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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의 실수 (삼상 13:1-23)
영적적용:육체와 은사
설명
본문은 요나단이 블레셋의 수비대를 치자 이에 격분한 블레셋 군대들이 대거
몰려와서 이스라엘이 위기를 당하는 장면이다. 이처럼 육체에 입혀주시는 은사
의 바른 의미를 알지 못할 때 여러 가지의 실패가 발생한다.
1. 육체의 영성이란?
☞ 육체의 영성이란 육체가 은사라는 영성을 입어 영을 따라 하나님을 바로
섬기게 되어짐을 가리킨다. 그러나 은사가 전부인 줄로 알거나 은사를 육
신의 것을 추구하는데 이용한다면 바알의 종교로 변질된다.
2. 사울의 육신적인 준비
1절 "사울이 왕이 될 때에 사십세라"
☞ 즉 40은 증인수 2를 제곱한 수인 4에다 환난 연단 혹은 전부 모든 갖춤
등의 수인 10을 곱한 수로 연단을 통해 성령의 능력으로 온전히 입혀 주사
일군되게 하심을 뜻한다. 이처럼 능력충만해야 할 것이다.
3. 사울의 실수
1절 "그가 이스라엘을 다스린지 이년에 그 중에 이천은 자기와 함께"
☞ 그가 한 일은 기껏 자신의 왕권을 강화한 일이다. 육체의 영성을 주신 1차
적인 목적은 능력에 능력을 더함이 아니라 자기의 신앙을 완성하기 위함이다.
4. 요나단의 큰 실수
3절 "요나단이 게바에 있는 블레셋 사람의 수비대를 치매"
☞ 이는 오직 부친 사울의 왕권을 위한 것으로 신령한 의미에서 영권에 대한
분수를 넘어선 탐욕적인 추구는 사단의 시험에 포위되는 무서운 결과를 가
져온다. 신비주의자들에게 귀한 경종을 울리는 교훈이다.
5. 사울의 더 큰 실수
8절 "사울이 사무엘의 정한 기한대로 이레를 기다리되"
☞ 사울은 길갈에서 7일을 기다리지 못해 스스로 번제를 드림으로 그의 왕권
의 결정적인 실격을 불러왔다. 길갈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예표요, 7일
은 안식토록 내가 온전히 죽어짐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때 은사
적인 능력들은 그 생명이 길지 못한다.
6. 육신적인 신앙의 결과(15-23절)
1) "사무엘은 기브아로 가고" - 이처럼 도움의 은혜는 떠나고 만다.
2) 사울은 게바로 가서 요나단과 합류함 - 잘못된 신비주의의 남은 것은 600
명 즉 육신적인 것 뿐이요 길갈을 버리고 찾아간 게바는 '높음'이라는 뜻으
로 교만의 상징이다.
3) 블레셋의 노략군들의 세 방향 공격
① 오브라길로 말미암아 수알 땅에 이르렀고 - 오브라는 '황갈색'이란 뜻으
로 그 길은 원추모양으로 넓어지는 지형이며 수알은 '여우'라는 뜻이듯
신비주의 결과는 점점 세상적이요 불신앙적으로 나아간다.
② 벧호론 길로 향함 - 벧호론이란 '동굴의 집' 혹은 '호론신의 집'이란 뜻
으로 동굴이 본능을 우상은 탐욕을 상징하듯 잘못된 신앙운동의 결과는
본능과 탐욕의 열매를 맺게 된다.
③ 광야를 향한 스보임 골짜기가 내려다 보이는 지경 길로 향함 - 스보임
은 '하이에나 골짜기'요 위치는 소돔과 고모라가 있는 역청구덩이가 많은
곳으로 잘못된 신앙운동은 이단과 세속의 미혹에 빳게 됨을 뜻한다.
④ 철공이 없어짐 - 영적으로 완전히 무력하게 됨을 보여준다.
강해
오늘 말씀의 제목은 "사울의 실수"라는 제목입니다. 사울이 그 동안 까지는 대단
히 성공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부터 그가 조금씩 잘못하기 시작합니다. 본문은
요나단이 블레셋의 수비대를 치자 이에 격분한 블레셋 군대들이 대거 몰려와서
이스라엘이 위기를 당하는 장면입니다. 이와 같은 위기는 사울이 왕권을 받았지만
그 목적을 깨닫지 못하고 육신적인 목표만을 추구함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육체의 영성이 바른 목표를 향하지 못할 때 발생하는 실패에 대
한 이야기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육체의 영성이 무엇인가? 육체의 영성이
란 육체에 부어주시는 은사적인 능력을 포함하여 폭 넓은 의미에서 몸을 바쳐 열
심히 신앙생활하는 그 열심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매사에 성령님을 시인할 뿐 아
니라 열심히 예배하고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충성하고 또 봉사하며 전도하고
성경보고 물질드리고 순종함이 곧 육체의 영성입니다. 마치 몸이 영혼에 절대 필
요하듯 이 육체의 영성이 잘되어 있어야 견고한 신앙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육체의 영성이 전부인줄로 알고 거기에 머물러 있다든지 이 영성을
이용하여 이방인들처럼 육신의 것만 추구한다면 교만으로 변질되거나 마치 두아
디라 교회와 같이 큰 저력의 신앙을 가지고 육신의 것만을 달성코자 하는 바알의
종교로 전락되고 맙니다. 그 사실을 우리는 본문의 사울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
다.
1. 사울의 육신적인 준비는 다 되었습니다.
1절에 "사울이 왕이 될 때에 사십세라" 했습니다.
여기 숫자 사십은 대부분 연단이나 준비나 노력 혹은 완성 등을 가리킵니다. 그
래서 이스라엘도 광야에서 40년간 연단을 받았고, 모세도 미디안에서 40년을 연
단받았고, 사울도 다윗도 40년간씩 이스라엘을 통치했고, 예수님께서도 사역하시
기 전에 광야에서 40일간 마귀의 시험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모두 능력의 사람으
로 준비되었습니다.
즉 40이란 증인수 2를 제곱한 수인 4에다 다 갖춤의 수인 10을 곱한 수로 우리
에게 증인이 되도록 참된 증거인 성령의 능력으로 온전히 입혀 주심을 뜻합니다.
그래서 주의 일을 하려면 이 40의 수를 잘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능력
이지 생명 자체는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와 같이 사울은 능력적인 면에
서 이제 손색이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이스라엘 전체가 일사분란하게 따르는 완전
한 왕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2. 그는 그 능력을 자기를 위해서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다시 1절에 "그가 이스라엘을 다스린지 이년에" 그랬습니다.
여기 이년이란 일년이 다 지나고 이년째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만 1년을
가리킵니다. 1년이면 충분히 나라의 정세나 현황을 충분히 파악한 때입니다. 그리
고 국정을 보살핌에 있어서 때 묻지 않고 가장 순수할 때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
여유를 이용하여 자신의 왕권을 위한 기초를 다지기 시작했습니다.
원문을 보면 2절의 "택하여"란 말씀 앞에 '로'라는 용어가 있는데 그 뜻은 '자기
를 위하여'란 뜻입니다. 그래서 사울이 한 일은 2절에 "이스라엘 사람 삼천을 택하
여 그 중에서 이천은 자기와 함께 믹마스와 벧엘산에 있게 하고 일천은 요나단과
함께 베냐민 기브아에 있게 하고" 그랬습니다. 이렇게 그는 자신의 왕국을 위하여
자신을 경호할 삼천의 호위대를 3대로 편성했고 그 중에 한 대는 최측근인 아들
요나단에게 맡겨 수도를 방위하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가 기껏 왕권을 받아서 한 일은 자기의 왕권을 강화한 것입니다. 2절
후반절에 "남은 백성은 각기 장막으로 보내니라" 했는데 이 말씀은 오직 자기를
호위할 군대만을 뽑았음을 잘 보여줍니다. 그는 이렇게 하나님께서 왕권을 주신
그 목적을 깨닫지 못하고 참 목적을 깨달은 사람들은 배제시켰습니다.
그런데 이 왕권에도 능력의 왕권과 생명의 왕권이 있습니다. 먼저 생명의 왕권은
순교하거나 내가 진정 십자가의 공로로 죽어질 때 생기는 영원한 것입니다. 그러
나 능력의 왕권은 나를 만들어 감과 사역을 위하여 일시적으로 주신 것입니다. 즉
육체의 영성을 주신 제 1차적인 목적은 영혼의 영성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데 자기 완성을 위해서는 무관심하고 능력에 능력만을 더하려는 욕망이나 신앙의
열심이 전부인줄 알고 교만의 자아만을 키운다면 그 결과는 사단이 틈타는 결과
만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3. 그런데 요나단은 사울을 위하여 더 큰 일을 저지릅니다.
3절에 "요나단이 게바에 있는 블레셋 사람의 수비대를 치매 블레셋 사람이 이를
들은지라" 했습니다.
여기 요나단은 사울의 장자인데 그가 여러 블레셋의 수비대도 많지만 수도 부근
의 게바에 있는 블레셋의 수비대를 공격한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또 요나단의 군
대가 오직 왕을 호위하기 위한 근위대였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합니다. 또 나라를
위해 모여든 사람들은 다 보냈다는 점도 기억해야 합니다. 또 블레셋의 수비대가
사울을 감시하고 그 활동을 억제하도록 파송된 군대들이었음도 알아야 합니다. 그
수비대들은 사울에게 위협적인 존재였습니다. 그러므로 요나단의 이 일은 오직 아
버지를 향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을 보십시오. 그는 자기의 왕권을 강화시킬 어떤 것도 구하지 않았
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선한 뜻대로 구하자 하나님께서는 그가 구하지 아니한 것
까지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의 나라가 점점 견고하여 갔습니다. 우리도 그
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하나님께서 구하지 않은 것까지도 다 허락하여 주실
것입니다. 여기서 교훈하는 것은 목적이 바로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4. 그 결과 그들에게는 더 큰 시험이 오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5-7절의 내용입니다. 5절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과 싸우려 하여 모였
는데 병거가 삼만이요 마병이 육천이요 백성은 해변의 모래 같이 많더라 그들이
올라와서 벧아웬 동편 믹마스에 진 치매" 그랬습니다.
요나단의 일로 마치 벌집을 건드린 것처럼 블레셋 군대가 쳐들어 왔습니다. 그들
의 무력은 참으로 막강했습니다. 병거가 삼만 대라 했는데 이 삼만 대라면 그들이
다 나가서 싸울 자리도 없을 만큼 많은 병거입니다. 거기다 육천의 마병대와 해변
의 모래와 같이 많은 대군라고 했습니다.
여기 병거는 대단한 위력을 가진 수레로서 두 필의 말이 끌고 두 사람 정도가
타서 그 위에서 싸울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 그대로 돌진하여 깔아 뭉개는 강력한
전차입니다. 이 병거는 대개 철갑으로 싸여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삼만이었는데
여기 삼은 나쁜 의미로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모방한 것으로 거짓의 상징이며, 만
은 충만의 수로서 그러니까 남을 속이기에 위력적인 특징을 지닙니다.
이것은 잘못된 신앙운동에 나타난 폐해를 뜻합니다. 그래서 이단이 생기고, 그래
서 시한부종말론자들이 생기고, 그래서 파당과 분열이 생기고, 사단의 영을 받은
사람들이 생기고, 공산주의도 목사의 아들 마르크스에 의해 창안된 것으로 다 잘
못된 신앙운동에서 발생한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사람들이 감쪽같이 넘어갑니
다.
더구나 병거는 자아의 완악함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잘못된 신앙운동이 되면 자
아만 더 강해져갑니다. 기도와 금식 등이 모두 성경적인 것들이지만 그러나 목적
을 잃은 매일 10시간 기도, 40일 금식, 혹은 인간적인 꿈과 계획 등이 오히려 자
아만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모든 일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육천의 마병대는 육은 짐승과 세속과 사람의 수요, 마병대는 그 위력을
상징하는 것으로 육신적인 타락만을 가져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마7:15에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
를 따겠느냐" 하셨습니다. 그래서 비정상적인 신앙의 결과는 언제나 윤리적인 것
들만 봐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블레셋의 군대가 해변의 모래와 같이 많았는데 보병의 임무가 죽이고 포
위하고 점령함이듯 육신의 것만을 구할 때 사단이 그 심령을 정복하고 맙니다. 그
래서 그런 육신주의자들에게는 축복이 축복이 아니고 저주가 됩니다. 혹은 신비만
을 추구하는 사람이나 단체에는 귀신의 영이 틈을 탑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
할 것은 예수님이지 신비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구하면 신비도 주어집니다. 그러
나 신비만 추구하면 갈수록 귀신의 영에 사로잡혀 버립니다.
4. 중요한 것은 우리가 정한 대로 끝까지 죽어지는 것입니다.
8절에 "사울이 사무엘의 정한 기한대로 이레를 기다리되" 그랬습니다.
사울이 기다린 장소는 제사의 중심자인 길갈이었습니다. 길갈은 죄를 처리하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예표요, 7일은 그 곳에 육신적인 것을 안식케 하는 내가 온전
히 죽어지는 곳을 가리킵니다. 내가 죽어지면 그것이 영적인 승리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포인트는 8절의 정한 기한인 이레 즉 7일에 있습니다. 이 7일은 육
신이 쉬는 안식으로서 육신의 쉼은 곧 육신적인 것의 쉼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가
나안의 모든 악을 척결할 때 비로소 안식이 옴과 같습니다. 즉 내가 죽어지는 십
자가의 진리의 상징입니다.
사울의 실수는 이것을 기다리지 못한데 있었습니다. 그 결과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는 경고를 듣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무슨 일이 있어도 이 7일의 의
미인 십자가의 과정을 순종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령의 외적인 감동이 떠
남과 동시에 그 믿음도 끝나고 잘못된 신앙으로 떨어져 버립니다. 마치 가룟유다
처럼 예수님을 따라 온갖 신령한 말씀과 표적과 귀한 직분까지 받았지만 거듭나
지 못하므로 예수를 팔고 영원히 버림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과 같이 아무리
잠시 동안 놀라운 성령의 표적이 함께 있다 할지라도 십자가로 내 영혼이 변화
받지 못하면 아무 쓸데가 없으며 도리어 그것들이 교만하고 자아만을 위하는 일
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를 통하여 나를 부인하는 작업부터 해야
합니다. 그래서 딤후2:11에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했습니다. 그래야 진정한 생명의 왕권을 받습니다.
그 동안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많은 영적부흥을 주
셨지만 사람들 중에는 그 운동을 통하여 진정한 회개의 열매를 맺지 않고 다만
육신의 치료와 마음의 위로를 받는데 그치고 만 경우들이 많았습니다. 우리의 신
앙생활의 목적이 육신과 마음의 평안을 위하는 것이라면 그 신앙은 쭉정이에 불
과합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우리는 진정한 영적인 회개의 열매를 맺는데 힘써야
합니다.
5. 육신적인 신앙의 결과는 비참한 것을 알아야 합니다.
15-19절에 "사무엘이 일어나 길갈에서 떠나 베냐민 기브아로 올라가니라 사울이
자기와 함께 한 백성을 계수하니 육백명 가량이라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과 그들
과 함께한 백성은 베냐민 게바에 있고 블레셋 사람은 믹마스에 진쳤더니 노략군
들이 삼대로 블레셋 사람의 진에서 나와서 한 대는 오브라길로 말미암아 수알 땅
에 이르렀고 한 대는 벧호론 길로 향하였고 한 대는 광야를 향한 스보임 골짜기
가 내려다 보이는 지경 길로 향하였더라 때에 이스라엘 온 땅에 철공이 없어졌으
니 이는 블레셋 사람이 말하기를 `히브리 사람이 칼이나 창을 만들까 두렵다' 하
였음이라"
여기 보니까 사울에게 실망한 사무엘은 기브아로 가고, 사울은 남은 600명과 함
께 전에 불레셋의 수비대가 있었던 게바로 가서 아들 요나단의 군대와 합류하여
일전을 준비하지만 수효도 작고 농기구로 무장한 백성들에다 칼은 겨우 두 자루
에 밖에는 되지 않아 적을 이길 가망성은 조금도 없었습니다.
여기 사무엘은 그리스도 혹은 성령 은혜의 상징으로 육신적으로만 나가면 은혜
에서 빗나감을 보여줍니다. 또 최종적으로 남은 600명은 육신의 상징으로 잘못된
신앙의 유산은 오직 육신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길갈을 버리고 찾아간 게
바는 '높음'이라는 뜻으로 교만의 상징입니다.
더구나 블레셋의 노략군들의 공격이 세 방향에서 이루어졌는데 한 대는 오브라
길로 말미암아 수알 땅에 이르렀는데 오브라는 '황갈색'이란 뜻이요, 오브라길은
원추모양으로 넓어지는 지형을 가졌고, 수알은 '여우'라는 뜻으로 잘못된 신앙운동
의 결과는 점점 세상적이요 불신앙적으로 나아감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잘못된 영
에 사로잡히면 성경의 지도도 거절하고 조금이나마 남은 영적인 믿음마저 노략질
당합니다.
또 한 대는 벧호론 길로 향하였는데 벧호론이란 '동굴의 집' 혹은 '호론신의 집'
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데 동굴은 본능을, 우상은 탐욕을 상징합니다. 즉 잘못된
신앙운동의 결과 인간의 본능과 탐욕만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리고 나머지 한 대
는 광야를 향한 스보임 골짜기가 내려다 보이는 지경 길로 향했는데 스보임은 '하
이에나 골짜기'라는 뜻이고 위치는 소돔과 고모라가 있는 역청구덩이가 많은 곳입
니다. 즉 잘못된 신앙운동은 이단과 세속의 미혹에 빳고 악에게 먹힘을 당할 수밖
에 없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철공이 없어 무기도 없고 농기구마저 블레셋 사람
들에게 벼르렸는데 이처럼 영적으로 완전히 무력하게 됨을 보여줍니다.
<결론>
결론으로 말씀드리면 내가 영적으로 성숙해지는 진정한 십자가를 경험하는 신앙
생활이 되지 못하면 진정한 능력은 없으며 도리어 사단의 시험으로 말미암아 패
가망신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은혜를 받은 대로
더욱 나를 죽이고 영적으로 변화되는 곳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그 때 진정한 하나
님의 나라를 온전히 누리는 성도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