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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주에 필요한 5만분의일 지형도 도엽명 :
만리포 근흥 서산 당진 홍성 예산 청양 전의 평택 진천 안성
속리산에서 분기된 한남금북정맥이 경기도 안성땅 칠장산까지 와서 그 소임을 다하고 한남정맥과 금북정맥에 그 자리를 내주어 한남정맥은 용인 인천 김포벌을 누비며 강화대안 문수산에서 그 끝을 바다로 담그고
금북정맥은 남으로 남으로 내려가다가 청양 백월산에서 북진하여 가야산을 빗고 서산 은봉산에서 머리를 서쪽으로 돌려 그 끝을 안흥진 바닷가에 담그는 산줄기를 말하며 도상거리 약 260km이다
그러나 이 금북정맥은 온전한 금강의 북쪽 울타리가 되지 못한다
안흥진서부터 청양 백월산까지의 산줄기는 충청도 서해안 개울을 적시는 정도고 금강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다
도면상 백월산에서 성태산으로 연결되어 장항으로 빠지는 산줄기가 온전한 금강의 북쪽 울타리 구실을 하는 것이다
[신경수님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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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지도]
천안쪽으로 가려면 구로역에서 급행전철을 타야 시간과 경비도 절약할 수 있다. 1시간쯤 걸리는 평택까지 갔는데 눈깜박
할 사이 전철은 평택역을 출발했고 어쩌나~~ 성환까지 가서 서울로 오는 전철을 타고 뒤돌아 평택역으로 왔다. 먼저 와
기다리고 있는 가진이와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일죽행 죽산까지 버스를 타고 간다. 죽산에서 30분쯤 기다려 칠장사로 가는
버스로 환승하여 갔다.
칠장사 가는 버스는 06시 40분, 9시 30분, 13시. 18시 30분으로 하루 4번 운행하는데 9시 30분차로 갈 수 있었다. 운전기사
님의 친절에 감동받았다. 타는 사람, 내리는 사람마다 일일이 친절하게 인사하며 운전석에서 일어나 안전하게 타는지, 내
리는지 도와주는 정말로 친절한 기사분이었다. 버스를 보고 밭에서 손을 흔들어 인사하는 아줌씨, 반대편에서 기다리고 있
는 승객에게 버스를 타고 갔다가 돌아 나오자는 사람, 누구네 아무게는 안녕하냐는 등 , 그러는 사이 칠장사가 거의 도착할
쯤에 버스의 의자는 꽉차 있었다.
아무리 보고 또 쳐다 보아도 정말 살맛 나는 세상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바라보고 또 쳐다보고 기사님을 떠나 보내고 칠장사로 올랐다. '七賢山 七長寺'의 일주문이 식물의 연꽃과 덩굴
을 그려 넣은 연덩굴문과 덩굴문 때문이었다. 식물문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소재는 연꽃과 덩굴이라고 했다. 연꽃은
여러사상이나 종교에서 중요한 식물로 인식하였기 때문이고 덩굴문은 장수와 좋은 일이 계속되기를 바라는 연면(連綿)의 의미
뿐만이
아니라, 다른 무늬를 돋보이게 하는 역할로 인해서 자주 나타나고 있다. 때문에 덩굴문은 연꽃, 국화, 모란, 보상화(寶相華, 연꽃
의 변형체로 좀 더 화려한 느낌을 준다고 했다.
[京畿 安城 七賢山 七長寺 天王門 柱聯]을 옮겨 보면 이렇다.
四大天王威勢雄 사대천왕위세웅 사대천왕의 위세는 웅장하시니
護世巡遊處處通 호세순유처처통 세상 두루 돌아 지키고 모든곳에 나타나시어
從善有情貽福蔭 종선유정이복음 착한일 하는 중생게게 복덕을 주시고
罰惡群品賜災隆 벌악군품사재륭 죄인은 악한 무리에게 재앙을 내리신다
그래서 인지 오늘은 천왕문으로 들어 대웅전 꽃무늬창살에 발길을 먼저 옮기게 된다.
[꽃무늬창살]
大雄殿은 석가모니를 모시는 법당으로 앞쪽에는 소나무로 뒤쪽에는 느티나무로 기둥의 가운데가 볼록한 배흘림기둥으로 지
어졌으며 조선 후기에 여러 차례 수리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1704년에 지어져 310년의 세월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듯
빛바랜 단청에서 알 수 있다. 아마도 대웅전의세월만큼이나 흘렀을까 칠장사의 역사를 대변해 주는 꽃무늬창살역시 칠장
사 건물중에서 가장 오랜 세월을 간직하고 있다고 했다.
단청을 칠하지 않아 옛멋이 그대로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암행어사 박문수가 머물다가 꿈에 과거시험 문제를 계시 받아 장원급제 했다는 설화도 전해지는 나한전이다. 나한전
뒷편에는 고려말의 나옹선사(懶翁禪師)가 심었다고 전해지는 나무다. 나옹의 '나(懶)'는 게으르다는 뜻이다. 그래서 나
옹은 '게으른 늙은이' 정도가 되겠다. 나옹선사는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 하
네.....'를 지은 바로 그분이시다.
마치 여자의 치마 폭을 펼친 듯한 모습이라고 스님은 귀뜸해 주셨으니 620년의 수령이 노송의 품격과 자태를 뽐내고 있
는 것 같았다.
칠현산 자락에 조용히 자리한 칠장사.
천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변함없이 우리네 인생살이를 말없이 지켜봐준 고마운 절이다.
오랜 시간 우리 곁에 있어왔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이곳엔 수많은 전설들이 이어져 내려오고,
간절한 염원을 안고 칠장사에 찾아들었던 이웃 하나 하나의 바람들이 모여 독특한 문화풍습이 만들어졌다고 칠장사 관계자는 전
하고 있었다.
칠장사 뒷길 칠장산으로 오르는 길에는 표지기들이 나무에 걸치어 있었다. 산죽밭 가운데 나무들이 서 있는 길로
올랐다. 얼마 전 내려왔던 길을 오늘은 올라가게 되는 칠장산. 옆으로 조금만 눈을 돌려 보면 칠장산에서 뻗은 산줄
기 하나가 한남금북정맥이었다.
언젠가 저 길을 걸을 때 또 갈 테이니
오늘은 그냥 안흥진으로 가는 산줄기로 가자구나.
먼저 올라온 가진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중고개[中峴]의 칠순비 부부탑은 2002년 김성기 임경순님 부부의 칠순을 기념하기 위한 탑이라네요.
진천에서 오신 분들이 있다. 옥정현까지 산행하게 된단다. 영남알프스 종주를 하고 싶다는 그 분들과 걷는다.
걸어도 걸어도 좋을 것 같은 산길, 낙엽이 덮힌 흙길을 걷는다.
아미산[칠현산]에 정상에 도착한다.
아미산에서 한 도둑이 목이 말라 샘을 찾아다니던 중 눈부신 빛을 발견하고 따라가 보니 퐁퐁 솟아나는 맑은 샘물이 그를 유혹하는 게 아니겠는가! 도둑이 정신없이 물을 마시고 보니 금바가지로 변해 있었다. 도둑은 얼른 금바가지를 챙겨 집으로 돌아왔고, 그의 동료였던 나머지 여섯 도둑들도 똑같은 상황을 겪었다. 그러나 집에 돌아온 후 금바가지는 간 곳 없이 사라지고 두려움에 떨던 일곱 도둑들은 죄책감에 스스로 칠장사의 혜 소국사를 찾아가 사죄했다. 그길로 그들은 출가하여 열심히 수행을 하였고, 세월이 흘러 나한의 경지에 이르렀다. 이 일을 기려 사람들은 아미 산을 칠현산[七賢山]으로, 칠장사[漆長寺]를 칠장사[七長寺]로 고쳐 썼다. 더 놀라운 일은 그 후에 일어났다. 스승으로 모시던 혜소국사가 입적에 들게 되자 깊은 슬픔에 잠겨있던 일곱 나한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있던 절 뒤편 너럭바위 위에 일곱 덩이의 돌멩이가 나타났는데 하나같이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를 더 세밀하게 깎아 일곱 나한이라 하여 모시고, 그 너럭바위 위에 나한전을 지었다. 칠장사의 일곱 나한 이야기는 무지한 도둑들도 나한이 되었는데,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고기하지 않고 참고 견디면 무슨 일이든 해 낼 수 있다는 교훈을 주는 아미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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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산과 나한이 된 일곱 도둑 이야기를 적어 보았다.
덕성산으로 가는 이정목
[헬기장]
[공림정상]
[무이산을 바라보며 걷는다] 산줄기에서 조금 비껴있는 무이산에서 정맥까지 이어지는 산릉이 가지런히 평행을 이룬다.
[철탑에서 바라보는 무이산]
광혜원의 정경이 아스라이 조망되는 길을 간다.
[무술마을 갈림 길] 이정목이 있는 덕성산이다.
덕성산은!!
안성시 죽산면과 진천군 광혜원면 경계에 위치한 높이 506m의 금북정맥 능선상에 있는 산이다. 비들목 뒤에 있다. 산 정상에서 기왓장, 토용등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아이들이 토용을 주워 집으로 가져오면 부정을 탄다고 어른들이 크게 꾸중을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 산을 경계로 신라와 백제가 대치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이 산 아래인 무술과 비들목에 신라군이 주둔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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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생각없이 걷던 나는 덕성산을 그냥 지나치게 되고 이미 지난 그길을 되돌아 보니 저거이 덕성산였구나!..
무술마을은
병무관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예전에는 80여 호가 살던 큰 마을이었다고 한다. 조선 연산군 때 조정의 선비가 사화를 피하여 이곳에 와서 아무 걱정 없이 지냈다고 하여 무수라 명명한 것으로 설명하나 믿을 수 없다. 무술이라고도 하는 것을 보면, 무수는 무술에서 변형된 어형으로 추정된다. 무술에 대해서는 김유신 장군이 무술을 연마하던 곳이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설명하나 이 또한 크게 믿음이 가지 않는다. 전국에 무술이라는 골짜기 또는 마을 이름이 몇 군데 존재하는데 그 유래가 분명하지 않다. 가술, 여술 등에 보이는 술과 같은 것으로 보이며, 산의 뜻일 가능성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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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4.9]
안성시 금광면의 정경도 보이고
[무티고개]
평택 음성간 고속국도의 차소리가 들려온다. 아마도 옥정마을이지 싶다.
광혜원의 저수지가 저 멀리 조망되는 산길을 걸으면서 금북정맥 산줄기는 남으로 남으로 내려가게 된다.
[사정골과 옥정재로 가는 이정목]
[사장골 정상]
이 아래 광혜원 사장골은
병무관 남쪽에 있던 마을이다. 네 가구가 살고 있었는데, 너무 외져 위험한 곳이라 하여 이주시켰다고 한다. 사장을 射場으로 보아 신라 화랑들이 활을 쏘고 훈련하던 곳이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설명한다. 전국에 사장골이라는 골짜기가 적지 않은데, 활터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설명하는 지역도 있지만 대체로는 사장나무(당산나무, 마을 앞 둥구나무)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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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채색 풍경에 솔나무는 발목을 잡고
[옥정산]이 아닐까 한다. 돌에 쓰여진 알 수 없는 글자는 내 짐작으로 玉井山!
베낭을 두고 무이산으로 발길을 옮겨 동쪽으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정상에 올라 본다.
[무의산 정상]에 서니 금곡천이 흐르는 광혜원이 조망되는 산, 이곳에서 내려가는 산줄기 따라 가도 얼마 되지 않는
곳이다.
무의산의 삼각점, 걸어 온 산줄기가 저 멀리 산릉을 이루며 칠장산으로 조망되는 곳이다.
그래 여기는 어데, 저기는 어데, 걷는 것 만으로 산을 가지 않는다. 무이산에서 바라보는 조망은 중부고속국도와
평택, 음성간 고속국도가 만나면는 음성분기점까지 충청북도의 이월면 산줄기가 조망 되는 무이산이었다.
무이산에서 산줄기를 이어가는 소나무 숲이 일품이다.
[만디고개] 돌탑이 있는 고개이다. '거기 서봐. 여기가 평택, 음성간고속국도의 터널인 금광터널이 되는 고개였다.
이 아래 만디=만죽리=만승리는
죽현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옛날 흉년이 든 어느 해에 큰 부잣집(영의정 허적의 집)에서 쌀을 만 되나 내놓아 주민을 구휼했다고 하여 만되라 하였는데 이것이 변하여 만디가 된 것으로 설명한다. 이 마을 이름을 따서 만승면이라는 면 이름을 만든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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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를 돌아보면 [덕성산에서 무이산까지 조망]되는 산줄기가 고속국도의 차량소리가 심심찮다.
[고라니봉]
밭으로 만든 것인지, 알수 없는 이유로 산길을 막고 있었다. 우회길을 내어 놓았다. 경사가 급하게 떨어지는 내리막길에
흰 밧줄를 잡고 내려 간다. 이러다 옥정재 저 아래 떨어지는 건 아닌가 하는 마음도 잠시 길은 옥정재에 올려 놓았다.
넓은 공간의 산을 파헤쳐 놓았다. 집을 지으로 하는 건지 몰라도 들어 갈 수 없는 담을 치고 있는 옥정재에 해가 머리
위에서 반짝인다.
도로를 건너 쉬어가자. 자리를 깔고 앉아 친구와 두런두런 이야기로 한나절이 그렇게 간다. 차가 오가는 차도에
우리를 유혹하고 있는 건 산을 오르는 것이 아니라 내려가려는 마음이 더 커 있었다. 옥정리까지 내려가려는 길이
길고 구불구불하여 지나가는 차에 히치성공!
타고 보니 고급승용차였다. 태워준 고마움으로 이러저런 이야기로 차는 안성으로 가고 있었다. 안성에서 제일 큰
저수지가 고삼저수지이고 두번 째로 큰 금광저수지와 덕성산을 바라 보면서 걸었던 산길이 저 멀리 스쳐간다. 안
성에 내려 간단히 간식을 먹고 평택까지 와서 친구는 천안으로 나는 서울로 귀경한다.
나는 금북정맥 산줄기에서 거제도 산친구를 기다리기로 한다.
그 담 이야기는 어데쯤일까. 그렇게 친구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칠장산에서 내려왔다.
첫댓글 칠장사의 전설이 잘 읽었어요. 이런 깊은 뜻이 박문수 어사의 꿈, 나옹선사의 시가 노래로 근데 헤갈렸어요 청산별곡으로 ~~
지나간 시간들이 새롭게 다가온다.
다시 옥정재에서 또 다른 옥정재를 보리라
잘 보았어요.
금북정맥 시작 했네요.
칠장사 , 칠현산에서 시산제 지내고 산행 했던 생각이 납니다.
보름 무렵이어서 묵나물 5가지는 내가, 대장님이 머리고기, 머리고기가 너무 잘 익어서
대원들이 정말로 잘 먹었던 기억이 나네요.
안산즐산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