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을 하다 우연히 다음과 같은 글을 보았습니다..^^
만물이 비어있다는 생각은 망상이다.
양자물리학의 연구결과를 공(空)의 증명이라며, 쪼개고 쪼개면 결국 비어있기에 만물이 공하다고 주장하지만 억지주장이다. 쪼개지는 것, 쪼개기 전의 그것, 그것은 무엇이며, 양자물리학에서 발견한 쿼크와 힉스 입자, 그것은 무엇인가.
대승불교의 空 사상은 불교의 목적인 '모든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에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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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空)이란 뜻은 비어있음이죠.
그런데 세존이 말하고자 하는 공(空)은 단순히 비어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잡아함경1-1.>을 보면..
색(수상행식)을 무상하게 관찰하듯이 색 등을 공으로 관찰하라는 하십니다.
만일 공이란 말 뜻이 비어있다는 것으로만 알면 색이 비어있음으로 관찰하라는 게 됩니다.
그 말이 색을 쪼개고 쪼개보면 결국 비어있는 것으로 보라는 것인지요?..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저는 색을 공으로 관찰하라는 것을 무상하고 무아(비아)인 것으로 관찰하라는 것으로 봅니다..()..
색이 공하다는 것은 무상하고 무아임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겁니다.
3법인에 공이 빠져있는 이유도 공이란 말이 무상과 무아를 두루 포함하고 있듯이 3법인에 무상과 무아가 있는데 공을 더 붙일 필요가 없기 때문이 아닙니까?..
무상하다는 것은 항상하는 존재가 없다는 것이고,
무아는 실재하는 존재가 없다는 것이듯..
무상과 무아를 보면 공하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비어있다는 설명이 아님도 알 수 있구요.
그러면서 불교를 공부하는 이로서 절때로 잊지 말아아야 하는 것!
苦는 대상에 있는 게 아니라 관찰하는 자에게 있듯이 고멸은 대상 문제가 아닌 관찰자의 문제이듯..
무상, 고, 무아, 공은 대상 입장이 아닌 관찰자 입장에서라는 겁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나에게 무상하게 관찰되고..
내가 괴로운 것이며,,
내가 무아이며..
나에게 공으로 보인다는 겁니다.
그러니 불교를 안답시며..
"대승불교의 공 사상은 망상이다"
하는 씰데없는 망상 짓은 멈추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마 저 글을 올린 자가 말하는 공은 ..
대승불교인 반야부에서 창작한 것으로 알고 있을 겁니다.
불교에 커다란 해악을 끼치는 자들은 겉모습의 불교만 보고 있는 나이롱 불자들이 아닌가 합니다.
첫댓글 만물이 공한것이 쪼개고 쪼개서 비어있다는 결론에 의한건 아닐텐데
저 글이 불자의 글인가요?
색을 공으로 관한다는 것은 색을 어떻게 관찰한다는 겁니까?..
색을 무상으로 관한다는 것은 지금 여기 있는 색은 항상하는 게 아니다 라고 관하는 거죠.
색을 고로 관하는 것은 항상하기를 바라는 데 항상하지 않으니 고임을 관한다는 거구요.
색을 비아(또는 무아)로 관한다는 것은 색은 내가 아니다 또는 색 안에 또는 색 밖에 나는 없다고 관하는 겁니다.
그럼 색을 공이라 관하는 것은??..
01. 색은 비눗방울이나 볼처럼 속이 비어있어 지금 당장 사라질 수 있는 것으로 관하는 것입니다.
곧 있지만 있는 게 아니라고 관하는 것이죠.
어제의 색이 잇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 어제의 색은 없습니다.
과거의 색은 지금 없습니다. 지금 색은 미래에 없습니다.
하여 지금 있는 색에 집착하지 않는 게 공으로 관찰하는 것입니다.
02. <M. 121. 소공경>을 보면..
A는 없지만 B는 있다. B는 없지만 C는 있다. C는 없지만 D는 있다.. 고 하다 마지막 부분에..
그는
‘욕망의 번뇌를 조건으로 하는 고뇌가 있지만, 여기에는 없다.
존재의 번뇌를 조건으로 하는 고뇌가 있지만, 여기에는 없다.
무명의 번뇌를 조건으로 하는 고뇌가 있지만, 여기에는 없다.
그러나 유일한 고뇌가 있다.
즉, 생명을 조건으로 여섯 가지 감각 영역을 지닌 몸 그 자체를 조건으로 하는 것이다’라고 분명히 안다.
그는 ‘이 지각의 세계는 욕망의 번뇌에 관하여 공하다’고 분명히 알고,
‘이 지각의 세계는 존재의 번뇌에 관하여 공하다’고 분명히 알고,
‘이 지각의 세계는 무명의 번뇌에 관하여 공하다’라고 분명히 안다.
그러나 ‘여기에는 공하지 않은 것이 있다.
즉 생명을 조건으로 여섯 가지 감각 영역을 지닌 몸
그 자체를 조건으로 하는 것이다’라고 분명히 안다.
그는 거기에 없는 것을 공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거기에 남아 있는 것은 있으므로
‘이것은 있다’라고 분명히 안다.
그러므로 아난다여, 이것은 그에게
진실되고 전도되지 않고 청정한 공이 현현된 것으로 나타난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효진 이때 경에 나오는
[그러나 ‘여기에는 공하지 않은 것이 있다.
즉 생명을 조건으로 여섯 가지 감각 영역을 지닌 몸
그 자체를 조건으로 하는 것이다’라고 분명히 안다.] 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근본불교와 실유적인 남방불교가 달라지는 것으로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