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한 그릇[식일완(食一碗)]의 의미를 아는 것이 만사지(萬事知)
해월은 1892년 상주 왕실촌에서 이미 ‘밥이 한울이다’라는 ‘식즉천(食卽天)’을 강조한 적이 있었다. 따라서 1896년 음성 창곡에서 말한 ‘만사지(萬事知)는 식일완’은 해월이 이전에 강조한 ‘식즉천’의 확장이라고 할 수 있다. ‘만사지(萬事知)는 식일완(食一碗)’은 ‘만사를 안다는 것은 밥 한 그릇을 먹는 이치를 아는 데 있다’라고 풀이할 수 있다. 이는 해월이 평소에 제자들에게 가르쳤던 도는 높고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행하는 일상 속에 있다는 내용과 서로 통한다.
해월이 말한 밥 한 그릇이 만사지는 우선 밥 한 그릇이 만들어지는 데는 천지부모, 즉 한울님의 도움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우리가 자연적으로 생성된다고 생각하는 곡식은 한울님의 조화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해월을 보았다. 그래서 자연을 천지부모라고 했다. 사람이 부모의 보호 속에서 자라는 것이 마치 한울님의 품속에서 사는 것과 같으므로 천지부모의 은덕에 늘 감사하고 공경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해월은 강조했다. 다음으로 밥 한 그릇이 나에게 오기까지 수고한 모든 사람의 노고를 알고 감사해야 한다는 의미도 담겨있다고 생각된다. 구슬땀을 흘리며 쌀을 기른 농부에서부터 밥 한 그릇을 지어내는 가족의 고마움에 감사하는 마음 등등 내가 먹고 살아가는 데 도움을 준 무수히 많은 사람에 대해 감사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해월은 말하고 있다. 이렇게 한울님의 간섭과 사람들의 도움으로 지어지는 소중한 밥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공평하게 밥을 나누어 먹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나가야 한다는 해월의 평등사상도 담겨 있다.
▲ 이철수의 판화 <밥이 하늘입니다>(1987). 해월의 ‘만사지(萬事知)는 식일완(食一碗)’을 형상화했다. |
청주 산막, 상주 은척으로 이주
1896년 6월에 해월은 음성의 창곡을 떠나 청주군 청천면 산막리(淸州郡 靑川面 山幕里, 현 청주시 서원구 남이면 산막리)로 이사했다. 이때 청주에 사는 권병덕(權秉悳)과 신형모(申瀅模) 등이 새로 이사한 해월의 집을 찾아 가르침을 받았다. 권병덕은 당시 해월의 명을 받아 경상도 진주, 산청 집현산 홍지동, 남해(南海), 물직(勿直) 등 경상도 일대를 순회하면서 도인들의 상황 파악과 포덕 활동을 은밀하게 진행했다. 이후 권병덕은 해월의 명을 받고 삼남 일대를 순회하며 교인 규합에 힘썼다.
8월에 해월은 다시 경상도 상주군(尙州郡) 은척원(銀尺院)으로 이거(移居)했다. 해월이 상주 은척으로 갈 때 상주의 접주였던 황우원(黃祐元)이 주선한 것 같다. 해월이 은척원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호남도인(湖南道人) 손병규(孫秉奎), 홍계관(洪桂寬), 최익서(崔益瑞) 등이 찾아와 호남 지역에 동학도들이 다시 살아나고 있으니 포(包)를 설치하고자 한다고 의견을 말했다. 이에 해월은 동학혁명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관에서 동학에 대한 지목이 심한 상황에서 호남 지역에 다시 포를 만들면 또다시 어려움에 부닥칠 것을 염려해 “이 시기(時期)에 포(包)를 설(設)치하는 것은 자는 불을 다시 불러일으키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 한갓 인심(人心)을 어지럽게 할 뿐이라”고 타일러 후일을 기약하며 조용히 수도에 전념하기를 권했다.
해월이 상주 은척원에 있을 때 황해도 도인(道人) 방찬두(方燦斗)가 멀리서 찾아왔다. 방찬두는 황해도 송화군 출신의 동학접주로 1894년 10월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기포해 황해도 신천, 재령, 송화, 장연, 해주, 강령, 문화 등지에서 관군과 여러 차례 전투를 벌였다. 동학혁명에 참여했던 인물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해월의 소재지를 수소문한 끝에 경상도 상주 은척원까지 해월을 찾아왔다.
▲ 청주 산막리 전경. 현재 청주시 서원구 남이면에 속한 산막리에 해월은 1896년 6월 권병덕을 주선으로 이사와 8월까지 약 2개월간 은거했다. |
마음을 경계하라
1896년 12월에 해월은 ‘삼암(三菴)’에게 명(命)해 도인들의 마음을 경계하는 방법을 담은 수도법인 경심법(警心法)을 통문(通文)으로 각지의 도인들에게 보냈다. 글은 조금 길지만, 해월의 사상을 잘 담고 있어 전문을 싣는다.
내 마음을 공경치 않는 것은 천지를 공경치 않는 것이요, 내 마음이 편안치 않은 것은 천지가 편안치 않은 것이니라. 내 마음을 공경치 아니하고 내 마음을 편안치 못하게 하는 것은 천지부모(天地父母)에게 오래도록 순종치 않는 것이니, 이는 불효(不孝)한 일과 다름이 없느니라. 천지부모의 뜻을 거스르는 것은 불효가 이에서 더 큰 것이 없으니 경계하고 삼가라. 천지부모를 길이 모셔 잊지 않는 것을 깊은 물가에 이르듯이 하며 엷은 얼음을 밟는 듯이 하여, 지성으로 효도를 다 하고 극진히 공경을 다 하는 것은 사람의 자식 된 도리이니 극진(極盡)히 할 것을 빌고 또 비노라.
마음이 착하고 즐겁지 않으면 한울이 감응(感應)치 않고 마음이 항상 착하고 즐거워야 한울님이 언제나 감응(感應)하느니라. 그러므로 마음이 화(和)하면 기운이 화하고, 기운이 화(和)하면 집안이 화하고, 집안이 화(和)하면 천하만사(天下萬事)가 자연히 그 가운데 화(化)하여 이루어지나니, 임금으로부터 뭇 백성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다 수신(修身)으로써 근본으로 삼는다는 말도 이것을 이름이니라. 마음을 공경하고 마음을 길러 한울님을 기쁘게 하고 한울님을 즐겁게 하여 한가지로 대도(大道)를 이루도록 축원(祝願)하노라.
사람을 내고 도(道)를 냈으니 은혜(恩惠)가 이보다 큰 것이 없고, 사람에게 이 법(法)을 가르치게 하였으니 은혜(恩惠)가 이보다 중(重)함이 없는지라. 한울님의 덕과 스승님의 은혜[천덕사은(天德師恩)]를 잠시라도 모앙하는 데 해이해서는 안 될 것이니, 수심정기(守心正氣)를 하면 가까운 것이 천지(天地)보다 더 가까운 것이 없고, 산심상기(散心傷氣) 하면 먼 것이 천지(天地)보다 더 먼 것이 없느니라.
1. 개미도 정숙(整肅)한 거동이 있고 벌도 위(衛)를 모시는 도(道)가 있으니, 사람으로서 벌과 개미만 못할 수 있으랴. 먼저 규모(規模)를 정한 다음에야 도(道)가 바르게 제 길로 나아갈 것이니, 절대로 번거롭고 어지럽게 하지 말고 비밀과 엄숙으로 더욱 단속을 더 하여 공경으로 지기(至氣)를 받들어 한울님이 싫어하는 지경에 이르는 일이 없도록 할 것.
1. 공(公)이란 천하(天下)의 대공(大公)이요 사(私)란 개인(個人)의 편사(偏私)라. 공사지간에 군자와 소인이 있으니 모든 일에 임하여 지공무사(至公無私)로써 위주할 것,
1. 환난(患難)에 서로 구제하며 빈궁(貧窮)에 서로 도와주는 것은 우리 도(道)의 제일 급선무니 자비와 측은으로써 마음을 기르고 도(道)를 기를 것.
1. 연원(淵源)은 자재연원(自在淵源)이니 차례대로 연원을 상종하여 미치지 못하는 탄식이 없게 할 것.
1. 도(道)의 근본은 모두 팔절(八節) 두 편 가운데 있으니 팔절의 의미를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투득(透得)하여 그르치는 일이 없도록 할 것.
1. 우리 스승님의 도법(道法)을 떠나 털끝만치라도 어기는 일이 있으면 난법란도(亂法亂道)를 면치 못할 것이니 털끝만한 차이로 끝내 멀어지는 일이 없도록 할 것.
1. 포덕(布德)은 처음에 번거롭고 어지럽기 쉬우므로 이에 다시 거듭 말하노니 밖으로 엄숙하고 안으로 단정히 하여 지목과 혐의를 받게 하지 말 것.
해월은 동학혁명 이후 동학 교단의 종교적 위상을 높이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 동학혁명으로 인해 외부에서 동학 교단을 정치적 결사로 인식하게 됐고, 동학에 입도하는 사람들도 종교적인 측면보다 정치적인 측면을 우선하는 경향이 두드려졌다. 이에 해월은 동학의 본질인 종교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통문을 수시로 내려 보냈다. 위의 경심법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해월이 경심법을 통해 교도들에게 수련을 강조한 또 다른 이유는 동학도의 일부가 의병운동에 가담해 동학혁명의 항일 투쟁을 지속하는 경우가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동학혁명 이후 동학에 대한 지목이 심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동학도가 의병운동에 가담했다는 것이 알려지면 교단의 정비가 그만큼 힘들어지기 때문에 해월은 제자들에게 정치 운동에 가담하지 말고 수도에 힘쓰라는 내용의 통문을 보냈다.
상주 은척에는 상주동학교가 있는데 이는 이름만 동학을 썼을 뿐 동학교단과는 무관하다. <한국신흥종교총감>에 상주동학교는 수운의 제자였던 김시종이 경북 안동지방에서 남접접주라 칭하면서 1909년 동학교를 새로 세웠다고 한다. 이후 김낙춘을 거쳐 3대 김주희가 상주 은척면에 본부를 옮겨왔다고 한다. 김주희는 동학교의 명칭을 궁을도라고 했다고 전하는데 현재는 상주동학교 또는 은척동학교라 불린다. 상주동학교는 동학의 이름을 빌렸지만 동학과 천도교와는 관련이 없다. 다른 기록에 따르면 김주희는 동학혁명에 참여했던 상주대접주 김현영(金顯榮) 휘하의 김윤배의 아들로 알려져 있다.
▲ 천도교 상주교당. 해월을 상주 은척으로 은거하도록 주선했던 황우원의 후손이 지금까지 상주에서 천도교를 이어오고 있다. |
성강현 문학박사, 동의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