, 부하 장졸들과 한방을 썼을 것 같지는 않으니까.
그의 정유일기만으로도 잠자리에 까다로운 것을 알 수 있다.
주인 집이 너무 낮고 더러워 파리떼가 벌처럼 모여 사람이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5월15일)
잠잘 방이 좋지 못하여 겨우겨우 밤을 지냈다(6월1일)
잠자는 방을 도배하고(6월5일) 다음날 다시 바르고 군관이 쉴 마루 두칸을 증축하는 등.
민폐를 끼쳤다고 종들을 매로 다스리고 받은 것을 돌려주고(6월3일)
누구의 종이 바친 미투리를 거절하다가 끝내 값을 주어서 보내는(5월7일) 등 정갈과 수신이
지고한데 반해 잠자리만은 무척 가렸던 것 같다.
민폐에 철저한 방어자세였음에도 잠자기 마땅한 집이면 주인네 사정에 눈감고 귀막았는가.
임시로 거처하는 집이지만 여러 날을 양해한 집과 달리 불시에 들어와 5일이나 묵는다면 집
주인 가솔의 처지는 어떠했을까.
8월 3일 임금의 재수임교유서를 받았기 망정이지(7월22일에 내렸는데 8월3일에 도착한 것)
그 교유서가 없었다면 얼마나 더 머물렀을지 모를 일이니.
아무튼 손경례는 이순신을 극진히 대접한 것 같다.
"충무공의 나라를 위하는 높은 節義를 몸소 느끼고 南原의 경계까지 전송했다" 고 교유서를
받고 떠나는 이순신 통제사와의 작별을 손씨 대동보의 경례 항(項)에 기록했으니까.
본관이 밀양인 손경례(孫景禮)는 삼국유사(三國遺事 卷第五 孝善 第九 興德王代 孫順 埋兒)
에 등재되어 있는 시조 손순(孫順)의 29世 손이다.
그의 고조인 25세 수령(壽齡/1417~1486)이 이조초기의 무신 하경복의 질녀와 결혼, 처가가
있는 수곡면 사곡에 뿌리를 내렸다.
그(수령)는 이곳에서 파조가 되었는데 그의 호 오곡(梧谷)을 따서 오곡공파라 하였단다.
경례는 파조인 수령의 현손(玄孫/高孫)이며 위로 父(28세) 약(爚/1514~1583), 祖父(27세)
난원(蘭遠), 曾祖父(26세) 시(時/1460~1501)가 있다.
이 집은 그(경례)의 후손인 창수(淐壽/문패/1910~1988)가 물려받은 듯 한데 그(창수)의 사
후(死後)에는 어찌 되었는지.
그는 한말의 유학자 회봉 하겸진(晦峯河謙鎭/1870~1946)의 문인이었으며 우계서실은 그의
호(號) 우계를 딴 편액이란다.
다음 글은 이순신의 백의종군과는 무관하나 이순신에 극진했던 손경례의 시조에 관한 가화
(佳話)라 올리는 삼국유사 글의 간추린 번역문이다
<손순(孫順/古本에는孫舜)은 모량리(牟梁里) 사람이다.
부친(鶴山)사망 후 아내와 함께 품팔아 양식을 구해서 노모(運烏)를 봉양하는데 어린 자식이
늘 모친의 음식을 뺏어먹었기 때문에 이를 민망히 여긴 손순이 아내에게 말았다.
"아이는 다시 얻을 수 있지만 어머니는 그럴 수 없는데 아이가 어머니의 음식을 뺏어먹어서
어머니의 굶주림이 심하시니 이 아이를 땅에 묻어 어머니의 배를 부르게 해드립시다"
부부는 아이를 업고 모량리 서북쪽 취산(醉山)의 북쪽들에 가서 땅을 파는데 기이한 석종(石
鐘)이 땅 속에서 나왔다.
놀란 그들은 괴이하게 느껴 종을 나무에 걸어놓고 두드렸는데 은은한 소리가 들을만 했다.
"이 기이한 물건이 나온 것은 정녕 아이의 복인 듯 하니 아이를 묻어서는 안되겠네요"
아내의 말에 동의한 남편이 아이와 종과 함께 집으로 돌아와 종을 들보에 매달고 두드렸다.
종소리는 대궐까지 들렸고 이 소리를 들은 흥덕왕(興德王/신라42대 777~836)이 명했다.
"서쪽 들에서 들려오는 이상한 종소리가 맑고도 멀리 퍼지는데 보통 종소리가 아닌 듯 하니
빨리 가서 알아보라"고.
손순의 집을 다녀온 사자(使者)로부터 자초지종을 들은 흥덕왕.
"옛 곽거(郭巨/후한시대 효자)가 아들을 땅에 묻자 하늘이 금솥(金釜)을 내렸는데 이번에는
손순이 아이를 묻자 땅속에서 석종이 나왔으니 천지가 전세 효도, 후세 효도를 함께 보는 것"
이라며 집 한채를 내리고 매년 벼 50석을 주어 순결한 효도를 기렸다.
이에 손순은 살던 집에 홍효사(弘孝寺)라는 이름의 절을 세우고 그 석종을 안치했다.>
지자체시대의 개막 이후 각 지자체는 관광지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다.
굴뚝(공해) 없는 효자산업으로 각광받고 있는 업종이 바로 관광업이니까.
주목받는 과거의 인물이나 사건이 실낱같은 개연성만 있어도 연기설을 내세우며 쟁탈전을
벌이기 일쑤인가 하면 없는 전설도 만들어 사람들을 끌어모은다.
다음에는 유명 관광지로 업그레이드(upgrade)된다.
이충무공군사훈련유적비가 서있는 곳이 바로 이 경우에 해당한다.
그런데, 손경례의 집은 왜 저리 썰렁한가.
군졸들을 하루 훈련시켰다는 곳은 문화재가 되고 관광코스에 들었는데 5일간이나 묵고 왕의
재수임교유서를 받으므로서 정유왜란의 승기를 잡은 곳이다.
더구나, 손경례(孫景禮)는 벼슬은 종7품 사재감직장(司宰監直長)에 불과하지만 삼국유사에
등재되어 있는 효자 가문(三國遺事卷第五 孝善第九 興德王代 孫順埋兒)의 후손이다.
이순신과 관련된 유적으로나 관광상품성에서 진배미에 비해 월등한데도 재수임사적지 비석
하나가 전부일 뿐 관리를 하지 않아서 지저분하다.
마을 노인들도(경로당) 시큰둥, 모르쇠로 일관하고 찾아온 외지인에게 시비 거는(왜 왔냐고)
늙은이까지 있으니.
마을회관 벽에는 '백의종군로 도보탐방로 도장받는 곳' 간판이 붙어있으나 무슨 도장을 찍어
주는지 상대해 주는 아무도 없다(한달 사이에 2번 방문했는데도)
손씨 재실 영모재(永慕齋)가 있고 후손들이 거주한다는데도, 상거가 있기 때문인지 후손들도
몰라라 하는 것 같다.
전혀 이해되지 않는 관계당국자들 때문에 허탈해진 기분으로 문암교 건너편 강정으로 갔다.
이순신이 백의종군 왕복 때 모두 들렀으며 내 백의종군로 걷기 마지막 길이다.
어제 지나간 두양리에서 덕천강과 나란히 뻗어있는 정개산(鼎盖)에 있었으나 토성이라 흔적
도 없다는 정개산성을 가늠해보며 당도한 강정(江亭)에서 백의종군길 마지막 휴식도 취했다.
정유재란 때 불탄 후 재건했으며 운치를 돋우는 소나무가 있다 해서 송정(松亭)으로도 불렸
는데 문암정으로 개명되었다는 정자다.
문 같은 형상으로 마주보는 두 바위기 있었다 하여 이름이 문암(門岩)이었으나 훗날 이곳을
찾는 선비들이 文岩이라고 씀으로서 漢字가 바뀌게 되었단다.
지라산 웅석봉에서 발원하여 진양호로 유입되는 덕천강을 420년 전에는 어떻게 건넜을까.
이순신의 기록 습관으로 보면 일기에 한줄 있을 법 한데 왜 왕복 모두 침묵했는지.
1975년까지 370여년간 이곳을 원계리로 통하는 교통 요지로 만든 나루터가 여기에 있었다
하나 역산해 보면 당시(정유년) 보다 훗날인데.
내 이순신의 백의종군로 걷기가 이 궁금증을 끝으로 막을 닫는 듯 했는데 백의종군은 물론
이순신과 전혀 무관한 일이 바로 옆에서 마지막 궁금증으로 대기하고 있을 줄이야.
강정과 백의종군로 표석 사이에 서있는 비석 임천대(臨川臺).
누가 무슨 뜻으로 여기에 세웠는지 크게 음각된 세 글자 뿐이니.
전에, 언젠가 남반도(南半島/八道) 어데선가 보았다는 기억만 가물가물하니.
멍에를 벗어버려 홀가분한가 싶을 겨를도 없이 다른 멍에에 씌우는가.
임천을 찾아 나서볼까.
에필로그(epilogue) - 이순신을 우리 곁에서 쫓아내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