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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of Japanese Folksong
일본 포크송의 역사
글ㅣ구가 후에타 (문화평론가)
정리, 감수ㅣ박성서 (대중음악평론가)
1.
일본 포크송의 역사를 두루 살필 수 있는 인터넷 사이트를 소개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필자는 일순간 당황하였다.
유감스럽게도 그러한 사이트는 매우 드물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사이트를 바탕 삼아 일본 포크송의 일반적인 통사(通史)를 재구성하는 일도 여간 어렵지 않음은 물론이다.
인터넷 안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대부분 가수 측에서 운영하는 공식 사이트거나 음반회사의 홍보용 사이트거나
그렇지 않으면 팬들의 애정으로 이루어진 팬 사이트 정도일 뿐이다.
이러한 단편적인 사이트들에서 포크송 전체 역사를 바라보겠다는 문제의식을 찾아내기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반면에 서적 형태로는 ‘구로사와 스스무(黒沢進)’ 것이 주목할 만하다.
이 음악연구가의‘일본 록기 포크편(日本ロック紀 フォーク編, シンコー・ミュージック, 1992, 현재 절판)’은
상세한 포크송통사의 결정판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런데 바로 이 책이 인터넷 포크송 사이트 속의 통사를 꾀하는 이에게는 크나큰 장벽이 될 수 있다.
일본의 인터넷 세계에서는 저작권이나 판권 문제에 대한 관계 기관의 법률과 기준이 워낙 엄격하고 까다로워서,
자칫 인터넷 사이트에서 위 책 내용을 되풀이하거나 모방함으로써 봉변을 당하게 되는 일을 모두들 꺼리는 형편이다.
아마 그래서 쓸 만한 포크송 사이트가 생겨나기가 더욱 힘든 것 아닌가 싶다.
이런 형편에서 그나마 우리의 갈증을 달랠 수 있는 사이트로는 ‘위키피디아(Wikipedia)’와 ‘유튜브(YOU TUBE)’를 들 수 있다.
‘위키피디아’는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여전히 수많은 자원봉사에 의해 세계 각 국어 판의 집필과 편집이 계속되어 나갈 무료 백과사전인데,
이 백과사전의 일본어판은 영어판 다음으로 정리가 잘 되어 있다.
특히 일본의 서브컬처에 대해서는 최적의 안내서가 될 것이다.
네티즌 여러분은 이하 이 글의 일본어로 된 고유 명사들을 복사해서 ‘위키피디아’ 검색창에 입력해 주시면
그것들에 대한 대강의 지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또 ‘유튜브’는 무료 개방 동영상 사이트인데, 여기서는 가수들의 모습과 노래를 꽤 많이 접할 수 있다.
이 글에서 필자는 ‘유튜브’ 내 동영상의 링크를 제시하였는데, 문제는 여기가 업데이트와 삭제가 빈번히 이루어지는 곳이므로
대상 동영상이 언제든지 갑자기 삭제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그럴 경우에도 역시 이 글에 나오는 일본어로 된 고유명사를 ‘유튜브’ 내 검색창에 입력하여 검색하시면 좋은 자료를 얻을 수 있겠다.
‘유튜브’ http://www.youtube.com/
‘위키피디아’ 일본판 http://ja.wikipedia.org/wiki/
‘위키피디아’의 ‘포크송(フォークソング)’ 항목을 보면, 일본의 포크송은 ‘포크(フォーク)’라고 지칭될 때가 많다고 지적되고 있다.
여기서 ‘포크송’은 그 본래의 뜻인 ‘민요’이기보다 미국에서 50년대 말부터 60년대 초에 걸쳐서 유행한 ‘현대식 민요’ 즉, ‘모던 포크송’을 가리킨다.
그리고 ‘모던 포크송’이라 하면 킹스턴 트리오(Kingston Trio)나 브라더스 포(Brothers Four) 등의 연주 스타일을 상기하면 될 것이다.
그런데 일본에서 토착화(?)된 ‘포크’는 이러한 미국 것과도 또 다르게 인식되고 있는데, 이 글도 이러한 구별에 따라 집필해 나가도록 하겠다.
그리고 일본의 포크송은 미국 포크송과 구별하여, 제목을 제외한 본문 속에서는, ‘포크’라는 명칭으로 지칭토록 하겠다.
2.
일본 포크송의 시작
원래 일본에서 ‘포크’라는 것이 일반 대중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장미가 피었다(バラが咲いた)’라는 노래가 1966년에 크게 히트했을 때부터이다.
노래한 가수는 당시 일본대학(日本大学) 예술학부 방송학과에 재학 중이었던 ‘마이크 마키(マイク真木)’다.
당시 일본에서 유행 중이었던 ‘로커빌리(rockabilly, ロカビリー; 엘비스 프레슬리 풍의 음악)’나
‘그룹사운드(group sounds, 약칭 GS, グループサウンド; 이른바 록 밴드)’ 가수들이 날라리 풍 인상을 연출하고 있었던 것에 비해,
이 노래를 부른 마이크 마키가 점잖은 우등생이라는 이미지를 지닌 채
통기타와 심플한 코드 진행으로 평범한 일상생활을 노래하는 모습을 보여준 모습은 그야말로 신선함 그 자체였다.
대학 안에서는 ‘모던 포크 쿼텟’이라는 아마추어 그룹으로 활동하고 있었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나듯이
마이크 마키는 미국 모던 포크송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에서는 이러한 류의 포크를 ‘칼리지 포크(college folk, カレッジフォーク)’라고 불렀다.
‘마이크 마키’의 공식 사이트 http://www.havmercy.co.jp/mike/mike.html
‘장미가 피었다’는 대중적으로는 큰 인기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포크를 지향하는 젊은이들에게서는 심한 혹평을 받거나 심지어는 증오의 대상마저 되었다.
이 노래가 미국의 모던 포크송을 표면적으로 모방하여 일본 대중들이 소화하기 쉬운 소비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수가 스스로 작사와 작곡을 한 것이 아니라
상업적인 기성 가요계의 대표적인 음악가인 ‘하마구치 구라노스케(浜口庫之介、1917-1990)’가 만들었다는 사실 때문에 집중적으로 공격을 받았다.
예를 들어 ‘잭스(Jacks, ジャックス)’라는, 제법 카리스마가 있는 일본 포크록 밴드가 있는데,
그 그룹의 음반 중에 ‘롤 오버 구라노스케’(음반회사의 압력에 의해 ‘유라노스케’라고 변경되어 발표함)라는 노래를 들 수 있다.
물론 비틀즈(Beatles)의 ‘롤 오버 베토벤(Roll over Beethoven)’의 패러디인 이 노래는 하마구치 구라노스케를
기성 가요계의 상징으로 보고 ‘배금주의자이자 야바위꾼’이라며 심하게 매도하였다(LP『ジャックスの奇跡』東芝エキスプレス EP-7726).
‘잭스’에 관하여 http://www3.ocn.ne.jp/~zip2000/hayakawa.htm
필자 개인적으로는 하마구치 구라노스케는 대중음악 작가로서의 재능이 대단하였다고 생각하는데,
또 그가 심하게 매도된 이유도 어지간히 짐작할 만하다.
하마구치 구라노스케는 그때그때 유행하는 음악을 소화해 내어 유행가로 만드는 데에는 당시 최고의 실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하와이안 음악에서 시작하여, GS(록 가요), 칼리지 포크, 그리고 수많은 아이돌 가요 등과 같이 여러 부류의 음악을 가지고 히트송을 만들었다.
그는 대중 욕구의 방향을 잘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에게 한 가지 결여된 것은 아마 자신의 주장이나 사회에 대한 항의 등의 자세일 것인데,
그러한 것은 당시 기성 가요계에서 (그리고, 아마도 현재의 가요계에서도) 살아남기 위해서는 필요 없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시대는 변해' 갔다.
3.
간사이 포크송
미국 포크송이 점잖은 모던 포크송에서 시작해 격렬한 사회 비판성을 지니게 된 데에는
미국 사회가 공민권 운동이나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 등으로 고양되었던 사정이 있었는데,
일본 사회에서도 유사한 상황이 생겨나고 있었다.
1965년에 일본에서 ‘베트남에 평화를! 시민연합(“ベトナムに平和を!市民連合”; 약칭 “ベ平連”)’이라는 시민운동 조직이 발족되었다.
1969년 봄, 이 ‘베평련(ベ平連)’의 젊은 멤버들은 도쿄(東京) 신주쿠(新宿) 역 서쪽 출구 광장에서 ‘포크 게릴라’로 등장하여
일반 보행자에게 노래를 통해 반전 메시지를 호소하기 시작하였는데, 점차 이 호소는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이 자연발생적인 집회는 매주 토요일 밤에 행해져 엄청난 수의 일반 통행자들까지 밀려들어 노래와 토론이 전개되었다.
얼마 후 경찰이 이 서쪽 출구 광장을 ‘통로’라고 개명해 집회를 금지함으로써 ‘포크 게릴라’ 활동을 못 하게 할 정도로 여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참가하였다.
그런데 그 때 불리었던 노래는 대부분 도쿄에서 활동하는 가수들 것이 아니라,
오사카(大阪)와 교토(京都)를 중심으로 하는 간사이(関西) 지방에서 활동하던 가수들 것이었다.
사실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에 걸쳐 일본 포크의 중심지는 분명히 간사이였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크게 역사적인 배경을 말하자면 간사이 지방은 태평양전쟁 당시 군국주의 파시즘화에 저항했던
‘전협(全協)’이라는 전국적 노조 조직의 간사이 지부가 제일 마지막까지 버틴 곳으로 유명하다.
또 간사이에는 교토대학(京都大学)과 그 외 대학의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한 시민운동의 전통이 남아 있었고,
게다가 일본 역사의 어두운 부분이라 할 수 있는 ‘피차별 부락(部落)’을 거점으로 하는 ‘부락 해방운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들에서 알 수 있듯이 도쿄 지역에 비해 비교적 진보적인 풍토가 유지되고 있었기에 간사이는 당시 포크의 중심지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정치, 사회적 이유보다 좀더 직접적인 이유가 있었다.
이 때 도쿄에는 기성 주류 음반 회사가 많이 존재한 반면 간사이에는 이러한 주류 음반 회사가 없었던 것이 좀더 결정적이었다 할 수 있겠다.
주류 음반회사를 통하여 음반을 낼 경우 전국 판매점을 망라하는 유통망에 진입할 수 있으나,
대신 음반 회사들이 “자발적으로 만들었다.”는 윤리 규정을 따라야 했다.
1955년에 발족한 ‘레코드 제작 기준 관리 위원회(’레코드 윤리 심사회(レコード倫理審議会)‘라고도 함. 통칭 레코륜(レコ倫))’는
지금도 판매 음반의 가사에서 사회적, 정치적으로 문제가 있는 부분을 찾아내 지적하고,
각 음반 회사는 그 지적에 따라 가사 변경이나 발매 중지 등의 조치를 취하는 식으로 검열을 실시하고 있다.
이 주류 음반 회사의 폐쇄적인 언론 검열은 국가의 명령이나 통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업계 각 회사들의 자발적인 모임에 의한 것이라는 형식을 띠고 있기에 정치적 이유를 들어 비판하기도 어려웠다.
일반인은 이러한 윤리 규정이 있는지조차 몰랐기에, 창작인의 소중한 재능은 남모르게 왜곡되고 말살되어 버렸다.
이 조직이 교육, 경찰 관료의 낙하산 인사의 목적지가 되고 있음은 말 할 것도 없다.
이에 비해 오사카나 교토에는 주류 음반 회사가 없었기 때문에 비교적 자유로운 음악 표현이 가능하였다.
도쿄와 간사이 지방의 이러한 음악 풍토의 차이를 잘 나타낸 것이 바로 ‘ ‘임진강’ 발매 금지 사건‘이다.
4.
'포크 크루세이더즈'의 대성공
당시 간사이에서는 아마추어 대학생 밴드가 자비출판 형태로 음반을 제작해서 스스로의 힘으로 판매에 나섰던 일이 있었다.
그런 대학생 밴드 중 하나인 ‘포크 크루세이더즈(Folk Crusaders, フォーククルセーダーズ)’가
1967년 졸업 기념으로 불과 3백장만 제작한 앨범 안에 수록되었던 ‘돌아온 주정뱅이(帰ってきたヨッパライ)>’라는 노래가
심야 방송을 통하여 갑자기 큰 화제가 된 것이다.
이것에 주목한 도쿄의 주류 음반 회사들이 그들을 스카우트하려고 치열하게 쟁탈전을 펼치기도 했다.
결국 그들은 졸업과 밴드의 해산을 연기하고, 일 년만이라는 약속으로 프로 포크 가수가 되기로 결심한다.
‘도시바(東芝) 레코드사’에서 1968 년에 재발매된 ‘돌아온 주정뱅이’는 100만 장이 넘는 히트를 기록했는데
이것은 ‘오리콘(Oricon, オリコン, Original Confidence의 약자, 일본의 레코드 업계의 통계 기록 회사)’이 기록을 시작한 이래
최초의 밀리언셀러 레코드가 되었다.
그리고 포크 크루세이더즈가 두 번째 음반을 통해 발표하려 한 것이 ‘임진강’이라는 노래였다.
이것은 그들의 오리지널 곡이 아니고, 한국의 월북 시인 박세영(朴世永) 작사에 고종한(高宗漢) 작곡의 노래였다.
임진강을 건너 남북을 자유로이 넘나드는 새를 보면서 나는 왜 남쪽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인가, 누가 조국을 분단했는가 하고 묻는 내용이었다.
이 노래는 당시 교토에 사는 재일 조선인 젊은이에 의해 많이 불리었던 것이므로
일본인인 포크 크루세이더즈의 멤버가 이를 노래 한 것은 그들에 대한 신뢰와 사랑 그리고 우정의 표시에서였다, 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일본과 북한 그리고 한국의 복잡한 대립이나 국내 여러 단체로부터의 항의를 두려워한 도시바 레코드사는 이것을 발매 중지하였다.
연이어 이 노래는 모든 텔레비전과 라디오에서 방송금지까지 되어 버렸다.
어떤 기록에 의하면 도시바 레코드사의 모회사인 도시바 전기가 당시 한국 시장에 진출을 시도하고 있어
이 노래가 정치 문제화할 것을 걱정한 나머지 벌어진 사건이라고 한다.
(이 사태는 지난 2006년 2월에 한국에서도 개봉된 일본 영화 ‘박치기!(パッチギ!, We Shall Overcome Someday!)’의 배경으로 재현되었다.
포크 크루세이더즈의 노래도 이 영화에 사용되었음을 덧붙인다).
‘포크 크루세이더즈’의 ‘임진강’
http://www.youtube.com/watch?v=6n2NLi76pZc&mode=related&search=
영화 ‘박치기!’의 공식 블로그 http://blog.naver.com/pacchigi/
그 후, 포크 크루세이더즈는 ‘임진강’의 멜로디를 역회전하여
거기에 가사를 적은 노래 ‘슬퍼서 참을 수 없다(悲しくてやりいれない)’를 히트시키는 통쾌한 복수를 한 뒤 일 년 후에 약속대로 해산하였다.
‘슬퍼서 참을 수 없다(悲しくてやりいれない)’
http://www.youtube.com/watch?v=l3vJRQ4doYY&mode=related&search=
이처럼 ‘임진강’사건은 도쿄의 음반업계와 간사이 지방의 포크 문화의 어긋남을 여실히 드러낸 사건이었다.
5.
'URC 레코드'의 발족
그리고 포크 크루세이더즈와도 인적 교류가 깊었던 오사카의 이벤트 기획자 ‘하타 마사아키(秦政明)’라는 인물이
간사이 포크의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그는 ‘다카이시 도모야(高石友也)’라는 간사이 포크의 상징적인 가수를 발굴하여 키웠다.
그리고 ‘URC(Underground Record Club) 레코드’라는 새로운 음반회사를 설립하였다.
다카이시 도모야는 1941년 홋카이도(北海道) 출생인데, 도쿄의 릿쿄대학(立教大学)을 중퇴한 후
토목 작업이나 라면 포장마차를 끌고 다니는 일을 하면서 오사카에 이르렀다.
그리고 1966년 10월 10일, 하타가 주최한 콘서트에서 객석으로부터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불렀다.
그의 노래를 듣고 충격을 받은 하타는 거주지가 일정치 않았던 다카이시를 자택에 살게 한 뒤 ‘다카이시 사무소’라는 새로운 회사를 만들기까지 하는 등
그의 강력한 프로모터가 되었다.
노동조합이나 학교, 반전 집회, 노동자 음악 협의회(労音) 등을 돌아다니면서 이인삼각으로 포크 운동 행각을 시작했던 것이다.
이 다카이시 도모야의 노래에 격려를 받아 후에 ‘포크의 신’이라고 불리게 되는 ‘오카바야시 노부야스(岡林信康)’나,
‘다섯 개의 붉은 풍선(五つの赤い風船)’을 이끌어나가는 ‘나시오카 다카시(西岡たかし)’ 등과 같은 재능 있는 가수들이
하타가 운영하는 ‘다카하시 사무소’로 모여들었다.
더 나아가 하타는 자신의 곁으로 모인 가수들의 노래가 기성 음반 회사의 윤리 규정을 통과 못할 것이라 판단한 끝에 독자적인 판매망을 구축하려 하였다.
이것이 바로 회원제 음반 전달 클럽인 ‘Underground Record Club’ 즉 ‘URC’였다.
1969년 2월에 발족한 이 클럽은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회원수의 증가를 보여, 결국 새로운 레코드 회사인 URC 레코드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일본 사회가 반전 운동과 대학가 투쟁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던 것이 URC 레코드에는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베평련(ベ平連)’의 ‘포크 게릴라’들은 다카하시나 오카바야시의 노래를 중심으로 노래하였다.
덧붙이자면 URC 레코드에는 포크 가수뿐 아니라 일본의 록 밴드도 모여들었다.
앞에서 언급한 ‘잭스’를 비롯해서 ‘해피 엔드(はっぴえんど)’ 등이 바로 그들이었다.
일반적으로 일본 포크는 록 음악과의 친화성이 높다.
미국에서 밥 딜런이 모던 포크송의 스타일에서 포크록으로 전환하려 했을 때 큰 반감을 일으켰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는데,
이는 포크 가수들과 록 가수들이 URC 레코드을 통하여 깊은 인적 교류를 가졌던 사실에서 그 까닭을 찾을 수 있다.
URC 레코드 가수들의 노래가 소위 안방극장에까지 진출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미 대중적으로 절대적인 인기를 얻고 있던 포크 크루세이더즈가 자신의 콘서트에는 꼭 URC 레코드의 가수들을 게스트로 초대함으로써
URC의 광고탑 역할을 해주었다.
지금 일본 가요계의 상식에서 보면 각기 다른 음반 회사의 가수들이 같은 무대에 올라 공연을 하는 일이 극히 드물다.
그들이 여러 가지 복잡한 계약이나 권리 관계에 구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그 시대가 얼마나 자유로웠던가를 실감할 수 있을 정도다.
‘URC 레코드’의 역사에 관하여 http://avex-io.com/urc/history.html
‘다카이시 도모야’(직접 다카이시에 해당하는 것을 찾을 수 없어
1970~80년대에 그가 활동했던 포크 그룹인 ‘나타샤 세븐(ザ・ナターシャ・セブン, The Natasher Seven)’ 것을 제시한다.
http://www.youtube.com/watch?v=uSN-uwd4BaI
‘오카바야시 노부야스’의 ‘우리가 원하는 것은(私たちの望むものは)’
http://www.youtube.com/watch?v=VUn85axMlEA]
‘“니시오카 다카시’와 ‘다섯 개의 붉은 풍선’
http://www.youtube.com/watch?v=uQGC9odicFk&mode=related&search=
‘잭스’http://www.youtube.chttp://www.youtube.com/watch?v=WOsUjsiUQU0om/watch?v=WOsUjsiUQU0
6.
마지막으로,
'다카다 와타루가 교토로 내려왔다!'
그리고 드디어 도쿄에서 활동하던 가수들도 URC 레코드로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그 대표적인 가수가 ‘다카다 와타루(高田渡)’였다.
일본 포크의 역사를 개략적으로 소개하는 이 글은 일단 일본 포크 최대의 전성기였던 1969년까지에서 글을 맺으려 하는데,
그 마무리로는 일본 최고의 포크 가수인 다카다 와타루에 대한 이야기가 적당할 듯하다.
최근 10년 정도 사이에 1960~70년대 포크에 대한 관심이 높아가고 있다.
CD로 재발매된 음반들의 홍보 목적으로 만들어진 의도적인 붐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완전히 다른 감성을 가진 젊은 청중이 그 시대 음악을 접하며 감흥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역사라는 것은 잔혹하기에, 당시 절대적 인기를 자랑하던 가수의 노래가 지금 와서는 듣고 있을 수 없을 만큼 고루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반대로 당시 그다지 대중적인 인기를 끌지 못했지만 지금 들으면 충격적으로 마음을 움직이는 가수도 있다.
후자의 대표적인 예가 다카다 와타루일 것이다.
그는 1949년에 도쿄에서 태어나 2005년 4월에 죽었다.
이쯤에서 필자의 개인적인 얘기를 하고 싶다. 필자는 그의 라이브 하우스에서 공연을 비교적 빈번히 볼 수 있었는데,
그의 외모를 보고는 60대 노인이라 어림짐작을 했었다.
위스키를 들이키면서, 연주곡의 순서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채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노래하는 그를 볼 때마다
필자는 ‘노인 치고는 대단히 강인한 몸을 가졌군!’ 하며 감탄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이 글을 위해 조사를 해 보니, 불과 56세의 젊은 나이로 죽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필자가 그의 라이브에 다니고 있었을 무렵, 그는 아직 40대 초반이나 중반 정도밖에 안 되었다는 말이 된다.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죽기 몇 년 전부터 다카다 와타루에 대한 주목과 재평가가 서서히 높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사망도 비교적 크게 기사화되었다.
하지만 역시 어느 신문도 대표작은 ‘자위대에 들어가자(自衛隊に入ろう)’라고 소개하고 있었다.
뭐, 사실이긴 하다. 그는 아이러니컬한 풍자노래 ‘자위대에 들어가자’로 유명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노래에 담긴 진정한 매력은 소리 높여 사회 비판을 외치는 노래 쪽에는 없었다.
길가에서 추위에 얼어붙는 부랑자나, 한 벌 밖에 없는 코트를 전당포에 팔러 가는 실업자와
전당포 주인의 흥정을 재현한 따위의 유머러스하고도 슬픈 노래 등,
사회적인 약자가 그대로 거기서 노래하고 있다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 리얼리티를 가진 노래들에 진정한 매력은 존재하였다.
그는 밥 딜런이 노래한 ‘The House of Rising Sun’이 지나치게 심각하다면서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다.
그래서 그는 ‘아사히관(朝日舘)’이란 제목으로 번안해서 이 노래를 불렀다.
낡은 창녀의 어리석은 혼잣말(일인칭)로 전개되는 그의 ‘아사히관(朝日舘)’은 청중의 웃음을 이끌어 냈다.
하지만 이윽고 모두의 가슴 안에 그 늙고 어리석은 창녀가 살게 되었다.
그에 관해 여전히 잊을 수 없는 이야기 하나가 있다. 1989년 겨울의 일이었다.
심야 TV 방송에 뜻밖에도 다카다 와타루가 출연하고 있었다.
몇 명의 포크 가수를 게스트로 불러 옛날을 그리워하자는 주제의, 별로 유쾌하지 못한 프로그램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다카다 와타루는 불쾌한 것 같은 표정으로 가만히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토론 도중에 각 게스트가 자신의 대표곡을 노래하는 코너가 있었지만 다카다 와타루는 한 곡도 부를 노래가 없었다.
(텔레비전의 윤리 규정은 레코륜(レコ倫) 것보다 한층 더 까다롭다.)
그의 불쾌한 표정이 이것 때문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은 것이 토론회가 끝나갈 즈음에 밝혀졌다.
그때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다카다 와타루는 돌연 일본의 ‘천황’(이 호칭이 일본인의 자민족 문화 중심주의적인 우월감에서 유래된 것이라는 비판에는
타당성이 있다고 본다. 일단 이 글에서는 ‘일본 천황’라는 호칭으로 표기하기로 한다.)에 대한 야유를 시작한 것이었다.
이 1989년이라고 하는 해는 현재 일본 천황의 부친인 쇼와(昭和) 천황이 암으로 쓰러져 기나긴 위독 상태에 빠져 있었을 때였다.
그 미묘한 시기에 일본 천황에 관한 이야기는 터부시되고 있었다.
1988년에 일본 천황에게 태평양전쟁의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는 개인적 견해를 말한 나가사키(長崎) 시의 모토지마 히토시(本島等) 시장이
우익에 의해 저격당한 사건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다카다 와타루의 말은 그 2시간 이상에 걸친 ‘프로테스트 송(protest song) 투사(鬪士)’들의 토론회에서
일본 천황에 대해 어떠한 언급도 없었다는 사실을 시청자에게 주지시켰다.
뿐만 아니라 일본 천황에 대해 언급해서는 안 된다는 사전 약속이 있던 것도 일깨워 주었다.
왜냐 하면 다카다의 발언에 의해 출연자 모두의 표정이 일제히 얼어붙어, 프로그램은 순식간에 막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나는 갈채했다. 그렇다. 원래 일본의 포크라는 것은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는 유일하게 그 포크의 영혼을 잃지 않고 살아 있었던 것이다.
‘다카다 와타루’의 ‘자위대에 들어가자(自衛隊に入ろう)’에 관하여
http://www1.linkclub.or.jp/~kury/ct/abunaiuta/jieitai.html
‘다카다 와타루’의 ‘자전거를 타고(自転車にのって)’ http://www.youtube.com/watch?v=XFUEiMzqsO0
‘다카다 와타루’가 작곡한 ‘생활의 격식(生活の柄)’, 노래하는 가수는 다카다의 친구이자 대표적인 포크 가수인 가가와 료(加川良)
http://www.youtube.com/watch?v=astt7q2vYHQ&mode=related&se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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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일본 문화평론가 구가 후에타에게 원고를 청탁, 대중음악평론가 박성서가 정리, 감수한 것입니다.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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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일본 포크송 역사에 대해 저는 잘모르지만 귀중한 자료와 글
올려주셔서 조금이나마 알게되어 고맙습니다 ~^^
일본 포크송에도 일본에 있을때 꽤 관심을 가졌었는데 정리되기 힘든 역사를 가진 것 같다고 막연하게나마 생각했었습니다. 이렇게 정리가 되는군요. 감사합니다...^^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오늘 오후 박인수님 공연 잘 마치시길 빕니다.
저는 부산으로 내려왔습니다.
귀한자료네요.
재미있게 읽다보니 조금 알것도 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