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게가 물어 뜻듯 꽉 쥐고 우지끈하자 부지직 부지직 소릴 연발하는 기기. 순식간 형체는 알 수없이 되어 버렸다. 이 보다 ‘인정사정 볼 게 없다.’ 란 말을 실감나게 표현할 장면은 없지 싶다. 나이 탓인지 지켜보는 마음이 괜스레 조마조마하고 착잡하기 까지 하다.
저 장비로 말 할 것 같으면 한때 내 노라 하는 국내 몇 없다는 실험 테스트 장비가 아닌가. 들어올 때 고사도 지내고 포만감이 연구소 전체에 그득했었다. 숫한 해 박사논문도 만들고 유명타하는 학술지에 뽐을 내며 소문자자한 명품이란 말을 늘 듣고 지냈던 기기다. 사람으로 치면 이분으로 말 할 것 같으면 ‘00이시며 00이시며’ 를 대여섯 족히 단 명사격인 주제다.
그런 명품이 한 순간 그야말로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고정 자산에 생기는 가치의 소모를 결산기마다 계산하여 자산의 가격을 감해 가는 회계 상의 절차. 감가상각. 회계장부상 감가상각 셈수가 이제 더 이상 용납이 안 되는 상황에 다다른 것이다. 이를 우리는 불용자산이라 부르고 시중에선 고물이라 말한다.
즉 용도 수명을 다한 기기이다. 사람도 나이가 들면 흡사 용도의 가치를 다한 양 퇴직을 하고 사회와 자연 멀어진다. 요즘은 중도 탈락도 심심치 않은 게 갈수록 용도 수명이 짧아지는 추세다. 명품 고물이 처참히 무너져 어느새 퇴물 테이블 곁에 나란히 자리를 한다. 어제만 해도 존재의 가치론 비교도 안됐는데 이제는 동료 고물이다.
어제의 가치는 어제이고 고물로서의 등급은 따로 있다. 신이 난 집게차를 보면 단박에 알 수 있다. 마구 휘두르는 폼이 흡사 대어를 낚은 양 한다. 고물은 재활용이 가능한 철판이라면 최고의 가치이다. 천도 넘는 용광로를 거쳤던 철판은 이제 새 삶을 위해 다시 용광로를 향하는 채비를 할 것이다.
우리도 재활이라 할까. 그와 같은 부활이라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말이 시중에 있다. ‘남자나이 오십이면 잘 났던 놈이나 못 났던 놈이나 그 얼굴이 그 얼굴이고, 남자나이 육십이면 많이 배운 놈이나 못 배운 놈이나 그 머리가 그 머리고 남자나이 칠십이면 돈 많은 놈이나 돈 없는 놈이나 돈 쓸 일 없기는 매한가지다.’
씁쓸한 이 말은 용도를 중시하는 한 사회의 단면이고 독설일 뿐이다. 사람들은 사회를 너무 따르기 때문 이세상 전부인 양 종종 착각을 한다. 나이 들어 팔다리도 쑤시고 자연 고물이 되는 마당 나는 굳이 헉헉대며 사회를 추종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급급한 사회는 용도를 챙길 뿐 목적에는 관심이 없다.
하늘의 뜻을 안다는 지천명(知天命), 천지만물(天地萬物)의 이치에 통달하고, 듣는 대로 모두 이해할 수 있다는 60세 이순(耳順), 이 나이가 바로 삶을 목적으로 바라볼 좋은 때가 아닐까 싶다. 시중의 말대로 그 나이엔 돈도 재물도 별반이고 지식도 보잘 것 없는 지능으로 전락한다. 나는 이렇게 늙고 싶다가 그런 의미의 쉬운 표현이 아닐까. 어려서는 이를 감내하거나 감당하기가 쉽지 않다.
생각에 따라서는 홀가분하여 만사가 편하고 쾌청한 사랑의 가을 하늘일 수 있다. 사유할수록 이 세상은 넓고 해야 할 일도 많다. 가끔 자신의 과거를 유창하게 현재성으로 말하며 과거를 늘려 만끽하려는 분들을 만나곤 한다. 난 그럴 때 솔직히 쓴웃음이 난다. 아직도 명예와 권위에 매달리는가 싶고 소견이 좁다 여겨진다. 철 지난 괜한 용도에 붙들려 자기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란 생각도 한다.
나는 용도가 아닌 목적, 지식이 아닌 지혜의 삶으로 부활한다면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아니 난 가끔 감히 골동품을 꿈꾸기도 한다. 누구나 갖고 싶어 하는 골동품은 오랜 과거인데 미래를 수용한다. 고물인데 용도로서 찾지는 않는다. 품위 있는 골동품은 뭔가 다른 구석이 있다. 그만의 역사를 갖고 예술성을 지니고 세월을 초연하여 영혼을 갖고 산다.
너저분하게 널린 큰 평수를 차지한 마당 한가득 고물을 치우는데 고작 한 시간도 채 안 걸렸다. 채우니 8톤 트럭이 전부고 값은 1천오백만원. 철판이 아니었더라면 5 백 만 원도 안 되는 값이다. 난 고물인 줄 모르고 과거를 들먹이며 용도로서 제 값을 받으려고는 결코 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그야말로 볼품도 포기한 고물이다.
대신 값으론 절대 평가가 불가한 자유로운 목적의 영혼을 꿈꾸며 나만의 역사를 만들며 살겠다. 나는 용도의 물품이 아닌 고유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회와 작별하는 고물기기가 내게 많은 생각을 전한다. 부디 고성능 정밀 질량 분석기여, 잘가라!!!. 그간 찌지직 고문의 전기 맛 잘 견디며 수고했다. 비록 형체는 사라졌지만 이제 내 영혼은 자유다. 마음 속에 너를 간직해두마.
(조성원 님의 수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