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속 편린들
아름다운 것은 반드시 사라지지만 소멸하기 직전이 가장 아름답다. 매우 잔인한 모양으로 변모하므로 아름다움은 배반을 동반한다. 다만 누구에게도 시간표를 귀띔해 주지 않을 뿐 사라진다는 약속은 어기지 않는다. 사라져 주면 좋을 기억들이 제약 없이 맴돈다.
낙엽이 초록이었을 때 바람을 등허리에 마구 밀어 넣고 그토록 잎을 우려먹었다. 그러다 햇살이 누그러져 열기가 사라진 틈을 타 메말라 죽게 하였다. 햇살의 잔가시가 앙상한 잎 사이 가냘픈 늑골 여기저기를 마구 헤집어 놓았다. 한때 뜨겁게 달아오르던 더위조차 바람에게 주소를 물어 떠났다. 아무 곳에나 뒹굴어 몸 던지는 것. 버려진 추억 속 갈피에 좌초한 은행잎. 그 속엔 기억들이 켜켜이 쌓여 죽지 않은 유해로 꿈틀거리고 있다. 대빗자루 끝에서 털려 나간 꽃잎도 기억을 안고 떠났다.
대지에 물결치는 기쁨. 그 속에 빛나는 생명. 그윽한 침묵 속에 침잠한 유해들. 그들은 반추를 거듭하는 기억을 품었다. 부모님께 얼마나 효심으로 엎드렸던가. 아내와는 충분히 교감했던가. 친구들의 진실 없는 교언영색巧言令色을 향락하기 위해 나는 얼마나 나의 생명을 낭비 했던가.
활 만드는 사람은 탄력을 다루고, 배 부리는 사람은 물길을 다룬다. 목수는 무늬를 다루고, 지혜로운 자는 자기를 다룬다. 목표는 즐거움을 추구하지만, 즐거움은 고통을 동반한 아픔으로 누적된다. 그럴 때면 하늘 끝에서 노려보는 싸늘한 조각달이 나를 조소하고 있음에 전율한다. 바람도 구름도 스쳐 지날 뿐 아무런 위로도 되지 않는다.
거울에 반영된 나를 향해 묻는다. ‘너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느냐?’ 나는 얼굴을 붉히지 않고 곧 대답할 수 있는 생각을 갖고 있지 않음에 소스라친다. 인간이라는 위대함은 힘없이 사라진다. 동물과 구별되는 자기비판이 어디론가 소멸한다. 선각들이 애써 남겨놓은 각성은 글자 나부랭이가 되고 만다.
나를 다루는 지혜 익히기에 게을렀다. 가슴에 매달린 고드름이 아직 녹지 않았다. 윤리위기는 때때로 몸뚱이 하나 옴짝 못하게 옥죄어왔다. 종교지식은 마음속 고드름을 한 발이나 더 늘어뜨렸다. 나는 나를 다루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그래서 신념을 포기와 맞바꾸는 일상을 거듭 하였다. 타협에 서툴러 소갈머리를 드러냈다.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는 위선으로 내 것을 챙겼다. 감언이설에 휘둘려 현실을 왜곡하곤 하였다. 선동을 리더십으로 오인하여 실속 없이 앞장서는 것을 자랑삼았다. 오지랖을 적극성으로 위장하였다. 지식을 지혜 인양 인용하며 어휘를 농락했다.
나는 외롭다고 느껴본 적이 없다. 혼자라서 답답할 일도 없다. 다만 신들이 내 비위를 맞추어주지 않는다고 생각될 때 탄식하고 절망한다. 니체를 괴롭힌 신이 어떻게 죽었는지 알 만하다. 공맹孔孟이 왜 신神 이야기를 입에 올리지 않았는지 알아가기 시작한다. 기적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증명 불가능한 과학현상을 증명하고자 시도한다.
아무리 훌륭하게 꾸며도 원숭이는 원숭이에 지나지 않는다. 특히 사람은 조금만 연습하면 금방 원숭이 흉내를 낼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원숭이는 원숭이임을 알아 신을 찾지 않는다. 반면 사람은 신과의 교감을 보챈다. 그러나 막상 신이 보내는 감응에는 아랑곳 하지 않는다.
기억 저편에 도사린 영상은 오솔길에 쌓인 낙엽처럼 앙상한 가벼움으로 세월을 보듬고 누웠다. 낙엽 한 장 들추면 청년이 나오고 또 한 꺼풀 들추면 유년이 나온다. 추억은 낙엽이 되어 빛도 잃고 향도 없이 앙상하게 포개져 있다. 기억인지 추억인지 아리송한 물안개 저편 소실점에 머물고 있는 과거를 곱씹는다.
돌로 담을 쌓으려면 잉카족의 손놀림처럼 빈틈없이 돌을 주물러야 한다. 얼굴은 주름져도 아름다움을 유지하는 노인이 있다. 꾸미기를 체념한 늙은 표정에는 순수마저 정화된 처연함이 배어있다. 돌을 다듬듯 삶에 가치를 더하느라 세월이 소비되고 그 사이 주름은 이랑을 이루었다.
쾌락으로 찌든 생애, 호피로 덮은 거실 바닥, 주름 없는 노안老顔은 향기가 없다. 그러느라 바람 없는 봄은 없고, 태풍이 뒤따라 여름을 쓸어간다. 자기연민은 천치 같은 미소 끝에서 햄릿 같은 비애와 춘향 같은 향기를 추렴한다. 그렇듯 윤회를 실어 나르느라 물이 흐르고 바람이 분다.
모든 존재는 합당한 이유가 있어 존재한다. 다만 존재들이 존재가치를 모르고 있을 뿐이다. 내 잔인한 기억 또한 분명 그랬어야 할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부당한 까닭만 남고 아름다운 이유는 다 사라져 버렸다. 삶의 본질이 영혼을 만나러가는 여행이라면 나 이제 멈추어 서서 잠재의식이 들려주는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고자 한다.
우선 번뇌라고 하는 잡초를 베어내고 빈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그 첫 번째 잡초가 스산한 기억들이다. 비우고자 하는 노력이 없으면, 이루고자 하는 욕망이 망상妄想처럼 소란스럽게 밀려든다. 잊혀진 영혼이 들려주는 독백을 뒤적여 들을 때가 되었다. 부지깽이로 산소를 불어 넣는 뒤적임도 면벽참선 못지않다. 타버린 재처럼 과거는 재현되지 않는다.
자아는 무리 속에서 찾을 길 없다. 인간에게 고독이라는 선물을 준 것은 자아를 찾으라는 일깨움이다. 고독하지 않은 시간이면 또 하나 무가치한 기억을 쌓고 있는 순환에 매어 있음이다. 혼자여야만 실행 가능한 작업은 고독해지는 일이다. 원숭이는 고독해지면 나무를 타고, 인간은 고독할 때 사유思惟라는 바다에 몸을 담근다.
인간이라는 위대함은 자기비판을 통해 원숭이와 구별 짓는다. 이것은 혼자인 삶에서 느끼는 고독이 더욱 중후하기에 가능한 분별이다. 못다 씻은 각질처럼 등짝에 눌어붙은 기억 위에 나는 덧칠을 한다. 다음에 다시 지구촌에 올 때는 부디 맑고, 밝고, 향기로운 존재로 등장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