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4월11일 임시정부수립일'에 생각하는 건국절 논란
학계 일반적 시각은 '부정적'...1980년대부터 '임정 고평가'
좌편향 연구·교육 비판한 게 '대한민국 및 이승만 정통론'
1919년 9월 17일 의정원(=국회) 기념사진.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이란 명시적 표현이 1987년 개헌 때 처음 헌법 전문에 처음 포함됐다. ‘3·1운동’은 줄곧 강조돼 왔으나 ‘임정의 법통’은 없었다. ‘유엔 승인의 유일한 합법 정부’라는 점이 더 강조됐다. 임정에 대한 ‘고평가’는 1980년대부터다. 대한민국 현대사를 강력하게 비판하는 흐름, 이에 위협을 느낀 흐름, 정반대의 입장이었으나 선택은 하나 즉 ‘상하이 임정과 김구’였다. 1990년부터 정부 주관 4.11 기념식이 열리게 된 배경이다. 좌익 아닌 민족주의 세력을 찾다 보니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헌법전문의 기술처럼 대한민국은 임시정부를 계승한 것일까? 그러나 1919년 다양한 세력이 총망라된 출범 당시의 임정, 1923년 독립운동가들이 대거 떠난 이후, 윤봉길·이봉창 등의 의열(義烈)투쟁 시기, 태평양전쟁기의 임정을 같은 조직이라 볼 수 없다는 게 학계의 일반적 지적이다. 김구는 대한민국 건국을 반대했다. "현재 국회의 형태로선 대한민국임시정부 법통을 계승할 아무런 조건도 없다"고 답한 바 있다(48년 6월8일자 경향신문).
제헌 헌법 전문에 ‘임시정부 계승’이 명시되지 않은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제헌국회에서 이승만은 ‘한성정부’ 계승론을 주장한다. 3·1운동의 결과 서울에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 곧 자신을 집정관총재로 선출한 한성정부의 법통을 계승하는 정부로 본 것이다. 실제 제헌헌법 전문엔 ‘대한민국을 건립해서 선포한’ 독립정신을 계승한다고 밝혔다. 즉 ‘3·1 독립정신 계승론’이다.
임시정부 인식은 박정희 정부 때 달라진다. ‘3·1 독립정신 계승론’이 ‘임정 계승론’으로 바뀐다.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계승"한다는 제3공화국 헌법 전문은 기본적으로 현행 헌법 전문에 이어진다. 박정희 정부는 임시정부 중심의 독립운동을 높이 평가했다. 관련 독립운동가의 서훈(敍勳)이 대대적으로 이뤄진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독립운동가들 대부분이다. 1960년대 말 이후 박정희 정부의 ‘민족문화 진흥’ ‘민족정신 진작’ 사업을 통해 ‘임정’은 한국사의 정통 지위를 얻는다. ‘임정 정통론’은 1980년대에 ‘법통론’으로 강화돼, 1987년 10월 공포된 개정 헌법 전문에 완전히 자리잡았다.
1987년 헌법개정의 핵심은 대통령직선제 및 국회 국정감사제 부활, 헌법재판소 설치와 국민기본권 보장 강화 등이었는데, 충분한 검토 없이 ‘3·1 독립정신 계승론’이 ‘임정 법통론’으로 바뀐 것이다. 이를 전면 부정하고 나선 게 1980년대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북한 주체사상 영향을 받은 젊은 연구자들과 소장파 교수들의 ‘민중사학’이었다.
그들은 "3·1운동 ‘민족대표’의 외세의존적 타협적 성격을 비판"하며, "노동자 계급을 선두로 한 식민지 민중들이 민족해방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시작했다"고 역설했다. 조선공산당, 나아가 배후의 코민테른의 민족해방운동론의 되풀이에 불과했다. 소련·동구권 몰락으로 이 논리가 힘을 잃자 매달린 게 ‘민족주의’(실은 ‘반일종족주의’)였다. 항일테러 활동, 무장투쟁, 적색농민노동운동 등이 찬양되고, 실력양성운동 외교독립운동은 폄훼했다.
2000년대에 들어 한국사 연구 및 교육의 좌편향성을 비판하며 나선 게 ‘대한민국 및 이승만 정통론’이다(이영훈 서울대수, 낙성대연구소). 이미 ‘김구 숭앙’은 한층 본격화되는 중이었다. 정부 홍보물 전시물에 김구의 임시정부 사진이 사용되는가 하면, 민족대표 33인과 같은 우파 민족주의자에 대한 폄훼는 더 심해졌다. "33인이 우리나라 최초 룸살롱인 태화관에 가 낮술을 먹으며 기미독립 선언을 외쳤다" "그 집(태화관) 마담과 (독립선언을 주도한) 손병희랑 사귀었다." 심지어 ‘친일파가 만든 독립영웅’이라며 유관순을 공격하는 일까지 벌어진다(2017년 수능 한국사 강사 설민석).
그 종착점이 문 정부의 ‘1919년 건국론’이었다. 그런데 슬그머니 입장을 바꾸어 ‘건국 100주년’ 대신, ‘지난 100년’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북한의 노여움’ 때문이다. ‘1919년 건국론’은 북한의 존재를 설명할 수 없다. 남한은 제헌 이래 3·1 독립정신과 임시정부 계승을 주장해왔으니 ‘1948년 재건됐다’ 하면 되지만, 북한에 대해선 설명이 불가능하다.
문 정부가 ‘3·1운동 100주년 공동기념’을 북한에 제안했다가 거절당하고 황급히 ‘건국’ 표현도 4월 11일 임시공휴일 지정도 거둬들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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