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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과
영적 성장을 위한 비결-예수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제자들의 가슴을 가득 채우고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는가? 누가 높은가의 문제로 다투던 제자들의 신앙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던 것은 무엇이었는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돌아가심으로 실망한 제자들을 완전히 달라지도록 만드셨던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초대교회 모든 부흥을 일으키도록 마음의 불을 붙이셨던 분은 누구인가?
바로 예수님이시다.
예루살렘 성전 미문에 앉아있는 앉은뱅이가 주목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행 3:4)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행 3:5)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앉은뱅이가 주목한 것은 돈과 사람이었다. 돈을 얻기위해 사람을 바라보는 것이다. 앉은뱅이는 베드로가 우리를 보라하니까 베드로를 주목하였고 베드로를 바라보면서 돈을 얼마나 얻을까 쳐다본 것이다.
베드로가 앉은뱅이에게 주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는가?
(행 3:5-6) 『[5]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6]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베드로는 자신에게 있는 것을 주겠다고 말한다. 그런데 앉은뱅이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 베드로에게 있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셨다. 대단한 신앙이다. 베드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집중되어 있었고 예수님께 사로잡혀 있었고 그의 온 마음을 채우고 있었던 것은 예수님이셨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렇게 신앙하고 있는지 자문해보아야 한다. 우리 마음에 베드로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가?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가? 베드로가 앉은뱅이에게 주고싶었던 것은 금과 은이 아니라 곧 자기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었던 예수이셨다.
앉은뱅이를 일으킨 힘은 베드로 개인의 권능과 경건이 아니었다.
(행 3:12)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사람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주목하고 있었지만 베드로와 요한은 자신들을 주목하지 말라고 말한다.
베드로는 이스라엘 백성들로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주목하게 만들었다. 앉은뱅이를 건강하게 하신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소개하고 있다.
(행 4:9-10) 『[9] 만일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10]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처럼 베드로는 예수님께 주목하고 있었고 예수님이 그의 온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던 것이다. 오직 예수님이었다. 모든 영광도 예수님께 돌렸고 모든 능력도 예수님께서 하신 능력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앉은뱅이가 고침을 받은 후 어떻게 변화되었는가?
(행 3:7-8) 『[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예수님 때문에 나음을 입은 앉은뱅이는 발과 발목이 힘을 얻고 걸으며 뛰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즐거워서 하나님을 찬미하게된 것이다. 예수님이 마음에 들어갈 때 발과 발목이 힘을 얻고 걷기도하고 뛰기도하고 찬양할 것이다. 예수님이 들어갈 때 영적인 소성함을 얻게되고 변화가 일어나게된다는 것이다.
오늘날 영적인 앉은뱅이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분은 바로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이 없는 결과는 영적인 앉은뱅이일 것이다. 예수님은 생명의 양식이기에 먹지않아서 힘이 없어 앉아있는 이들에게 일어설 수 있는 힘이 되는 분이시다. 오래동안 먹지않으면 힘은 약해지고 나중에는 걸어갈 힘도 없어 앉아있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음식을 먹게되면 힘이 나게되고 걸을 수 있고 뛸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없어서 힘이 없는 앉은뱅이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는가? 예수님은 우리의 힘이요 우리의 소망이시다. 앉은뱅이도 일어나게하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찾아야할 분은 바로 예수님이시다. 예수님때문에 영적인 소생함을 되찾고 일어서서 걷기도하고 뛰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게될 것이다.
절망 중에 있는가? 예수님을 찾아야할 것이다. 실망과 낙심가운데 있는가? 예수님을 찾아야 한다. 우리가 바라보아야할 것은 금과 은이 아니요 예수님이시며 우리가 바라보아야할 분은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이시다. 금과 은과 사람을 바라볼 때 우리에게 찾아오는 것은 좌절이요 절망이다. 금과 은, 사람을 바라보다 좌절가운데 있거나 낙심가운데 있다면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예수님을 바라볼 때 다시 일어설 힘을 얻게될 것이다. 그 힘없이 앉아만 있던 좌절의 시간이 비록 오래되었다할지라도 예수님을 바라볼 때 새힘을 얻고 영적인 소성함을 찾게될 것이다. 우리의 모든 소망은 바로 예수님이심을 기억해야 한다.
앉은뱅이가 어떻게 고침을 받을 수 있었을까?
“이 불행한 사람은 고침을 받고자 오랫동안 예수를 만나기를 소원하였다.”(행적, 57)
앉은뱅이가 고침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의 마음 속에 오랫동안 예수님을 만나기를 소원하였기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찾았을때에는 예수님께서 이미 돌아가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후이었다. 실망한 그를 위해 친구들이 날마다 성전 미문에 데려다 준 것이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베드로와 요한을 만나게 되었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때문에 고침을 받게된 것이다. 예수님을 직접 만나지는 않았지만 예수님을 믿는 믿음만으로도 고침을 받게된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만으로 소생함을 얻고 일어서게되었고 걷게되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전함으로인해 대제사장과 장로와 서기관들에게 핍박을 받게된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사랑에 사로잡힌 자들이었기에 그 어떤 핍박도 두렵지 않았었다. 왜 예수님의 제자들은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았을까?
(행 4:13,16,18) 『[13]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 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그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16]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꼬 저희로 인하여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18] 그들을 불러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는 이 말은 베드로와 요한으로하여금 예수님과 상관없는 생애를 살고 예수님과 거리를 두는 삶을 살라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을 깨달은 그들에게 예수님과 상관없이 살라는 협박이 통할까? 또한 예수님과 거리를 두며 살라는 것이 쉬울까? 이처럼 제자들은 예수님께 사로잡힌 삶을 산 것이다.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그들을 불러서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지도 말라고 경고한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그 협박과 경고에 대하여 두려워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사랑이 너무 크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 속에 있는 예수님에 대한 사랑에 비하면 그 핍박은 너무 작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행 5:29)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오히려 협박하는 그들을 향하여 하나님께만 순종하겠다고 증거한다. 그들은 예수님께 사로잡힌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마음에 예수님이 가득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협박이 그들의 마음을 바꿀 수 없었다.
예수님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의 생애는 어떤 생애일까?
고린도후서 5장 14절 말씀을 여러 번역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개정개역성경-(고후 5: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새번역성경-(고후 5: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휘어잡습니다. 우리가 확신하기로는,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으니, 모든 사람이 죽은 셈입니다.』
쉬운성경-(고후 5: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사로잡고 있습니다. 우리는 확신합니다.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으므로, 모든 사람이 죽은 것입니다.』
현대인성경-(고후 5:14)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으므로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 우리는 확신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강권하여 그 사랑에 휘어잡혀 살아가고, 그 사랑에 사로잡혀 살아가며, 그 사랑이 온 생애를 지배하게될 것이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중심은 바로 예수님이었다.
스데반도 죽을 줄 알면서도 예수님을 전함으로 죽게되었고 스데반의 죽음 이후 그리스도인들도 흩어져 핍박을 받으면서도 전했던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행 11:20)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들의 삶을 변화시켜주신 예수님의 사랑으로인해 예수님을 위해 살았고, 예수님을 닮아가며 예수님을 증거하는 예수행전을 산 성도들이다. 이제 마지막시대를 살아가는 남은 자손들의 신앙은 어떤 신앙이 되어야 하겠는가? 남은 자손의 삶 또한 예수님을 위해 살고 예수님을 닮아가며 예수님을 증거하는 예수행전이 되어야할 것이다. 우리들의 삶이 예수님의, 예수님에 의한, 예수님을 위한 예수님 행전이 되어야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무엇에 사로잡혀 사는 삶이었는가?
(행 17:2-3) 『[2]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3]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예수님을 만난 이후 예수님께 사로잡힌 삶을 살았고 만나는 사람들마다 예수님을 전하는 예수 행전의 삶을 살았었다.
(행 18:1,4,5) 『[1] 이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4]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 [5]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서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하니』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 사로잡히자 말씀에 사로잡힌 생애를 살게되었고, 말씀에 사로잡힌 생애를 살게되자 예수님을 증거하는 생애를 살게되었다.
초대교회 예수님의 제자들의 변화된 모습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들의 생각은 그리스도로 가득 찼고, 그분의 나라를 확장시키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 되었다. 마음과 품성에 있어서 그들은 주님과 같이 되었고, 사람들은 그들이 “그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행 4:13) 을 알았다.”(행적, 45)
“그들은 더이상 개인주의적 모임이나 조화되지 않고 다투는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었다. 그들의 희망은 더이상 세속적인 위대함에 고착되지 않았다. 그들은 “마음을 같이 하”고, “한마음과 한뜻이 되” 었다. ”(행적, 45)
예수행전의 삶을 사는 성도에게는 위와 같은 변화가 일어난다. 자신들이 스스로 변화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능력으로,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강권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에 사로잡힐 때에, 그 예수님의 사랑에 지배될 때에 이러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오늘도 우리에게 이 사랑이 우리 마음을 강권하기를 원하신다. 그 사랑에 사로잡히고 그 사랑에 지배받으므로 예수님을 드러내고 예수님을 증거하게될 것이다.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은 사람은 어떤 생애를 살겠는가?
(행 2:33)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나를 살려주신 은혜가 너무 크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죽으신 예수님의 사랑이 너무 크지 않는가? 광활한 우주에서 이 지구는 보이지도 않는 크기일 것이다. 그 지구에 살고있는 우리가 이 광활한 우주에서 얼마나 큰 존재인가? 그런데 나를 보석처럼 여기시고 나를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요 사랑인가? 이 십자가의 사랑을 깨달았다면 예수님을 높이는 생애를 살 것이다. 이 큰 우주에서 작은 미물에 불과한 나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시는 사랑이 얼마나 큰가? 그분의 사랑을 알지도 못한 우리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셨다는 것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고 얼마나 귀하게 여기셨다는 것인가? 이 예수님의 사랑이 너무나도 감사하지 않는가?
주님의 심장을 터지게한 것은 우리를 향한 사랑때문이다. 그 사랑이 너무 컸기에 그 사랑을 심장이 감당하지 못하고 파열된 것이다. 오 얼마나 크신 사랑인가? 이 감당못할 사랑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이 세상엔 그 사랑을 담을 그릇이 없고, 그 사랑을 기록할 단어가 없다. 그 큰 사랑을 내 작은 마음에 어찌 담을 수 있겠는가? 그 크신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내 마음에 담기에 내 마음은 너무나도 작다.
감당못할만큼 큰 바람이 불면 그 바람 속으로 지푸라기처럼 물건들이 날아가고 빨려들어가듯 예수님의 크신 사랑의 바람에 빨려들어갈 뿐이다. 예수님의 사랑에 우리는 반응할뿐이다. 우리의 작은 손, 작은 발로 헌신하지만 예수님의 큰 사랑에 비하면 조그마한 반응일 뿐이다.
그리스도인들의 마음 속에는 무엇으로 가득차 있어야 하겠는가?
(눅 1:1-2) 『[1]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2]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꾼 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행 1:1-2) 『[1]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2]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예수님의 행적을 본 많은 사람들 중에 그분에 대하여 기록하려고 붓을 들었던 사람들이 많았었다. 예수님께서 행하시고 가르치신 일들과 승천하시기까지의 모든 일을 기록하고자하는 목적이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예수님의 생애를 하나도 놓치지않고 따라가고 싶었기때문일 것이다. 예수님의 행적에 대하여 기록하고자했었던 자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잊지않고자 기록하였을 것이며 그 말씀들과 행적을 잊고싶지 않았기때문일 것이다. 그들을 사로잡았던 예수님께 사로잡힌 삶을 살고자 함이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의 행하신 일과 가르치신 말씀에 얼마나 사로잡혀 살아가고 있는가? 이제 우리들도 예수님의 생애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말씀을 내 마음판에 새기어 제자들이 그리하였던 것처럼 예수님께 사로잡힌 그리스도인이 되어야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분의 소유가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당신의 생명으로 그대를 사셨으므로 그대는 예수님의 소유이다. ”(가정, 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