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지신인문학상 심사평
----이용우, 조숙진의 시에 대하여
언어는 우리 인간들의 지식의 총체이며, 언어가 없었다면 만물의 영장이기는 커녕, 먹이사슬의 최하동물로서의 생존 자체가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코끼리와 코뿔소처럼 힘이 센 것도 아니고, 사자와 호랑이처럼 사납고 무서운 것도 아니다. 제비와 수많은 철새들처럼 하늘을 자유자재롭게 날아다닐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백상어와 고래처럼 푸르고 푸른 바다의 제왕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언어는 이처럼 우리 인간들의 나약성을 극복하고 만물의 영장으로 군림을 하게 했는데, 왜냐하면 모든 사건과 현상들을 기록하고 그 지식을 활용하여 수많은 문명의 이기들을 개발해냈기 때문이다. 산업혁명이나 문화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사상의 혁명이 먼저 일어나고, 사상의 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언어의 혁명이 먼저 일어난다. 새로운 언어의 탄생은 새로운 인간의 탄생이 되고, 새로운 인간의 탄생은 새로운 우주의 탄생이 된다. 모든 사물의 기원도 언어이고, 모든 사상의 기원도 언어이다.
본지는 이번호에서 [‘ㅅ’과 ‘ㄹ’ 읽기] 외 4편을 응모해온 이용우 씨와 [건조주의보 내린 사이] 외 4편을 응모해온 조숙진 씨를 애지신인문학상 당선자로 내보낸다. 이용우 씨의 [‘ㅅ’과 ‘ㄹ’ 읽기]는 대단히 역사 철학적이고, 그 언어의 유희를 통하여 이 세상의 삶을 찬양하고 자기 자신의 행복한 삶을 연주하고 있다고 할 수가 있다. 우리들의 인생은 ‘ㅅ’과 ‘ㄹ’, 또는 웃음과 울음 사이에 있으며, 때때로 그가 처한 위치와 입장과 환경에 따라서 그 역할을 달리 할 뿐이다. 바보역할이면 어떻고, 울보역할이면 어떤가? 부자역할이면 어떻고, 거지역할이면 어떤가? ‘ㅅ’과 ‘ㄹ’의 뿌리가 사랑이듯이, 바보와 울보의 차이도 없고, 부자와 거지의 차이도 없다. 우리는 모두가 다같이 ‘모노 드라마의 주연 배우’이며, 그때, 그때의 처지와 입장과 환경에 따라서, 온몸으로, 온몸으로 ‘명품연기’를 펼쳐보여야 할 역사적 사명과 그 의무가 있는 것이다. 이용우 씨는 이제 마악 출발한 신인으로서 ‘ㅅ’과 ‘ㄹ’의 유사성과 차이성에 주목하여 [‘ㅅ’과 ‘ㄹ’ 읽기]의 명품 연기를 펼쳐 보인다. 웃음과 울음은 ‘한 뿌리- 한조상의 형제’이고, 사랑을 쟁취하고 그 행복을 연주하기 위하여 그 희비극을 펼쳐나가는 우리 인간들의 초상이라고 할 수가 있다. “쩌엉 쩡.../ 겨우내 배를 부풀리더니/ 자궁이 수축을 시작한다”라는 [해빙], “포경선에서 풀려나 어기적거리는/ 고래 한 마리가 예쁘다”는 [포경선을 타다], “‘이골난 낫질로/ 남의 인생 베는 사람은 되지 말아야지”의 [아버지의 낫] 등, 어느 것 하나 아름답고 뛰어나지 않은 시가 없다. 참으로 새롭고 탁월한 언어학적 성찰의 결과이며, 이용우 씨는 그 즐겁고 유쾌한 웃음으로 모든 슬픔과 비극적인 사건들마저도 다 녹여버린다.
조숙진 씨의 언어는 땅이 되고, 땅은 [초록의 힘]이 된다. 초록의 힘은 모성의 힘이 되고, 그는 이 모성의 힘으로 그 모든 것을 다 끌어안는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듣고 싶은 노래는 지지직거리고/ 건네받은 비스켓에 크림은 없었”지만( [건조주의보 내린 사이]), “누군가의 삶에 박힌 불행의 문신은/ 맨발을 덮은 군화자국으로/ 마음에 쏜 말의 총알로/ 뼈에 새겨진 손가락 총 자국 그대로/ 옷자락에 가려지고 땅속에 묻혔어도” 그 불행의 [문신]을 지우며, 또는 “입에서 불을 뿜는” [혀끝의 모의]를 뛰어 넘어서, 너도 나도 손에 손을 잡고 즐겁고 기쁜 [벚꽃 장날]의 대동축제를 연출해낸다. 조숙진 씨의 언어는 초록의 힘이 되고, 가장 날카롭고 예리한 칼날로 그 모든 환부들을 다 도려내고, 새로운 세상의 ‘시의 축제’--‘벚꽃 축제’를 펼쳐보인다. 시는 언어의 축제이고, 언어의 축제는 이 세상의 삶의 축제이다.
대단히 뛰어나고 훌륭한 이 시인들의 앞날에 무한한 행운이 깃들기를 기원한다.
----애지신인문학상 심사위원 일동(글 반경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