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쫓아온다. 도망치려고 탈옥수처럼 발버둥 치는데 발바닥이 땅에 달라붙어 옴짝달싹할 수가 없다. 가슴은 새가슴처럼 팔딱거리고 입안은 바짝 마른다. 잠에서 깨어 보면 이마에 식은땀이 흥건하다. ‘꿈이었구나.’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다.
오십여 년 전 일이다. 매년 여름철이 되면 우리 동네에는 일주일에 한 번씩 아이스케키 장수가 나타났다. 동네 아이들은 손가락을 세며 그 장수가 오는 날을 기다렸다. 내가 나고 자란 동네는 중산간 오지마을이어서, 군것질이라고는 모르고 지냈다. 그시절, 아이들의 유일한 간식거리는 들에 나가 산딸기나 볼래(보리수 열매), 삼동을 따서 먹었고 여린 삥이(‘새’의 여린 순)를 뽑아서 벗겨 먹는 것이 전부였다.
아이스케키 장수가 마을에 나타나는 날은 운동회 날보다 더 좋았다. 부모님은 아이스케키 장수를 학수고대하는 아이들에게 큰 자비를 베풀었다. 군말 없이 십원짜리 동전을 손에다 쥐어 주셨다. 자나 깨나 기다리던 그날이 오면 온 동네 아이들은 아이스케키를 물고 세상을 다 얻은 듯 동네 고샅을 누비고 다녔다. 일주일마다 맛보는 달착지근하고 입에 착 달라붙는 맛이야말로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가 없는 기쁨이었다.
그날도 아이스케키 장수가 우리 마을에 나타났다. 학교에서 돌아오던 나는 아이스케키를 사 먹을 꿈에 부풀어 신이 나서 집으로 내달렸다. 집에 도착해 보니 어머니가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가 갈만한 곳을 수소문했지만 오리무중이었다. 오늘 아이스케키 맛을 보지 못하면, 일주일이나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하니 숨이 멎을 지경이었다. 그날따라 어머니와 나를 기다리다 지친 어린 동생도 아이스케키를 사달라고 칭얼대는 것이 아닌가.
보채는 동생을 데리고 아이스케키 장수가 있는 마을회관 앞으로 갔다. 아이들이 줄지어서 아이스케키를 사 먹는 것을 보자마자, 울상을 지으며 참던 동생은 울음보가 확 터져버렸다. 점점 커지는 동생의 울음소리에 가슴은 두근거리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마른침을 삼키며 용기를 냈다.
“아이스케키 두 개만 외상으로 주시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안돼”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어쩔 도리 없이 울고 있는 동생을 달래 가며 아이스케키를 사 먹는 아이들을 부럽게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한참 지났을까. 아이스케키 장수가 입맛을 다시는 나를 부르더니
“혹시, 너희 집에 마늘 있니?”
무슨 영문인지 몰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한 꾸러미 가져와라. 아이스케키 두 개 주마.”
때마침 우리 집 처마 밑에는 쭉정이는 내다 버리고 굵고 실한 통마늘만 꾸러미로 묶여 대롱대롱 걸려 있었다. 어머니는 오일장 날마다 몇 꾸러미를 내다 팔아 생필품을 사 오시곤 했다.
통마늘 한두 꾸러미를 빼내도 티가 날 것 같지 않았다. 나중에 들키면 동생이 막무가내로 아이스케키를 사 달라고 졸라서 그랬다고 핑계를 댈 속셈이었다. 부모님 허락 없이 통마늘 꾸러미에 손을 뻗는 순간 더럭 겁이 났으나, 입 속에서 맴돌며 녹아내리던 달콤한 맛의 기억은 이미 내 이성을 넘어섰다. 과감하게 통마늘 꾸러미를 아이스케키 두 개와 바꾸어 동생과 하나씩 입에 물었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그 달착지근하고 달콤한 맛은 어디로 도망간 것일까. 전혀 맛을 느낄 수가 없었다. 동생은 맛있다고 신이 나서 뛰어다니는데, 나는 가슴이 쿵쾅거리고 얼굴이 화끈거리며 식은땀이 흘렀다. 처마 밑을 보고 속상해하실 어머니 모습만 아른거리는 것이다.
해가 마을 뒷산을 넘어갈 무렵에 마실 갔던 어머니가 돌아오셨다. 식구들이 둘러앉아 저녁밥을 먹는데 밥이 모래알처럼 까끌거려 목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미리 동생에게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단단히 입막음한 상태지만, 고자질할까 봐서 조마조마 눈치만 살폈다.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시늉만 하다가 배가 아프다며 핑계를 대고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오늘이 아이스케키 장수가 오는 날인 걸 뻔히 알고 있는 어머니는 저녁을 다 먹고 나서도 아무런 말씀이 없었다. 처마에 걸린 마늘꾸러미를 세어 보시고는, 몇 개를 내려 오일장에 내다 팔려고 소쿠리에다 가지런히 정리할 뿐이었다.
‘이미 내가 마음의 벌을 받고 있음을 간파했을까?’
그 후로 트라우마가 생겼다. 무엇엔가 쫓기어 옴짝달싹 못하고 가슴이 팔딱거리며 마른침을 삼키는 악몽을 꾸는 일이 종종 있었다. 잠에서 깨어 돌이켜보면 양심과 어긋나게 행동하고 나서 꿈을 꾼 경우였다. 세월이 지나면서 그러한 증세는 사라졌지만, 지금도 그때 일이 떠오를 때면 가슴을 쓸어내리는 버릇은 여전하다.
#2022제주시교육_스물한번째호에 게재(제주시교육지원청, 2022.12. pp206~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