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 121. 공(空)에 대한 작은 경(소공경)>에서..
그러나 ‘여기에는 공하지 않은 것이 있다.
즉 생명을 조건으로 여섯 가지 감각 영역을 지닌 몸 그 자체를 조건으로 하는 것이다’라고 분명히 안다.
그는 거기에 없는 것을 공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거기에 남아 있는 것은 있으므로 ‘이것은 있다’라고 분명히 안다.
를 보면서 근본불교와 남방 상좌부 불교가 해석을 달리한다고 했는데..
둘은 무엇을 달리 해석하고 있을까?..
세존께서는 우리가 말하고 생각하는 대상이..
대상 그대로가 아닌..
인식된 것임을 철저히 깨치고 있는 데 반해
남방 상좌부는 물론 부처님 당시 제자들도
대상을
대상 그 자체로 이해하는 경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곧 '사과' 하면 세존께서는 우리에게[ 인식된 사과]를 말하는 것인데..
그 말을 듣는 제자들 가운데에는 '사과'하면 외부에 있는 [사과 자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알아 듣는다는 것이다.
해서 '책상은 고' 라는 것은 인식하고 있는 책상은 고라는 뜻인데.. 고는 인식하는 자에게 있는 것이므로..
책상을 외부에 존재하는 것으로 알아듣는 제자들은 책상이 어떻게 고일 수 있느냐고 반문하게 된다.
<잡. 319경>에 나오는 '일체는12처' 라는 의미도..
일체는 6내외입처 결합으로 생기는 인식이라는 것인데..
엉뚱하게도 일체는 6내입처와 6외입처 합이라고 하는 어처구니없는 해석까지 나온다..^^
다시 말하지만..
일체는 12처의 결합으로 생기는 '인식인 법의 집합'이요,
일체는 외부에 있는 것을 지칭하는 게 아닌 5온에 의해 '인식되는 모든 것'을 말한다.
그것은 외부에 아무 것도 없다(無境)는 게 아니다.
무언가가 틀림없이 있기에 인식이 생기지만..
우리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접해 알 수 없고..
우리에게 알려진 것들은..
외부에 있는 그대로 모습이 아닌 6내입처의 간섭으로 드러난 모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가 인식하는 그 모습대로 외부에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하여
'즉 생명을 조건으로 여섯 가지 감각 영역을 지닌 몸 그 자체를 조건으로 하는 것이다’
에서 [여섯감각 영역]이란 세존은 인식된 감각영역으로 설명하고는 것인데
남방불교에서는 여섯감각 영역이 외부에 인연따라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접촉하는 대상이 인식된 것이라면.. 그 인식은 의지로 지금 여기서 멸할 수 있다. 그러나
대상이 남방불교에서 말하듯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라면 지금 여기서 의지로 멸할 수 없 게 된다.
더 구체적으로 멸할 수 있는 대상이란 무엇이며, 어떤 효과를 가져 오는 것일까?..
사과가 있다는 것의 의미는..
내가 인식하대로 외부에 사과가 있다는 게 아니라..
사과라고 인식한 게 있다는 뜻이다. 해서 그 사과를 보며 일으킨 욕심이 있다면..
그것은 외부에 있는 대상을 보며 일으킨 게 아닌 인식된 사과를 보며 일으킨 욕심이 된다.
하여 사과라는 인식을 멸할 수 있으면, 그 사과로 말미암아 생긴 욕심은 멸할 수 있으리라.
그런데 사과라는 것이 외부에 있는 대상이라면 우리는 대상을 멸할 수는 없으니, 할수 있는 것은 욕탐을 멸하는 수행만이 있을 뿐이다,
일체가 고라는 것은 사과가 고라는 것과 같다.
어떻게 사과가 고일 수 있을까?..
사과는 인식된 것이며, 생겨나는 인식이 모두 고라면 사과라는 인식은 고가 될 수 밖에 없으리라.
고는 욕탐이 있기에 생긴다.
인식은 6내입처와 6외입처 결합으로 생긴다.
이때 내외6입처를 결합하는 게 욕탐이라면.. 그로 인해 생기는 인식은 고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