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문 碑文에 쓴 짝사랑
서오릉 명릉은 조선왕조 19대 숙종의 왕릉 王陵이다. 비각 안에 있는 비문 뒷면은 다음과 같이 써져있다.
숙종현의광륜예성영렬장문현무경명원효대왕 숭정기원후 34년 신축 8월15일 탄생 갑인년(1720년) 6월 8일
승하 하였다.
숙종肅宗은 묘호廟號이다. 왕의 사후에 종묘에 봉안하는 신주의 이름자이다. 우리가 기억하는 임금의 이름이다.
현의 顯義는 시호 諡號이다. 임금의 사후에 중국으로부터 받는 이름으로 우리가 미리 사지선다형의 이름을 지어
들고 가서 그중 하나를 점지 받았다고 한다. 광륜부터 대왕까지 16자는 존호 尊號에 해당되며 신하들이 상의하여
평소 임금의 품행을 적어 봉헌한 것이다. 당신님의 팔뚝님은 참으로 굵었나이다.
잘 모르지만 대체로 그런 것이 아닐까 ?
외국사신이 조문을 왔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숭정기원후 34년(1661년)이 그 것이다. 숭정은 명나라 마지막
임금 의종의 연호이다. 숙종이 돌아가신 해 1720년은 중국역사에서 청의 4대 강희제(1661-1722) 5대 옹정제 6대
건륭제(1735-1795) 등이 현재의 넒은 영토와 외국문물을 받아들여 가장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고 있었다.
그때는 명나라가 멸망한지 100년도 지난 때였다. 독실한 청나라 사신은 왕릉까지 참배하겠다고 고집한다.
어찌할거나 이미 없어진 명나라에 대한 짝사랑이 발각되는 것이다. 그때까지도 청나라는 소중화 小中華
조선에서는 오랑케의 나라였다. 숭정기원후 어쩌고는 너희는 오랑케 비문명 나라라는 간접 표현일수도 있다.
임금의 특명을 받은 접대 팀은 전력을 다해 현장참배를 막았다. 그렇지만 사신이 돌아간 후 조선의 접대 팀은
유배 길에 올랐다. 몸통은 어디가고 왜 깃털만 수난을 받는 것일까 ? 지금이랑 비슷하다.
사랑과 가난은 숨길 수 없다는 격언이 있다. 그때까지 우리는 명나라에 사대 事大 하는 사랑과 가난 같은 청나라에
대한 멸시를 숨기지 않고 살았다. 18세기는 역동의 시대였다. 산업혁명이 일어나 세계는 자본주의가 싹트고 불란서
혁명은 시민의 권리를 찾아 주장하기 시작하고 미국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였으며 청나라도 중국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비문 碑文에 쓴 짝사랑은 이루어 진 것일까 ?
짝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어서 실체도 없는 명나라를 100년도 넘게 사랑한 것은
당신 명나라의 은혜는 만구비를 돌아서 동쪽나라 조선에서 꽃피우리라는 만절필동 萬折必東의 소중화 小中華 사상
때문이다. 안타까운 짝사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