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장 사랑했던 무뢰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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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우와 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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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7.11 / 오승욱(영화감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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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우처럼 수많은 영화에 출연하면서도 언제나 한결같았던 배우도 없을 것이다. 그는 오직 죽음으로 귀결되는 남성적 비장미, 그리고 오직 살아남기 위해 자기 손과 얼굴에 피와 때를 묻히는 질긴 카리스마를 보여줬다. 이소룡도 성룡도 아닌 오직 왕우에게만 애정을 바쳤던 영화감독 오승욱이 오랜 사랑을 고백한다.
70년대 중반 권격영화가 쏟아져 나오던 그 시절, 내 주변의 친구들과 삼촌들은 모두 이소룡을 좋아했지만 나는 왕우를 더 좋아했었다. 물론 나도 이소룡 영화가 동네 극장에 들어오면 아침에 들어가서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보고 또 봤고, 버스 정류장 가판대에서 파는 이소룡에 관한 책들을 모조리 사서 책장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봤으며, 그의 탁월한 액션 신 연출에 감탄했지만, 왠지 왕우만큼 매혹되지는 않았다. 너무나 왕우를 좋아하는 나에게 친구가 신문의 해외토픽란에 난 왕우의 폭행 기사를 보여주며 그 사람 깡패인데 그래도 좋아하냐고 물었었다. 잠시 주춤했지만, 결론은 ‘그래도 좋아!’였다.
당시 봤던 왕우의 영화들은 거의 모두 눈을 잃거나, 온몸이 피투성이가 돼 죽어 나자빠지면서 끝났다. 그가 용케 살아남았다 하더라도 팔이 잘리거나 온몸에 피 칠갑을 하고 고통 때문에 얼굴을 찡그리며 사람들의 부축을 받고 간신히 서서 영화를 끝냈었다. 장철 감독의 영화 <심야의 결투>와 <대자객>에서의 죽음은 말할 것도 없고, 그가 주연 감독한 <외팔이 드래곤>(1971)에서도 온몸이 너덜너덜 찢어지고, 한쪽 눈알이 뽑혀 간신히 몸을 지탱하고서야 영화가 끝난다. <흑호문>(1972, 원제: 패왕권)에서는 마영정이라는 한국의 시라소니 같은 협객을 연기 하는데, 마약과 매춘, 인신매매를 하는 동락당 일당과의 대결에서 자신이 믿고 사랑하던 앵벌이 소년의 배신 때문에 온 몸에 석회가루를 뒤집어쓰고 눈물, 콧물을 다 흘리며 악당들과 싸우다가 등과 다리에 도끼가 박혀서 결국 적을 이기지 못하고 동락당의 간판만을 부셔버리고 죽는다.
아마도 장철의 영향 때문이었는지, 왕우가 출연하거나 감독한 영화들에서 그는 죽어야지만 평화로워지는 무뢰한이었다. 이소룡이 출연하기로 했다가 시나리오가 마음에 안 든다며 거절해서 왕우가 대신 출연한 <냉혈호>(1973, 원제: 냉면호)를 보면, 이소룡을 위한 영화였던 만큼 <당산대형>이나 <맹룡과강>처럼 홍콩에서 건너온 순진하지만 무서운 실력을 지닌 청년이 일본에서 적들에게 박해를 당하다가 번개 같은 발차기로 적들 모두를 제압하여, 고통 받는 동포들을 구해내고 어디론가 떠나버리는 그런 이야기였지만, 왕우는 캐릭터를 건달로 바꿔 항상 건들거리고 여자들과 바람을 피우고, 걸핏하면 싸우다 도망치기를 반복한다. 라스트 대 결투에서 악당의 날카롭게 날이 선 칼을 맨손으로 잡아 막아내고, 종아리에 도끼가 박혀 쩔쩔매면서 하얀 옷이 피투성이가 되어서야 영화가 끝난다. 아마도 이소룡이 이 영화에 출연했다면 입가에 피가 조금 묻는 것으로 끝났을 것이다.
할리우드 물을 먹었던 이소룡의 영화들은 기본적으로 <셰인>류의 서부극이다. 약간 이야기가 다른 <용쟁호투>(1973) 역시 할리우드 첩보물 <007> 이야기의 또 다른 변형일 뿐이었다. 하지만 왕우의 영화들은 좀 더 사악한 마카로니웨스턴과 닮아 있다. <사대천왕>(1974)에서 도박꾼으로 나와 싸움에 불리해지자 도망치면서 ‘중국병법 중 으뜸은 36계 줄행랑’이라며 뻔뻔스럽게 도망치는 그런 비열한 주인공은 오직 왕우의 것이었다. 그가 연기했던 캐릭터들은 거의 모두가 건달, 도박꾼, 호색한이었다.(물론 70년대 중반 이후에는 재미없는 영웅 캐릭터를 연기하기도 하지만)
<쌍룡>에서 그가 첫 등장을 했을 때의 극장 안 풍경이 기억난다. 영화가 시작하면 진성이 나와 마적단에게 죽은 자신의 가족들을 부여잡고 복수를 결심한다. 그리고 장면이 바뀌면 도박장에서 밤새워 도박을 한 호리호리한 체격의 사나이가 나타난다. 너무 멀어서 누군지 분간이 잘 안됐지만, 관객들은 그가 왕우 임을 알고 일제히 한마음이 되어 탄성을 지른다 "아, 왕우다!" 도박꾼이며 건달인 왕우는 마적단의 여두목 곽소장을 사랑하고 진성은 자신의 가족을 죽인 곽소장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나타난다. 그런데, 왕우는 과묵하고 멋진 복수귀 진성을 친구로 삼는다. 마침내 진성이 귀소장을 죽이고, 사랑에 눈먼 왕우는 애인의 복수를 위해 진성과 대결한다. 발을 로프로 연결하여 사생결단을 내려던 그들은 죽음 직전까지 싸우다가 주먹을 내리고 싸우지 말자, 이렇게 싸운다고 죽은 사람이 돌아오느냐며 서로 등을 돌리고 갈 길을 간다. 이 세상에는 슈퍼맨만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학교에 가면 잘난 척하는 깡패 같은 선도부 놈들과 공부 잘하는 놈들에게 무시당하고 매 맞는 것이 하루 일과였던 나는, 이 세상에는 알 수 없는 사악한 폭력과 어둠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셰인>류의 서부극처럼 정의가 항상 멋있게 이기는 꼴을 보면 울화가 치밀었다. 그래서 뭔가를 얻기가 너무나 어렵고, 피투성이가 되거나 죽어야지만 원하는 것을 얻는 왕우의 영화가 더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얼마 전, 일본의 가라테 배우 구라다 야수키가 쓴 ‘내가 만난 홍콩 액션스타’란 책에서 왕우편을 여자친구에게 변역해 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었다. 그 친구는 번역을 해주면서 “이거 뭐 봉이 김선달이 대동강 물 팔아먹은 그런 황당한 이야기인데 이런 걸 뭐하러….” 했지만, 나는 왕우에 대해 다시 한 번 감동 먹었다고 울먹였다. 그랬더니 여자친구는 웃으면서 “혹시 구라다 야수키가 30년 전 왕우에게 선물 받은 사파이어 반지를 끼고 왕우를 만났는데, 정작 선물을 준 왕우는 그걸 전혀 기억 못하더라는 이야기에서 감동 먹었냐”고 했다. 난 바로 맞췄다며 웃었다. 구라다 야수키는 왕우를 조폭인지 배우인지 분간이 안 가는 멋진 큰 형님 같았다고 회상했다. 보통 그런 인간이라면 자신이 누가 봐도 멋진 슈퍼 히어로 역만을 고집했을 텐데, 왕우는 항상 죽음을 향해 가는 위악적인 캐릭터를 연기했던 것 같다. 내가 왕우에게 매혹되는 지점이 바로 거기다. 그래서 그가 현실에서 폭행에 연루된 깡패라 해도 좋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번 부천영화제에 왕우가 온다고 한다. 너무나 물어 보고 싶은 것이 많다. 촉망 받는 수영선수였던 그가 심판 판정에 불복해 수영 대회장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버리고 영화계에 입문 하게 된 이야기며, 어떻게 장철과 만났는지. 그리고 그가 감독 주연한 첫 작품 <용호의 결투>에서 어떻게 주먹 싸움만으로 영화를 만들 생각을 했는지, 그리고 스튜디오에서 누군가 싸우면 바로 왕우가 그곳에 있었다고 하는 말이 사실인지, 뭐가 불만이어서 그렇게 싸움질을 하고 다녔는지, 식당에 가면 항상 출입구를 바라보고 앉아서 자신의 적이 오는 것을 경계했고, 가방에는 왜 늘 장전된 총을 넣고 다녔는지, 살인교사 혐의가 사실인지, 역도산처럼 배에 칼을 맞고도 깨진 맥주병으로 정말 자기를 찌른 놈을 묵사발 냈는지, 그리고 성룡이 흑사회로부터 목숨의 위협을 받고 있을 때 그가 나서서 성룡을 호주로 빼돌려 구해준 일이 사실인지, 세금포탈 때문에 대만으로 도망쳤다는데 그게 사실인지, 그리고 그의 집에 가면 금으로 만든 세숫대야가 있다는데 그게 사실인지, 정말 만나서 묻고 싶다.
역도산, <피와 뼈>의 김준평, <내일의 죠>의 원작자 가지와라 잇기, <성난 황소>의 제이크 라모타 같은 무뢰한들은 너무나 매혹적인 인물이다. 왕우 역시 그런 무뢰한이다. 이 세상에 살아남기 위해 피투성이가 돼 스스로 자기무덤을 팠던 남자들. 정말 궁금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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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보았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