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카페 프로필 이미지
청봉스님의 장군죽비
 
 
 
카페 게시글
금강경5가해 스크랩 40-2 금강경5가해 청봉선사강설 23. 離相寂滅分 第十四 (상을 여의면 적멸함)
명심 추천 0 조회 26 14.04.24 13:4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금강경5가해40-2-1.zip

 

 

육조:수보리가 부처님의 뜻을 깊이 깨달아 자기의 見處를 드러내었으니 업이 다하고 때(垢)를 없애서 지혜의 눈으로 밝게 통하여 믿고 알고 받아 지님이 곧 어려움이 없게 된 것이다. 세존이 세상에 계시면서 설법할 때에도 역시 한량없는 중생이 능히 믿고 알고 받아 지니지 못하였거늘 하필이면 유독 후 오백세를 말했을까? 대개 부처님이 계실 때에는 비록 하근기로 믿지 않고 더불어 의심을 품는 자가 있을지라도 곧 부처님께 가서 물으면 부처님이 곧 마땅함을 따라 그들을 위해 설하시어 깨닫지 못함이 없을 것이나 부처님이 멸도 하신 뒤 후 오백세에는 점점 말법(시대에)에 이르게 되어 聖人에 가기가 아득하게 멀어지고 다만 가르치신 말씀만 있게 되어 만약 어떤 사람이 의심이 있어도 물어 해결할 곳이 없어서, 어리석고 어두워(迷惑) 집착을 가져서 남(生)이 없는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상에 집착하여 분주하게 구해서 육도에 윤회하리니, 이때에 심오한 경전의 말씀을 얻어듣고 맑은 마음으로 믿고 공경하여서 無生의 이치를 깨닫는 자는 심히 드물게 있게 되므로 가장 희유하다고 말하신 것이다. 여래께서 멸도 하신 뒤, 후 오백세에 만약 어떤 사람이 능히 반야바라밀의 심히 깊은 경전을 믿고 알고 받아 지니면, 곧 알라 이 사람은 내다, 사람이다, 중생이다, 죽지 않고 오래 산다는 상이 없으니 이 네 가지 상이 없으면 이것을 이름하여 實相이라 하는 것이니 곧 이것이 佛心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르되 “일체 모든 상을 떠난 것을 곧 이름하여 모든 부처라 한다” 하였다.


傅大士:空生聞妙理如蓬植在麻이니 凡流信此法하면 同火出蓮華로다 恐人生斷見하여 大聖預開遮시니 如能離諸相하면 定入法王家니라

부대사:수보리가 묘한 이치를 들음은

            쑥을 삼밭에 심어 둠과 같으니

            범부들이 이 법을 믿으면 불에서 연꽃이 피는 것과 같노라

            사람들이 斷見을 낼까 염려하셔

            큰 聖人이 미리 열고 막으시니

            만약 능히 모든 상을 여의면

            결정코 法王의 집에 들 것이니라.

 

冶父:心不負人이면 面無慙色이로다.

說誼:佛有三身이니 是法身耶인가 報身耶인가 化身耶인가 看彼毘盧老漢住處하라 非三非一이로되 而三而一이니 若使文殊不來途中하고 普賢忘却靑山이면 早已辜負毘盧老漢이라 辜負毘盧則心有?然하여 面無慙色이나 如今不然하여 寒山忘却來時路하고 拾得相將携手歸이니 所以心無?然하여 面無慙色이로다.

야부:마음에 사람을 저버리지 않으면 얼굴에 부끄러운 빛이 없을 것이로다.

설의:부처님은 세 가지 몸이 있으니 이것은 法身인가? 報身인가? 化身인가? 저 비로자나불의 머무는 곳을 보라. 셋도 아니고 하나도 아니로되 셋이요 하나이니, 만약 문수(智慧)로 하여금 반야지혜의 쓰임(途中)에 오지 않고(定에만 국집해서 머묾:일체 중생을 제도하는 행을 하지 않음) 보현(行)으로 하여금 본체(靑山)를 잊게 한다(行만 있고 定이 없음)면 일찍이 이미 비로자나불(眞佛)을 저버리는 것이라. 비로자나불을 저버린즉 마음에 열적고 어색함이 있어서 얼굴에 부끄러운 빛이 있게 되나 지금은 그렇지 않아서 寒山(청산:체)은 올 때의 길을 잊어버리고 拾得(도중:작용)과 서로 손을 잡고서 돌아오니(體, 用이 함께) 이 때문에 마음에 부끄럽고 열적어 어색함이 없어서 얼굴에 부끄러운 빛이 없도다.

청봉착어:비로자나불 법신은 동함이 없으나

               지혜 문수와 보현 행이 있어 수승하며

               한산(靑山)의 지혜가 습득(途中)의 행과 더불어

               성인의 경계를 보이니 부끄러움이 없도다.


  법신은 하나도 둘도 셋도 아니며, 하나이기도 셋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둘 아니라(不二) 하는 것이다. 만일 비로자나불(법신)만이라면 그것은 無記와 같음이니 문수의 지혜는 본체(자성, 불성)와 더불어 있으므로 만약 행(用:途中)으로 쓰이지 않고 定에만 국집하고, 보현은 행(보살, 작용)이므로 만약 체(定:청정본성:靑山)를 여의고 행(用)에만 국집해서 만상에만 끄달린다면 모두 어긋나는 것이다. 體(한산:청산)와 用(습득:도중)이 둘 아니므로 함께 증득하고 서로 여의지 않아야 함을 드러낸 것이다.

 

冶父:舊竹生新筍하고 新花長舊枝인데 雨催行客路하고 風送片帆歸로다 竹密不妨流水過山高豈?白雲飛

說誼:本始雙成이니 父子同業이라 旣然同業이니 莫戀家裏事하고 好作途中客하며 亦莫戀途中하고 却向家裏歸니라 雖然如是途中不?家裏事家裏不?途中事니라 看看하라 文殊普賢左旋右轉하니 毘盧滿面笑春風이로다.

야부:묵은 대에서 새순이 나고 새 꽃은 옛 가지에서 자라는데

         비는 나그네길을 재촉하고 바람은 조각배를 돌려 보내도다.

         대나무 빽빽해도 물 흐름에 방해되지 않고

         산이 높아도 흰 구름 날아감을 어찌 막으랴?

설의:진여본체(本覺)와 깨달아 증한 본체(始覺)가 쌍으로 이뤘으니 父子가 동업(본연이나 깨달음이나, 진이나 속이나 다르지 않음)이라. 이미 그렇게 동업일진대 집안 일은 생각말고 길 가운데 객이 됨을 좋아하며, 역시 길 가운데 일(用)은 생각지 말고 도리어 집안(體)을 향해 돌아갈지니라.

  비록 이 같으나 길 가운데 일(俗諦)은 집안 일(眞諦)에 걸리지 않고 집안 일은 길 가운데 일에 걸리지 않느니라. 보고 보아라. 문수(智慧) 보현(行)이 좌로 돌고 우로 굴리니 비로자나불(法身體)의 얼굴 가득히 봄바람의 웃음이네.

청봉착어:법신과 보신이 공적함을 깨쳤으니

               걸림 없는 마음이라 무애자재하도다.

               本覺과 始覺이 둘 아니니

               청정(眞諦)한 가운데 밝게 행(俗諦)하도다.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