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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宗敎)란 무엇인가 (上).
/ '신(神)이 없는 종교'는 가능한가?
천도교 홈에 게재된, 본인의 모든 글과 동학, 천도교와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은, 모두 오암 동학사상 연구소 카페(http://cafe.daum.net/oamdonghak)의 김 용천 자료실과 교리, 교사 연구 논문과 학술논문 자료실에 게재되어 있사오니, 자주 방문하시어 많이 읽어주시고, 교단발전에 널리 활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포덕 152(2011)년 7월 15일.
오암 동학사상 연구소 운영관리자. 김 용 천 심고.
留意事項; 이 글은 ‘천도교의 신관 정립에 대하여’ 중에서 종교란 무엇인가? 의 일부 생략되었던 부분 중에서, 상당부분을 추가 수록한 글입니다. 그러므로 완성된 전문(全文)은 아닙니다.
/ 필자인 오암 김 용 천 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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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전에 우리를 돌아보며.
천도교가 동학으로부터 수운의 사상을 철저히 계승하여 새로 탄생한 종교로서, 오늘에 이른지 벌써 150여년을 맞고 있다. 천도교가 민족신앙을 이어 받은 민족종교라고 자부도 하는 경향도 보이고, 인류문화 역사상 최고의 고급종교라고 평가 받기도 한다고 믿고 있는 천도교 교단과 교인들은, 선천(先天)의 문화인 종교학(宗敎學), 신학(神學), 철학(哲學) 등에서 논의되는 종교에 관련된 언어에 얽매어 독창적(獨創的)인 천도교의 사상이나 종교로서의 면모(面貌)를 다 설명하지 못하고 있는 가슴 아픈 실정(實情)에 놓여 있다는 것은 주지(周知)의 사실이다.
선천 세상에서 만들어진, 만들어지고 있는 언어의 개념이나 한계에 대한 적합여부(適合與否)와 천도교 사상을 기존(旣存) 용어에 맞추어 설명해보려는 노력으로, 천도교인으로서의 독창성(獨創性)과 독자적(獨自的)인 수운심법(水雲心法)을 기조(基調)로 한, 종교적 목적을 이룩하기 위한 참다운 신앙생활에 대한 길을 모색(摸索)하는 데에 매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더욱이나 한심한 것은, 기존의 종교이론이나 용어의 개념으로, 천도교의 독창적인 사상을 설명하려는 애처로운 노력이 우리들을 한없이 슬프게 한다. 선천의 모든 것을 거부하고 다시 개벽(開闢) 또는 후천개벽으로 새로운 세상과 신문화를 창출(創出)하는 신인간이 되겠다고 다짐하고 있는 동학인 들이, 선천문화를 기준으로 삼고 천도교를 설명하고 평가하려는 발상(發想)과 태도는 매우 한심(寒心)한 일이기 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동학과 천도교가 근, 현대사에 깊이 참여하여 새로운 역사를 창조한 주인공으로서의 자부심을 갖고 수운의 사상을 바탕으로, 새로운 종교학, 신학, 철학 등의 학문 분야에서 동학과 천도교만이 표현할 수 있는 신조어(新造語)를 만들어 인류문명에 새로운 개척자가 되어야 할 때가 왔다고 선언해야 한다. 수운이 탄생하기 이전에는 없었던 언어들을, 동학과 천도교 시대에 이미 우리가, 수많은 신조어로 만들어 한국의 근, 현대사에 던져 고귀한 경험을 갖게 한 수많은 언어들, 즉 동학, 동학혁명, 갑진개화, 천도교, 기미독립, 어린이, 천도교 청우당, 수운 최제우, 해월 최시형, 의암 손병희, 한울님, 시천주, 사인여천, 인내천 등등의 수 백 개의 신조어들을 심도(深度)있게 이해하지 못 하면서 한국의 근, 현대사를 똑바로 이해했다고 말하는 것은, 망발(妄發)이나 망언(妄言)이 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선천의 세상에서 정착(定着)된 종교의 개념은 어떤 것이며, 새로 모색(摸索)되어야 할 종교의 개념은 무엇인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이런 문제들은 핵심으로 하여 천도교적(天道敎的)인 사상을 담은 종교란 용어와 이와 관련된 모든 언어에 시천주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개념의 정의를 해보고자 하는 시도(試圖)에서, 인류역사 속에서 동서양의 여러 가지 종교정의를 살펴보고자 한다.
/ 필자인 오암 김 용 천 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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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학계에서 종교라는 단어의 어원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에 대한 답은 할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이 통설로 되어 있다. 세계 여러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종교현상에 대하여 '종교'라는 단어를 언제 어디에서 사용하였는가가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학에서 다루고 있는 어원적인 것과 본질적인 것을 두루 살펴보면, 상당한 부분을 이해할 수 있다고 보아야 한다. ‘宗敎’라는 단어의 의미를 분석해 보면, 종교가 어떤 것인가를 말해주고 있다. '宗敎'는 '宗'자와 '敎'자의 합성어로. 宗자는 으뜸, 근본 등이며, 敎자는 가르치고 배운다는 의미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종교는 이 세상에서 사람으로서 살아가기 위한 삶의 지혜로 가장 먼저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 최고의 근본적인 가치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견해와는 조금 다르게 일반사전이나 백과사전에 종교의 정의가 기술되어 있다. 요약하여 살펴보면, ‘종교는 어떤 숭고, 위대, 신비한 대상 즉 초자연의 신을 숭배하고 신봉하여 인격수양과 사회생활의 진, 선, 미를 추구하는 것을 연구 실천하는 일’이라든가 ‘간명한 개념규정은 곤란하나 일반적으로 사람이 초인간적인 위력을 인식하고 이에 대한 외포 또는 신뢰의 정을 느끼며 희생을 바치고 기원 예배하여 나아가서는 흔히 제사의식을 행하고 의무 관념에서 복종 봉사하는 생활을 할 때 이러한 관계를 말한다.’ 고 매우 기독교적인 해석을 하고 있다.
동양에서 종교란 말을 언제부터 사용하였는지는 확실하지는 않으나 대개 근대에 와서 생겨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에서는 AD 13세기경에 이미 중국에 사용했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서구의 강력한 기독교가 동양 특히 중국에 유입되면서부터라고 한다면, 기독교의 한 종파인 경교(景敎-중국에 전래된 이후 붙여진 이름; Luminous Religion)의 전파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경교는 AD 431년에 에페리우스(Epherius 또는 Epheso) 종교회의에서 예수에 대한 이론(異論)이 제기되자 이단자로 배척받아 페르샤 근처에서 포교하다 죽은 남 로마의 네스토리우스파(Nestorianism)가 세운 기독교 계통의 종교이다. 그 후 교조에 뒤를 이어 신도들이 페르샤의 국교로 만드는 데까지 이르렀고 당태종 정관 9년인 AD 635년엔 21명의 해외 선교사단을 만들어 당나라 장안에 들어와 당태종의 후대(厚待)를 받았으며 포교에 힘을 섰다. 그러나 경교는 동양적인 사고로 교(敎)나 도(道)로서의 순수한 의미로 받아졌다. 경교가 당나라에 들어온 지 약 600년 후인 AD 1253년에 카라코름(Karakorum / 和林)에서 불교, 그리스도교, 회회교, 네스토리우스교의 지도자들이 모여 국제 종교회의를 연적이 있다고 알려졌는데 이때부터 ‘종교’란 말이 사용되었으리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동양에서 종교란 말은, 대체로 ‘종을 주관적인 것으로, 교를 객관적인 것으로 보아 서로 상위(相違)한 것이 교오작용(交互作用)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註 01; 경교의 초기 교역자와 신도들은 자신들을 ‘갈데아 교회 혹은 앗시리아 기독교’라고 불렀다. 그러나 중국에 유입되면서, 처음에는 그들이 페르시아에서 왔다는 의미에서 파사교(波斯敎)라고도 하였다. 중국에서 경교의 역사와 실태를 증언해주는 귀중한 사료인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에 의하면, 네스토리우스파 그리스도교를 '경교'라고 하게 된 것은 "그 공덕과 효용이 뛰어나게 밝기 때문" 또는 “기독교의 하나님은 영혼의 태양이시오, 세상의 빛이시기 때문”이었다. 635년에서 781년(덕종 건중 2)까지 경교의 역사가 이 비문에 수록되어 있다. 당 태종은 나라의 돈으로 장안에 대진사(大秦寺)를 건립하여 경교승을 두었으며, 아들 고종은「예수 메시아경(序聽迷詩所經)」,「일신론(一神論)」,「일천론(一天論)」,」등을 번역한 네스토리안 선교단의 단장은 아라본(阿羅本-Abraham의 중국식 표기)을 진국대법주(鎭國大法主)로 삼고 경교를 진종(眞宗)이라 하여 국교로 삼았다
이러한 경서 등에 의하면, 경교의 중심사상은 일신론적인 신관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경교의 찬송문이나 예배서에 해당하는 존경(尊經)과 경교삼위몽도찬(景敎三威蒙度讚)은 엄격하지는 않지만 삼위일체의 교리를 보여주고 있다.
경교가 중국의 문화적 전통에 적응하려 했던 흔적은 여러 곳에서 나타났다. 교회의 명칭을 '경교'라 한 것이나, 성령을 '현풍'(玄風), 교당을 '사'(寺), 수도사를 '승'(僧), 사도를 '승가'(僧伽), 천부를 '천존'(天尊)으로 번역한 것은 중국 전통종교와의 연결성을 추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당(唐) 초기에 국가의 보호를 받으며 발전했던 경교는 당 말기에 이르러 쇠퇴하기 시작했으며, 약 400여 년 동안 거의 소멸되었다가 원(元) 때에 일시적으로 재흥하였다. 이때 네스토리우스파는 경교라는 명칭 대신 '야리가온'(也里可溫)이라고 불렸는데, 이는 '복음을 섬기는 자'란 뜻을 지닌 몽골어 '아르카운'(Arkaun)을 음역한 것이었다./인터넷 통합지식을 정리함.
註 02; 카라코룸(Karakorum / 중국에서는 카라쿤룬[喀喇崑崙]이라 함.)은 옛 몽골제국(태종·정종·헌종 시대)의 수도로서 Kharakhorin, Har Horin이라고도 한다. 중앙아시아에 있는 실크로-드 중의 한 도시로 西域을 지나 東進을 하는데 주요한 통로였다. 지금은, 이 도시의 유적이 몽골고원의 중앙에 있는 오보칸가이 주의 오르콘(혼)강 상류에 있다. 고고학적 유물 발견으로 오르혼 강의 흐르는 물을 이용한 금속제련의 중심지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카라코룸은 고대 초원의 제국의 중심지라고 불리는데, 이르면 8세기부터 이곳에 유목민들이 살았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1220년에 몽골의 칭기즈 칸의 주요 경쟁자였던 나이만 몽골족의 수도였던, 오늘날 울란바타르의 서남서쪽에 있는 카라코룸을 그의 새로운 제국의 본거지로 삼아 약 30년간 중국 침략의 기지로 이용했다. 1889년 2명의 러시아의 동양학자가 카라코룸의 정확한 위치를 알아냈고, 1948~49년 당시의 소련 과학 아카데미 회원들이 유적을 발굴했다. 그들이 발견한 것들 중에는 도시 남서부에 있는 오고타이 궁전 터와 12세기 말이나 13세기 초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 불교사원의 유적이 있다.
1267년 칭기즈 칸의 후계자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인물이며 중국에 원(1279~1368)을 세운 쿠빌라이 칸은 수도를 대도(大都 : 지금의 베이징[北京])로 옮겼다. 1235년 칭기즈 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오고타이는 카라코룸 주위에 성벽을 쌓고, 화강암 반석 위에 64개의 나무기둥으로 떠받쳐진 직4각형의 궁전을 지었다. 한때 이 도시에는 수많은 벽돌 건물과 12개의 무속신당 및 2개의 이슬람 사원이 있었으며, 일찍이 조각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특히 거대한 돌거북이 유명하다. 1388년에 일어난 베이얼 호[貝爾湖] 전투에서 홍무제(洪武帝 : 명 태조)가 이끄는 명나라 군대는, 몽골을 침략해 대승을 거두고 7만 명의 몽골족을 사로잡는 한편 카라코룸을 파괴했다. 나중에 이 도시는 일부 재건되었지만 곧 황폐해졌다. 1585년 이 도시가 있던 자리에 세워진 불교사원 에르데니주는 오늘날 박물관으로 이용하고 있다. / 백과사전과 인테넷 통합지식에서 종합 정리.
영어에서 종교를 의미하는 religion은, 라틴어의 '렐리기오(religio)'에서 유래한 단어라고 하며, 이 religio는 의례란 뜻을 가진 단어로, 결국 제의(rite)라는 뜻, 다시 말해서 관습의 외식적 제례란 뜻이다. 시세로(Cicero)에 의하면 religio는 '다시 읽다' 란 뜻의 re-ligare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경전이나 의례문을 반복해서 읽음으로써 엄숙한 예배나 종교의식을 진행해가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기원전 1세기 경 키케로(Cicero. B.C. 106-63)는
religere의 변형인 religendo에서 전래되었다고 말했다. religere는 '다시 읽는다' 또는 ‘모은다(集).’ 다시 수집한다, 다시 돌아간다는 뜻을 가진 동사이고, religendo는 정동(精動)이란 뜻을 가진 명사라고 한다. 이 키케로의 설은 엄숙한 예의와 마음으로 신들에게 한 제사를 의미하고 있기도 하다. 로마인들은 국가에 있어서나 로마인들의 민족신(民族神)에 대하여 제사하는 의식전체를 종교라고 했다고 한다. 성경(창세기 1-5장과 이사야 서 19장 22절 참조.)에 기록된 내용으로 미루어 보면 기독교가 의미하는 종교는 우리에게 생명을 준 존재에 대한 유래와 생의 목적을 하나님에게 대한 경배(敬拜)의 한 형식이라 할 수 있다. 이 의미를 좀 더 설명하고 이해할 수 있는 당시의 사람들의 생각을 살펴본다면, 불은 상승하여 태양에게로 돌아가고, 물은 아래로 흘러 넓은 대양으로 돌아가며, 인간은 죽어서 진신(眞神)에게로 돌아간다는 믿음이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종교는 진신에게서 추락되었고 근원에서 이탈된 인간이 그 근원과 진신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이 근원과 진신에게로 돌아가기 위하여 정성스러운 기도와 예배를 통하여 실현하려 하였다.
4세기경에 기독교의 수사학자인 루시우스 락탄티우스( L. Lactantius)는 religio를 '재결합하다' '함께 묶다.' ‘매다. 또는 뒤에 맨다.’라는 종속적(從屬的)의 의미를 가진 religare에서 유래한다고 주장하면서 "인간이 신앙의 끈으로 하나님과 묶어져 충성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뜻으로 사용하였다. 요한 계시록 2장 10-11절에 보면 ‘죽도록 충성을 다하라. 그러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너에게 주겠다. 귀가 있는 사람은 성령의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이기는 사람은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주장에 대한 근원적인 설명을 해주고 있다. 또한 희랍어로 신앙이란 말은 피스티스(πιστι'ς)라고 하는 데, 이 말의 어원은 피시토스(πιστo'ς)에서 왔다고 한다. 피시토스의 의미는 충성적인 것을 총칭(總稱)하는 것이라 한다.
다음 글은 천도교의 종교관(“天道敎”; 崔東熙, 金用天 共著 1976. PP. 254-258.)과 ‘교리사를 위한 시론’(동학사상 전개의 제 문제; 김용천. 2004.)’중, 제 1 장. '인간과 종교(PP. 56-70.)'를 종합하여 재정리한 글이다.
종교기원에서 살펴본다면 종교가 모든 학문과 대립하여 존재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포용하여 그것들을 혁신하고 개조하는 것이 종교였다. 현대의 모든 종교가 이러한 일들을 계속하고 있다. 종교는 인간의 영적존재의 가장 깊은 근원에 접촉하며 인간의 사상을 지배하며 인간의 감정을 자극하고 인간의 행위를 지배 조절하며 인간생활의 모순으로부터 건져서 해방시킨다. 이와 같은 종교에 대한 개념규정은 입장에 따라 다르게 하고 있다. / 이 글은 각종 종교학과 종교사와 비교종교학의 이론서들을 바탕으로, 천도교의 종교적 입장을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부분을 발췌하여 필자의 생각을 담아 재정리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종교를 논할 때에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몇 가지의 특성적인 측면에서 정의를 내리기도 한다.
첫째로, 인간의 감정적 입장에서 맥 타가르트(Mc Taggart 英)는 ‘인간과 우주 전체 사이에 조화가 있다고 하는 신념에 기초를 둔 감정을 종교라 한다’고 했고, 독일의 철학자인 플라이데러(Pfleiderer)는 ‘종교는 신앙의 끈으로 인간을 신에 결합시키는 것’이라 했고, 멘지(Menzies 佛)는 ‘초월적 영역을 찬양하고 예배하는 것’이라 했고, 틸레(Tiele 和)는 ‘무엇이든지 자기이외의 것에서 자기보다 우월한 존재에 대해여 존경하며 자기는 그 지배 밑에 있는 줄 믿고 그 존재를 접촉하여 갈망하는데서 성립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종교의 현상을 정밀하게 분석하면 감사, 감격에 넘치는 심정에 도달한다. 이와 같이 종교의 본질이 동경과 감사에 있기 때문에 종교인의 입에서는 찬송이 끝이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둘째로 이지적(理智的) 입장에선 레빌(Revill 佛)은 ‘종교란 것은 인간이 신비한 정신을 세계전체와 자기의 지배자로 인정하고 자기가 그것에 합치(合致)하고자 하는데서 생긴 인간의 규범(規範)’이라고 했으며, 라드(Ladd 美)에 의하면 ‘종교란 역사적 심리적 사실로 보면 형이상학적이며, 언제든지 실재(實在)에 대한 이지적 원리를 찾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 곧 실재의 세계와 인간의 경험을 결합시켜 가지고 세계와 인간의 모든 사실을 설명하려는 것이다.’ 라 했으며 문스테르베르히(Munsterberg 獨)는 ‘종교와 철학은 같은 문제를 다루는 것으로 둘 다 같이 영원한 가치의 세계를 절대적으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철학은 경험을 예상하는데 까지 올라가지마는 종교는 경험을 초월한다. 이렇게 철학은 경험의 세계를 밑받침해 주는 하층건물이요 종교는 경험위에 건축한 상층건물이라 할 수 있기 때문에 종교는 인격을 초월한 의식을 통하여 되는 지각형식(知覺形式)이다.’ 라 했고 이에 대하여 하르트만(E, Hartmann 獨)은 ‘인간이 자기감정에 영향을 줄 수 있는 형이상학적 개념을 갖고 있다고 한다면 이것이 곧 종교의 신앙이며 어떤 사람이든지 자기의 종교적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형이상학적 관념을 요구한다.’고 보았으며, 맥스 뮬러(Max Muller 英)는 ‘종교란 무한한 존재를 지각하는 것으로 이 무한의 지각은 직접적으로 인간의 덕성을 감화시킬 수 있으므로 종교는 인간의 도덕적 품성을 바로 잡아 줄 수 있는 표현으로서 무한을 지각하는 곳에 나타난다. 우리가 만일 조용히 앉아 귀 기우려 잘 듣는다면 모든 종교의 이면에서는 심령이 무엇을 사모하느라고 헐덕거리는 숨소리를 들을 수 있다. 또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느라고 애를 쓰는 탄식소리와 무한자를 쳐다보고 사랑하는 속삭임이 들려 올 것이라 하여 무한자인 신과 인간의 따사한 관계를 말하고 있다.
셋째로 의지적인 입장에선 프레이저(Frazer 英)는 ‘종교는 자연의 가는 길과 인간이 걷는 길을 다 같이 지배하고 섭리(攝理)하는 것이라고 믿는 초인간적 존재와 화친(和親)하고 서로 교제할 수 있게 한다.’고 했고 라이트(Wrigth 英)는 ‘사회적 인정을 받는 가치의 보존을 확보하려는 노력을 종교.’라 했으며, 케어드(E. Caird 스코트랜드)는 ‘종교는 우주에 대한 인간의 구경적(究境的) 태도의 표현이며 모든 사물에 대한 인간의 의식전체의 종합이다. 다시 말하면 종교란 것은 세계에 대한 통일의 원리로서의 신의 능력에 얼마라도 적응하는 형식으로 의식하는 것이다. 실상은 우리 의식의 구성요소로써나 혹은 예상으로써 세계에 대한 통일의 원리가 존재한다고 신앙하는 것이 곧 인간이 종교적인 유일의 이유가 된다. 라고 했다. 제임스(W. James 英)는 ‘종교는 개인이 초인간적인 존재와 깊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에 거기에 대한 감정과 행위에 대한 경험이라고 하고 종교생활을 광의(廣義)의 입장에서 살펴보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신령한 질서가 있다고 하는 신앙과 인간행위의 최선은 자기를 그 질서에 조화시키는 것이라는 신념에서 종교생활이 형성된다. 이 신앙과 이 신념이 곧 인간의 종교적 태도.’라고 했다.
넷째의 경향으로, 이상에서 살펴본 지(知). 정(情). 의(意)의 입장과는 달리 본래 지. 정. 의란 인간을 이해할 때 분리하여서는 살필 수 없다는 입장에서 인격에 중심을 두고 종교를 정의한 하나의 경향이 있다. 이러한 경향의 학자들은 인간의 생활, 그 자체가 인격이라는데 그 근거를 두고 있다. 혹킹(Hocking 美)은 ‘종교란 이상보다는 높고 깊은 곳에서 발생한 것이요 지적인 것보다, 도덕적인 것보다 더 높은 것이요 구경적(究境的)인데 넓게 본 감정에서 일이라 할 수 있으나 능히 모든 행동을 좌우하는 의지력이 첨가되어 있다.’고 했으며, 칼빈(J. Calvin 佛)은, ‘종교는 인간의 신성한 감상으로 신을 신뢰하는데 경외심(敬畏心)과 연결한 것이다. 이것은 신에게 경배(敬拜)하고자 하는 심정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요, 공인된 정당한 예배까지 포함한 것.’이라고 했다. 한 편 파머(Farmer 美)는 ‘종교는 구극적 존재자의 개성에 대한 요구의 응답으로, 그 요구에는 네 가지 요건이 포함되어 있는데
첫째는 신의 무조건 요구에 대한 인식이며,
둘째는 그 요구 속에는 개인의 이익과 행복이 포함되어 있다는 인식이고,
셋째는 신의 절대적 요구와 구현으로써 인간을 만나보고 자신을 깨닫는 것이며,
넷째는 신에게 대한 인간의 숭경심(崇敬心)과 공포심의 반응을 말하는 것으로 이것은 신이 우리에게 양심으로 선악을 분간하며 순종해야 된다는 생각을 주었으며 또 순종함으로써 행복을 얻을 수 있으며 그 명령을 순종함과 구원을 굳게 믿음으로써 이간의 최상의 목적이 달성된다고 했다. 이로써 인간은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신을 공경함을 의미한다.’고 하고 있다.
이상에서 종교를 본질적인 측면에서 관찰하고 설명한 것을 두루 살펴보았다. 이와 같이 열거한 모든 정의는 얼른 어떤 것이 종교의 올바른 정의인지 판단하기 어려운 것은 종교가 여러 가지 측면을 갖고 있기 때문이어서 종교의 정의는 무용한 것이며 불가능한 일이라는 웹(Webb)교수의 부정적인 견해에 수긍이 가기도 한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종교정의는 종교와 비종교, 좀 더 넓게 말한다면 종교적인 것과 비종교적인 것을 구분하고 확실케 하는 데는 필요한 것임엔 틀림없다 하겠다. 이와 같이 종교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현상과 내적요소를 통한 종교에 대한 정의가 통일될 수 없는 복잡한 측면을 종교는 갖고 있다. 그러나 종교는 인간의 자기보존이란 필연적인 요구에 의하여 출발된 것이고, 그것이 궁국적인 목표이기 때문에 이것을 기준으로 하여 판단해야 한다. 만약 종교의 본질이 인간의 심성을 벗어나 있다면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할 것이다.
종교가 모든 학문 또는 사회발전과 인류사의 전진에 따라 그 내용도 변질되어 가고 있는데 그것은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에임즈(E. S. Ames)가 말했듯이 ,종교란 최고가치의 보존과 동시에 최고사회가치에 대한 의식으로서의 사회 경험을 떠나 종교적 정서를 유지하려는 사람은 그 떠난 만큼 비종교적이라 할 수 있다. 이와는 반대로 시대적 사회운동에 몰입하는 사람은 그만큼 진정한 의미에서 종교적이라 할 수 있다.’고 했다. 이것은 한 종교가 주체의 장(主體의 場)으로서, 그 종교가 존립(存立)하고 있는 사회와 국가가 객체의 장(客體의 場)으로 관계를 맺고 있고, 어떤 형식이든 관계를 맺어야 하는데 그 관계는 원만하고 조화로워야 한다. 에릭 프롬(E .Fromm)은 진정한 종교란 ‘개인에게 살길을 제시해주며 헌신의 대상을 부여해주는 사상과 행동의 체계로서 한 사람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이 단체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을 말한다.’고 한 것은, 주체와 객체의 관계가 매우 원만하고 조화로운 관계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매우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만약 한 종교가 주체의 장으로서 객체의 장인 사회와 국가와의 합목적인 공동의 목표를 향하여 매진하지 못한다면 그 종교는 객체로부터 외면당하거나 사라지게 될 것이다. 이러한 종교의 역할과 기능을 설명해주는 견해들이 있다.
다니엘 지 톰프손(Daniel G. Thompson)은 더 나아가 종교는, ‘자연의 질서와 요청된 초자연자 사이에 있다고 보는 관계에서 일어나는 인간정서의 집합이라고 단정하고 있어, 결정적으로 신과 인간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하기 위한 의식이 종교란 것’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다. 이러한 경향에서 막스·웨버(Max Weber)도 ‘신은 인간에 의해 요청된 것’이라 하여 과거의 신과 인간과의 종속적인 관계를 부정하였다. 그러므로 인간이 신에 대한 충성, 경배로 돌아간다는 말은 무의미해졌다. 고 말함으로써 종교는 인간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신이 주체가 되어 인간을 종속화 하여 신의 의지라고 불리는 섭리대로 인간을 신의 노예가 된 객체로 전락시켜 신의 세계를 창조한다는 것은 진정한 종교가 아니라는 것이다.
종교가 신에 대한 경배란 핵심적인 요소가 있어 신관이란 개념이 정립되어 오고 있다. 종교학, 신학, 철학 등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신관에 대한 용어들은 거의 통일되어 있지만 신관에 대한 개념정의는 조금씩 다른 입장을 밝히고 있고, 이런 정의들은 서양의 학문에서 출발되었고 정의되었기 때문에 기독교적인 사상이 깔려 있다고 보는 것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신관에는 유신론에서 유일신론, 이신론, 다신론, 범신론, 범재신론, 그리고 무신론으로 나누어 신관을 정리하고 있다. 위의 신론의 정의를 알아보기 위하여 철학대사전을 바탕으로 관련된 종교학, 신학, 철학 등의 서적과 인터넷의 통합지식을 종합하여 이해하기 쉽도록 재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有神論(theism, Theismus)이란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으니 오늘날에는 좁은 의미로, 이 세계의 존재의 原因이라 하면서도 이 세상과는 아무런 관계없이 세계 밖에 초월하여 있는 비인격적인 존재라고 생각하는 理神論과 반대로 세계를 창조하였을 뿐만 아니라 영원히 세계를 지배하는 인격적인 신을 주장하는 입장을 말한다. 또 셋P에 내재하는 신 즉 자연이라고 보는 汎神論에 반하여 변하고 生滅하는 세계를 초월한 초자연적인 존재가 신이라는 것을 주장한다. 實在의 窮極의 근거는 인식할 수 없다는 불가지론(不可知論; agnosticism, Agnosticismus; 사물의 본질이나 실재의 참모습은 인식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우리들의 경험을 초월하는 모든 문제를 거부하려는 입장.)에 반대하여 계시에 의한 신의 존재를 체험을 통해야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다 같이 신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원시적인 종교와 같이 많은 신들의 존재를 인정하는 多神論(polytheism), 과 많은 신들 가운데 유일한 신을 최고신이라고 하여 숭배하는 單一神論(henotheism)이 있으며, 그것이 순수하게 발달한 것이 一神論(monotheism)이며, 그 대표적인 것이 기독교의 신이다. / 哲學大事典과 其他 資料의 統合 要約.
理神論(deism, Deismus)은 17-8세기에 걸쳐 주로 영국의 자유사상가와 과학자들에 의하여 제창된 뒤에, 프랑스, 독일의 계몽사상을 강하게 지배한 합리주의적 내지 자연주의적인 유신론을 광범위하게 나타낸 역사적 개념으로 원래는 기독교를 근대 과학적 합리성과 조화시켜 그의 반이성적 신비적인 요소를 제거함으로써 반종교적인 세속주의에 대항하려는 호교적(護敎的) 목적에서 출발되었다. 그러나 역사적인 계시, 교리 등을 제 2의 적으로 보기 때문에 도리어 기독교 교회와 대립하다가 전통적의 교권의 비판자가 되었다. 그 후 입장에 따라 비판의 내용이 다르게 되었으나 이신론을 주장해 온 사람들은 신의 존재증명에 관하여 목적론적 또는 자연 신학론적인 증명의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교회적 권위의 기초인 계시의 유일성이 원리상으로 부정되어 유태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의 계시종교(啓示宗敎)는 역사적으로 상대적인 개념이 되고 권리상의 평등한 것이 되었다. 이러한 태도는 복음서나 傳承의 자유비판 또는 종교현상의 심리학적 사회학적, 역사학적인 대상으로 취급되게 되는 단서를 제공했고 휴움(D Hume)의 실증주의에도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 / 哲學大事典과 其他 資料의 統合 要約.
汎神論(pandeism, Pantheismus)과 汎心論(panpsychism, Panpsychismus)은 유신론처럼 신과 자연이 질적(質的)으로 다른 것으로 보지 않고 자연의 모든 것이 신이라 하고 그 속에서의 대립을 인정하지 않는다. 종교가 품고 있는 신비적인 경향을 이론화 하려할 때에 범신론의 입장을 취하는 것이며 자연이나 세계를 보편적인 신이라는 원리로서 통일하려는 그리스 사상이나 불교와 같은 형태와 이와는 달리 모든 것이 통하는 것이 신이라 하고 자아와 신의 일치를 주장하는 베에다(Veda)나 브라흐만(Brahman)의 종교와 같은 두 가지의 형태가 있다. 범신론은, 한 쪽에서는 일체의 모든 것에 신성(神聖)이 있어 구별이 없다는 낙관적인 태도를 취하고, 다른 한 쪽에서는 일체의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를 좋다고 하여 도덕적인 노력이 필요하지 않다고 하는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모든 것이 신이라면 많음(多)과의 차별이 부정되어 무세계론(無世界論)이 되며 선악진위(善惡眞僞)의 구별이 없어지고 가치의 실현을 지향하는 인격의 자유로운 행동도 무의미하게 되나 주로 인간의 내면적 신비적 생활을 강조하여 스피노자(B de Spinoza), 괴에테(J W v Goethe), 셀링(F W J Schelling) 등의 관념론적 사상에 큰 영향을 주었다. 범심론(汎心論)은 범신론(汎神論)이 만유에는 신이 있다고 주장하는 데 반하여 신을 대신하여 마음이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라이프니쯔(G W Leibniz)가 단자론(單子論)에서 말하고 있는, 정신적 실체(實體)인 모나드(monade)는 명암(明暗)의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모두 표상작용(表象作用)을 가지고 각자의 시점(視點)에서 우주를 영사(映寫)하는 것이다. 라고 보는 견해와 같은 것이다. / 哲學大事典과 其他 資料의 統合 要約.
註 03; 單子論(monadology, Monadenlehre) - 라이프니쯔(G W Leibniz)가 지은 책 이름이기도 하고, 그의 실체론(實體論) 또는 형이상학설 전체를 말하기도 한다. 이 책에서 설명하고 있는, 단자란 만물의 실재성(實在性)을 띠는 구성요소로서 불가분의 단순실체(單純實體)이나 원자(原子)와는 달리 비물질적(非物質的) 정신적인 본성을 가지며 표상(表象)과 욕구로써 이루어져 있다. 또한 단자는 생물의 통일성, 자기동일성의 원리 및 모든 활동력의 근원이다. 이에 대하여 물체의 모양, 크기 및 운동과 같은 연장적 성질(延長的性質) 그 자체는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자연계는 모든 곳이 있어서 단자로서의 통일성과 작용력을 갖춘 유기체로 채워져 있으며 단자는 외부와 교섭하는 창을 가지고 있지 않아 서로 작용하는 법이 없고 그 일체의 변화는 자발적, 독립적으로 자기 안에서 생기며, 현재는 과거의 흔적을 갖고 미래의 징후(徵候)를 배태(胚胎)하고 있다고 했다. 또한 각 단자는 ‘산 거울’로서 각각의 시점에서 우주전체를 표현 혹은 표출(表出)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는 마치 함수(函數)에 있어서와 같이 항상 정확한 일치대응(一致對應)의 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은 바로 신에 의하여 세워진 예정조화(豫定調化)임에 틀림없다고 판단하고 있다. 모든 단자는 자연적으로 생멸하는 일이 없이 우주와 더불어 존속한다. 또한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무한한 술어(述語)를 내포한 개체적 주어(個體的主語)로서 서로 내용적으로 다르며 똑 같은 두 개가 존재하지 않는다(不可識別同一의 原則) 그러나 최고의 단자인 神으로부터 천사, 인간, 동물, 식물을 거쳐 단순한 물질로 간주되는 최하위의 단자에 이르기 까지 모두가 연속적인 한 계열을 이루고 있다.(連續律) 인간은 이성적 정신으로서의 자기를 의식할 수가 있고, 영원적 진리의 인식과 도덕적 성질을 구비하고 있다. 단자 사이에 존재하는 예정조화의 관계는, 정신과 물체 또는 신체와의 사이 또 도덕적 세계와 자연적 세계와의 사이에서도 불 수 있다. 그리하여 우주 전체가 무한한 다양성과 범통적(汎通的)인 조화적 질서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는 것이다. 이 세계는 최고의 지혜와 선의의 권력을 구비한 신에 의하여 가능적 세계에 있어서 가장 완전한 것으로서의 창조되었고(最善觀), 일체의 사상(事象)에는 반드시 충분한 이유가 존재하는 것이다.(理由律)라고 강조하고 있다. / 哲學大事典과 其他 資料의 統合 要約.
汎在神論이란 무엇인가를 알기 위하여 우선 이 용어를 ‘최수운의 신개념’이란 글에 도입한 김경재가 설명하고 있는 汎在神論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汎在神論은 C, K, W, E, T 다섯 가지 요소를 모두 내포한 生存 자체이다. 神은 自意識的인 생존으로서 세계를 알고 그러면서도 세계 속에 內在하며, 영원무궁한 존재 자체이면서도 神的 相對性을 갖고 있는 시간적 생존이다. 이것의 상징은 정점을 지향하는 원추형의 입체이며 인간과 神과의 관계는 順理와 順命에 서서 神과 共役的이며 同役的인 창조 행위로 참여하는 관계를 띈다. 크게 보아서 汎在神論은 전통적인 有神論과 汎神論이 창조적으로 종합 지향된 형태이다. 西歐의 宗敎, 哲學史에서 슈라이엘맛하(1768-1834)와 쉘링(1775-1854)에 이르러 대체로 인간의 보편적인 神意識은 汎在神論的 경향성을 띄기 시작했는데 한국의 종교, 철학사에서 水雲(1824-1864)의 위치가 그와 같으며 시간적으로 동시대이다.’(P. 47.)라고 평가한 것은, 수운의 신관을 범재신관으로 인식하는 근거가 된 범재신론의 특징적 요소를 설명한 것으로 화이트헤드의 영향을 받은 미국의 정신의학자인 ‘하트손이 이 함수관계를 만들어 신관의 특징을 설명한 데서 출발했다.’고 했지만 이 용어와 도입의 유래는 사실과 다르다.(PP. 46-48.)
범재신론이란 용어는, 독일 관념철학자 Karl C. F. 크라우스(1781-1832)가 전통적인 유신론이나 범신론(pantheism)과는 다른 자신의 신론, 즉 “모든 것(pan)이 신(theos) 안에 존재한다(is)”는 이해를 위해서, 이런 용어(panentheism,; 汎在神論,)를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20세기 중반 이후 종교철학에서 범재신론적 사유체계를 보편화시킨 사상가로 여겨지는, 찰스 하트숀(Charles Hartshorne; 1897- )에 따르면, 범재신론은 그보다는 훨씬 오래된 종교사상으로. 이미 이집트의 이크나톤, 중국의 노자, 그리스의 플라톤, 인도의 힌두교 경전, 유대-기독교 전통의 성경에 등장했다고 한다. 하트숀은 자신의 저서인 “Philosophers Speak of God, 1953”에서 종교철학 사상사를 개관하고, 범재신론적 사유구조의 성격을 분간하는 기준을 제시한다. 여기에 따르면, 범재신론이란 다음과 같은 함수관계를 만들어, 다섯 가지의 속성을 지닌 신을 옹호하는 자신의 입장인 신관의 특징을 설명하고 있다.
C) 의식성(conscious, self-aware), ; 神은 自意識的이다.
K) 세계를 인지(knowing the world, omniscient), ; 神은 세계를 알고 있다.
W) 세계를 포괄(world-inclusive). ; 神은 세계 속에 內在해 있다.
E) 영원성(eternal), ; 神은 영원하다.
T) 시간성(temporal), ; 神은 시간적이다
註 04; 汎在神論의 보다 구체적인 설명은, 김경재의 ‘최수운의 신개념’이란 글과 신관에 관련된 다른 몇 편의 글들을 재해석하고 있는 P. .에서 하고 있으므로 그 글을 통하여 보다 심도 깊은 이해를 하시기 바람.
無神論(atheism, Atheismus)은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철학적, 종교적 입장에서의 주장으로 어떠한 신도 인정하지 않는 철저한 무신론과 설혹 신이 있다하여도 인간으로서는 인식할 수 없다는 불가지론(不可知論)적인 무신론으로 구분하고 있다. 무신론은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논의되었던 명제로 데모크리토스(Demokritos)의 원자론적 유물론이 전자에 속하고, 소피스트(Sophist)는 후자에 속한다. 일반적으로 그리스나 로마에서는 국가가 공인하는 신을 부인하는 자들을 ‘신이 없는 사람(atheos)’이라 하였는데, 이런 의미에서 소크라테스(Sokrates)도 무신론자로 비난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아낙사고라스(Anaxagoras)는 태양을 물질적인 것이라 말하였기 때문에 무신론자의 낙인이 찍히었고, 피타고라스(Pythagoras)는 우리는 신의 존재에 대해서 확실한 것을 알지 못한다고 하여 회의론적인 연설을 한 죄로 아테네에서 추방을 당했다고 한다. 근대 자연과학의 발달은 신학적인 세계관을 한층 더 흔들어 놓아 새로 나타난 범신론과 이신론은 기독교적인 인격신을 부정하는 것이라 하여 무신론이라 지칭했다. 이러한 사조는 18세기 프랑스의 유물론적 계몽사상가에 의해서 신은 인간의 무지와 권력자의 기만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맹렬하게 비판하는데 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한편 독일에서는 헤겔철학이 신을 이데아(Idea)까지 승화시켰으나 포이엘바하(P.J. A. v. Feuerbach)는 이 관념적인 구축(構築)을 유물론적 자연주의적인 인간학의 입장에서비판하고 기독교도 비판했다.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근대사상의 결합을 기독교적인 사고의 퇴폐로 인정하고 ‘신의 죽음’을 확인하는 니힐니즘(nihilism)이 확대되어 현대의 무신론적 실존주의(atheistic existentialism, atheistiacher Existentialismus)로 발전하고 있다. 무신론적 실존주의자의 대표적인 인물은 하이덱커(M. Heidegger)와 싸르뜨르(J. P. Sartre)이다. 하이덱커의 존재론에는 신이 등장하지 않아 무신론적이라 말하고 있고, 싸르뜨르는 적어도 실존이 본질에 앞서는 존재 즉 어떤 개념에 의해서도 미리 규정되어지지 않고 실존하는 존재가 있으며 그 존재가 바로 ‘인간’ 이라고 말했다. 그러함으로 인간은 자유로우며 스스로 책임을 진다고 한다. 이들은 모두 인간을 초월로서 파악하지만 지평적 초월(세계에의 초월)만을 인정할 뿐, 수직적 초월(신에의 초월)은 인정하지 않는다. / 哲學大事典과 其他 資料의 統合 要約.
이상에서 우리는 광범위하게 종교의 본질적인 측면에서 여러 입장과 관점을, 그리고 어원적인 입장에서의 정의와 신관에 대한 정의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여기에서 공통된 점을 발견할 수가 있다면, 종교란 어휘들 속에서 기독교적인 특성을 제외한다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고 본다.
첫째로, 양심적인 것 또는 양심적인 정확성이고,
둘째로, 존경과 신성(神性)이고,
셋째로, 민족신(民族神)에 대하여 제사하는 의식전체 등이 포함되어 있다 하겠으나 이 어휘들 속에 포함되어 있는 뜻이 반드시 종교의 올바른 정의라고는 할 수 없으며 다만 종교의 기원적 입장에서 볼 때 그러한 초기적 양상을 살펴볼 수 있을 따름이고, 자세히 살펴본다면 시대적 상황에 따라 그 내용이 변천되었고 변천되어가고 있음을 간파할 수 있다.
/ 종교(宗敎)란 무엇인가 (上).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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