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인의 종교에서 야훼의 신전은 오직 예루살렘에만 존재할 수 있고 그 신전에서만 제사를 올리거나 예배를 드리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바빌론에 잡혀간 유다인들은 제사와 예배를 드릴 수가 없으니 종교의 자유가 있으나 마나였다. 이러한 위기에서 종교 지도자들은 신전에서의 제례 의식보다 믿음을 갖고 율법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설득했다.
이렇게 해서 시나고그(Synagogue)가 탄생했다. 이곳에 신자들끼리 모여 성경과 율법을 낭독하고 기도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예배의식이 시작되었다. 60년 만에 예루살렘으로 귀향한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의 방해로 수십 년 걸려 소박한 형태로나마 야훼 신전을 재건했다. 시나고그도 세웠다. 이때부터 신전과 시나고그가 함께 존재했다.
시나고그는 예배, 공부, 그리고 회의라는 세 가지 용도로 활용되었다. 예루살렘의 신전 예배에 참가할 수 없는 사람들은 지역에 있는 시나고그에서 예배했다. 다만 시나고그에서는 제례의식을 지내지 않았다. 시나고그에는 사제 대신 랍비가 있었다. 랍비는 성직자가 아니라 평신도였다. 랍비는 학식이 높은 학자로 자연히 지역 공동체의 지도자 역할을 하고 재판관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인생 문제의 상담역이 되기도 했다. 랍비도 설교를 하지만 그것은 본질적으로 교사의 가르침으로 간주되었다. 랍비는 높은 학식과 도덕성으로 권위를 인정받았다. 지금도 랍비는 신부나 목사처럼 예배와 의례를 주도하지 않고 따로 생계수단을 갖고 있다.
시나고그는 공부하는 곳이었다. 유대교에서는 성경과 율법을 공부하는 것이 기도하는 것만큼 중요하다고 가르친다. 배움으로 신의 섭리를 이해하고 신에게 다가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유대교에서는 성경과 율법에 관한 공부가 바로 신앙생활이다. 랍비는 율법을 해석하고 공부를 돕는 역할을 하며 질문과 토론으로 학습을 진행했다. 또한 유다인들은 시나고그에서 공동체의 크고 작은 일을 의논하고 처리했다. 이처럼 시나고그는 공동체 생활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기원전 334년에 페르시아 원정을 시작한 알렉산드로스 왕이 페르시아의 대군을 격파하고 이집트로 가기 위해 팔레스타인으로 진격해 왔다. 유다인들은 해방자 페르시아에 대한 충성 문제로 분열되었으나 결국 저항 없이 항복했고 알렉산드로스는 유다인의 종교를 인정했다. 페르시아 정복을 완수하고 바빌론에 도읍을 정한 알렉산드로스가 기원전 323년에 열병으로 급서하자 예하 장군들이 제국을 분할하였다.
계승국가들의 왕가는 마케도니아 혈통이었고 마케도니아인들과 그리스인들이 귀족계급을 형성했다. 팔레스타인은 안티고누스 왕국에 속했다가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으로 넘어갔다.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은 알렉산드리아를 수도로 이집트를 차지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마지막 파라오 클레오파트라는 마케도니아인과 그리스인의 혈통이었다.
기원전 200년 셀레우코스 왕국은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에게서 팔레스타인을 빼앗았다. 유다인들은 기원전 166년에 반란을 일으켜 기원전 164년 12월 25일 예루살렘을 점령했다. 기원전 142년에는 유다 땅에서 셀레우코스 왕국의 군대를 몰아내고 완전한 독립을 이룩했다. 이를 하스모니아 왕조라 한다. 기원전 586년에 유다 왕국이 멸망한 후 444년만이다. 기원전 140년 셀레우코스 왕국은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유역을 파르티아에게 빼앗기고 시리아만을 차지한 소국으로 전락했다.
예루살렘 성채 - 하스모니아 왕조 시대 건물
BC 121년의 형세
로마 장군 폼페이우스가 기원전 64년에 시리아를 정복하고 다음해에 예루살렘을 점령했다. 로마는 유다왕국을 속주로 편입하고 유다이아(Judaea)라 불렀다. 한국에서는 유대라고 한다.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기원전 30년 로마의 옥타비아누스에게 정복되어 그리스인에 의한 오리엔트 지배가 막을 내렸다.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혈통이 오리엔트를 지배한 약 300년간을 헬레니즘 시대라고 한다. 이 시기에 유다인들은 제국 전역의 여러 도시로 퍼져 나갔다. 팔레스타인의 유다인들은 지중해 연안으로 나갔고 바빌론에 잔류했던 유다인들은 동쪽 내륙으로 퍼져나가 중앙아시아의 실크로드 주변까지 진출했다. 이렇게 확산된 유다인 공동체를 거점으로 유다인에 의한 국제무역이 급속도로 발전했다. 최대의 상업 도시로 번영한 알렉산드리아는 1백만 명의 인구 가운데 40%가 유다인이었다. 헬레니즘 시대에는 그리스어가 오리엔트 세계의 국제어였다. 상업에 종사하던 유다인들은 그리스어를 자연스럽게 사용했고 젊은이들은 히브리어를 거의 잊어버리고 있었다. 이 때문에 유다인 학자들이 모여 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했다.
하스모니아 왕조의 살로메 알렉산드라 여왕(재위 BC 75 ~ BC 67)은 이름에서 나타나듯이 헬라화된 인물이었지만 생각은 남달랐다. 알렉산드라 여왕은 모든 국민이 성경을 읽고 율법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우선 가장들에게 글을 가르치고자 전국에 걸쳐 학교를 설립하고 모든 성인 남자에게 의무교육을 실시했다. 교사양성소도 설치했다. 이후 유다인 사회에서 최소한 가장들은 글을 읽고 쓸 수 있었다.
그 뒤로 유다인들은 열세 살에 성인식을 치르기 위해서는 ‘모세 오경’ 즉 창세기, 출애급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중 한 편을 반드시 모두 암기해야 했다. 그리고 성인식에 참석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성경을 토대로 자신이 준비한 강론을 해야 했다. 이러한 전통은 유다인의 지적 능력을 향상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히브리인들이 장사에 능한 것은 타고난 자질이라기보다 교육의 힘이다. 히브리인들은 성경을 읽기 위해 어려서부터 글을 배웠다. 여러 가지 장부를 기록해야 하는 상업에는 읽기, 쓰기와 계산 능력이 필수적이다. 특히 원거리 국제무역은 계약서와 물품 목록을 작성해야 하고, 물품을 받거나 보낼 때 관련 증빙서류를 작성해서 동봉해야 하고, 멀리 떨어진 거래처와 서신을 주고받아야 하며, 상품의 시세와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해서 문서로 정리해야 한다. 자금계획을 수립하고 원가와 비용과 이익을 계산해야 하며, 나라마다 화폐가 달라서 환전 계산에도 익숙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문맹인 사회에서 글을 안다는 것은 대단한 경쟁력이다. 글을 읽고 쓰고 계산에 능한 유다인들은 어딜 가도 쉽게 자리 잡았고 무역으로 부를 축적했다.
인류 역사 대부분의 시기에 유대인을 제외한 거의 모든 사람들은 문맹이었다. 16세기에 금속활자가 발명될 때까지 책은 손으로 써야 했기에 어느 나라에서나 대단히 귀했다. 하층민들은 책을 볼 기회조차 드물었고 글을 전혀 몰랐다. 특히 중세 예수교 사회는 성직자를 제외하고 대부분 문맹이었다. 중세 시대에 문맹은 수치가 아니었고 기사들에게는 오히려 용맹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왕족이나 귀족들 중에도 문맹이 적지 않았으며 상류층 가운데 일부만 글을 읽을 수 있었다.
12세기 후엽 프랑스 남부에서 부유한 몇몇 식자가 성경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여 새로운 종파를 만들었다. 이렇게 탄생한 알비파와 발도파는 교황의 권능을 부정하고 성경만을 믿을 것을 길거리에서 설교하며 신도를 늘려갔다. 교황청은 그들을 파문하고 군사를 일으켜 대대적으로 토벌하고 처형했다.
이후 1229년 교황 그레고리 9세는 신자들이 이단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평신도는 성경을 소유하거나 읽거나 번역할 수 없다는 금지령을 내렸다. 성경이 숨겨져 있다고 의심되는 곳은 가차 없이 수색했고 적발된 자는 종교재판에 회부하여 화형에 처했다. 이런 상태가 5백 년 동안 계속되었다.
유대교가 기원전부터 공부를 의무화한데 반해서 예수교는 문맹을 강요했다. 예수교 사회에서 글을 아는 사람은 성직자와 일부 귀족뿐인데 이들은 상업을 천시했다. 유대인에게는 토지 소유는 물론 농사 일 자체를 금지해서 유대인은 장사 밖에 할 일이 없었다. 유대인이 국내상업과 국제무역에 앞장선 것은 첫째로 그것 밖에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공부를 열심히 했으니 문맹 사회에서 경쟁력이 우월했다. 또한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 공동체가 국제적 네트워크 역할을 하여 정보를 교환하고 상부상조했다. 이런 요인들로 원거리 무역을 석권할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