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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월 3일 토요일 낙동정맥 1회 (매봉산~석개재)
S 산악회
낙동정맥 1회차 : 삼수령 -2.5 (24분) - 매봉산 -1.3 (20분) –낙동정맥 분기점 -1.1 (46분) 구봉산- 1.2 (20분) 대박등 – 4.4 (1시간 44분) – 유령산 – 0.7 (27분) 우보산 – 1.9(54분) – 통리재 – 3.4 (1시간 34분) – 면안등재 – 0.6 (16분) 고비덕재 – 0.9(27분) – 백병산 – 1.6(39분) – 큰재 – 6 (2시간 40분) – 구랄산 – 2.2 (1시간 18분) – 면산 - 4.6 (2시간 3분) – 석개재
산행거리 : 약 33 km 산행시간 : 약 14 시간
https://www.ramblr.com/web/mymap/trip/371711/1852398
거리 33.9 km
소요 시간 14h 0m 6s
이동 시간 13h 19m 30s
휴식 시간 40m 36s
평균 속도 2.5 km/h
최고점 1,328 m
총 획득고도 2,070 m
난이도 힘듦
낙동정맥 (洛東正脈) 01 – 매봉산
낙동정맥을 나서며
양산박
산길은 인생을 참 많이 닮았다.
오르막 다음엔 꼭 내리막이 있고
내리막 다음엔 꼭 오르막이 있는
힘들 땐 좀 쉬어가라 그늘이 있고
바쁠 땐 쉴 틈 없이 달려가라 하는
이렇게 산길은 인생을 꼭 닮았다
잘못 든 길이라면 되돌아와도 되고
큰일이 아니라면 둘러가도 좋은
끝없이 이어질 듯 달리던 길도
강물에 내려앉아 손발을 씻는
인생은 참 산길을 꼭 닮았다
날씨 : 맑음, 미세먼지 약간, 밤은 매우 추웠으나 낮에는 기온이 올라감,
옷차림 : 세 겹 옷에 땀 배인다..
낙동정맥을 시작하며
2019년 12월 22일 백두대간을 종주하고 나서 다음 산행지로 가고 싶은 곳이 낙동정맥이었다. 물론 설악이나 지리산도 들러보고 싶고 눈 쌓인 덕유산이나 소백산 등 겨울산 산행을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러던 차에 S 산악회에서 1월 3일부터 연속으로 16번에 나누어 낙동정맥을 안내한다고 하여 망설임 없이 일단 신청하였다.
신청하고 나서도 약간의 갈등이 생겼다. 매주 연속으로 금요무박 산행을 하는 것이 체력적으로 만만치 않을 뿐더러 이런식으로 산행을 하고 났을 때 과연 어떤 성취를 이룰 수 있는가 하는 회의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혹시 함께 할 친구들이 있을까 하는 생각에 함께 백두대간을 뛰었던 몇몇 사람들에게 말을 건네보니 자유인에서 3월이나 4월에 낙동정맥 산행을 하려고 준비중이라 한다. 만일 그렇다면 내가 이 쪽으로 사람을 이끄는 것이 그 쪽 산행 계획을 세우는데 방해가 될 것으로 판단되어 결국 나 혼자서 참여하기로 결심했다.
낙동정맥은 태백산 줄기인 삼척 매봉산에서 백두대간으로부터 갈라진다. 매봉산 아래에 낙동정맥 분기점 표시석이 있는데 이곳에서 북진기준으로 백두대간 왼쪽은 한강으로 오른쪽 낙동정맥의 오른쪽은 낙동강으로 그리고 백두대간과 낙동정맥 사이에서 흐르는 물은 오십천을 거쳐 동해로 빠진다. 그런 연유로 이 곳을 삼수령(三水領)이라 부른다. 옛날 전쟁을 피해 이 곳에 들면 화를 면할 수 있었다 하여 달리 피재라고도 부르던 삼수령에 빗물이 내리면 어느 지점에 떨어지느냐에 따라 한강을 거쳐 서해바다로, 낙동강을 거쳐 남해로 또는 오십천을 거쳐 동해로 흘러들어 대양에서 다시 만난다는 모티브로 글을 써서 돌에 새겨놓은 것이 있다.
낙동정맥의 주요 이정표는 아래와 같다.
삼수령(백두대간에서 분기)-통리재(영동선, 국도 제38호선 통과)-백병산(1259m)-면산(1245m)-석개재(지방도 제910호선 통과)-삿갓봉-진조산(908m)-답운치(국도 제36호선 통과)-통고산(1067m)-(덕산지맥분기)-한티재(430m, 국도 제88호선 통과)-검마산(1017m)-(금장지맥분기)-백암산(1004m)-창수령-맹동산(808m)-(화림지맥분기)-황장재(국도 제34호선, 당진영덕고속국도 통과)-대둔산(900m)-주왕산(周王山, 907m)-주산재(지방도 제914호선 통과)-피나무재(지방도 제914호선 통과)-통점재(국지도 제68호선 통과)-(팔공기맥분기)-가사령(국지도 제69호선 통과)-(비학지맥분기)-침곡산(725m)-한티재(국도 제31호선 통과)-운주산(806m)-이리재(익산포항고속국도, 지방도 제921호선 통과)-시티재(국도 제28호선통과)-어림산(510m)-마치재(지방도 제904호선 통과)-남사봉(470m)-만불산(275m)-사룡산(비슬기맥분기)-숲재-당고개(국도 제20호선 통과)-백운산(892m)-고현산(1034m)-운문령(국지도 제69호선 통과)-가지산(1241m, 운문지맥분기)-석남령(구24번국도 통과)-신불산(1159m)-영축산(1081m, 영축지맥분기)-정족산(749m, 남암지맥분기)-천성산(922m)-(용천지맥분기)-군지산(535m)-금정산(802m)-산성고개(산성터널 통과)-만덕고개(국도 제14호선 통과)-백양산(642m)-구덕산(562m)-몰운대
S 산악회에서는 이를 16개 구간으로 나누어 매주 금요무박으로 진행한다.
1 삼수령에서 시작하여 석개재 – 2답운령 – 3한티재 – 4아래삼승령 – 5하삼의리 – 6황장재 – 7피나무재 – 8성법령 – 9이리재 – 10한무당재 – 11이리재 – 12한무당재 – 13당고개 – 14운문령 – 15지경고개 – 16녹동교 – 개금령을 거쳐 부산 몰운대에서 바다로 떨어진다.
『산경표』에 기록되어 있는 산이름은 다음과 같다.
백병산(白屛山, 1,259m)
백령산(白嶺山, 1,004m)
주왕산(周王山, 907m)
주사산(朱砂山)
사룡산(四龍山, 685m)
단석산(斷石山, 829m)
가지산(加智山, 1,240m)
취서산(鷲棲山, 1,059m)
원적산(圓寂山, 812m)
금정산(金井山, 802m)
총 392.4 km 를 내달려 4월 24일 몰운대에서 낙동정맥 산행을 마칠 때까지 주말의 다른 일정을 미루고 산행에 집중해야 할 것이다.
산행기
낙동정맥의 시발점 매봉산 천의봉
매봉산 천의봉에서 낙동정맥을 시작한다.
금요일 밤 11시 30분 신사역을 출발하여 원추 치악산 휴게소를 거쳐 토요일 새벽 3시 30분 산행 들머리인 삼수령에 도착했다. 지난 가을 각시취꽃이 지고난 10월 말 백두대간 산행길에 들른 후 3개월만에 다시 찾았다. 백두대간과 낙동정맥 분기점에 세워진 안내석을 지나면서 다시 이 곳을 찾아오겠다고 한 말이 실현되었다.
따뜻한 버스에서 내리자 차가운 바람이 시원하게 다가온다. 차가운 밤 하늘에는 수 많은 별들이 초롱초롱 빛난다. 산님들은 버스에서 미리 채비를 갖춘 채 하차하자 마자 총총걸음으로 낙동정맥 시발점인 매봉산으로 향한다. 분기점에서 간단한 시산제를 지낸다는 산대장님의 안내말씀은 뇌리에 남아 있지 않고 오늘 총 26 km 로 예정된 산행을 어떻게 정해진 시간 안에 마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그 빈 자리를 메운다. 버스 옆자리에 앉은 베테랑 산꾼님은 32 km 정도 될거라면서도 좀 길지만 흙산이라 크게 어려움이 없을거라 위로하지만 전체적인 산행지도를 볼 때 이 정도면 나에게는 도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낙동정맥 분기점을 지나 매봉산으로 오르는 능선에 접어들자 오른쪽 바람의 언덕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무척 매섭다. 짚고 가는 스틱이 바람에 날려 흔들린다. 거센 바람에 신이 나서 돌아가는 풍력발전기 날개 소리가 휙휙 귓전을 스쳐간다. 달리 바람의 언덕이겠나. 다른 때는 모르겠으나 지금 같은 겨울 한 철은 풍력발전기의 전성시대겠다는 생각이 든다.
매봉산 천의봉에 있는 전망대는 그대로 바람에 노출되어 있다. 차가운 바람 저편으로 오투리조트인지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다. 정상석 앞에서 인증사진을 남기고 서둘러 내려간다. 이곳까지 올라온 다른 회원들도 주변을 둘러볼 여유도 없이 (물론 깜깜한 밤이라서 아무것도 안보이지만) 종종걸음으로 달음박질쳐 내려간다.
매봉산 전망대
날이 추우니 혹여 눈이라도 있을까 기대했지만 그 동안 한 두 차례 내린 눈은 다 녹아 없어지고 메마른 흙은 딱딱하게 얼어 있다. 겉 표면은 말라서 먼지가 날 정도다. 고랭지 채소밭 가장자리로 난 좁은 길에만 눈이 조금 남아 있다.
구봉산(九峯山 또는 九鳳山 902.2 m)
다른 이들이 다 떠나고 난 뒤 맨 뒤에 영우님과 둘이 남았다. 램블러 트랙 따라가기 기능을 이용하여 선답자가 걸어간 길을 따라가니 길을 잃을 염려는 없으나 이정표에 신경을 쓰면서 열심히 걷는다. 산행 경험이 나보다 많은 영우님은 거리(30 km)와 주워진 시간(13시간)을 나름 계산해보니 여유가 있다면서 서두르지 말자한다. 내가 지향하는 것이야말로 여유있게 걷는 것인데 그의 말을 들으니 위안이 된다.
구봉산
작은피재 포장도로를 건너 정맥 산길에서 처음 만나는 구봉산(九峯山 또는 九鳳山 902.2 m)을 지난다. 적각의 된각마을 뒤에 있는 아홉개 봉우리로 이루어진 산이라서 九峯山이라 부른다고 하지만 깜깜한 밤중에 다른 산봉우리는 볼 수가 없다. 달리 아홉마리의 봉황새가 춤을 추는 형상이라서 구봉산(九鳳山)이라 부른다고 한다.
대박등(大朴嶝)
산길 가에 왼쪽으로 로프를 연결해 놓았는데 랜턴불빛에 반사되어 선명하게 비친다. 지자체에서 산길 정비에 신경을 많이 쓴 모양이다. 구봉산을 지나 한참 걸었는데 반대쪽에서 서너명의 회원들이 되돌아오기에 어쩐일인가 물어보니 구봉산 인증을 안한 채 지나와서 다시 되돌아가는 중이라 한다. 그들은 아웃도어 업체에서 마케팅 일환으로 실시하는 인증캠페인에 참여하는 사람들이다.
대박등은 대배기(꼭대기)를 의미한다.
이정표가 대박등(大朴嶝)을 옆으로 지나쳐 왔음을 알려준다. 영우님은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으니 50 미터 되돌아가 대박등을 보고 가자고 한다. 경상도 방언으로 꼭대기를 ‘대배기’라고 하는데 대박(大朴)은 이를 이두식으로 표현한 말이라 한다. 밤이라서 잘 보이지 않지만 이 능선의 북쪽 즉 동해쪽은 가파른 절벽이고 서쪽은 완만한 경사를 이룬 우리나라 전형적인 동고서저(東高西低 – 동쪽은 높고 가파르며 서쪽은 완만하게 낮아지는 형태)의 지형을 보여주는 곳이라 한다.
첩첩산중에 공장 기계소리
길 안내표지에 신경쓰며 가는데도 잠시 산길에서 벗어난다. 램블러 따라가기 기능이 작동하여 핸드폰 진동을 알아차리고 다시 정상산길로 찾아든다.
산길을 걷다 보면 이렇게 무덤을 자주 만난다. 대간이나 정맥에 명당자리가 많은가보다.
개 짖는 소리와 기계음은 태백위생사업소에서 나는 것이었다.
콘크리트 포장도로를 건넌다.
6시 20분 산길에 있는 무덤을 지나고 얼마쯤 가자 이정표에 ‘전망대’가 1.1 km 앞에 있음을 알려준다. 은근히 전망대에서 일출을 볼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이 솟아난다. 하지만 7시 40분에 해가 뜨는데 1.1 km라면 7시 조금 넘은 시간에 이를 수 있으니 그 곳에서 해가 뜰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을 것이다.
태백시 위생사업소 팻말이 있는 곳에서 작은 콘크리트 도로를 지나 다시 산길로 접어드는데 멀지 않은 곳에서 여러 마리의 개 짖는 소리가 소리가 들린다. 주변이 어두우니 우리가 첩첩산중 산길을 걷고 있을 터인데 이렇게 개 짖는 소리가 가까이 들리는 것은 산중 농가에서 기르는 개가 낯선 길손을 경계하며 주인에게 경각심을 심어주려는 충견인가보다.
또 차가 지나가는 듯한 기계음도 규칙적으로 들린다. 영우님은 아마도 느티고개를 넘나드는 차 소리인가 보다라고 한다. 하지만 유령산을 지나야 느티고개가 나오는데 유령산까지 1.5 km 라고 하니 그 곳에서 나는 차 소리가 여기까지 들릴 리가 없다는 생각에 다시 한 번 귀를 기울여보니 분명 차 소리는 아니고 어느 공장에서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다.
유령산 (楡嶺山 932.4 m)
산 이름치고 참 해괴하다. 분명 한자(漢字)로는 다른 뜻이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유령이라 하면 귀신(幽靈)을 떠올리게 된다. 도대체 어떻게 된 산이기에 그런 이름을 갖고 있을까 궁금해진다. 유령산에 이르기 전 전망대가 있는 작은 봉우리가 나온다. 몇 개의 벤치가 설치되어 있고 진행방향인 유령산쪽을 제외한 삼면이 활짝 트여있다.
7시가 채 안되었는데 주변이 조금씩 밝아온다. 전망대에서 어렴풋이 비치는 주변 산세를 둘러본다. 우리가 새벽에 출발한 매봉산은 그 주위에 밀집되어 있는 풍력발전기 무리로 알 수 있겠고 그 왼편으로는 산상에 KBS 중계소가 있는 함백산이 보이고 더 왼쪽으로 큰 산은 분명 태백산이겠다. 이런 주변 산군(山群)들은 어설픈 새벽 여명에 희미하게 보이지만 함백산이나 태백산 언저리에 쌓인 눈도 육안으로 구분할만 하다.
유령산 정상이 가까와지고 우리는 잠시 쉬어간다.
유령산 위 능선길에 돌이 놓여 있는 것이 마치 산성의 흔적이었다는 느낌이 든다. 느티재 넘어 우보산에도 이런 흔적이 있다.
느릅나무가 많이 자란다는 느릅재 위에 있는 산이라 하여 느릅나무고개산 즉, 유령산이다.
앞서간 영우님의 독촉에 서둘러 전망대를 떠난다. 나뭇가지 사이로 먼동이 터온다. 구름이 없는 일출은 분홍빛이다. 산마루 위에 하늘이 잠시 붉게 물든다. 7시 15분 유령산에 올랐을 때는 랜턴불에 의지하지 않고도 주변 사물을 볼 수 있을만큼 날이 밝았다. 정상석 옆에 세워둔 산 이름의 유래를 보고 우리는 실소하고 말았다. 유령(楡嶺)은 귀신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라 느릅나무를 뜻한다고 한다. 즉, 느릅나무 고개 위에 있는 산이라는 말이다. 참 우리나라 말이 어렵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렇게 유령산에 대한 궁금증을 아주 가볍게 해소한다.
나뭇가지에 가려 보이는 해돋이가 아쉽다.
느티고개 유령 산령당(楡嶺 山靈堂)
유령산에서 한 발짝 내려선 곳에 작은 산신당이 있다. 느티고개다. 아마 느티나무와 느릅나무가 혼동되어 사용된 듯하다. 신당 현판에는 유령 산령당(楡嶺 山靈堂)이라 써 있다. 전면 세 칸짜리 산령단 옆에는 오석으로 만든 유래문(由來文)이 세워져 있다.
신라시대에는 왕이 태백산 산제를 지내기 위해 소를 끌고 이 고개를 지나갔으며 조선시대에는 이 신당에서 태백산을 향해 제를 올렸다고 한다. 차도와 철도가 생기기 전에는 영서와 영동을 잇는 주요 고개였으며 산이 험하여 해수(害獸)의 폐해를 입지 않으려면 여럿이 무리를 지어 넘어야 했다고 한다.
느티나무 고개 삼척 방향 - 고개 위까지 차가 올라온다.
유령 산영당
임진왜란으로 신당이 불에 타 없어지면서 한동안 제사를 올리지 못하던 중 어느날 황지(현 태백시)에 사는 청년이 아버지의 제사물품을 사기 위해 삼척의 소달장(所達場 – 도계읍에 위치)을 다녀오는데 이것저것 챙기다보니 너무 늦는 바람에 사람무리는 이미 고개를 넘어가고 이 청년 혼자서 고개를 넘어가고 있었다. 이 때 호랑이가 나타나 청년을 잡아 먹으려 하는데 청년이 정신을 차리고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호랑이로 변했던 산신령이 그의 효심에 감동하여 자신의 청을 들어주면 살려주겠다 한다.
매년 날자를 정하여 큰 소를 잡아 제사를 지내라는 것이었다. 청년은 꼭 그리하겠다고 약속하고 풀려나 무사히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 제사를 올릴 수 있었다. 그 뒤로 청년은 마을 사람들과 상의하여 그 동안 중단되었던 산신제를 다시 올리게 되었고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어 매년 음력으로 4월 16일에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유래문의 설립 연도가 단기 4330년으로 표기된 것으로 보아 지금 이 신당은 1997년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우보산(牛甫山 933.1m)
느릅재라고도 부르는 느티고개에서 통리에 이르기 전 또 하나의 봉우리를 넘는다. 산정상에 어느 산악회에서 써 놓은 우보산(牛甫山 933.1m)라는 푯말이 붙어 있다. 지나온 유령산도 달리 우보산이라고 부른다고 하고 인터넷 지도에도 두 산의 이름이 우보산으로 표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옛 문헌에 나타난 산 이름이 어느 봉우리를 의미하는지 명확하지 않은가보다. 우보산이라는 이름은 소를 잡아 제를 지낸 영신당 위에 위치하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추정된다. 느티고개를 사이에 두고 비슷한 높이의 봉우리 두 개가 우뚝 서 있는 형상이다.
우보산 전망대에서
우보산 정상에서
우보산에서 통리로 내려가는 길이 무척 짧지만 무척 가파르다. 산에서 내려와 ‘느릅령’이라는 안내문이 세워져 있고 그 옆에 무너진 돌탑이 있는 쉼터에서 아침을 먹었다. 차가운 날씨에 산에서 먹기에 편한 빵과 커피를 준비해왔다. 오래 앉아서 먹을 수 없는 것이니 간편하게 먹는 것이 좋다. 영우님은 컵라면을 준비해 와서 하나를 권하는데 사양했다. 주변에는 느릅타무는 하나도 안보이고 잣나무 숲 가운데 묘가 두 기 서 있다.
통리마을
산에서 내려오면서 훤히 보이던 통리 마을에 들어서니 이 곳은 꽤 큰 도시같은 마을이다. 지금은 그 중요성이 덜하지만 한 때 우리나라 주요 연료로 석탄을 이용할 때 석탄운송에 큰 역할을 담당했던 역이다.
정맥길은 통리마을을 가로지른다. 철도 건널목을 지나 다시 산 입구를 찾아 오르는데 경사가 무척 급하다. 중간쯤 올랐을 때 송전탑이 있는 곳은 주위 나무들이 다 벌목되어 시원한 조망을 보여준다. 사진을 찍고 산을 오르는데 다리에 힘이 무척 들어간다.
우보산 아래 느릅령에서 아침을 먹었다.
우보산을 내려오면서 바라본 통리마을 전경
통리역
태현사 옆으로 난 흐릿한 길을 따라 오른다. 정식 등로는 능선 반대편에서 시작되는 듯 하다.
맨 뒤쪽에 혼자 남아 램블러 따라가기를 하는데 좌표에 오차가 있는건지 자꾸 경로를 이탈했다는 메시지가 뜬다. 그러나 길은 외길이고 난 제대로 잘 가고 있다.
면안등재
산길은 멀리 백병산을 오른쪽에 두고 큰 반원을 그리며 돌아가는 형국이다. 앞에 가던 영우님이 길이 이상하다며 되돌아와 확인하고 다시 앞으로 나아간다. 면안등재는 이 반원의 꼭지점에 있다. 그 뜻을 알 수 없으나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산의 이름이나 고개 이름이 세 자로 되어 있는 반면 이 산에는 면안등재니 고비덕재니 하는 것처럼 네 자로 되어 있는 이름은 고구려 지명의 영향이 아닌가 나름 생각해본다.
면안등재 - 이 지역에는 등자가 들어간 지명이 많다. 햇댓등, 대박등, 면안등, 등등등
태백시에서 낙동정맥 보존을 위해 모니터링한다는 팻말이 세워져 있다. 산(山)이 자산인 태백시에서 백두대간과 낙동정맥을 갖고 있다는 것은 어찌보면 큰 자산인지도 모른다. 이런 자산을 함부로 개발하여 훼손하기보다는 자연상태를 보존하고 산길을 정비해서 더욱 많은 사람들이 찾도록 하는 것이 미래가치를 높이는 방법일 듯하다.
상당히 거리가 떨어진 장소에 또 다른 면안등재 푯말이 붙어 있다.
태백시에서 세운 면안등재 팻말을 많이 지나서 나무에 개인인지 산악회인지 모르는 사람이 나무에 면안등재 표식을 부착해 놓았다.
고비덕재
금방 나타날 듯하던 백병산(白屛山)은 쉽게 그 모습을 내보이지 않는다. 여우님은 나보다 한 발 앞서서 가고 난 뒤따르며 주변을 한 번씩 훑어보면서 가는 중이다. 먼 데서 볼 때 백병산일거라고 생각했던 산 봉우리를 넘으니 다시 작은 내리막으로 이어지고 좁은 그 안부에 헬기장이 조성되어 있다. 진행방향으로 왼쪽은 굉장히 넓은 면적이 벌목되어 조망이 열려있다.
고비덕재 - 여기서 백병산까지 900 미터만 가면 된다.
옛날 태백 내륙에 사는 사람들이 삼척지역에서 소금을 사올 때 넘나들던 고개라 한다. 고갯마루에 고비(고사리)가 많이 자라고 있어 고비덕재라 불렀다고 한다.
백병산 (白屛山 1,259.3 m)
고비덕재는 통리에서 3.6 km 지나온 지점이고 백병산까지는 900 m 남았다. 출발지인 매봉산에서 이미 약 17 km 높고 낮은 길을 걸어온 몸이 몹시 지쳐 있다. 더구나 맨 뒤에서 쫒기듯 따라가는 것은 선두에서 달아나는 것과는 또 다르다. 가급적 빠른 걸음으로 따라잡으려 애를 쓰면서도 멋진 풍경이나 중요한 이정표를 눈여겨 보면서 걷다 보니 행선이 느리다.
백병산으로 오르는 길에는 산죽밭도 있고
음지엔 약간의 잔설도 남아 있다. 수령이 오래된 신갈나무 물푸레나무가 원시림을 이루고 있다.
백병산 삼거리 - 이 곳에 배낭을 벗어두고 백병산에 다녀온다.
백병산은 낙동정맥에서 약간 벗어나 있다. 오래된 신갈나무와 물푸레나무가 자라는 펑퍼짐한 비탈면에 아직 잔설이 쌓여 있고 능선 아랫쪽에는 산죽이 자라고 있다. 먼저 올라온 영우님이 삼거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서 백병산 정상까지 400 미터 평지성 오르막이다. 백병산은 삼거리에서 회랑처럼 길게 이어져 있으니 이 길 위에 떨어지는 빗물은 양쪽으로 갈라졌다가 백산골을 거쳐 모두 낙동강으로 흐른다.
백병산은 흰 병풍으로 둘러쳐진 산이라는 뜻이다. 정상석이 있는 곳에서 약 500 미터 더 가면 촛대바위와 병풍바위가 있는데 그 병풍바위가 먼 발치에서 올려다 보면 흰색으로 빛난다 하여 백병산이라 불렀다 한다. 하지만 몸이 지쳐 있는데다 시간에 쫒기는 상황이라 촛대바위와 병풍바위 있는 곳에 가지 못하고 삼거리로 뒤돌아와 간식을 먹고 다시 출발한다.
대 백병산 - 이 정상 아래 촛대바위가 하얗게 빛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백병산 정상에서
다시 백병산 삼거리로 나와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면산을 향해
큰재 (1087m)
오전 11시 백병산 삼거리를 떠난다. 다음 목표인 면산까지 8.5 km 만 가면 된다. 정해진 하산 시간은 오후 4시 30분이니 아직 5시간 30분 남았다. 평균 시속 2.5 km 보다 조금 더 부지런히 걷는다면 세 시간 정도면 면산 정상에 오를 수 있고 거기서 날머리인 석개재까지 1시간 30분이면 될 것 같다는 계산을 해본다. 이제는 산길도 계산을 하면서 걸어야 하나보다.
계산이 늘 맞는 것은 아니지만 힘내서 걷다보면 어느새 날머리에 가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솟아난다. 등산화를 잘 봇 매었는지 내리막길에는 발가락이 아파온다.
이런 큰 고개를 소금 가마니를 지고 넘어다녔다니 참 대단한 사람들이었다.
산죽이 우거진 숲길을 지나니 이제까지 많이 보이지 않던 큰 소나무가 눈길을 끈다. 미끈하게 쭉쭉 벋은 것과 바위틈에서 거센 풍파에 시달린 듯 울퉁불퉁 꼬불꼬불 자란 것 등 여러 모습의 소나무가 자라고 있다.
길가에 ‘큰재’라는 이정표가 서 있다. 고비덕재와 마찬가지로 통리 주민들이 동해에서 구입한 소금을 지고 넘던 고개이며 너무 힘이 들어 큰 고개라는 뜻으로 부른 것이라 한다.
덕걸이봉
육백지맥 분기점이라는 봉우리를 지나고 진행방향으로 나무 사이로 끝없이 펼쳐지는 봉우리들을 보면서 저 봉우리들은 이름이 뭘까 하는 궁금증이 돋는다. 까마득히 멀리 있는 저 봉우리들이 오늘 걸어가야할 코스라는 것을 그 때는 미처 몰랐었다.
백병산에서부터 산길은 계속 내리막이다. 양지쪽에는 산죽이 자라고 숲에는 소나무와 신갈나무가 번갈아 나타난다. 내리막에 있는 작은 봉우리는 옆으로 빗겨서 지나간다. 이렇게 한없이 내려가면 다시 올라가야 할텐데 어쩌자고 이렇게 내려가기만 한단 말인가. 내리막이라 해서 속도가 빨라지는 것도 아니고 힘이 그렇게 많이 덜 드는 것도 아니다.
육백지맥 분기점
뒤에 혼자 남아 가다 보니 힘이 부친다. 잠시 쉬어간다.
산길에 대나무가 무성하게 자란다.
덕거리봉
면산까지의 거리가 쉽게 줄어들지 않는다. 백병산 삼거리 기점 3.7 km 되는 지점이다. 이젠 지치고 허기가 찾아든다. 큰 통나무를 잘라 만든 의자가 여럿 놓여져 있는 양지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의자에 앉아 빵과 물로 요기를 하니 조금 기운이 난다. 시간은 벌써 한 시 이제 버스가 출발할 시간까지 3시간 30분 남았다. 면산까지는 아직도 4.8 km 남았다.
조금 더 진행하니 나무에 ‘덕거리봉 1091.6’이라는 푯말이 나무에 붙어 있다.
토산령 (兎山領 950 m )
덕거리봉을 지나자 처음으로 바윗길이 나타난다. 그리 험하지는 않지만 왼쪽 도계리쪽은 매우 급격한 낭떨어지이고 오른쪽도 그다지 넓은 편이 아니라 넘어지면 위험한 구간이다. 추락주의라는 표식을 세워놓고 두터운 로프로 안전을 도모해 놓았다.
영우님이 전화로 어디쯤 오고 있느냐고 묻는다. 위험 바위구간이라 하니 자신은 토산령에 도착했다면서 기다리겠다고 한다. 하지만 금방 나타날 것 같았던 토산령에는 바위구간을 지나 한참 내려간 다음 다시 작은 봉우리를 넘어서 또 급한 경사를 한참 내려가 1시 40분에야 도착할 수 있었다.
급한 미탈길을 내려가고
드물게 이런 바위 벼랑길도 지난다.
그리고 토산령 - 토끼가 많아 토산령이라는데
이 토산령도 현재는 오가는 길손없는 옛 길이다. 옛날 도로가 생기기 전 삼척의 풍곡리 주민들이 태백의 철암으로 넘나들던 고개였다고 한다. 그러나 삼척쪽으로 보면 급한 낭떨어지라서 이 곳으로 바로 길이 났을리는 없고 면산쪽으로 이어졌을 것 같다.
고개에 토끼가 많아 토산령이라고 불렀다는 유래를 적어놓은 이정표가 서 있다.
구랄산 (堀謁山 1071.6 m)
점점 더 시간의 압박을 받는다. 면산까지 3 km 남았고 하산 시간은 3 시간 남았다. 면산에서 하산하는 거리나 시간에 대한 정보가 없으니 일단 면산까지 되도록 빨리 올라가야 한다. 토산령에서 기다리겠다던 영우님에게는 먼저 가라고 얘기하고 나도 부지런히 걷지만 점점 체력이 고갈되는 느낌을 받는다. 다리가 힘드니 호흡이 거칠어지고 입이 바짝 마른다. 겨울날씨를 생각하고 물을 작은 병 하나 챙겨왔더니 턱없이 모지란다.
산행을 하다 보면 봉우리를 다 넘었다 싶을 때 그 앞에 더 높은 봉우리가 턱 버티고 있는 것을 종종 보게 된다. 산행 초기에는 그나마 재미를 느끼면서 크게 힘들이지 않고 오르지만 중간을 넘어섰을 때는 심리적으로도 부담을 준다.
구랄산 - 이름이 구라같다. 그러나 그 의미를 알고 보면 좀 진지하다.
구랄산에서 바라본 면산 - 여기서 보이는게 다가 아니다.
토산령을 지나 높은 산 봉우리 하나를 넘고 급하게 난 경삿길을 내려선 다음 다시 한참을 올라가니 오른쪽으로 능선이 벋어 있고 그 끝에 구랄산 정상석이 서 있다. 구라산이라고 부르고 싶다. 원래 굴알산(堀謁山 1071.6 m)이라 불렀는데 발음을 쉽게 하다보니 자연스럽게 구랄산이 되었다고 한다. 옛날 약초 캐는 심마니들이 며칠씩 산속에 기거하곤 했는데 그들이 머물던 굴(堀)이 많았다 한다.
면산(免山 1,245.2 m)
구랄산에서 급경사를 다시 한참 내려간다. 내려간 만큼 올라가야 한다는 건 산꾼들이 잘 알고 있는 진리다. 세상에 공짜가 없는 법이다. 구랄산 능선에서 나무 사이로 멀리 커다란 산 봉우리 세 개가 이어져 있다. 속으로 생각하기에 첫 번째는 면산이겠고 면산에서 석개재로 하산하는 길에 두 개의 큰 봉우리가 있다는데 아마 나머지 두 개가 그것인가보다. 하지만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모두가 착각이었다.
마음속으로 단단히 각오하고 열심히 올라 산 봉우리 끝 하늘과 맞닿은 마루금이 보이기까지 몇 번을 쉬었는지 모른다. 은근히 전에 자유인 산악회에서 백두대간을 걸을 때 후미에서 천천히 걸었던 별동대가 생각난다. 특히, 큰형님이 우리와 보조를 맞추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동병상련이 느껴진다. 큰형님은 그렇게 힘든 백두대간길을 무사히 마친 것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힘들 때마다 가끔씩 ‘빨간불’을 외치면서 쉬어가곤 했는데 지금 내가 속으로 빨간불을 자꾸 외치고 있다.
면산으로 오르는 길은 오래된 나무들이 많이 자란다.
살다가 살다가 지쳐 쓰러진 나무들도 여기저기 나뒹군다.
다 올라왔다고 생각했을 때 눈 앞에는 올라온 것보다 더 높은 봉우리가 버티고 서 있다.
그렇게 두 세 개의 전위봉을 거느린 면산 두리봉이 마침내 등장한다.
면산은 오른쪽으로 강원도 태백시와 경상북도 봉화군 경계를 만든다.
봉우리를 거의 다 올라갔을 때 영우님에게서 전화가 온다. 면산 정상에 도착하면 연락하겠다고 했는데 지금 도착한 모양이다. 어디나고 묻길래 면산 정상 다와간다고 하니 그렇게 만만한게 아니라며 내가 말했듯이 봉우리 하나를 넘으면 또 하나가 나타나는 아주 힘든 산이라 한다. 산행 전 버스에서 내가 영우님에게 해줬던 말이었다.
정말 그렇다. 봉우리 하나를 넘으니 그 앞에 또 하나가 있고 그 앞에 또 봉우리가 자리잡고 있다. 정말 언제 끝이 날지도 모르는데 산길은 계속 위로 이어진다. 큰 산은 이렇게 전위봉(前衛峰)을 여럿 거느리고 있다. 마치 왕성(왕성)을 치기 위해 주변에 있는 수 많은 중소 성들을 함락시켜야 하는 봉건주의 시대 권력구조와 닮았다. 그러나 지금 봉건주의를 생각할 만큼 낭만적이지 않다.
두 번째 전위봉을 오르는데 영우님에게서 또 전화가 온다. 정상에서 다른 회원 한 분을 만나 함께 내려가는데 면산 정상에서 석개재까지 4 km가 넘으며 그 산행코스도 만만치 않으니 서둘러 오라 한다. 맥이 빠진다. 만일 버스를 놓치면 택시를 타고 태백시로 가서 고속버스를 타고 가야 할 지 어떨지 상상해본다.
면산에서 석개재로 가는 길고 지루한 길, 그리고 힘든길이다.
하루 종일 함께 했던 해는 서산 너머로 뉘엇뉘엇 넘어간다.
또 한참 있다가 다시 영우님에게서 전화가 온다. 산대장과 통화했는데 원래 예상했던 것보다 산행거리가 훨씬 길어서 다른이들도 많이 늦게 내려가고 있으니 너무 급하게 서두르지 말라고 당부한다. 정말 다행이다.
끝이 나지 않을 듯하던 산길이 산죽 우거진 하늘로 치솟더니 마침내 펑퍼짐한 정상에 도달한다. 면산, 아래에서 올려다볼 때 산이 하두 멀리 있는 것 같아 ‘먼 산’이라 부르던 것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면산(免山)이 되었고 큰 전쟁 때 이곳으로 피해 들어온 사람들이 화를 면할 수 있어서 또 그렇게 굳어졌다 한다. 산 정상은 면산의 두리봉이다. 정상의 모습이 두구스름하게 생겼다 해서 두리봉이라 부른다.
석개재(石開재 899 m)
산대장에게 전화를 했다. 산대장도 오늘 처음 참석한 여성회원을 데리고 아직 하산중이라 한다. 안전하게 내려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니 조심해서 하산하라고 당부한다. 면산에서부터 오른쪽 하산길은 강원도 태백시를 벗어나 경상북도 봉화군으로 들어선다. 왼쪽은 여전히 강원도 삼척시다.
이제 몸도 마음도 바빠졌다. 잠시 산죽밭을 완만하게 지나던 산길이 갑자기 급하게 내리막을 달린다. 스틱에 몸을 의지하면서 급한 마음을 다잡고 넘어지지 않으려 주의하면서 움직인다. 한참 내려오면서 앞으로 갈길을 가늠해본다. 저 멀리 오른쪽으로 달리는 능선길에 봉우리 두 개가 솟아 있는데 저 능선이 석개재로 이어지는 정맥길인가? 너무 멀어서 기가 죽는다.
하지만 산길은 바위가 솟아 있는 좁은 회랑길을 지나 좀더 밑으로 떨어지더니 다시 오르막이 시작된다. 작은 산봉우리를 넘더니 오른쪽으로 이어지지 않고 직진한다. 어느덧 오후 5시가 넘고 저 멀리 능선 너머로 해가 마지막 호흡을 가다듬으며 나뭇가지 사이로 숨바꼭질한다. 저 해가 산 너머로 떨어지고 나면 금방 사방이 어두워질 테니 어쩌면 랜턴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마중나온 산대장님을 앞세우고 마침내 석개재로 하산한다.
정말 하늘이 내려준 몸인가보다. 살아 숨쉬는 것이 다행이라는 기분이 든다.
해가 지고나니 사방은 더욱 고요하다. 이제 봉우리 하나만 넘으면 석개재다. 마지막 힘을 쏱아가며 1099봉 앞 전위봉 능선에 올라서서 지나온 길을 뒤돌아본다. 더욱 목이 탄다. 몰병에 남아있던 물 한방울까지 다 짜서 마셨다. 순간 전에 황대권이 지은 <야생초 편지>에 실려있던 ‘요료법(尿療法)’에 관한 내용이 떠오른다. 자신의 오줌을 마셔서 병을 치료한다는 내용이다. 나는 물통을 꺼내 오줌을 받아 한 모금 마셔본다. 맛을 음미하는 것이 아니고 무슨 병을 치료하려는 것도 아니다. 심한 갈증을 일시 해소해보자는 생각이다. 작년 여름 두타 청옥산 구간을 걸을 때 백복령으로 가는 길에 느꼈던 그 심한 갈증이 떠오른다. 산행중이든 어떤 상황에서도 심한 갈증이 올 때 임시방편으로 이 요료법을 쓰면 괜챦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어이 !” 봉우리 위에서 누군가 소리친다.
“어이 !” 하고 대답하고 다시 발걸음을 바삐 운직인다. 산길을 조금 오르자 산대장이 다가오더니 몸은 괜챦느냐고 묻는다. 배낭을 받아주겠다고 한다.
“괜챦습니다 !” 괜한 오기가 생긴건가? 몸 속에 남아 있던 마지막 힘을 짜낸다. 앞서 걷는 산대장 뒤를 따라 마지막 봉우리를 넘었다. 내리막 길에 다시 발가락이 아파온다. 한참 내려가자 또 누군가 랜턴을 켜들고 올라온다. 그리고 오후 5시 40분 날머리인 석개재에 도착했다. 빨간색 산악회 버스는 카랑카랑거리면서 언제라도 출발할 준비를 갖추고 있다.
버스에 오르니 모두들 걱정스런 눈길로 나를 격려한다. 내 짝궁은 이미 오후 2시도 안되어 하산을 완료하고 라면에 소주까지 먹고 있었다고 한다. 돌아오는 길에 들린 휴게소에서 아이스크림를 사서 회원들께 미안한 마음을 전한다.
이렇게 낙동정맥 1구간을 마쳤다. 꿈길을 걸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