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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와 공산주의
공산화와 종교는 별 관계 없지만 기독교교리인
이웃사랑을 실천했다면 애초에 공산주의 출현은 없었을 것
김용규 철학자·‘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의 저자
2013년 새해를 맞는 우리 문화계에는 ‘레미제라블’ 열풍이 일고 있다. 경기도 용인 포은아트홀에서 뮤지컬 ‘레미제라블’이 라이선스공연으로는 한국 초연으로 막을 올렸고, 서울 종로구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에서는 박장렬 연출 연극 ‘레미제라블’이 성황리에 공연 중이다. 민음사가 지난 11월 출간한 빅토르 위고의 원작소설 ‘레미제라블’도 총 5권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과 만만치 않은 가격(6만1000원)에도 불구하고 단 3주 만에 3만5000부가 팔렸다. 12월 19일 대통령 선거 날에 맞춰 세계 최초로 개봉된(미국보다 일주일가량이나 앞섰다) 톰 후퍼 감독의 영화 ‘레미제라블’ 역시 연말 극장가를 노리는 쟁쟁한 작품들을 모두 따돌리고 흥행 1위를 기록하고 있다. 대사를 노래로 표현하는 ‘송 스루(Song Through)’ 형식이기 때문에 작품에 몰입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을 감안하면 놀라운 일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시대를 초월하는 위대한 작품의 힘 때문일 것이다. 당신도 잘 알다시피 ‘레미제라블’은 저주받고 비천한 한 인간이 어떻게 성자(聖者)가 되어가는지를 그린 매혹적이고 강렬한 서사를 갖고 있다. 장발장의 이 같은 변모를 작가는 “놀라운 덕이 나타나고 있었다. 그의 광대무변함 속에 겸손하고 온화한 최고의 덕이. 이 죄수는 예수로 변모하고 있었다”라는 말로 묘사했다. 그뿐 아니다. 이 작품은 통렬한 사회적 메시지도 담고 있다. 위고는 서문에 “지상에서 무지와 빈곤이 존재하는 한 이러한 책들도 무익하지는 않으리라”라고 겸손을 떨었지만, 이 작품이 간직한 메시지가 던진 파장은 달랐다. 프랑스에서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렸다는 이 소설은 워터루전쟁(1815), 왕정복고, 7월혁명(1830), 2월혁명(1848)으로 이어지는 혁명기를 배경으로 빈곤에 시달리고 압제에 찌들던 민중의 절망과 희망을 절절하게 묘사했다. 그것을 통해 위고는 인간과 세상을 바꾸는 진정한 힘은 사랑과 자비라는 것을 강력하게 설파했다.
하지만 이것이 지금 우리나라에 불고 있는 ‘레미제라블’ 열풍을 모두 설명할 수 있을까? 아니다. 내 생각에는 뭔가 다른 이유, 즉 이 작품에 호응하는 시대적·사회적 요구가 함께 하고 있는 것 같다. 빈부격차의 완화와 사회적 불평등의 해소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그때와 지금이 전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20세기 말에 이루어진 공산주의의 몰락과 함께 잊혀져가고 있는 교훈이 있다. 소설 ‘레미제라블’에서 공화주의자들이 파리에서 바리게이드를 치고 “굶주림, 착취, 곤궁으로 인한 매춘, 실업으로 인한 비참” 등으로부터의 해방을 외치고 있던 바로 그 시기에, 영국 런던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인간이 천하고 속박되며 버림받고 경멸당하는 존재가 되는 모든 관계를 철폐하기 위한” 공산당선언(1848)을 선포했다는 사실이다. 경제적·사회적 불평등이 폭동과 혁명을 부른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부터 이 같은 불평등의 기원과 그에 대한 해법으로서의 공산주의 사상과 기독교의 교리를 살펴보고자 한다. “천주교와 공산주의는 상극이라 하는데, 천주교도가 많은 나라들이 왜 공산국이 되었나?”라는 고 이병철 회장의 질문에 대한 답은 그 가운데서 밝혀질 것이다.
쓰레기가 된 인간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가 ‘제1의 물결’이라고 이름 붙였던 ‘농업혁명’은 기원전 9000년경 유프라테스 강변에서 시작되었다. 이 지역은 땅이 비옥한 데다 일찍부터 농업기술이 발달해 주민들이 늘고 정착지가 확대되었다. 이것이 고대 도시국가의 출발이다. 초기 청동기 시대인 기원전 3000년경에는 유프라테스 강변에만 10여개의 도시국가가 번성했다. 그러자 주변의 사막을 떠돌던 다양한 유목민들이 풍요와 안정이 보장된 그곳으로 몰려들었다. 이들의 이동은 도시국가 주민들이 순조롭게 받아들일 때는 정상적인 이주였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테러 또는 전쟁으로 변했다. 도시국가 주민들은 질서 구축과 경제 발전을 위해 이들이 성곽의 ‘밖에서’ 자기들끼리 따로 살게끔 했다. 최초의 신분 구분이자 차별이었다. 이것은 한 사회가 어떤 형태로든 안정된 조직을 갖추게 되면 그 조직은 구성원들에게 신분을 부여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때 신분은 조직이 부여하는 정치적·사회적·법적 보호 ‘안에 있는 사람(insider)’과 그 ‘밖에 있는 사람(outsider)’을 구분하는 역할을 한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도시국가에서는 성곽(城郭)이 그러한 구분과 차별의 징표였다.
1세기 초에 활동했던 로마 시인 오비디우스가 그 불길한 징표를 가장 먼저 알아챘다. 그의 시 ‘아모레스’에는 성곽 ‘밖에 있는 사람’들의 탄식이 실려 전해오고 있다. “오래전…/ 어느 누구도 보습으로 땅을 파헤치거나/ 토지를 분할하거나/ 노를 저어 바다를 휩쓸지 않았다/ 해안은 세계의 끝이었다 / 영리한 인간의 본성, 당신의 발명들의 희생/ 파격적이면서 창조적인/ 왜 탑처럼 높이 솟은 벽돌로 도시를 경계 짓는가?” 성곽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가장 긴박하고 중요한 문제는 살아남는 일이었다. 그들은 스스로 무장하고 자신들의 생명을 지켜야 했고, 목축업·어업·수공업을 하여 성곽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착취를 당하며 물건과 용역을 공급해 생계를 유지했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이 같은 사람들을 아카드어로 하피루(hapiru), 또는 하비루(habiru)라고 불렀다. 요컨대 하비루들은 농업혁명이라는 문명화가 낳은 불가피한 산물로서–폴란드 출신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이 ‘쓰레기가 되는 삶’에서 사용한 표현을 빌리자면–“인간쓰레기,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쓰레기가 된 인간들”이다.
갑자기 문명화 이야기를 꺼낸 내 의도는 단순하고 명백하다. 인류 역사를 살펴보면 새로운 생산방식과 그에 따른 새로운 생활양식, 새로운 사회제도가 정착될 때마다 이와 같은 일들이 되풀이되어 일어났다는 사실을 당신에게 제시하려는 것이다. 정말이냐고? 그렇다. 생산수단과 생활양식, 사회제도가 바뀔 때마다 ‘경제 발전’과 ‘질서 구축’을 명목으로 유무형의 새로운 성곽이 세워졌고, 그 ‘안에 있는 사람’과 ‘밖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 구분과 차별이 생겨났다. 문명화는 구분화이자 차별화다. 고대 그리스, 로마에서도 그런 일들이 있었다. 보다 크게 보아, 토플러가 ‘제2의 물결’이라 부른 ‘산업혁명’이 일어난 19세기 영국과 유럽 각국에서 그런 일들이 다시 한 번 일어났다. 부르주아지(유산계급)와 프롤레타리아트(무산계급)라는 구분과 차별이 그것이다. 한마디로 프롤레타리아트는 산업혁명이 낳은 하비루, 곧 쓰레기가 된 인간들이다. 그리고 이들이 혁명을 일으켜 공산국가를 세웠다.
다시는 노예가 되지 않겠다는 이들의 노래
‘공산당 선언’이 출간된 1848년은 역사가 다시 한 번 소용돌이친 해였다. 이해에 유럽 대부분의 주요 도시에서 인간의 평등을 외치는 혁명이 일어나 여러 왕조가 무너지고 공산당이 설립되었다. 당시 유럽 각 나라에서는 산업혁명의 결과로 수많은 사람들이 제강업이나 방직업에 종사하기 위해 도시로 몰려들었다. 예를 들어 19세기 초에 7만명 정도였던 영국의 맨체스터 인구는 1831년에 이미 두 배로 늘어났고, 1801년 98만8000명이었던 런던의 인구는 1851년에는 236만3000명으로 불어났다. 이들이 도시 빈민층을 형성했는데, 그들의 빈곤과 비참은 ‘레미제라블’의 묘사를 능가했다. 마르크스는 이 가난한 사람들을 ‘프롤레타리아트’라고 불렀고, 엥겔스는 그들을 보고 “초라한 몰골의 부녀자와 아이들이 떼를 지어 여기저기 돌아다니는데, 그 모습이 쓰레기더미와 진흙탕에서 자라는 돼지만큼이나 더럽다”라고 묘사했다.
도시는 이들을 감당할 수 없었다. 하늘은 공장 굴뚝이 내뿜는 오염물질로 뒤덮여 있었고, 상수도·하수도 같은 기본 시설들마저 갖춰지지 않았다. 그러자 콜레라와 같은 전염병들이 창궐했고, 새로운 산업병인 폐결핵이 무섭게 번졌다. 영국의 어느 지방에서는 유아 3명 중 1명이 첫돌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마르크스도 역시 3명의 아이를 잃었다.) 이런 환경에서 마치 부르주아지의 노예처럼 하루 14시간 이상을 일하는 노동자들은 비참할 뿐 아니라 단명했다. 1842년에 작성된 한 정부보고서는 맨체스터 노동자와 그 가족들의 평균 수명이 17세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그들은 그야말로 쓰레기가 된 인간들이었다. 이에 대한 현실적이고 과학적인 대책을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처음으로 강구했다. ‘공산당 선언’이다.
공산당 선언은 뮤지컬 ‘레미제라블’에서 젊은 공화주의자들이 바리케이드 위에서 부르던 ‘두 유 히어 더 피플 싱(Do you hear the people sing)’의 가사인 “다시는 노예가 되지 않겠다는 이들의 노래”가 구체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선언이다. 또한 그것은 기원전 9000년경 유프라테스 강변에서 시작된 문명화 이후 최초로 시도된 새로운 생산방식과 분배방식의 출현을 선포하는 것이기도 했다. 마르크스는 ‘첫 단계의 공산주의’(엥겔스는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생산에 따라 분배한다고 했다. 하지만 ‘더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엥겔스는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각자는 능력에 따라(일하고), 각자에게는 필요에 따라(분배한다)”라고 했다. 하지만 이들의 이상은 실현하기에 너무 벅찼다. 볼셰비키혁명 이후 공산주의는 점차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동의어로 쓰였고, 스탈린 체제부터는 ‘전체주의의 상징’이 되었다. 그리고 망했다. 프롤레타리아, 곧 산업혁명이 낳은 하비루들의 경제적·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혁명은 실패로 끝났다.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기독교는 달랐다. 경제적·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기독교의 방법은 ‘혁명’이 아니라 ‘사랑’이다. 기독교가 말하는 사랑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하느님(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사랑은 사실상 둘이 아니고 하나다. 하느님(하나님)사랑이 없이는 이웃사랑을 할 수 없고, 이웃사랑을 하지 않고는 하느님(하나님)사랑을 할 수 없다는 것이 기독교 교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는 공적인 생애 3년 동안 시종 이웃사랑을 교훈했다. 예컨대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마태복음 22:39, 누가복음 10:27)고 가르쳤다. 이웃사랑이 경제적·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하는 데에 혁명보다 더 근원적이고 효과적이라는 것이 예수의 생각이고, 기독교 교리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가 말하는 ‘이웃’이 누구냐 하는 것이다. 누가복음에 그 답이 들어있다. 한 율법사가 예수에게 물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누가복음 10:29) 이때 예수가 그에게 들려준 것이 ‘착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다.(누가복음 10:30~37)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나 강탈과 폭행을 당해 죽어가고 있었다. 그곳을 지나던 유대교 제사장과 레위 사람이 보고 피해 지나갔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부정하다고 여기는 사마리아인은 그 사람을 구했다. 이야기를 마친 예수가 율법사에게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겠느냐”라고 묻고, “자비를 베푼 자니라”라고 교훈했다. 이 말은 우리가 자기 자신처럼 사랑해야 할 이웃이란 고통과 위험에 빠져 있는 성곽 ‘밖에 있는 사람’들, 곧 쓰레기가 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려 준다. 예수는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빌려 자신의 사명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였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누가복음 4:18~19)
엄밀히 말해 기독교는 하비루들의, 하비루에 의한, 하비루를 위한 종교다. 모태인 유대교부터 그렇다. 유대인을 가리키는 말인 ‘히브르(hebrew)’의 어원이 바로 하비루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는 히브리인들은 본디 성곽 ‘밖에 있는 사람’들로서 떠도는 사람들이자 쓰레기가 된 사람들이었다. 아브라함 자신도 13번이나 거처를 옮기며 살았고 아내를 묻을 땅 한 평이 없어 헷 족속에게 엎드려 사정하여 겨우 동굴이 붙은 텃밭을 샀다.(창세기 23 : 4)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신이 이 하비루들을 특별히 사랑했다. 신의 아들 예수도 마찬가지다. 그 자신 마구간에서 태어나 평생을 성곽 밖을 떠도는 쓰레기가 된 사람으로 살았다. 가는 곳마다 천대받고, 그 어느 곳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다 결국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 매 맞고 죽임을 당했다. 그런데 그도 역시 하비루들을 사랑했다. 창녀, 세리뿐 아니라 무시당하고 멸시받고 내쫓긴 모든 아웃사이더들과 사마리아인 같은 이방인들에게 깊은 관심을 보였다. 바리새인들이 죄인이라고 멸시하는 여인을 용서하고(누가복음 7:37~48), 성전에 당당히 나가는 바리새인보다 뒤편에 물러서 있는 세리를 의롭다 했으며(누가복음 18:10~14), 혈우병을 앓는 부정한 여인을 정결케 했고(누가복음 8:43~48), 거지 나사로는 천국에 갔지만 호화롭게 산 부자는 지옥에 갔다(누가복음 16:19~31)고 교훈했다.
과거는 미래의 본보기다
이제 이 회장의 질문에 대해 답하자. 당신도 잘 알다시피 폴란드, 니카라과를 비롯한 세계 각국이 공산화되는 데에는 종교가 아니라 정치·외교·군사와 같은 외적 요소들이 작용했다. 특히 냉전시대 미국과 소련(구 러시아)의 세력경쟁이 결정적 요인이었다. 예를 들어 동유럽 국가들은 194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공산주의 국가가 아니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에 승리한 소련이 불도저처럼 ‘서쪽을 향하여 밀고 나가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폴란드,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등 동유럽 여러 국가들에서 공산당 지도자들이 기존의 정부를 무너뜨린 뒤 소련을 지지하는 공산정권을 세웠다. 이 같은 상황은 라틴아메리카, 동남아시아 등 세계 다른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소련은 공산혁명운동을 지원하였고, 미국과 해당 지역의 동맹세력은 이에 대항하며 그들의 세력을 넓혔다. 그 결과 어떤 나라는 공산화되고 어떤 나라는 안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천주교와 공산주의는 상극이라 하는데, 천주교도가 많은 나라들이 왜 공산국이 되었나?”라는 이 회장의 질문이 애초에 잘못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산화와 종교는 별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제를 일단 그리 정리하고 다시 생각해 보면, 이 질문에는 죽비와 같은 통렬한 질책과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다. 왜냐하면 만일 기독교인들이 예수의 교훈이자 자신들의 본분인 ‘이웃사랑’을 충실히 실행했더라면, 착한 사마리아인이나 ‘레미제라블’에서 사랑과 자비로 장발장을 감화시킨 미리엘 주교처럼 살았더라면, 그래서 가난과 압제에 시달리는 비참한 사람들이 생기지 않도록 노력했더라면, 그래서 ‘안에 있는 사람’과 ‘밖에 있는 사람’이라는 구분과 차별이 없었더라면, 공산주의라는 이념이 아예 출현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토플러가 ‘제3의 물결’이라 부른 정보혁명과 세계화에 힘입은 신자유주의, 금융자본주의가 21세기의 하비루들을 날마다 수없이 만들어내고 있다. 이때 우리가 다시금 기억해야 할 교훈이 있다. 빈곤에 시달리고 압제에 찌드는 대중의 불만이 커지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너는 듣고 있느냐 성난 민중의 노래, 다시는 노예가 되지 않겠다는 이들의 노래”가 다시 울려 퍼진다는 사실이다. “과거의 일들은 미래에 되어질 일들의 본보기이다. 세상은 언제나 한 가지였다. 현재의 일들과 미래에 다가올 일들이 그 언젠가 있었던 일들이다. 같은 것들이 되풀이되어 오고 있는데, 다만 치장을 새롭게 하고 다른 이름으로 다가온다.” 르네상스 말기 이탈리아 역사가이자 정치가인 프란체스코 구이치아르디니가 남긴 말이다. 새해를 맞으며 새겨듣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