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바라기 꿈
- 광명 GIDC 반 고흐 더 이머시브
* 작가와 함께(2024. 6호)
차용국
광명시 GIDC 빌딩 전시관에서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 더 이머시브’가 열리고 있다. 전시관은 고흐의 작품 전시관, 이머시브immersive 영상실, 고흐 작품 스케치 인쇄물에 색칠하기 체험 등으로 꾸몄다. 요즘 전시관은 AR(증강현실)이나 VR(가상현실) 체험 공간은 기본이고, 날로 새롭고 세련된 테크노 그래픽techno graphic 영상기법이 등장하여 놀라움과 재미를 더해준다. 이러한 예술품 전시 기획은 새로운 IT 기술이 가미된 친밀성으로 젊은이들을 예술의 세계로 불러들인다.
물론 전통적인 갤러리gallery에서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도 적지 않지만, 요즘 젊은이들은 첨단 IT 시설이 갖추어진 도심의 복합 쇼핑몰 전시관을 선호한다. 그들은 그러한 환경과 문화를 기반으로 성장한 세대다. 그들은 다양한 볼거리와 먹거리가 두루 갖추어진 하나의 공간에서 충만함과 안정감을 느낀다. 그러니까 그곳은 그들의 크고 작은 일상과 기억의 지대이고, 만남과 소통이 이루어지는 광장이다. 그들은 그곳에서 만나고 얘기하고 관람하고 먹고 마시고 즐긴다. 그곳은 대개 접근성이 좋아서, 예술과 대중의 간격을 좁히고, 예술의 향유와 확산에 이바지하는 면도 적지 않다.
전시관 로비에 들어서자, 벽면에 온통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을 배경으로 <해바라기>가 피었다. 고흐는 1887년에 <해바라기>를 그리기 시작했고, 1889년에 <별이 빛나는 밤>을 그렸다. 이 시기를 살펴보면, 그의 삶에 크나큰 영향을 미친 사건과 변화의 분출이 감지된다. 물론 그가 그린 이 시기의 작품에서도 그런 변혁의 단서가 보인다.
<해바라기>는 고흐의 작품 중 하나이기도 하지만, 한 점의 그림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전 세계 갤러리에서 발견된 총 11개의 캔버스 시리즈를 지칭한다. 고흐는 1887년 파리에서 첫 번째 해바라기 시리즈를 그렸다. 그 시리즈는 탁자 위의 해바라기를 묘사하는 4개의 캔버스로 구성되어 있다. 그 후 2년 동안 화병 안의 해바라기를 묘사하는 두 번째 시리즈(1888-1889)를 그렸다. 이 시리즈는 총 7개의 캔버스로 구성되었다.
고흐의 해바라기는 색상, 특히 노란색을 중심으로 한 작품에 약 30가지의 서로 다른 색조를 사용한 점이 눈에 띈다. 그는 노란색을 중심으로 한 다양한 색상의 배치를 통해 나타나는 변화의 양상에 주목하고 몰두했던 듯하다. 그의 단순히 여러 가지 색의 조합을 통해서 해바라기의 활기찬 표현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해바라기 작품마다 화려함을 반전시키는 인상적인 효과를 강조했다. 어떤 해바라기는 꽃이 활짝 피고, 어떤 것은 시들고, 어떤 것은 씨를 수확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는 하나의 정물화 안에서 해바라기 삶의 각 단계를 묘사했다. 사람의 생애, 아니 자연 만물의 생애의 모습이 클크로즈업 된다.
고흐의 해바라기는 자연으로부터 영감을 얻는 동시에 그것을 자유롭게 표현한 듯 보이기도 하지만, 오히려 그 반전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는 "나는 과장하기도 하고, 때때로 모티프의 변화를 만들기도 하지만, 전체적인 그림을 창조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모든 것이 자연 안에 이미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단지 그것을 해석해야 할 뿐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해바라기를 통해, 그리고 그것들의 서로 다른 삶의 단계를 하나의 배열 안에서 배치 시켜서, 만물과 사람의 필연적 순환에 대한 은유를 보여주고 있다.
고흐는 첫 번째 해바라기 그림을 파리의 한 레스토랑 카페에 전시했다. 고갱은 그것을 발견하고 감동했다. 고흐는 용기를 얻었고 이사한 아를의 스튜디오에서 고갱과 함께 살면서 그림그리기를 희망했다. 그는 동생 테오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고갱과 함께 우리만의 작업실에서 살고자 하는 희망이 있고, 작업실을 위한 장식을 하고 싶다. 다른 것은 필요 없고 큰 해바라기면 되겠지. 꽃들은 빨리 시들고 그림을 한 번에 완성해야만 하기 때문에, 나는 매일 일출부터 그것을 그릴 거야." 고흐는 아를의 스튜디오에 고갱을 위한 손님 방을 만들고 해바라기 작품 몇 개를 걸었다. 고갱은 나중에 그 작품들을 "본질적인 '빈센트' 스타일의 완벽한 기록"이라고 말했다. 더하여 고갱이 <해바라기를 그리는 반 고흐>를 그리는 데도 영감을 주었다.
1888년 말경 고갱(Paul Gauguin, 1848~1903)은 고흐의 거듭된 요청을 받아들여 아를의 스튜디오로 왔다. 그들은 함께 작업했고 서로 자극도 되었지만, 심각한 갈등도 겪었다. 고갱은 아를을 떠나려고 했고, 고흐는 또다시 혼자 외롭게 남겨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12월 23일 저녁 고갱은 아를 시내를 홀로 걷고 있었다. 그때 고흐가 한 손에 면도칼을 들고 급히 쫓아왔다. 고흐는 아를을 떠나려는 고갱을 붙잡으려 하였지만, 고갱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고갱은 그날 밤 집으로 가지 않고 호텔에서 혼자 잤다. 다음 날 고갱이 집으로 돌아갔을 때, 집 앞에 경찰과 구경꾼들이 모여 있었다. 전날 고갱과 다투고 혼자 집으로 돌아간 고흐는 사창가에 찾아가 ‘라셸’이라는 창녀에게 피 묻은 귓불을 건네주며 “이걸 잘 간직해”라고 말했다고 했다. 고갱은 파리로 돌아갔다.
귀 거세 사건 이후 병원에 입원한 고흐는 1889년에 이르러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다. 그러면서 <자화상>, <레 박사의 초상>, <삼나무가 있는 밀밭>, <별이 빛나는 밤> 등을 그렸다. 1889년 이후 그린 그림들에는 구름·하늘·건초·낫·벽지 무늬 등에서 귀의 돌기 모양을 볼 수 있는 점이 인상적이다. 그림에 나타나는 직선과 곡선의 형상들은 소용돌이 형태로 변하고, 이전 그림에서 볼 수 없었던 귓바퀴 모양의 구불거리는 선으로 변한다. 귀가 있어야 할 인물의 얼굴에 귀를 삽입한 것이 아니라 화면 여러 곳에 귀를 그려 넣은 것이다.
일반적으로 자기 몸 일부를 절단하는 것은 비정상적인 행동이지만, 그런 자신을 그리는 것은 더욱 비정상적인 행동이다. 고흐가 자신의 귀를 스스로 잔인하게 잘라 버린 그림을 그린 것은 그에게 ‘결핍된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우리의 시선에는 보이지 않는 것. 우리가 이전에 보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세계로 인도하는 것 등 말이다. 1890년 2월 그는 편지에서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그리고 음악과 같은 색을 만들기 위해 점점 더 위험을 감수하고……”라는 글을 썼다. 또 다른 편지에서는 “나는 왜 음악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까”라고 썼다.
미술을 독학했던 고흐는 늘 자신의 재능과 실력에 만족하지 못했다. 더하여 그는 능력의 결핍을 용납하지도 현실에 안주하지도 않았다. 그는 해바라기를 그릴 때 수많은 색의 배합을 집요하게 실험했듯이, 소리와 그림의 일치를 상상하며 극단적일 정도로 몰두했다. 그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을 수도 있었는데, 그는 그것을 자신의 실패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는 소리가 색이 되게 할 수 없는 불가능성을 자신의 무능으로 받아들이고, 소리가 감지하지 못하는 자신의 귀를 스스로 자르기에 이르렀던 듯하다.
정신의학적 관점에서 이것은 정신질환자가 저지르는 자상自傷이다. 심리학자 라캉은 이런 현상을 “상징화할 수 없는 것이 현실 세계에 나타난” 경우로 보았다. 자신의 귀를 잘라내고 나서 정신을 되찾은 그는 그 귀를 자기 그림에 다시 그려 넣으려고 애썼다. 그는 음악과 회화가 분리된 현상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그 원인이 인간의 근본적인 청각적 장애에 있다고 믿었으며, 그런 식으로라도 행동하여 상징적으로나마 모든 것을 제자리에 돌려놓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그의 그림에 변화가 생겼을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체험을 글로 옮기고, 화가는 그림으로 옮긴다고 할 때 아마도 고흐는 그것을 상상으로, 그리고 실제로 경험한 ‘거세’를 그림으로 옮겼을 것이다.
고흐가 기쁨이나 고통의 외침이 들리는 그림을 그리려고 천착했던 것은, 정신착란에서 야기된 망상으로 치부할 수만은 없을 듯하다. 그가 소리의 울림을 그림에 담으려 했던, 어쩌면 불가능한 꿈을 향한 치열한 고뇌가 없었다면, 오늘날 고흐의 작품은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사실, 그는 이러한 불가능의 영역을 탐구한 덕분에 천재성을 발현할 수 있었다.
1890년에 이르러 고흐는 점점 더 깊은 절망의 늪에 속수무책으로 빠져들었다. 평생을 괴롭힌 간질과 정신분열증의 증세는 갈수록 더욱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소리와 그림을 일치시키려는 시도는 실패하였고, 사람들은 자신을 인정하지도 이해하지도 않는다. 단지 미치광이로 취급할 뿐이다. 자신은 신과 사람들로부터 사랑받지 못해 괴로워하는 사람일 뿐이라는 결론에 이르고 말았다. 1889년 그는 테오에게 쓴 편지에 “난 그저 지나치게 몰입한 예술가의 상태에 있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라고 썼다. 또 다른 편지에는 “내 작업을 생각하면 몹시 후회스러워. 내가 그리고 싶었던 대로 되지 않았어”라고 썼다.
1889년 7월 테오의 부인은 편지로 고흐에게 임신 사실을 알리며, 만약 사내아이라면 그의 이름을 따서 ‘빈센트’라고 부르겠다고 했다. 그녀는 시아주버니가 대부가 되어 주기를 바랐다. 고흐는 이 편지를 받고 자신이 죽음으로써 세상을 떠날 때가 다가오고 있음을 예감한다.
사실 ‘빈센트’ 반 고흐의 가족 이름은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고흐의 할아버지와 삼촌의 이름도 ‘빈센트’였다. 1852년 3월 30일 고흐가 태어나기 1년 전 사산死産된 그의 형 이름도 ‘빈센트’였다. 아버지 테오도루소는 고흐의 동생을 자신의 이름과 같은 ‘테오’로 불렀으며, 여자 누이의 이름에는 어머니와 이모(혹은 고모) 이름을 붙여주었다. 이처럼 몇 가지 이름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중복적으로 복잡하게 사용되면서 고흐 가문의 세대 개념은 완전히 무너졌다. 누가 누구인지, 누가 죽고 누가 살았는지, 헷갈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내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서서히 사라져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또 달리 방법이 없다면, 나는 슬픔의 먹이가 되고 절망의 희생자가 될 수밖에 없을 거야. 내가 너나 다른 사람들에게 폭탄이나 짐이 되어 버렸고, 전혀 쓸모없는 불청객이나 무위도식자로 여겨질 것을 생각하면 차라리 사라져 버리는 편이 낫다고 생각해.”
고흐는 새로운 ‘빈센트’가 태어나면 자신은 사라져야 할 대상인 ‘빈센트’가 되어야 한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가 해바라기 시리즈에서 활짝 핀 꽃, 시든 꽃, 씨를 수확할 꽃을 묘사한 것처럼, 그것이 자연과 사람의 자연스러운 순환일 것이었다. 고흐는 다음 해인 1890년 7월 가슴에 총을 쏘아 자살했다. 테오도 6개월 후 사망했다. 장례식에서 고흐의 관은 그가 평소 애정을 가졌던 노란색 꽃들로 장식되었다. 그를 기리며 친구 가세 박사는 그의 무덤에 해바라기를 심었다.
※ 참고 자료
-광명 GIDC 전시관 안내문
-장 피에르 윈터·알렉상드라 파브로 지음, 김희경 옮김, 『명작 스캔들 Ⅱ』 , 2012, 이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