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도의 길라잡이 / 19 추수의 해(The harvest years)
원제 : Talking with God (하나님과 이야기 나눔)
by Mrs, Gwyne Dresser Mark (귀네 드레서 마-크 여사 지음)
"주님을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이사야 40:31
오늘날 노년기보다 더
영적 치유의 기적이 필요한 곳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시인 브라우닝은
"가장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
우리의 출발은 인생의 마지막을 위해 있다."고 썼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노년을 이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것에 대해 실제로 두려움을 가지고 있지는 않더라도
어느 정도는 그 결말이 참담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노년층이 빠르게 인구의 주류가 되고 있는 세상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기획되는 인간사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의 수명이 길어진다면 그 안에서 기회를 찾아야 합니다.
그 기회를 찾는 일에 있어서
어려운 경제적 요인들은 쉽게 인식됩니다.
그러나 보다 명확하게 인식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어서
많게는 아니나 어느 정도 우리의 관심을 필요로 하는 것들이 있는데
이는 ‘동기부여’와 ‘의욕’에 관한 것입니다.
노인의 장애 중 일부는 노인이 필요하지 않다는 오해,
즉 수입이 끝나고 자녀가 성장하면
인생의 가치 있는 부분이 끝난다는 오해에서 비롯됩니다.
그 후 몇 년은 시간을 때우는 임시적 시기로
옆에서 지켜보거나 앉아 있는 위탁자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인생의 한 국면이 끝났다고 해서
더 중요한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일까요?
물론 우리는 노년이 의미하는 것이
신체 메커니즘의 둔화 및 마모라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젊은 시절의 익숙하던 많은 활동들이
나중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수명이 연장되고 있는 한 가지 이유는
이전에는 병들고 손상된 신체로는 오래 살 수 없었으나
지금은 반드시 치료하지 않아도
의학이 그 생존을 유지시켜 주기 때문이라는 것도 솔직한 사실입니다.
(And it is also a blunt fact
that one reason the life-span is lengthening is
that medical science now keeps alive,
without necessarily curing, diseased and impaired bodies
which formerly could not have survived so long.)
따라서 많은 노인들이 신체적으로 제한을 받고 있지만
그러나 이것이 쓸모없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어떻게든 우리는 인생을 전체로(whole) 보도록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육체와 영혼은 지상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지만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몸은 점차적으로 낡아지는 기계입니다.
영혼은 욕구와 인식으로 그것은 결코 중단될 필요가 없습니다.
몸이 불안정해서 영이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래된 차가 고장 나면 운전자가 영원히 움직일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전체로 볼 때
노년은 책임감 없는 유아기 때보다 더 불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이해합니다.
돌이켜보면 어린 시절의 놀이는 아주 사소해 보일 수 있습니다.
사실 모든 아이들에게는 어른들의 바쁜 일이 그러하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각 단계는
그것을 경험하는 사람들의 발전에 대한
중요성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아이들에게는 '어른'이라는 엄청난 자유를 막연히
기대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젊은이들에게 있어서
사랑에 빠지는 것과 세상에 대단한 자가 되는 것의 마법은
그들의 미래를 중요하지 않게 만들어버립니다.
젊은 성인들의 경우 직업과 가족은
매일 하는 일을 필요로 하고
꿈을 위한 시간을 거의 남겨두지 않습니다.
그러나 책임이 커지고 압박이 가해질 때
거기에는 잘 마련해둔 휴식과 즐거움을 위한 날들, 곧
은퇴라고 하는 솔깃한 오아시스가 손짓합니다.
그리곤 어떻게 될까요?
수년간의 학습, 훈련 및 노동에 대한 지속적인 성과가
없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은퇴를, 슬럼프에 빠지고
더 이상의 노력을 하지 않는 시기로 여기는 것에서 벗어나
그때를 특별히 우리의 습관을 개선하고
과거의 노력을 더 날카롭게 조명하도록 기대하면 안 될까요?
왜냐하면 이때는 확실히 쟁기질과 씨뿌리기, 잡초 뽑기와
물주기가 행해진 추수의 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노인들이 이것을 믿도록 어떻게 도울 수 있습니까?
즐겁고 유익한 노후를 위해 우리 모두는 어떻게 준비해야 합니까?
경제적, 생리적 문제에도 불구하고 노년의 문제는
사실은 영적인 문제입니다.
어떤 의사는 노인들의 어려움은
대체로 그들의 능력 사용을 중단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이 배우는 것을 멈추는 것은
그들이 더 이상 배울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동기를 잃었기 때문에
그들은 더 이상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습니다.
이는 ‘죽음 너머의 삶’에 대한 지식이
그들에게 없기 때문이 아닐까요?
‘죽음 너머의 삶’의 실체를 확신하고 그것이 어떤 것인지 아는 것은
지상에 존재하는 것에 대한 의미와 가치를 부여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시간 감각을 무한한 지평으로 들어가게 합니다.
성숙한 마음의 우수함은
앞을 내다보고 보이는 것에 도달하는 능력입니다.
따라서 저 너머에 있는 목적지를 보지 못할 경우
그것이 고통스럽다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But this need not be. 고통을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노년’을
영구적인 존재에 훨씬 더 가까워지는 기회,
즉 다가올 더 큰 경험을 준비하기 위해
중생의 느슨해진 결말을 단단히 묶어두는 기회로 본다면
그것은 노년을
영을 위해 분주한 시간, 삶의 영적 사실들에 대해
알아야 할 방대한 분량을 배우는 시간으로 보는 것이고
그러한 통찰력은 노년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상황을 완화하는데
큰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 치료에서 수행된 작업이 보여주는 것은
불안과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것이
육체적 질병을 줄이는 강력한 수단이 된다는 것,
그리고 영이 강할 때
모든 문제를 더 쉽게 대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출발은 인생의 마지막을 위해 있다.”
인생의 마지막이
끝없이 재개되는 인생의 예비 단계라는 것을 아는 것은
노인들이 잊어졌거나 불필요한 태도를 극복하는데
확실히 도움이 될 것입니다.
사람이 다음 일을 준비하는데 충분히 몰두한다면
그는 소외감을 느낄 수 없습니다.
준비는 쓰임새(usefulness)의 한 형태이며
이것에 대한 깨달음이 만년의(in later years) 인생철학보다
더 잘 적용될 수 있는 곳은 없습니다.
노년층의 불안함의 대부분은
쓰임새를 향한 자신의 본능적인 촉구에
만족을 찾지 못하기 때문인데
이는 대체로 진정한 쓰임새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한 위대한 철학자는 그 쓰임새를,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발견하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최선을 다해서 하는 것으로 정의했습니다.
따라서 유용하다는 것은
우리가 다른 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것들을
반드시 그들을 위해 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고
다른 사람 뿐 아니라 자신에게도 필요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실제로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노인의 경우 이것은 다른 사람이 더 큰 작업을 수행할 수 있도록
약간의 노동을 흔쾌히 행하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또 그것은 단순히 즐겁고 힘들어하지 않는 태도로 일하거나
기꺼이 바쁜 사람들의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여든이 넘은 한 숙녀가 말하기를
"우리 노인들은 여전히 해야 할 일이 있는데
그것은 수용하고, 적용하고, 감사하는 것을 발전시키는 일입니다."
이것을 품위 있게 하는 것이 유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적인 의식(awareness) 차원’에서 생활하고 활동하는 것을 배운 결과
이 차원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쓰임새의 특별한 형태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특히 나이가 든 사람들에게 적합한데
이는 마침내 그들에게
앉아서 생각하고 묵상하고 기도할 시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육체적인 한계가 아무리 크더라도
그들은 사고(thought)와 사랑으로 어디든지 갈 수 있습니다.
기도 중에는 외로움이 설 자리가 없고
하나님과 교제하고 이웃을 긍휼히 여길 때는
자신의 무가치를 느낄 수 없습니다.
섭리 하에 노년은
무미건조한 세월이 요구하는 시간과 힘과 관심의 소모로부터
우리 자신을 떼어놓을 수 있는 피난처입니다.
우리가 차분해질수록
바깥일들의 분주함과 소란스러움에서 물러나
"고요하고 작은 음성"을 더 명확하게 들을 수 있고
우리가 알아봐주기를 끈기 있게 기다리는
보이지 않는 존재를 더 확실히 채울 수 있습니다.
(Under Providence, old age is a harbour for enabling us
to separate ourselves from the drain upon time and strength
and attention which the workaday years demand.
As we become quieter, as we withdraw
from the bustle and clamour of external affairs,
we can hear more clearly "the still, small voice" and fill more
surely the invisible Presence patiently awaiting our recognition.)
기도의 실천은
하나님의 현존을 현실로 만듭니다.
이 실재(Reality)를 알게 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그 빛을 비추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 삶의 궁극적인 쓰임새입니다.
출발하기 전 그것을 어느 정도 성취하는 것은
추수의 해의 위대한 약속입니다.
(This is the ultimate usefulness of human life;
to achieve it, somewhat,
before “going on" is the great promise of the harvest yea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