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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반 무예를 배우는 의미
1. 민족무예란
가) 개념의 정의
우리 민족의 몸짓은 확실히 일본인의 몸짓과도 다르고 중국인의 몸짓과도 다를 뿐 아니라 서양인들의 몸짓과도 현저하게 다르다. 그렇다면 이러한 우리의 몸짓들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 우리의 몸짓은 우선 한반도라는 지리적, 자연적 조건에 의해서 일차적으로 규정되는 것이며, 거기에 우리만이 경험한 역사적 체험을 통해서 형성된 것이다. 즉 우리는 즐거운 때는 환희의 춤을 추고 슬플 때는 비탄의 몸부림을 치며, 일상 생활상의 필요에 따라서 수렵이나 노동을 하면서 우리의 몸짓을 형성하여 왔다. 그리고 내외의 반역이나 침략세력에 대해서는 생사를 건 필사적인 전투행위라는 격렬한 몸짓을 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유사 이래만도 일천번에 가까운 외래침략을 당하여 왔다고 한다. 따라서 빈번한 외래침략세력에 대항하여 싸우는 격렬한 몸짓이 전형적인 무예로써, 여기에는 단순히 몸짓만이 아니라 그러한 격렬한 의지, 민족 자존심이 작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우리 민족의 적극적인 몸짓을 한마디로 집약하면 민족무예하고 할 수 있다.
이리하여 민족무예란 체현(體現)형태로서는 격렬한 몸짓이지만, 관념(의지)형태로서는 민족자존과 자주적인 민족사상이 되는 것이다. 즉 관념형태로서의 민족 주체의식 일뿐 아니라 원뿌리의 민족사상인 것이며, 체현형태로서 격렬한 몸짓(전형적인 무예)으로 민족사상과 우리의 몸짓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민족무예의 양면으로서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일체를 이루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주지하는 바와도 같이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인 반도이고 내륙 깊숙이 큰 강물이 흘러서 일찍이 주운(水運)이 비상히 발전하였다. 그리하여 무거운 화물은 주로 수운으로 운반하였으나 내륙에는 산이 많고 도로가 없고 수레 또한 없었다. 따라서 일상적인 생활은 무거운 등짐을 메고 가파른 길을 오르내려야 했던 것이다. 무거운 등짐을 메고 가파른 길을 오르 내리기 위해서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다리는 휘청거리는 듯한 몸짓으로 탄력을 이용하여 구르듯이 걷고, 무거운 등짐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거의 닫는 것처럼 걸어야 했던 것이다. 외국인들이 맨 처음 우리 나라를 여행하면서 쓴 기행문에 의하더라도 체구는 작지만 무거운 등짐을 메고 마치 닫는 것처럼 걷은 모습에 경악을 금치 못한 인상을 기록하고 있는데서 우리는 우리 선인들의 모습을 엿 볼 수가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모습을 우리는 택견에서 발견하게 되는데, 여기에서도 우리는 우리 선인들의 일상적인 모습을 발견하게 되어 정겹기 그지없다.
이와 같은 일상적 생활이 비할 바 없이 강한 각력(脚力)을 갖게 하는데, 각력은 동시에 비상한 각술(脚術)을 갖게 하는 기본 동력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른바 백기신통비각술(白技神通飛脚術)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이처럼 강력한 각력에서 유래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의 강력한 각력은 우리가 온돌생활을 하는데서 오는 것으로, 확실히 의자생활을 하는 서양인이나 현대인보다 온돌에서 앉은 생활을 하는 쪽이 보다 강력한 각력을 갖기 마련이다. 이와 같은 현상은 가라데에서 배운 태권도가 가라데를 능가하는 각술을 갖게 된 동기라든지, 권투, 유도, 레슬링과 같은 외래의 스포츠에서도 특히 격투기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현실을 상기해보면 우리민족의 종족적 소질이 격투기에 능하다는 반증이 된다. 그런데 전투의 경우 팔다리가 긴 서양인들에게 유리할 듯 한데도, 전투에서는 강한 소질을 보여주고 있는데 우리의 전통적인 씨름을 예로 들어보면 어찌 서양인들이 이길 수가 있었는가 ?
중국인들도 일찍이 동방은 신선이 사는 나라로서 존경과 흠모의 대상이었고 동방에서는 선약(仙藥)이 나는 고장으로 확고히 인식되어 있었다. 진시왕이 동남동녀(童男童女) 서복(徐福)에게 500명씩을 보내어 동방에 가서 선약을 구해 오도록한 고사는 바로 이러한 사실을 반증하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신선, 선비의 본 모습은 한가로이 글공부나 하는 그러한 사람들이 아니라 이처럼 심신단련을 부단히 하는 무예인의 본 모습인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나) 민족무예의 역사적 역할
우리의 역사는 특히 고대사에 있어서 스스로 기술한 역사는 없어지고 중국인에 의해서 그들의 편견대로 기술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우리를 동이족(東夷族)이라 하여 경외감을 갖고 대하였고, 고구려는 군사 강국으로 수나라, 당나라와의 전투과정을 자세히 기술하였다. 동이(東夷)의 이(夷)자를 살펴보면 大+弓이 되는데 이는 활만을 잘 쏜다는 뜻이 아니라, 무예 일반에 강하여 의젓하다는 뜻이 담겨있다. 때문에 우리는 삼국정립 이전 부족국가 단위의 역사시대에서 조차 이민족의 침략을 번번이 격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의 민족사에서 가장 영광스럽고 자주적인 역사는 상무적인 고구려에 의해서 창출되었다. 고구려는 삼국이 분립된 조건에서도 중국대륙의 통일세력인 수나라, 당나라와 백여 년간을 맞서 싸워왔고 큰 전쟁만 하더라도 열 두 번을 싸워 번번이 이길 수 있었다.
고구려의 상무적인 기상과 고구려인의 무예는 민족의 자주 자립을 지킬 뿐 아니라 우리의 생활권(生活圈), 문화권(文化圈)을 지키고 생명과 재산을 지켜온 직접적 전투수단이었다. 그런데 민족무예와 민족사상을 별개의 것으로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원래 우리의 민족사상인 신선사상(神仙思想), 선비사상은 그 자체가 민족무예로서 구태여 구분하자면 관념형태로서는 자주적인 민족사상이지만 체현형태로서는 우리의 몸짓 곧 민족무예인 것이다.
신선사상, 선비사상은 원뿌리의 민족사상일 뿐아니라 최초의 진보적 사상으로 민족사를 지탱해온 대들보의 역할을 해온 것이다. 이것이 최초의 진보적 사상이라는 것은 숙명론(宿命論)이 지배하는 고대사회에서 인간의 수명을 늘릴 수 있고 운명 또한 개척할 수 있다는 진취적 사상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진보적 사상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김부식과 같은 사대주의자도 고려시대에 엄연히 존재하는 민족사상을 부정할 수가 없어서 그가 편술한 삼국사기(三國史記) 진흥왕 본기 만랑비 서문에 {우리나라에서는 옛부터 현묘한 도술이 있었다. 이를 풍류라고도 하는데....}라고 기술하고 있다. 신선사상, 선비사상은 풍류도, 낭가사상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고구려에서는 조의선인(早依仙人), 신라에서는 화랑도로 이어지면서 고려에서는 선랑(仙郞), 조선조에서는 선도(仙道)로 명맥을 이으면서 외래침략과 같은 민족존망의 위기상황에서는 분연히 궐기하여 민족을 구출하는 바와도 같은 민족사의 대들보 역할을 톡톡히 해온 것이다.
고구려에서는 당태종의 30만 정예병을 우리의 조의선인들은 불과 3만명이 자력결집하여 이를 격퇴한 예를 비롯해서, 수당의 빈번한 침략을 번번이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원동력으로 작용하였다. 또한 신라의 화랑도가 삼국통일의 원동력으로 역할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고려왕조에 이르러 선랑(仙郞)의 역할에 대해서 잘 알려지지 않았다. 고려는 고구려의 건국이념을 계승할 뿐만 아니라 만주의 실지회복(失地回復)을 위해 광군(光軍) 30만을 상비하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불행히도 대륙에서는 遼(글안), 金(여진), 元(몽고)로 이어지는 강대한 세력들이 교체되면서 오히려 우리를 침략하였다. 이 때 만일 고려왕조와 같은 강력하고도 자주적인 왕조가 아니었던들 우리의 민족사는 강대 세력에 흡수 분해되어 버렸지 않았을까 하는 소름끼치는 상상을 해보기도 한다.
고려조정에서는 빈번한 외래침략을 대비하여 신라의 화랑도나 고구려의 조의선인 제도를 모방하여 선랑(仙郞)을 육성함으로서 국가적 위기상황에 대비할 것을 논의한 때가 많았다. 뿐만 아니라 고려왕조가 빈번한 외래침략을 번번이 격퇴한 역사적 합심협력의 시기에는 엄청난 저력을 발휘하여 오히려 침략자들을 전율케 하였다. 몽고의 장수들이 자신들이 경험한 어떠한 군사들 보다도 용맹스럽고 잘 싸우는 사람들이라고 격찬했던 예에서도 보듯이, 또한 징기스칸 자신이 {고려국은 나라는 작지만 당태종의 30만 정예병을 격파한 무서운 군사들}임을 상기시켜 몽고 출정군을 훈계한데서 보듯이 고려인의 상무적 기개를 실감할 수 있다. 사실 당시의 세계에서 몽고군사에 저항할 수 있는 어떠한 군사와 정치세력이 없었다는 점을 상기하면 고려의 저력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다) 민족무예의 현실적 의미
조선조에 이르면 주자학에 의한 건국이념과 사대교린이라는 현실주의적인 외교노선에 따라 중국(명나라)에 대해서는 사대(事大)의 예에 따라 예우하고 여타의 종족이나 나라에 대해서는 선린우호정책을 폄으로서 건국후 200여 년은 비교적 평온한 셈이다. 그러나 이때도 한글의 창제나 과학기술의 발전과 같은 자주적인 기풍은 엿보인다. 다만 이때는 비록 선도(仙道)가 역사의 뒤안길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주자학, 불교, 도교 등 동양사상과 공존하면서 임진조국 전쟁과 같은 국가존망의 위기에서는 역사의 전면에 나타나서 찬연한 위업을 이룬 것이다. 즉 임진조국 전쟁 당시 의병장으로 활약한 많은 분들이 선도를 수행한 분들이었다. 서산대사, 사명당, 홍의장군, 곽재우선생 등의 예처럼 불교나 유교를 신봉했지만 실제로 선도를 수행함으로서 선도를 사회적으로도 불교, 유교와 공존하면서 구체적인 개개인의 의식속에서 조차 공존하는 모습으로 맥락을 이어왔다.
오늘날에 이르러서까지 유.불.선. 삼교합일들은 바로 이러한 사례를 잘 말해주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신선사상, 선비사상 곧 민족무예는 우리의 민족사를 지탱해온 기둥의 역할을 해온 것이며 우리의 생활권, 문화권을 지켜온 직접적 수단이었다. 그러면 민족무예의 당위적 정제방향은 어떠한가? 우리민족은 19세기말 이래 외세의 침략을 당하기 시작하여 한때는 악랄하기 유래가 없는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하에서 신음하기도 하였고, 태평양전쟁에서 패배한 일제의 기반에서 겨우 벗어나자 이제는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의해서 일본이 아닌 우리가 분단됨으로서 동족상잔이라는 민족적 비극과 수난을 당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민족적 수난과정에서 우리는 문화적 열등의식에 젖게 되고 민족자존과 긍지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의 전통문화는 전쟁의 파괴와 더불어, 또한 그에 연이은 근대화, 산업화 과정에서 여지없이 그 토대로부터 소멸위기에 직면한 것이다. 여기에 우리의 몸짓 곧 민족무예 또한 예외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택견이 명맥을 이어오게 되었고 24반 무예가 복원되어 실날같은 연면성을 유지하고 있다.
우리가 우리 것만 좋고 남의 것은 무조건 나쁘다는 식의 맹목적, 배타적 민족주의도 바람직하지 못하지만 우리 것은 무조건 남의 것보다 못하다는 식의 문화적 열등감은 더더욱 큰 문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어디까지나 우리의 전통문화에 뿌리를 두고 외래의 특히 현대과학문명의 눈부신 발전은 제 성과를 주체적으로 소화 흡수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국제주의를 수용하는 민족주의자라야 만이 국제화된 사회에서 국제무대에 나아가 민족자존과 긍지를 높일 수 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리고 우리는 민족적 비극의 근원인 민족분단을 극복할 통일일꾼을 양산하는데 정신적 지주로서 민족무예의 당위적 정책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웃나라인 일본의 형편을 살펴보면 사실상 사무라이 정신, 사무라이 문화가 일본문화의 기저를 이루고 있다. 그들의 전통극이라는 {가부기}가 사실은 봉건무사가 자신의 은인인 봉건영주를 위해 복수하는 내용의 이야기인 것이다. 자본주의화한 현재 사회에서 조차 그들의 의식세계는 거의 맹목적이다시피 한 의리관념(이른바 오야붕(親)과 꼬붕(子)이 기저를 이루면서 세계무대를 석권하고 있다. 서양인들 역시 개인주의적인 기사도 정신이 그 의식의 기저에 살아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자본주의 발달 초기단계에서는 개인주의가 발달한 서구에서 자본주의가 꽃피울 수 있었지만, 자본주의가 고도화된 단계에서는 이른바 거대 독점자본의 형성으로 조직사회의 윤리를 가르치는 일본의 사무라이 문화권에서 꽃피울 수 있게 되었지 않느냐 하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자본주의가 성숙한 단계에서는 이른바 다국적기업이나 초국적 기업의 형성으로 우리의 선비정신에 입각한 공동체적인 삶의 방향을 추구하는 그러한 정신적 기저라야 너도 살고 나도 살며 사회와 국가 나아가서는 전 인류를 살릴 수 있는 그러한 성숙한 도덕관념이 형성되어야 한다고 본다. 민족무예를 한다는 것은 이처럼 잘못된 우리 역사를 바로 잡고 잃어버린 역사를 찾으며 나아가서 인류공영 공생을 도모하는 고도한 윤리, 도덕성의 추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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