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전당집 제10권 / 묘지명(墓誌銘)
[인물요약]
■박준(朴峻)
1559년(명종 14) - 1625년(인조 3) / 향년 67세
조선시대 효행으로 정려를 하사 받은 효자로, 본관은 비안(比安). 자는 자첨(子瞻). 할아버지는 선교랑(宣敎郞) 박계인(朴繼仁)이고, 아버지는 삭주부사(朔州府使) 박희성(朴希聖)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로 청계군(淸溪君) 이채(李彩)의 딸이다.
1604년(선조 37) 풍병을 앓는 아버지를 지성으로 간호하여 낫게 하였고, 임진왜란 때 학질을 앓는 계모 민씨를 업고 피난하느라고 처자를 돌보지 못하여 마침내 부인 박씨까지 잃었다. 이러한 효행으로 1604년 헌릉참봉(獻陵參奉)에 제수되었다.
1606년 아버지의 상을 당하자 3년 동안 시묘하며 애통해한 효행으로 정려가 세워지고, 『동국신속삼강행실(東國新續三綱行實)』에 실렸다. 1610년(광해군 2) 귀후서별제(歸厚署別提)가 되었으며, 1611년 청백리의 후손이라 하여 동부주부(東部主簿)·감찰 등을 거쳐 1613년에 신령현감이 되었으나 관찰사의 모함으로 파직되었다. 1623년 다시 비안현감으로 나가 암행어사에게 추천을 받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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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안 현감 박공 묘지명병서(比安縣監朴公墓誌銘 幷序)
공의 휘는 준(峻)이고, 자는 아무개이며, 본관은 비안(比安)이다. 가계는 신라 박지상(朴池上)의 후예로, 병산군(屛山君) 우(瑀)가 하사 받은 땅에 거주하여 병산(屛山)을 본적으로 삼게 되었으니, 지금의 비안이다. 본조에 들어와 휘 서생(瑞生)은 야은(冶隱 길재(吉再)의 문도로 벼슬하여 이조 참판이 되었는데, 청렴과 지조, 올곧은 명성으로 당시에 소문이 났고, 청백리에 선발되었으며, 후손이 녹용(錄用)되기에 이르렀다.
고조 신원(信元)은 글씨에 조예가 있어 실제 《해동명적(海東名迹)》을 편찬하였으며, 관직은 군수에 그쳤다. 증조 강(綱)은 경기전 참봉을 역임하였으며, 조부는 계인(繼仁)이다. 부친 희성(希聖)은 삭주 부사(朔州府使)로, 승정원 좌승지에 추증되었으며, 종실 청해군(靑海君 이채(李彩)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가정(嘉靖) 기미년(1559, 명종14) 10월 14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14세에 모친의 상을 당했다. 부사군(府使君)이 중풍을 앓자 공은 부축하고 약시중을 들면서 밤낮으로 하늘에 빌었다. 새벽에 당시 어의였던 허준(許浚)의 집을 찾아갔는데, 허준은 매우 강직하여 막고서 집으로 들이지 않았다. 이후 공은 날마다 닭이 울기만 하면 찾아갔는데, 오래되어도 게으른 모습을 보이지 않자 허준이 공의 지극한 효성을 살펴 드디어 왕래하며 치료해 주었다.
임인년(1602, 선조35)에 부사공의 병이 다시 발작하였다. 갑진년(1604)에 병세가 더욱 위독해졌는데, 공이 손가락을 베어 피를 약에 타서 드리자 병이 마침내 나았다. 조정에서 소문을 듣고 가상히 여겨 헌릉 참봉(獻陵參奉)에 임명하고, 얼마 뒤에 효경전(孝敬殿) 참봉으로 바꾸어 임명했는데, 모두 부친의 병간호 때문에 사직하고 물러났다.
부친의 상을 당해서는 예에 따라 장사와 제사를 지내고, 3년 동안 죽을 먹었으며, 묘소 곁에 여막을 짓고 아침저녁으로 무덤을 살폈다. 하루는 들불이 묘 앞까지 번져 공이 홀로 울부짖으며 가슴을 쳤는데, 갑자기 바람이 반대 방향으로 불어 불이 꺼지니, 고을 사람들이 기이하게 생각했다.
계모와 서모를 섬김에 있어서는 사랑과 공경이 모두 지극했다. 과부가 된 누이에게 딸이 하나 있어 집에 데려다 길러 주었는데, 분별을 두면서도 은혜를 베풀었다. 부사공에서 공에 이르기까지 2대에 걸쳐 형제가 함께 살았는데 살림을 나눈 적이 없었으며, 규문 안이 화목하였다. 고을에서 공의 훌륭한 행실을 아뢰어 정려를 세워 표창하였는데, 사실이 《동국신속삼강행실(東國新續三綱行實)》에 실려 있다.
경술년(1610, 광해군2)에 천거되어 귀후서 별제(歸厚署別提)에 임명되었다. 신해년(1611)에 청백리의 자손이라는 이유로 몇 등급을 뛰어넘어 동부 주부(東部主簿)에 임명되었다가 사헌부 감찰로 자리를 옮겼다. 계축년(1613)에 신녕 현감(新寧縣監)에 임명되었는데, 관찰사가 법에 어긋나는 일로 공을 압박하자 공이 버티며 따르지 않다가 마침내 파직되어 돌아왔다. 당시의 정치가 날마다 잘못되는 것을 보고는 마침내 충주(忠州)에 우거하여 벼슬하려는 뜻을 접었다.
계해년(1623, 인조1) 반정이후에 곧바로 비안 현감(比安縣監)에 임명되었다. 어사가 고과가 가장 높다고 아뢰자 특별히 백서(帛書)를 내려 포상하였다. 정경세(鄭經世) 공이 영남에서 조정에 들어왔을 때, 임금이 영남의 어진 수령을 묻자, 정경세가 공을 언급하여 대답하였다.
을축년(1625)에 관사에서 세상을 떠나니, 나이가 67세였다. 고을의 부로(父老)들이 자제들을 이끌고 경계지역까지 곡을 하며 전송하였다. 이해 10월 27일에 적성(積城) 경신동(慶新洞)에 있는 선영 오좌(午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공은 두 번 장가를 들었다. 첫 번째 부인은 금성 박씨(錦城朴氏)로, 묘가 양주(楊州) 북작동(北鵲洞) 곤향(坤向)의 언덕에 있는데, 공의 묘소와 3리도 안 될 정도로 가깝다. 두 번째 부인은 정씨(鄭氏)로, 현경(賢慶)의 따님인데, 부인의 법도가 있었고 공을 도와 덕을 행하였다.
박씨는 딸 하나를 두었는데, 정직(鄭溭)에게 출가하였다. 정직은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 경연(慶演)은 참봉이며, 딸은 현감 이장영(李長英)에게 출가하였다. 경연은 3남 2녀를 두었고, 장영은 4남 1녀를 두었다. 정씨는 2남을 두었는데, 종악(宗岳)과 진악(震岳)이다.
종악은 아들 한 명을 두었는데, 민(岷)이다. 진악은 1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영(嶸)이다. 측실 소생 아들 차악(次岳)은 4남 5녀를 두었다. 명은 다음과 같다.
가정에 훌륭한 행실 있어 / 修于家
마을에 정려 내려 표창 하였네 / 表于閭
후세에도 알리기 위하여 / 詔于后
외사씨(外史氏)가 기록하였네 / 外史書
[주01] 비안 …… 묘지명 : 이 글은 박준(朴峻, 1559~1625)에 대한 묘지명이다. 본관은 비안(比安), 자는 자첨(子瞻)이다.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장유승 권진옥 이승용 (공역) |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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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比安縣監朴公墓誌銘 幷序
公諱峻。字某。比安人。系出新羅朴池上之後。屛山君瑀仍胙土。爲籍屛山。今爲比安。入本朝。有諱瑞生。以冶隱門徒。仕爲吏曹參判。廉操直聲。聞於時。選淸白吏。至錄後。高祖信元。工翰墨。實定海東名迹。官止郡守。曾祖綱。慶基殿參奉。祖繼仁。考希聖。朔州府使。贈承政院左承旨。娶宗室靑海君之女。以嘉靖己未十月十四日生公。年十四。遭母喪。府使君患風痺。公扶服侍醫藥。日夜籲天。晨扣時御醫許浚家。浚亢甚。拒不納。公日日聞鷄而往。久而不懈。浚察公誠孝。遂往來看護。壬寅。府使公疾復作。甲辰轉𠫷。公斷指和藥以進。疾竟瘳。朝廷聞而嘉之。除獻陵參奉。俄換孝敬殿。皆以親癠辭遞。曁遭慘。葬祭以禮。三年啜粥。廬于墓側。朝夕參省。一日野火延及墓門。公獨身號擗。忽風反火止。鄕人異之。事繼母庶母。愛敬俱至。寡妹有一女。館而畜之。能別而恩。自府使公至公。二世兄弟同居。未嘗析產。閨門之內雍如也。鄕里白公至行。棹楔表閭。事載三綱行實。庚戌。薦拜歸厚署別提。辛亥以淸白吏子孫。超授東部主簿。轉司憲府監察。癸丑拜新寧縣監。按使以不法事臨之。公持不從。竟罷歸。見時事日非。遂寓居忠州。無仕宦意。癸亥反正。卽除公比安縣監。御史奏最。特賜帛書以優之。鄭公經世自南中入朝。上問嶺表賢守令。經世擧公以對。乙丑卒于官。年六十有七。縣中父老率子弟哭送境上。是年十月二十七日。卜葬于積城慶新洞先塋午坐之原。公凡再娶。元配錦城朴氏。墓在楊州北鵲洞坤向之原。距公墓不三里而近。次配鄭氏。賢慶之女。有婦則。佐公爲德。朴氏生一女適鄭溭。溭生一男一女。男慶演參奉。女適李長英縣監。慶演三男二女。長英四男一女。鄭氏二男曰宗岳,震岳。宗岳一男岷。震岳一男二女。男嶸。側出男次岳。有四男五女。銘曰。
修于家。表于閭。詔于后。外史書。<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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