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솔솔 소나무/십 리 절반 오리나무/대낮에도 밤나무/우리 아기 자작나무/칼로 베어 피나무/목에 걸려 가시나무/죽어도 살구나무/거짓 없이 참나무……
나무노래는 이제 우리 곁을 떠났다. 이 민요를 부르던 때는 자연과 인간의 조화가 가능했겠지만, 이 시대 자연은 단지 대상물에 지나지 않는다. 개발에 맞선 생태주의가 점차 힘을 얻고 있으나, 종자전쟁 시대로 흘러가는 세계의 흐름을 막기에는 아무래도 역부족인 것 같다.
유전자 금고인 종자를 다양하게 확보하려는 세계 각국의 노력은 얼핏 생각하면 생태계를 보존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상 그 배후에는 유전형질까지도 상품으로 만들려는 자본의 음모가 깔려 있다. 자연선택에 인간이 적극 개입함으로써 쌀이나 밀뿐 아니라 배롱나무 한 그루, 명아주 한 포기까지 경제적 가치로 환원하려는 것이다.
자귀나무 붉은 꽃그늘 아래 앉아 곰곰이 생각해보라. 수수꽃다리가 어찌 우리 것이기만 하며, 층층나무가 국적을 갖고 태어났겠는가? 그것들은 최선을 다해 존재할 뿐이다. 미국 민들레가 들어와 생태계를 교란해도 그 불안정은 거대한 진화의 흐름에 흡수되어 안정 상태에 도달하도록 되어 있다.
정원의 일본 목련은 미끈한 몸매가 저리 아름다운데 단지 일본이 원산지라는 이유만으로 미워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 옆의 은행나무나 히말라야시더는 결코 다른 나무를 질투하는 법이 없다. 인간들이 라일락(미국)으로 부르거나, 리라꽃(프랑스)이나 정향나무(중국)로 부르거나 상관없이 수수꽃다리는 가없는 향기를 하늘에다 뿜어놓는다.
자귀나무 꽃그늘 아래 앉아 가만 생각해보라. 나무들에게 국적이란, 오랜 고향이었던 자연에서 너무 멀리 벗어나버린, 인간의 불안이 만들어낸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