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쫓아내십니다.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십니다. 성전을 깨끗이 정리하시는 이 사건을 우리는 성전 정화라고 부릅니다.
사순3주일, 부활을 기다리며 우리에게 선포된 오늘의 복음은 우리의 성전 정화를 가리켜 줍니다. 이미 받아들인 신앙을 정화하고 세례의 은총을 갱신하는 시기에 초대합니다.
두 가지를 말해줍니다.
하나는 성전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예루살렘 성전은 하늘과 땅을 잇는 가교 구실을 하였습니다. 전례적으로 제사를 바치는 장소이고 사제직이 수행되는 곳이었습니다. 경제적으로는 유다의 금고였으며, 정치적으로는 로마의 통치에 맞서 하느님의 통치를 추구하는 유다인의 안식처로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모든 유다인은 해마다 성전세를 바쳤고, 3대 순례 축제 때에는 사방에서 성전으로 모여 왔습니다. 성전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전투를 벌였고, 성전이 파괴되고 사라졌을 때에는 재건에 대한 희망을 늘 간직하며 살았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성전에 대한 귄위에 도전하신 분으로 묘사합니다. 일부 유다인들은 성전 예배에 충실하게 참여했으나, 히브리서에서 볼 수 있듯이 세월이 지나면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결국 성전의 제사를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로 대체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성전과 사제직의 의미나 기능을 부정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유다교의 옛 제도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십니다. 마태오 복음에서는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고 하십니다. 마르코 복음에서는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고 하십니다.
히브리서는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대하여 가장 깊이 반성한 책입니다. 신약의 그리스도교가 구약의 유다교를 계승하면서도 그것을 뛰어넘는다고 확신한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이야말로 하느님이 뽑으신 새롭고 진실한 대사제로서 유일하게 인간의 죄를 용서해 주실 수 있는 분이라고 소개합니다.
소위, ‘율법주의’라고 하는 것은 그 안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보지 못하거나 일부러 지나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율법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사랑의 두 가지 중대한 계명, 곧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밝혀 주셨습니다. 몸소 사랑을 보여주신 분은 당신의 몸을 나누어 주시어, 우리가 드리는 이 제사를 통해 우리와 일치하기를 원하십니다.
영성체를 받아모신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됩니다. 이 순간은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이루는 거룩한 순간이며, 동시에 내 몸을 당신의 거룩한 성전으로 세우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서 두 번째 정화의 필요를 갖게 됩니다. 사순 시기는 특별히 우리 실존의 광야에서 하느님께서 우리와 가까이 계심을 재발견하는 시간으로 초대하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에 도전이 되는 중요한 시간입니다. 비록 인간적인 잘못과 죄가 쌓여 유아 때 받은 세례의 은총이 없어진 것처럼 보이더라도, 결코 세례의 은총을 잊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광야는 신앙을 시험받는 곳이지만, 동시에 신앙을 정화하고 강화시켜 주는 곳입니다. 하느님을 떠난 경험이 있더라도, 하느님 위에 우리 자신의 기초를 놓는 법을 배울 때에 어김없이 광야는 도움을 줍니다.
특별히, 이 시기에는 이미 세례를 받은 공동체 구성원들은 지금 세례를 준비하고 있는 예비자들과의 관계를 떠올리며 역동성을 강화할 수 있어야 합니다. 뽑힌 이들에 대한 준비와 더불어 더 넓은 공동체를 결합시키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방인이었던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 믿음을 갖고, 그녀의 집으로 돌아가 가족들에게도 믿음의 길로 안내합니다. 그녀를 통해 믿음을 갖게 된 이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이제 당신이 한 말 때문이 아니오. 우리가 직접 듣고 이분께서 참으로 세상의 구원자이심을 알게 되었소.”
우리 성전의 정화는 위의 고백을 할 수 있도록 이루어 져야 합니다. 작게는 지금 여기에 함께 하고 있는 예비자들에게 이 고백을 전하고, 크게는 부활을 준비하면서 만나게 되는 우리 주변의 이웃들에게 또 세상을 향하여 말과 행동으로 고백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