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실>
문태성
소싯적 고향 동리의 마실은 소통의 장이었다.
낮엔 열심히 일하고, 밤엔 마실을 가서 대화를 나누며 휴식을 취한다.
마을사람들의 수가 적기도 하지만, 가족이외 마땅한 대화 상대가 없으니 동네 사람들과 얘기를 나눈다.
대개는 이웃집에 가기도 하지만, 때로는 좀 먼 길을 가기도 하고, 때로는 산을 넘기도 한다.
마실은 아부지도 가고, 어무이도 가고, 나도 가고, 동생도 간다.
아부지는 당부 말씀을 하신다.
“꼭두새복까지 노지 말고 일찍 오그라.”
어무이도 거드신다.
“깜깜한 밤쭝에 돌아댕기믄 호래이가 쥐두 새두 몰르게 물구간다 쪼끔만 노다 얼릉 와.”
아버지는 동네마을에서 인기가 있으셨다.
텔레비전은커녕 라디오도 몇 대밖에 없던 시절,
얘기책을 읽어 주는 유일한 분이셨기 때문이다.
일본에 13년이나 징용을 붙들려 가셨다 돌아오셨는데, 무학이지만 국해 정도로 글을 읽고 겨우 쓰시는 수준이셨다.
아버지는 라디오에서 ‘삽다리총각’ 연속극을 마치면 얘기책을 꺼내 읽기 시작한다.
마을주민들의 대다수가 글을 제대로 읽거나 쓰지 못하는 문맹자들이 많았다.
노인들과 여자들은 더욱 그러 하였다.
아버지는 장날 읍내에서 얘기책 몇 권을 사 오신다.
아버지가 사오신책은 홍길동전, 장화홍련전, 박문수전 등 고전소설이었다.
아버지는 얘기책을 한 줄씩 천천히 소리 내어 스님 불경 외듯 높낮이 음률을 넣어 읽어내려 가신다. 마치 무성영화 변사와 같으셨다.
몇 줄을 읽으시다가 해설에 이어, 다시 읽고 또 설명을 하신다.
이야기책의 분량이 짧고 용어구사가 부족하여 해설이 필요한 대목이 많다.
연세가 많으신 분들은 누워서 듣고, 앉아서도 듣고, 비스듬히 벽에 기대서도 듣는다.
어사 박문수전 '어사출두' 대목에서는 모두가 흥분되고 감흥이 난다.
이 시간만큼은 아버지는 박문수어사다.
이야기가 재미있을 즈음하여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며 일어서신다.
마을 어른들은 아쉬움을 남긴 채 내일 다시 모인다.
어무이들의 마실은 마을 늬우스 방이다.
꼭히 약속을 한 것도 아닌데 지녁밥을 일찍 해먹고선 모여든다.
사랑방은 남정네들에게 넘기고 안방 차지를 한다.
엊그제 시집온 며느리에게 감자, 보리, 쌀 3가지로 밥을 하라 했드니만, 큰 것부터 넣고 나서 열어보니 감자가 없어져 어디갔냐고 찾더라는 이야기,
도랑가로 소꼴 비러 갔던 머슴 만돌이가 장개를 못들어 뿔대가 났는지 해거름에야 어실어실 터덜거리며 오더라는 이야기,
대복이는 오늘도 국민학교에 안가고 큰집에 보리 비러 갔다는 이야기,
아랫말 추자는 재너머 총각이랑 눈이 맞아 연애질을 하다가 어무이 한테 머리채를 끄딩이고도 정신을 못차리고, 야밤에 숲거리에서 시시닥거리다 발각이 되어 즈 아버지한테 지게 작대기로 다리몽대이를 두들겨 맞고 쫓게났다는 이야기,
산모랭이에 멧돼지가 나타나서 콩밭을 쑥대밭으로 맹글어 농사 망친 이야기,
부산 신발 공장에 취직해 간 딸이 보내온 운동화 두 컬리를 받고 울었다는 이야기,
뒷집 김서방이 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소낭구를 버디이채로 집다가 산감한테 들켜 혼이 났다는 이야기,
아랫동네 철수가 진구네 닭장에 들어가 달걀을 훔쳐 마을 구판장에서 간빵 사먹으려다 뽀롱난 이야기,
윗마을 영수아버지 장례식 날 장례식 끝나고 마을 남정네들이 그집 사위들에게 꼬깔모자와 곰방대를 씌우고 진사놀이를 하다 차가운 물에 빠트리고 밭두렁에 떨궈삐래다 쌈박질이 난 이야기,
산에 나물 뜯으러 갔다가 서까래만한 뱀을 만나 혼비백산해 나물바구니도 내삐리고 도망 온 이야기,
복수 아들이 서당에 갔다가 한문선생에게 천자문을 못 외워 종아리 10대를 맞고 더는 못배우겠다고 때려치운 이야기,
영철이네 바깥노인네는 치매가 들었는지 비름빡에다 똥칠을 해 댄다는 이야기,
산너머 동네 덕수 아들은 공부를 잘해 면서기 시험에 단번에 척 붙어 동네에 경사 났다는 이야기,
진수네 풀빵틀은 오늘 누구네 집에서 구워 먹느냐고 물어보는 이야기,
동철이네 어미소가 송아지를 낳자마자 그 송아지가 펄덕거리민서 치띠고 내리 뛰드라는 이야기,
서울에 갔드니만 차도 디게 많고 사람도 많아 오데가 오딘지 몰라 사람구경만 하다가 집으로 오구 싶어 고만 내려왔다는 이야기 등 이야기는 끝이 없다.
지혜있던 고향 어르신들에게서 가르침이 나온다.
문명의 이기인 핸드폰, 트이터, 카카오톡, 페이스북, 마이피플...이런 게 있지만 정이 오고 가는 정도는 아니다. 우린 너무 무심하게 입과 귀를 닫고 산다.
선배, 친구, 후배가 어떻게, 오데서 뭘하며 사는지 물어도 안보고, 관심도 안갖고 여지껏 살아 온 날들이 많다.
저 아랫녘사람들처럼 끌어 주고 땡게 주고, 사람 키우는 것도 좀 하고, 행님, 동상 하고 안부를 물어도 보고, 맛있는 것도 나누며 “인생 뭐 있나?” 그러며 “같이 늙어 가는 시상! 도와가며 잘 살아 보세!” 이래야 사람 사는 맛인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