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진도 군수???
요즘 들어 나에게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 장군께서 진도군수셨다는 것이 사실이냐?’ 고 묻는 분들이 제법 많았는데 사실은 맞는 말이다.
몇몇 백과사전을 봐도 이는 확인이 되는바
<한국학중앙연구원(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도
◉이순신(李舜臣)
** 전략…. 그 뒤 전라도관찰사 이광(李洸)에게 발탁되어 전라도의 조방장(助防將)·선전관 등이 되고, 1589년 정읍현감으로 있을 때 유성룡에게 추천되어 고사리첨사(高沙里僉使)로 승진, 이어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만포첨사(滿浦僉使)·진도군수 등을 지내고, 47세가 되던 해에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되었다.
<다음 백과사전> 이순신 편에도
** 전략…. 유성룡은 이에 굴하지 않고 재차 국왕 선조를 설득하여 1591년 2월 이순신을 종4품의 진도군수에 임명했고, 그가 현지에 부임하기도 전에 종3품의 가리포(加里浦) 수군첨절제사에 임명한 다음, 2월 13일에는 정3품의 전라 좌도 수군절도사에 임명했다. 백의종군에서 벗어난 지 불과 4년 만에 조선 수군의 핵심 지휘관이 된 것이다.
다른 백과사전의 이순신(李舜臣) 편에도
** 전략...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591년 2월 진도 군수에 임명되었으나 부임 전에 다시 전라좌도수군절도사로 임명되어, 2월 13일 정읍을 떠나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지금의 여수)에 부임했다.
이렇듯 진도 군수에 이순신 장군이 임명되었음은 확인이 된다.
그리고 정사(正史)인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보면
宣祖修正實錄 二十四年 辛卯(1591, 明 萬曆 十九年) 二月一日 (戊辰) 篇
○以李舜臣爲全羅左道水使。 時, 舜臣聲名始著, 論薦相繼, 自井邑移拜珍島郡守, 未赴任除加里浦僉使, 未幾擢拜水使。
선조수정실록 24년 신묘(1591, 명 만력 19년) 2월1일 (무진) 편에
○이순신을 전라좌도 수사로 삼았다. 이때 순신의 명성이 드러나기 시작하여 칭찬과 천거가 잇따라서 정읍(井邑)에서 진도군수(珍島郡守)로 이배(移拜)되어 부임하기도 전에 가리포첨사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수사로 발탁되었다.
라고 올라있다.
이러하니 앞에 백과사전에서도 나왔듯이 진도군수에 임명되었으나 부임 전에 다시 가리포 첨사에 이어 전라좌도수군절도사로 승진 임명되어 실지로 진도 땅에 들어와 부임한 일은 없으나 진도군수로 임명받았음은 확실하다.
이러한 내용은 2007년 진도군지에도 보면
○ 이순신(李舜臣) 진도군수 임명(1591辛卯)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 孝宗7年, 1656) 명환조(名宦條)에 조선조의 이순신(李舜臣)을 들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당시 일본과의 관계가 미묘하고도 급박하게 돌아가자 조정에서는 선조 25년(辛卯年, 1591) 2월에 정읍현감(井邑縣監)이던 충무공 이순신(당시 47세)을 진도군수로 임명하여 부임 중에 완도 가리포 수군첨사절제사로, 그리고 부임 전인 2월 13일에 전라좌도수군절제사(全羅左道水軍節制使)로발탁 임명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제87대 진도군수로 발령받아 부임 도중에 승진하여 완도 가리포수군첨사절제사를 거쳐 2월 13일에 다시 발탁되어 전라좌도수군절제사가 되었다. -진도군지(상권 620쪽)-
○ 이순신(李舜臣)
...전략...『동국여지지』에는 진도의 명환(名宦: 이름난 관리)으로서 고려조의 윤승해(尹承解)와 더불어 조선조의 이순신이 등재되어 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진도군지(상363쪽)-
이렇게 기록되어있다.
그런데 진도 군수로 벽파진에서 보름간을 머물렀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이는 진도군수(珍島郡守)가 아닌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로 정유재란 때 명량대첩을 앞두고 벽파진에 머문 것이 와전된 것으로 그 내용을 난중일기(乱中日記)에서 살펴보자면 명량해전 때인 *8월 29일에 벽파진으로 들어와서
*二十九日丁亥。晴。到碧波津。[벽파진으로 갔다.] **이 때 진도에 들어와**
*三十日戊子。晴。仍陣碧波津。 [맑다. 벽파진(진도군 고군면 벽파리)에 대었다.]
*十五日癸卯。晴。數小舟師。不可背鳴梁爲陣。故移陣于右水營前洋。[맑다. 수가 적은 수군으로써 명량을 등지고 진을 칠 수 없다. 그래서 진을 우수영 앞바다로 옮겼다.] **이때 우수영(해남)으로 갔고**
*十六日甲辰。**[명량해전 당일] 해전을 치르고**
-명량대첩은 별도의 글을 참고 바람-
명량대첩(鳴梁大捷)당시 의문점의 진실과 울돌목
http://cafe.daum.net/jindo100/O6Rt/93
*十七日乙巳。晴。到於外島。則避亂船無慮三百餘隻先到。知舟師大捷。爭相致賀。又持斗斛之粮。以遺官軍。羅州進士林瑄,林懽,林業等來見。[맑다. 어외도(무안군 지도면)에 이르니 피난선이 무려 삼백 여 척이 먼저 와 있었다. 우리 수군이 대첩한 것을 알고 서로 다투어 치하하고, 또 많은 양식을 가져 와 군사들에게 주었다. 나주진사 임선ㆍ임환ㆍ임업 등이 와서 봤다.] **지금의 신안으로 떠남**
이렇듯 명량대첩 바로 다음 날인 9월 17일에 지금의 신안으로 떠났으니 우수영에서 해전을 치른 날짜까지 합해도 19일간이었고, 실재 진도에 머무른 시간은 벽파진에 주둔했었던 17일간이었다.
어떻든 1597년(선조 30년) 9월 16일 세계 해전사에 전무후무한 13척의 배로 133척의 적선을 무찌른 명량대첩(鳴梁大捷)이 진도 울돌목에서 있었다. 하지만 진도군민들도 합심해서 이뤄냈던 이 커다란 승전에도 불구하고, 이순신 장군은 바로 다음 날 17일 어외도(於外島, 신안)에 이틀 머문 후 19일 법성포를 거쳐 21일 고군산도(옥구군)에 가서 거기에서 그해 겨울을 났으므로, 진도군민들은 대첩 후 왜군 잔병들에게 큰 피해를 보아 당시에 희생된 진도인들을 묻은 300여기나 되는 『정유재란 순절묘역』이 진도에 실존한다.
국난의 시기에 그런 안타까운 희생들이 뒤따랐음에도 불구하고 충무공 이순신 장군께서 비록 정식 재임은 없었지만 제87대 진도군수(珍島郡守)로 발령받았던 그 기록은 우리 군민에게 뜻깊은 일이라 할 수 있으리라.
<진도 송현 출신 조병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