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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 목회서신 디모데전서
김성윤: 바울이 로마감옥에서 출옥 후에 쓴 디모데후서를 살필 차례지요?
노우호: 예
오늘부터 바울이 남간 마지막 3편의 편지를 볼 것인데
3편의 편지는 디모데전서, 디도서, 디모데후서로
목회에 도움이 되는 내용이 기록되었다고 하여
목회서신이라고 합니다
디모데와 디도는 사도 바울의 오른팔 왼팔과 같은 동역자로
일생동안 바울 곁에서 협력하던 사람들인데
이들이
잠시 떨어져 각 교회를 맡아 있던 시기가 있었는데
그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하나님의 교회를 어떻게 돌볼 것인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지난번에 바울이 로마에서 2년 정도 가택연금 상태로 있었죠?
김성윤: 예
노우호: 그 기간에 에베소, 빌립보, 골로새, 빌레몬 4개의 서신을 썼는데
그 이후 바울은 곧 석방이 되었습니다
석방되었을 때 바울의 계획은 스페인으로 가야 되지만
그 전에 생각지 못했던 옛 개척교회로 돌아옵니다
왜 돌아오느냐 하면
가이사랴에서 2년 로마에서 2년 동안 감금되어 있으면서
기도하고 계시를 받고 성경을 살피는 중에
하나님의 교회와 그리스도를 좀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고
그것은 개척한 교회에 가르치지 못한 내용이었고
그 내용이 너무 소중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석방되자마자 스페인으로 가지 않고
자신이 개척한 교회들을 방문하게 됩니다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바울의 깊은 이해는
골로새서에 기록되었고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바울이 깊은 이해는
에베소서에 기록 되었습니다
오늘부터 우리가 공부하는 디모데전서와 디도서는
교회와 교회조직에 대하여 기록합니다
바울이 교회와 교회조직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깊이 인식하면서
교회에 대한 재정비가 매우 절실하고 필요하다고 느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스페인으로 가지 않고 개척한 교회로 돌아오는데
이 여행은 일반적으로 교회에서 소개가 잘 되지 않고
신학교에서도 이 여행을 바르게 인식하지 못한 채 덮어두고 있습니다
바울이 로마감옥의 가택연금에서 석방되어
어떤 여정을 거쳐서 순교에 까지 가게 되었는가?
이것은 디모데전서, 디도서, 디모데후서를 통해서 밝혀지기를 원합니다
바울은 출옥 후 그레데로 간 것 같습니다
그레데는 지중해 가운데 있는 크레타라는 섬이 있습니다
크레타섬은 고대문명이 있는 곳으로
해상교통이 빈번한 곳이므로 사람들이 거칠고
심하면 거짓말도 잘하는 그런 문화를 가지 있었습니다
이곳 사람들의 심성이 거칠고 강퍅한 것과는 달리
디모데는 너무 착하고 유순하기 때문에
디도와 같은 걸출한 인물을 보내서 교회를 잘 돌볼 수 있도록
디도를 크레타에 남겨 두었습니다
그런 후 바울 일행은 에베소로 향하였을 것이고
에베소를 거쳐서 골로새서를 보낸 골로새로 갔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편지를 보낸 뒤
반드시 뒤 따라 가보는 원칙이 있습니다
김성윤: 그런데 왜 안디옥으로 가지 않고 에베소로 갔을까요?
노우호: 에베소 지역에는 바울이 두란노서원에 2년간 가르쳤던 제자들이 많으므로
만나야 될 사람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2년은 일꾼들을 세우기에는 미흡한 기간이지만
바울이 가장 오래토록 두란노서원에 날마다 강론 했으므로
안디옥교회 보다는 에베소교회가 중심이 되어
에베소교회 쪽을 선택 하였고
이쪽은 골로새, 히에라폴리스, 라오디게아 쪽인데
이곳을 ‘부루기아 지방 이라고 하지요
이곳들을 방문하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빌레몬서를 보면
빌레몬이 골로새지방에 있는데
나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라는 장면이 나옵니다
로마에서 풀려나오자마자
그레데, 에베소, 골로새, 히에라폴리스, 라오디게아 쪽으로 선회한 다음에
드로아로 올라갑니다
드로아는 터키의 서쪽 끝에 있으면서
유럽방향(마케도니아)으로 건너가려면 경유하는 항구인데요
그 때는 날씨가 더운 초여름 정도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 시기는 AD64정도 되는 더운 날씨의 초여름인데
날씨가 더우니까
외투나 무거운 짐 같은 것을 ‘가보’라는 형제 집에 맡겨두었습니다
그리고는 마케도니아로 건너갑니다
마케도니아로 건너가면
사모트라게와 네압볼리, 빌립보로 건너가는데
마케도니아로 건너가서 보니까
그동안 교회들이 상당히 많이 변질되어
처음의 순수성을 잊어 버린 상태였습니다
사람들이 어떤 조직을 하게 되면
반드시 조직병이 생깁니다
좋은 예로
빌립보교회의
여오디아파와 순두게파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끝없는 신화와 족보이야기로
복잡한 사상들에게 오염되어 있는 것을 보면서
바울은 이곳들을 방문한 것이 천번만번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마케도니아와 아가야에 있는 교회들의 문제와
전에 고린도교회의 문제도 복잡했잖아요?
(디도가 가서 수습을 하였지만)
김성윤: 예
노우호: 디도가 수습했다고 하지만
교회의 문제가 완전히 수습되어 온전한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 당시는 신약성경도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사역자는 막연히 구약성경의 어떤 부분만 가지고 있었고
교리가 확정된 것도 아니기 때문에
교회를 돌본다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교회를 돌아봄으로
교회가 상당히 어려움을 격고 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고
따라서 마케도니아에서 예상외로 많이 지체될 것을 생각하면서
에베소교회에 디모데를 남겨두게 됩니다
그레데는 디도를 두었고
에베소는 디모데를 맡겨두었는데
디모데전서는 바울이 마케도니아의 어느 지방에서
디모데에게 쓴 편지 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속히 돌아가려고 하지만
만일 내가 늦어지기라도 한다면
디모데가 해야 할 일을 기록하고 있는데
해야 될 일이 뭐냐 하면
교회를 조직화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은 언제나 질서가 필요하고
감독이 있어야 되므로
장로나 집사를 세우고 여러 직분들을 임명하고
교회 안에서 지켜야할 기독교적 윤리를 정리하여
사랑하는 아들과 같은 디모데에게 편지를 쓴 것입니다
사도가 젊은 목회자에게
교회의 조직과 관리의 원칙을 알려준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교회의 장로(감독)들을 세우는 규정과
어떤 사람을 집사로 세울 것인가!
대부분은 업적보다 인품(성품)을 더 중요시 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편지를 목회서신이라고 하지만
디모데전서와 디도서는 성격이 상당히 비슷하고
디모데후서는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디도는 그레데에 있으면서 교회 사명을 띠고 있고
디모데는 에베소에 있으면서 교회를 조직화 하고 관리해야 되는
중요한 사명을 띠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자신은 마케도니아에 가서
교회를 조직화 하기위해
장로를 세우고 집사를 세우는 일을 하려고 했습니다
바울이 앞에 쓴 편지에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과
다시 오실 예수님을 영접 하는 것
이런 것에 관심을 많이 기울였는데
뒤에 쓴 편지(옥중서신과 목회서신)를 보면
종말에 관한 이야기는 빠져 있습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예수님께서 오실 시기가 가깝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상당한 기간까지
이 땅에서 선교의 사명을 감당해야 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세상을 둘러보면서 세상은 넓다는 것도 보게 된 것이죠
김성윤: 예
노우호: 그리고 할일이 너무 많고
교회가 조직적으로 체계화 되어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선교적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거룩하고 튼튼한 교회의 기둥들을 세우고 조직화해야 한다는
바울의 의지를 엿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소중한 것입니다
바울이 만약
디모데와 디도에게
내가 속히 갈 것이므로
조금만 기다려라
이렇게 되었다면 이런 서신이 없었을 것인데
바울이 빨리 가려고 하지만
만일(만분의 일) 늦어질 때
대신하여 에베소에서 장로를 세우고 집사를 세우는 일을 잘 수행하도록
만분의 일 까지도 대비하는 마음 때문에
디모데전서 같은 귀한 성경이 나왔고
디모데전서를 기준하여
장로나 집사를 세워
교회를 조직화 합니다
교회의 직책을 보면
목사가 있고 장로가 있고 집사가 있고 교사가 있고
권하고 위로하는 권사가 있는 것은 지극히 성서적입니다
그러나
케톨릭의 교황이나 주교나 신부, 추기경은
성경에는 전혀 없는 직분이므로 잘못된 것입니다
교회의 직제나 교회의 체계화 조직은 반드시 성경적으로 해야 하고
그 기준은 디모데전서나 디도서 잘 살펴보고
교회를 성경대로 세워가고 관리해 나가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김성윤: 성경파노라마 지금까지 노우호 목사님이었습니다
145 목회서신 디도서
노우호: 오늘은 디도서를 살펴볼 것입니다
앞 시간에 디모데전서를 살펴본 뒤에
곧 바로 디모데후서를 봐야 되겠지만
성경의 재본 순서에 따르지 않고
오늘 디도서를 공부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디모데전서와 디도서는 같은 시기에 기록했고
디모데후서는 시간이 많이 지나고
바울이 두 번째 채포되어 로마에 호송된 뒤
나중에 기록한 책입니다
기록순서로는 디모데전서와 디도서가 같은 시기에 기록되었기 때문에
먼저 살펴보도록 하고
디모데후서는 디도서 후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디도는 사도행전과 누가복음을 기록한 누가의 친동생이라는 전설이 있습니다
누가는 사도행전을 기록하면서
디모데이야기는 하는데 디도의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습니다
김성윤: 동생이기 때문에 그랬을 것 같아요
노우호: 아무리 자기 동생이라도
디도의 이야기를 전혀 쓰지 않은 것은 너무 합니다
김성윤: 그렇기 때문에 디도가 누가의 동생이라고 추측 하는군요?
노우호: 예
누가 자신도 사도행전이나 누가복음에서
자신의 이름이나 자신의 이야기는 쓰지 않고
언제나 예수님과 바울이야기로 꽉 채워져 있습니다
이렇게 디도와 누가는 자신을 숨기는 사람들인데도
루카스(누가)의 말의 의미는 ‘빛나다!’ 의미대로
숨겨도 숨겨도 영원히 빛나는 사람들입니다
디도는 그의 동행으로서
아주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고
아주 어려운 지역에 보내고 어려운 일을 맡겨도
일처리를 시원스럽게 처리 하는 사람입니다
어려움이 있는 교회에 디모데를 보내는 것보다
디도를 보내면 해결이 잘 되는 경우를 체험 합니다
김성윤: 주님도 사람의 성격에 따라 일을 맡기는가 봐요
노우호: 어떤 분은 예수 믿는 것도 자신의 성격대로 믿는다는 말도 합니다
성품도 예수님께서 사용하시면 적절하게 필요 합니다
디모데처럼 섬세하게 눈물과 애정을 가지고 다스리는 사람도 필요하고
디도처럼 때로는 과감하게 처리하는 사람도 필요한 것입니다
그레데는 섬이면서 뱃사람들이 많이 드나드는 거친 지역이므로
디도가 적격자라고 생각 되었던 것 같습니다
디도서 1장 5절에 보면
1:5 내가 너를 그레데에 떨어뜨려 둔 이유는 부족한 일을 바로잡고 나의 명한 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
1:6 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방탕하다 하는 비방이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라야 할지라
이처럼 감독은 본인 자신만 아니고
그의 자녀까지도 깨끗해야 함을 말 합니다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이것은 아주 중요한 이야기죠?
김성윤: 예
노우호: 교회서 중직 맡은 분이 자신의 주장을 고집하기 시작하면
교회가 참으로 어려움을 당합니다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대수롭지 않은 일에도 화부터 내는 성격이라면
분위기를 망칩니다
좋은 말도 꺼내기도 전에 화부터 낸다면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술을 즐겨하지 아니하며
아무리 좋은 사람도 술에 취하면 이성을 잃기 쉽습니다
구타하지 아니하며
인격적인 대화로 하지 않고 주먹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사람은
교회의 중직으로는 합당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며
이것은 교회 직분자의 자격에 5번이나 나옵니다
세상 사람은 돈 욕심과 권세와 명예를 탐하여 감독으로 나가는데
교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요즘의 정치인은 뇌물만 안 먹으면
좋은 정치인으로 인정됩니다만
교회에서는 뇌물 안 먹는 것 외에
정말 온유하고 겸손하고 덕을 세우며 모범을 보이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바울이 그레데 사람들의 성품을 표현하기를
디도서 1장 10절에 보면
[디도서]
1:10 복종치 아니하고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가 많은 중 특별히 할례당 가운데 심하니
1:11 저희의 입을 막을 것이라 이런 자들이 더러운 이를 취하려고 마땅치 아니한 것을 가르쳐 집들을 온통 엎드러치는도다
(1:11 저희의 입을 막으려면 신실한 일꾼이 있어야 한다는 것)
1:12 그레데인 중에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장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장이라 하니
그레데 사람들 스스로 이렇게 이야기 하는데
바울이 알기에도 그 증거가 참되다는 것입니다
1:13 이 증거가 참되도다 그러므로 네가 저희를 엄히 꾸짖으라 이는 저희로 하여금 믿음을 온전케 하고
항상 거짓말쟁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장이라는 평을 듣게 되면
교회에선 안 되거든요
따라서 이런 사람들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은 디도가 적합하다고 생각하여
디도를 그곳에 보낸 이유가 됩니다
그리고
1:14 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와 진리를 배반하는 사람들의 명령을 좇지 않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을 보면서도 마음약한 목회자는 말을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예를 들면
디모데의 경우는 너무 마음이 착하고 온유함으로
이런 사람들은 잘 다루지 못하여
자신의 마음만 괴로워 위장병이 걸리게 되는데
디도의 경우는 당차게 이런 일을 처리하는 적격자로
그레데에 보낸 것 같습니다
디도와 동역할 수 있도록 아볼로를 함께 보내는 것 같습니다
바울은 이단들이 오면
조심하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장로와 집사를 세우는 것은
디모데전서에 쓴 내용과 비슷하고
3장에 가서 보면
금하는 이야기를 합니다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을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
그리고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 하라
자주 가까이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네가 아는 바와 같이 부패하여서
스스로 정죄한 자로서 죄를 짓느니라
우리가 이단들이 바른 길로 돌아오도록 애를 쓰지만
이단들과 만나서 대화를 해보면
아무리 이해시키려고 해도 잘 안 되고
시간만 낭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1-2번을 정말 애정을 가지고 권해 보다가 안 되면 멀리해야 합니다
성도들이 이단에게 전도하려고 하다가
오히려 전도 당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단인 경우에는 한두번 권해보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멀리하는 것이 좋습니다
디도에게도 그렇게 말을 할 정도이면
일만 성도들이야 오죽하겠습니까!
김성윤: 예,
노우호: 마지막 3장 12절 이하에 있는 말씀도 아주 중요한 말씀인데
바울의 마지막 여행 행적을
누가가 기록을 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사도행전 28장 이후의 바울의 행적을 예측하려고 하려면
바울의 마지막 서신들의 끝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디도서의 끝에 보면
3:12 내가 아데마나 두기고를 네게 보내리니 그 때에 네가 급히 니고볼리로 내게 오라 내가 거기서 과동하기로 작정하였노라
그러니까
드로아를 지날 때는 날이 더워지는 초여름 정도였는데
마케도니아로 건너가서
디도서를 쓸 당시에는
겨울나기(과동)를 어디서 할 것인가를 계획하고
디도서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아데마는 전설에 의하면
예수님 70인 제자중의 한사람이라고 합니다
두기고는 우리가 잘 아는 사람이죠?
바울의 연락책으로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사람으로
에베소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를 전달했던 사람이고
언제든지 연락을 책임지던 사람입니다
이 사람의 이름은 발이 빠른 사람이라는 의미인데
정말 발이 빨랐습니다
아데마를 보내든지 두기고를 보낼 때
너는 거기(니코폴리) 일에 손을 떼고
니코폴리스라는 곳은
고린도 항구에서 서북쪽으로 아드리아 해변에 있는 항구도시입니다
비아이그나티아가도의 아주 중요한 교통의 요충지인데
거기가 전략적으로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고린도 사역을 할 때에도)
바울이 그곳을 집중적으로 전도하지 못했습니다
이번에 온 김에 한 겨울을 여기서 과동을 하면서
니코볼리 전도를 집중적으로 하겠다는 생각으로
제자들을 대부분 여기로 불러 모읍니다
그리고 13절에 보면
3:13 교법사 세나와 및 아볼로를 급히 먼저 보내어 저희로 궁핍함이 없게 하고
바울은 자신이나 아데마, 두기고, 디도
이런 사람들이 가기 전에 일단 선발대로
교법사 세나와 아볼로를 급히 보내어
큰 집회를 앞두고 미리 준비케 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무작정 낫선 곳에 가서 허둥대는 것보다
선발대를 보내서 차분히 준비하게 되면
능률을 높일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보면 아볼로의 위치가 어느 정도 짐작이 되죠?
김성윤: 예,
노우호: 옛날 고린도교회에서 나는 아볼로 파다
나는 바울파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세월이 지난 뒤 아볼로의 위치가 바울의 오른팔과 왼팔같이 일하는
디도가 보내는 것을 결정하는 정도니까 계급이 아니지만 바울은 3진에 해당하는
바울 다음에 디모데 디도가 있고
디도의 지시를 받아서 움직이는 사람이 아볼로와 세나입니다
이처럼 편지의 뒤 끝의 내용을 살펴봄으로
사도들의 행적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여 바울일행은 곧 니코폴리로 갔을 것입니다
바울은 니코폴리에서 전도를 하다가 체포 됩니다
바울은 로마로 이송되어
두 번째 로마감옥에 투옥 됩니다
두 번째 투옥되어 쓴 편지가
다음에 공부할 디모데후서입니다
김성윤: 성경파노라마 지금까지 노우호 목사님이었습니다
146 목회서신 디모데후서
김성윤: 오늘은 디모데후서를 살펴볼 차례지요?
노우호: 예
디모데후서는 목회서진 중에서 마지막권이고
또 바울서신 전체에서도 어쩌면 마지막 서신입니다
이런 면에서 바울의 유언과 같은 말씀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난시간에 바울이 두 번째 로마감옥에 투옥 되었다고 말씀드렸는데
바울이 니코폴리 전도를 너무 심하게 했던 것 같습니다
로마황제 네로가 이시기에는 충분히 미쳤고
지난 1차 연금 때는 덜 미쳐서 가택연금 상태에서 석방되어 나왔지만
2차 투옥 때는 가택연금이 아니고
마메틴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이곳은 돌 감방인데
반은 지하에 묻히고 반은 지상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지상에 올라온 부분에도 창문은 없고
마치 성경책반쪽만한 구멍이 숨구멍처럼 하나 있습니다
그곳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길만
그 구멍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그 감옥에 들어갔다면
나갈 수 있는 소망은 희박한 것입니다
김성윤: 이제는 출옥의 희망을 가질 수 없겠군요
노우호: 1993년에 성지순례를 갔을 때
그 감옥에 들어가 보았는데
마음이 숙연 했습니다
거기서 기록한 편지가 디모데후서입니다
그때 디모데는 에베소교회를 돌보고 있었고
바울이 2번째 체포될 당시에는
바울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도망을 갔습니다
목자를 치면 양떼가 흩어진다는 말씀이 있듯이
예수님께서 잡히실 때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린 것처럼
바울이 2번째 채포될 때는 대부분의 전도팀들이 흩어졌습니다
이 사실을 아쉽게 생각하면서
이것으로 인하여 심판 날에 하나님 앞에서 허물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가질 정도로
바울이 많이 섭섭했음을 짐작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디도는 계획적으로 다른 곳으로 피신을 시켰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자신을 잡으려고 온 군인들을 향해
누구를 찾느냐? 물었을 때
그들이 대답이 ‘예수라’ 하니까
그렇다면 이 사람(제자)들은 보내라고 하는 장면을 볼 수 있듯이
바울의 경우에도 자신만 체포되고
디도와 같은 유능한 일꾼을 잃게 될까봐
달마디아(알바니아)쪽으로 보냈다는 것입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제각기 흩어졌는데
어떤 면에서는 흩어진 것은 잘된 일이죠(복음전파를 위해서)
바울이 감옥에서 묵상하고 기도해보지만
감옥에서 석방된다는 희망은 전혀 안보이고
기도하면 환상 가운데 반짝이는 면류관이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서 자신이 순교할 것을 예상하고
급히 편지를 쓰면서
에베소에서 목회하고 있는 디모데를
먼 길 로마까지 오라고 하는 안타까운 이야기를 듣습니다
디모데후서를 읽어보면
바울의 강하고 단호하게 명령하는 면이 있는가 하면
인간적으로 아주 외로워하고 약해져 있는
바울의 양면을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 속에 있는 거짓 없는 믿음을 사모하고 있습니다
1장 11절에 보면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반포자와 교사와 세우심을 입었노라
이를 인하여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 아니함은
(‘또’는 2번째 체포를 말합니다)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나의 의탁하는 것을 그날까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한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15절에 보면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
그 중에 부겔로와 허모게네가 있느니라
부겔로와 허모게네가 바울을 버렸습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두기고는 에베소로 보내었노라
드로비모는 병들어 밀레도에 두었고
이렇게 여러 사람들이 바울 곁에서 흩어지고
누가만 바울 곁에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이 편지를 쓰면서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정이 없어짐)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이런 세대가 올 것인데
너는 그런 사람들에게서 돌아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결같이 하는 말은
나의 교훈과 행실과 의향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와
핍박과 고난과 또한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과
어떠한 핍박받은 것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진 것을 네가 알기를 바란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다가
결국은 멸망의 길로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는 어려서부터 배운 성경에서 떠나지 말고
성경을 가지고 배우고 다른 사람을 가르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권하라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개그맨)를 좇으리라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그러면서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전날에 마가와 다투던 일이 있었죠?
김성윤: 예
노우호: 그 일을 떠올리면서
바울이 오해했던 것보다 마가는 아주 훌륭한 사람이 되었고
바울이 세상을 떠난다는 생각을 하게 되므로
마가가 많이 보고 싶어졌습니다
마가는 바울이 1차로마에 감옥에 있을 때
찾아오기도 했습니다
바울이 자신에게 박절하게 했던 것은 모두 잊어버리고
깊이 바울을 존경하면서 찾아왔던 아주 마음이 넓은 사람입니다
바울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마가를 보고 싶어 합니다
두기고는 에베소로 보내었노라
네가 올 때에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
(날이 더워진 초여름에 무거운 짐과 책을 가보의 집에 두고
마케도니아로 건너간 뒤 날이 추워진 것입니다)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때
날이 추워지면서 바닥에서 찬 기운이 올라오고
(우리나라도 처서가 지나면서 땅에서 찬 기운이 올라옵니다)
바울이 나이 많으므로 추위를 더욱 느끼게 되고
그래서 가보의 집에 맡겼던 외투를 가져오라는 것입니다
책은 특별히 가죽장식을 가져오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구리 장색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보였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저에게 갚으시리니
너도 저를 주의하라 저가 우리 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바울이 체포되면서 누구든지 바울을 변명하게 되면 함께 체포되므로
바울을 위해 변명하는 사람이 한사람도 없고
모든 사람들이 바울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심은 나로 말미암아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느니라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4장 19절에 보면
브리스가와 아굴라와 및 오네시보로의 집에 문안하라
에라스도는 고린도에 머물렀고 드로비모는 병 듦으로 밀레도에 두었노니
겨울 전에 너는 어서 오라 으불로와 부데와 리노와 글라우디아와 모든 형제가 다 네게 문안하느니라
겨울 전에 오라고 한 것은 날씨가 추워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이 겨울을 지난 이듬해 봄쯤(AD67)에 순교 했을 것으로 봅니다
디모데는 이 편지를 받고
서둘러 드로아에 가서 바울의 겉옷과 책을 챙기고
마가를 수소문하여 마가를 데리고
로마로 갔을 것입니다
바울이 최후의 변명을 하게 될 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디모데는 가만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울의 무죄를 주장하면서 끝까지 바울을 변론하려 했을 텐데
정치적으로 사형하기로 결정된 상황에서는
무죄를 주장하고 변론한다고 해고 아무 소용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바울은 순교하게 되고
바울을 변론하던 디모데가 오히려 체포되어 들어가는 일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다음 여정은 히브리서를 공부 할 때
좀더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김성윤: 성경파노라마 지금까지 노우호 목사님이었습니다
147 사도바울의 순교
노우호: 복음을 열정적으로 전하시던 사도바울이 하늘나라로 가시고
로마를 위해서 자신의 피를 쏟아 부은 것이죠
마메틴 감옥에서 멀지 않은 곳에
바울의 사형장소에 기념교회가 세워져 있고
바울은 참수형을 당했는데
참수가 될 때
머리가 땅에 떨어지면서 세 번 튀었다는 자국을
표시로 해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이방인을 위해 전심전력을 다해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하면서
달리던 걸음이 그곳에서 멈추게 되었구나 하는 생각에 숙연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바울이 순교한 이후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습니다
누가가 좀더 기록했으면 좋았을 것인데
누가도 그 이후에는 에베소로 오게 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순교하고 나서
디모데가 감옥에 들어가고 나니까
에베소교회가 비워지게 된 것이죠
에베소교회는 선교의 중심이 되는 교회이므로
그곳이 비워있으면 안된다는 생각에
디모데가 누가에게 적극적으로 부탁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누가가 에베소에 와서 교회를 맡게 되었는데
지금도 에베소의 옛날도시(old city)의 뒷문 쪽에 가면
(지금은 도시를 옮겨버렸기에)
누가의 무덤이 있습니다
터키가 기독교국가가 아니니까
그 무덤이 지금까지 방치되어 있습니다
황금으로 꾸몄어도 될 누가의 무덤이
쓸쓸하게 있었습니다
한국교회가 힘이 있다면
무덤이라도 잘 관리 되었으면 좋겠고
그 외에 성지의 소중의 장소가
터키 아이들이 새총에 많이 훼손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가파도기아에 가보면
동굴교회에 아주 소중한 벽화들이 많이 있는데
어린 아이들이 새총을 가지고
사도들의 벽화의 눈을 쏘아서 코를 훼손하는 것을 보고도
어찌 할수 없이 돌아 왔지만
바울과 함께 그림자처럼 일평생 동행하고
바울이 순교할 때까지 목격한
누가의 형제애를 볼 수 있습니다
디모데가 감옥에 갇힌
그 전후에 있었던 사실은
기록이 없기 때문에 확정 할 수는 없고
어떤 부분을 미루어 생각할 수밖에 없는데
히브리서가 이 문제 때문에 어렵습니다
371년 칼타고 회의에서
히브리서를 신약 27권으로 확정지울 때
히브리서를 성경에 포함해야 되겠지만
저자가 분명치 않으므로
갈등을 많이 했습니다
모든 서신들의 앞부분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사도된 누구는...’ 하면서
편지를 쓰고 있는 자신을 소개하는데
히브리서는 그런 기록이 없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를 연구할 때 가장 어려운 부분이
히브리서의 작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편지들의 성격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저작자에 따라서 이해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편지의 가장 중요한 것은 내용이지만
어떤 분이 썼느냐에 따라 그 책의 권위가 다르게 느껴지므로
저작자도 아주 중요합니다
김성윤: 예,
노우호: 그래서
마지막시간까지 이름표를 달지 못해 애를 먹던 서신이 히브리서입니다
명찰을 달아야 성경으로 포함 할 것인데
마지막 순간까지 고민하다가
일단은 바울의 명찰을 달아서 신약성경에 포함이 된 것입니다
김성윤: 여전히 의문이 남는군요
노우호: 성경으로 확정된 뒤에는 바울의 명찰을 떼어버리고
지금까지 저작자가 불분명한 상태입니다
오늘날까지 저작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견해가 많이 있습니다
몇 사람의 견해를 살펴보면
유세비우스는 바울이 히브리어로 기록한 것을
누가가 헬라어로 번역한 것이다
다른 여러 학자들은 히브리서의 저작자를
피크라는 학자는 브리스길라
하르막이라는 학자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에라스무스는 로마의 클레멘트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바울과 누가의 저작이라고 하고
칼빈과 델리치도 누가의 저작이라고 하고
트툴리안과 베이스쨘, 고뎁트, 살몬, 그레고리 이들은
바나바의 저작이라고 말하고
루터, 알포드, 몰튼, 파르, 로봇트슨
이런 사람들은 아볼로가 저작자라고 주장하므로
학자들마다 견해가 엇갈려서
히브리서기자는 하나님만 아신다고 일반화 하고 있습니다
김성윤: 저자가 불분명하니까 기록된 연대도 잘 모르겠군요?
노우호: 예,
사도바울이 순교한 그 이후만은 틀림없지만
예루살렘의 멸망이야기가 안 나오는 것과
내용의 분위기를 잘 살펴보면
예루살렘의 멸망직전(AD70이전)이었고
바울 사도가 순교한 그 이후라고 하면
AD67~AD70 정도가 되겠습니다
내용면에서 보면
히브리서가 어떤 분위기에서
어떤 목적으로 쓰여 졌는지를 추측할 수 있습니다
저도 확정할 수는 없지만
나름대로 저자를 추측해 본다면
바울이 마메틴 사형수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예루살렘교회가 쇠퇴한다는 소리를 듣고
바울은 한없이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감옥에 갇히기 전에
예루살렘교회가 어렵다고 하여
마케도니아 아가야 사람들이 연보를 모아 보내주곤 했는데
예루살렘교회는 그 이후에도 점점 어려워져서
결국은 예루살렘교회가 문을 닫게 되는데
왜 이렇게 되었느냐 하면
히브리인(유대인)들 중에서 예수를 믿었던 사람들이
다시 옛 유대교로 돌아간다는 소식을 들린 것입니다
히브리(유대)인들이 예수를 믿으면서도 할례를 주장하는 것도
바울의 마음을 아프게 했는데
그 할례당(유대인)들이 기독교를 버리고
그 옛날 유대교로 다시 돌아간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통곡을 했을 것입니다
김성윤: 가가막히죠
노우호: 바울이 동족을 사랑하기를
내가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자신이 동족이 구원받았으면 좋겠다고 할 정도로 간절했는데
이들이 그나마도 시원찮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가
다시 유대교로 돌아간다는 말을 들었을 때
땅을 치고 통곡을 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예수님의 오명이어(떡)를 먹던 수천 수만명들이
모두 예수님을 버렸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병 고침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일시에 마음이 변하여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아우성을 치던 사람들이
모두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큰 역사가 일어나므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구름같이 몰려왔지만
(하루에 3000명 5000명 몰려 왔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게 된 것이죠
바울이 이 일 때문에 수일을 먹지도 못하고 고민하고 있을 때
바울 옆에 있던 누가가 권했을 것입니다
‘아니, 다른 사람들에게는 편지도 쓰면서도’
‘자신의 동족을 위해서는 편지도 쓰지 않고 울고만 있느냐’고
가지 못할 처지라면
편지로 자신의 안타까운 마음을 전하라는 권면을 받고
바울이
‘아차! 그 생각을 왜! 못 했을까’ 하면서
정말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자기 동족 히브리인들을 위하여
히브리서를 쓰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쓰고 있는 동안에 사형날짜가 잡히고
결국은 히브리서를 완성하지 못한 채
서신의 미완성된 부분을 누가에게 부탁하고
사형장으로 갔다고 추측이 됩니다
그 이유는 히브리서 끝에 보면
편지를 쓰면서 아주 조심스럽게 권면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히브리서]
13:22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 내가 간단히 너희에게 썼느니라
13:23 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인 것을 너희가 알라 그가 속히 오면 내가 저와 함께 가서 너희를 보리라
바울이 살아 있을 때
디모데가 감옥에 갇혔다는 말이 없었으므로
지난시간에 말씀드린 것을 종합해보면
[히브리서]
13:24 너희를 인도하는 자와 및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라 이달리야에서 온 자들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에베소에 누가가 있을 때
이탈리아에서 사람들이 온 것입니다
그 때는 네로가 죽었고
정치범이었던 디모데는 네로가 죽게 됨으로 풀려나고
디모데가 감옥에서 나오자
누가에게 디모데가 풀려났다는 소식을 가지고 전해주기위해
바쁘게 이탈리아에서 사람이 온 것입니다
이런 것을 종합해보면
바울이 쓰던 것을 누가가 완성했다고 짐작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편지 첫머리에 바울의 이름이 없느냐 하면
누가가 이 편지를 완성 시키고 나서 예루살렘으로 보내려고 하다가
바울의 이름이 있는 앞의 한두절을 삭제 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히브리인들은 바울에게서 편지가 왔다고 한다면
읽지 않고 찢어버릴 것이 뻔 하니까
인사가 보다 편지 내용을 읽게 하는 것이 중요함으로
바울의 이름이 없는 것이 좋을 것 같아
하늘에 계신 바울 선생님 용서 하옵소서 하면서
편지 첫 부분에 있던 문안인사 부분을 잘라낸 것으로 추축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저자가 불분명한 책들이 몇 권 있는데
신약성경에서 히브리서가 그 중에 한 권입니다
이 다음시간에 그 내용을 살펴보면
바울의 심정과 누가의 심정을 이해 할 수 있겠습니다
김성윤: 성경파노라마 지금까지 노우호 목사님이었습니다
148 히브리서 파노라마
노우호: 히브리서 내용을 오늘 살펴보겠습니다
히브리서는 전체를 이해하기 보다는
몇 개 구절만 외워서 기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서 좌우의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고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다
한번 죽는 것은 정한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
위의 3구절을 요절로 많이 사용하는데
히브리스를 기록한 목적에 비추어 본다면
중요하게 여기는 위의 3구절이 없어도
히브리서에서 드러내고자 하는 내용에는 큰 손상이 없습니다.
책의 전체를 보지 않고
필요한 구절만 여기저기서 잘라 사용하는 습관은 좋지 않습니다
성경이 하나님 감동으로 기록된 말씀이라고 한다면
한절도 빠뜨리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죠?
성경이 처음부터 끝까지 영감 된 말씀이라면
영감 된 목적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어떤 말씀을 하시려고 그런 영감을 주셨는가를 생각하면서
한절도 빼지 말고 알뜰하게 한권씩 공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제 히브리서의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히브리서는 다른 말로 표현하면
비교논문형식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다가 다시 유대교로 돌아갔기 때문에
옛날에 믿던 유대교와
예수를 믿는 기독교 복음을 서로 비교하면서
어떤 것이 더 좋고 진리에 가까운지를 설명하려고 하니까
더 나은, 더 좋은, 더 아름다운
이런 표현들이 많이 나옵니다
제일 먼저 비교하는 것은
유대인들이 크게 자랑하는 그들의 선지자들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을 유대인들의 유산이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습니다만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
1:1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1:2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그러니까 구약의 선지자들이 했던 말을 모두 합친다고 할지라도
우리 예수님이 말씀 하신 것과는 비교가 안 된다는 것이고
두 번째
유대인들은 천사를 내세우는데
(유대인들은 천사를 굉장히 높게 보고
천사하면 껌벅하고 천사를 보기만 해도 까무러친다)
예수님은 천사보다도 더 뛰어나다는 것을 말씀하시면서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네가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고 하신 일이 있느냐? 하면서
또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든 천사가 저에게 경배 할지어다 말씀하시며
모든 천사들은 바람으로 사역자들로 삼는데
예수님을 믿고 구원 얻은 사람들을 도와주라고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천사이고
천사들은 하나님이 부리시는 종들에 불과한 것이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곧 하나님이므로
천사와도 비교가 안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김성윤: 그리고 유대인들은 모세를 크게 내세우지 않습니까?
노우호: 예,
유대인들은 기회만 있으면 모세를 이야기하는데
유대인들은 모세를 믿는다고 내세우면서
모세가 일러준 율법도 잘 지키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은 참 이상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선지자의 비석을 꾸미고는
이런 선지가 살아 있을 당시에
만일 자신들이 있었다면
이런 선지자를 잘 모셨을 텐데 하면서
이런 선지자보다 더 위대한 선지자!
예수그리스도까지도
못 박아 놓고는
자신들의 선지자를 자랑하고 있는
큰 착각에 빠져 있습니다
제가 보기로는
유대인들은 죽은 선지자는 존경하고
살아있는 선지자는 존경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참 불행한 일이죠
죽은 선지자만 존경할 것이 아니고
지금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있는 선지자를 존경해야지
유대인들은 모세와 비교하고 싶어 하는데
모세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사환에 불과하고
예수님은 그 주인집의 독생자이므로
그 집의 아들과 사환을 어떻게 비교 할 수 있겠는가?
비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유대인들은 여호수아를 아주 존경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순신 장군을 존경하듯이
여호수아를 굉장히 존경합니다
여호수아는 존경할 만한 인물이지만
그는 모세의 시종에 불과 하고
순전히 하나님께서 도우시므로
그가 가나안땅을 차지했지만
그렇다고 그가 영원한 안식을 준 것은 아니고
가나안 땅을 차지하고 나눠주면서
전쟁을 쉬게 했을 뿐이지
우리 여호수아(예수님)는 그런 여호수아가 아니고
요단강을 건너서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주실 하나님이시므로
너희 여호수아와 우리여호수아(예수님의 이름도 여호수아이거든요)는
비교할 대상이 아니고
너희 여호수아는 그림자에 불과하지만
우리 예수(여호수아)님이 실상이 아닌가!
그러므로 너희 여호수아와 예수님과는 비교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네 번째
너희들이 대제사장이 있다고 큰소리 치고 싶은 모양인데
너희 대제사장이라고 해봤자 아론의 후손이 아닌가!
아론이 레위지파에 속하고
레위지라가 구별된 것은 사실이지만
너희 제사장과 우리를 하늘나라를 인도하실 제사장(예수님)을 비교한다면
우리제사장은 적어도 멜기세덱의 반차를 ?i는 영원한 대제사장이다
멜기세덱의 반차를 ?i는다는 말의 의미는
그 멜기세덱이 얼마나 높은 분이냐 하면
너희의 최고 제사장인 아론의 조상을 따져보면
아론 위에는 레위가 나올 것이고
레위위에는 야곱
야곱위에는 이삭
이삭위에는 아브라함이 나오는데
그 아브라함도 멜기세덱 앞에서 무릎을 꿇고 복 빌음을 받았다
폐일언하고 복을 빌어주는 사람과 복 빌음을 받는 자가 중에 누가 높으냐?
낮은 자가 높은 자 앞에 가서 복 빌음을 받는 것이 아니냐!
우리 예수님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i는 영원한 대제사장이라는 것입니다
너희들의 제사장은 아론의 후손으로
굉장한 에봇을 입고
우빔과 둠빔을 가지고 있는 것 때문에
권위가 있는 것 같지만
그것은 소꿉장난에 불과하고
우리 예수님은
하늘에 있는 참 성전에 들어가신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아브라함보다도 더 높으신 분이므로
너희 제사장과 우리 제사장은 비교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위대한 멜기세덱의 반차를 ?i는 영원한 대제사장은
너희 편(유대교)에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편에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
너희가 또 성전이 있다고 굉장한 것처럼 하는데
성전은 모델하우스에 불과하다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는 말을 알지 못하느냐
산에서 본 것은 실상이고
본 것에 본을 좇아 지은 것은 모형이 아니가!
그러므로 너희가 예배하는 성전은 모형으로
하늘에 있는 것의 형상에 불과한 것이고
진짜 성전은 하늘에 있는 성전인데
거기에 우리 예수님께서 들어갔으므로
너희가 가진 성전보다 더 좋은 성전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섯 번째
그리고 너희가 언약을 가졌다고 생각하며
하나님께서 너희와 맺은 언약이라고
(그 언약을 지키지도 않으면서)
굉장히 좋다고 내세우는데
그러나 그 언약은 약점과 결점이 있고
완전치 못하기 때문에
때가 이르면
이스라엘집과 유다집에 새 언약을 세우겠다는 말을 기억하지 못하느냐!
우리가 예수님을 통하여 맺은 언약이야말로
새 언약이고 완전한 언약이다
옛것이 완전하다면
왜? 새로운 언약을 세우겠느냐!
옛 언약은 시대에 뒤떨어지고 너무 수준이 낮기 때문에
더 완전케 하시려고 예수님 오셔서
더 좋은 언약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자랑하며 내세우는 모든 것을 합친다 할지라도
예수님 한분과는 비교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에게 제물이 있다고 하면서
염소와 송아지의 피를 흘려서 속죄하는 제사를 지냈으므로
너희의 죄가 사함 받지 않았겠는가! 하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분명히 알 것은
염소와 송아지 피는
죄를 없이하지는 못한다
죄를 없앤다면
해마다 또 제사를 왜 드리겠느냐?
제사는 죄를 생각나게 하고
예수님 오실 때까지 집행유예 받은 것에 불과 하다
그러나 우리예수님께서 흘린 피는
한번 피 흘려서 우리의 죄를 완전히 없애버린 것이다
영원히 제사할 것이 없도록
단 한번으로 끝장을 내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드리는 제물과
흠도 점도 티도 없는 어린양(예수님)의 피와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는가!
송아지 피와 염소 피는 죄를 없이하지는 못하는 것이고
죄를 생각나게 하는 것이고
참 제물 되는 예수님께서 오실 때 까지
형을 집행유예 되도록
심판을 연장해놓은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너희가 또 예수님께서 오신다고 해놓고 금방 오지 않으므로
낙심하여 돌아서는 모양인데
성경에서 말하기를 잠시잠깐후면 오실이가 오실 것이고
지체하지 아니할 것이라는 말을 알지 못하느냐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하게 되면
속죄할 제사가 없고
오직 두려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하는 맹렬한 불만 있는 것이다
모세의 법을 범한 자도
2-3사람의 증인만 있으면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하는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들이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중하겠느냐
너희는 깊이 생각해 보라!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지 못하느냐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운 일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0:26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 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10:27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10:28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10:29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10:30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10:31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그리고 히브리서 기자가
안타까운 마음으로 하는 말이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그래서 믿다가 타락한 사람들이 얼마나 위험한지 경고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6:4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6: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6: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6:7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6:8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와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그리고
너희가 징계를 받고 고통을 받은 것 때문에
낙심해서 유대교로 되돌아간 사람들이 있는 것 같은데
하나님은 받으실만한 아들들 마다 채찍질 한다
그러니까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처럼 하지 말고
더욱 모이기를 힘쓰고
다시 교회로 돌아오라고 권면하는 말씀이 히브리서 내용입니다
[히브리서]
12:5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12: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 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이들마다 채찍질 하심이니라 하였으니
12: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12: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김성윤: 성경파노라마 지금까지 노우호 목사님이었습니다
149 약속에 근거한 소망
김성윤: 예수님의 제자 중에 베드로
노우호: 예, 베드로는 교회에서 많이 알려진 이름이죠
신약성경에서 가장 걸출한 인물이 있다면
베드로와 바울 요한
베드로전서는 AD60~AD66 어간에 기록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때는 네로 황제의 기독교 박해가 시작되었고
베드로는 이러한 박해를 인하여
잠시 동안 시험과 시련을 격어야 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역사는 아직 40년도 되지 않은 짧은 역사이고
오순절부터 교회의 역사가 시작된다고 한다면
교회의 역사가 너무 짧기 때문에
개인에게도 시험과 시련이 많고
교회에도 시험과 시련이 있는가 하면
기독교 전체의 역사에도 시련기가 있었습니다
시험과 시련기를 잘 넘기지 못하면
믿음에 굳게 서지 못하게 되죠
기독교의 10대 박해가 있는데
요한계시록을 살펴보는 시간에 10대 박해에 대하여 말씀드리기로 하고
우선 이 당시에 있었던 네로황제의 박해가 시작될 때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기독교인들에게
시험과 시련을 잘 이길 수 있도록
격려와 위로와 소망의 편지로 권면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수신자는 다시 말하여 이 편지가 어느 곳으로 보내졌느냐 하면
어느 한 교회에 보내진 것이 아니고
지금의 터키지방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말씀으로 되어 있습니다
맨 먼저 폰투(본도), 갈라디아, 가파도기아, 아시아, 비두니아
터키일대의 모든 곳에 흩어져 있는 그리스도인(나그네들)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을 나그네라고 표현을 잘 합니다
나그네란 이 세상을 고향으로 생각하지 않고
잠시 머물다가 가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땅은 우리의 영원한 본향이 아니고
우리가 영원히 여기 살 것도 아니고
정말 잠시 머물다 가는 곳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곳에서 시련과 환란과 고난의 날들이 다가오고 있을 때
성도들에게 몇 가지를 권면하고 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가진 참 믿음에 기초한 소망이 있기 때문에
이 소망을 가지고 시련을 이겨나갈 것을 권면을 합니다
시험과 시련과 환란과 핍박은 잠깐 있는 것이고
잠깐 있는 시련으로 인하여 오히려 기뻐 할 수 있는 것은
시련을 격을 때는 힘들지만 그 시련을 통과하게 되면
잘 통과 했다는 기쁨이 있습니다
야고보는 행함이 있는 참 믿음과 함께
시험을 이기는 믿음을 이야기 하고
베드로는 소망이 있는 믿음을 이야기 합니다
바울이나 야고보를 믿음의 사도라 한다면
베드로를 소망의 사도라고 할 수 있고
다음에 만날 요한은
사랑의 사도라고 칭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항상 있어야 되는 것처럼
믿음은 굉장히 중요하지요
(믿음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죠)
믿음은 믿음으로 끝나서는 안 되고
믿음은 소망으로 이어지게 되고
소망을 가진 사람들은
이 땅에서 사랑을 연습하고 실천하면서
사랑의 복음을 전하는 삶이 되어야 겠습니다
큰 흐름을 볼 때
바울과 야고보는 참 믿음을 강조합니다
베드로는 소망을 강조합니다
소망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희망과는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의 희망은
막연한
그야말로 이루어진다는 보장이 없는
희망사항이지만
참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보장된 소망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소망입니다
한번 약속하시면 반드시 지키시는 신실하신 분이
약속에 근거한 소망을 피력 하고 있는 것입니다
육체적인 출생도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것처럼
영적인 중생도 자신의 마음대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난 사람들에게 이런 소망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이 소망은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이 누리게 되는 것인데
이 소망으로 말미암아 어려움을 넉넉히 이긴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로 호송되는 과정에서
‘유라굴라’라는 폭풍이 불게 되었지만
어느 날 밤에 천사가 바울에게 나타나서
네가 예루살렘에서 전한 복음을
로마의 황제 가이사랴에게 반드시 전하게 될 것이라는 소망의 약속을 듣습니다
14일간 달빛도 햇빛도 별빛도 보지 못한 바울과 배에 탄 276명이
너무나 큰 절망에 빠져있었지만
소망의 약속을 붙잡은 단 한사람인 바울은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과정(배가 깨질지도 파선될 지도)을 거칠지는 모르지만
결국은 로마에 도착하여 로마황제 앞에 서게 된다는 약속을 받았으므로
바울에게 폭풍우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완전한 소망이 확실하다고 한다면
환란을 견딜 수 있다는 것입니다
네로의 핍박이나 도미티아누스의 박해 트라이안의 박해 등
10번의 박해를 ‘10대 박해’라고 하고
계시록에서는 열흘 간 시험을 받을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10일 뿐 아니라 10번의 때에 박해 받을 것이고
하나님께서 온 세계에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교회를 10번의 시험으로 연단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한 두 번의 시험으로 끝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여러 번의 시험을 거치는데
이처럼 사람마다 시험의 종류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면허시험도 시험의 종류가 4종류가 된다고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앞에 치루는 시험은 4종류가 아니라
사람마다 다른 시험을 치를 것입니다
믿음의 분량과 사명의 경중에 따라서
시험과 시련이 다르지만
어떠한 어려움도 이길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을 붙잡고
그 약속을 소망으로 가지고 있을 때 이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소망은
거듭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특권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소망을 주실 때
영생의 선물을 함께 주셨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 가운데 이루어질 그 소망의 세계를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순교의 자리까지도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소망은 썩지 않는 소망이고
더럽지 않는 소망이고
쇠하지 않는 소망으로
살아있는 소망이라고 베드로는 피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말라
모든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면서
오직 이 소망을 가지고 선한 싸움을 싸워 나갈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소망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이 소망은
우리가 죽게 되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 인하여 오히려 시작되는 세계(천국)를 약속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소망은 영혼의 닻 같아서
풍랑이 오더라도 세상물결에 휩쓸려 가지 않고
풍랑에 맞서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소망이란 하나님의 약속의 끈이라는 것입니다
약속에서 속자는 묶을 속으로
하나님의 약속에 묶여져 있는 소망을 가진 사람들은
어떤 환란과 고난과 핍박과 시련이 닥쳐와도
그런 물결에 요동치 않고
영혼의 닻을 내려 떠내려가지 않습니다
찬송가에도
이 몸에 소망 무엔가 우리 주 예수뿐일세
우리 주 예수 밖에는 믿을 이 아주 없도다
굳건한 반석위에 서겠다는 것처럼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이리저리 세상 물결에 요동하지 말고
든든히 서있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한 그 약속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고
그 약속에 근거한 소망을 가질 때
모든 박해를 이겨 나갈 수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멀지 않아 앞으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의 마지막인
대환란의 때가 도래 할 것입니다
다음에 살펴볼 요한 계시록에서
어떤 환란이 이 세상에 구체적으로 일어날 것인가를 보게 될 것인데
이런 대환란이 닥친다 해도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것은
다른 것으로는 이길 수 없고
다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소망의 세계를 생각하며
그 소망으로 인하여 세상의 박해를 넉넉히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스테반 같은 경우도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고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우편에 서 계시는 것을 봄으로서
이런 소망 때문에 돌에 맞으면서도 믿음을 지킬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믿음을 지키고 달려갈 길을 다 달리고
순교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을 위해 예비된 생명의 면류관인
의의 면류관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그 어려움도 이길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도
이 세상을 이길 힘은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소망을 확실히 믿을 때
세상을 이기게 될 줄 믿습니다
김성윤: 지금까지 노우호목사님이었습니다
150 참 믿음을 강조한 야고보서
김성윤: 오늘은 야고보서를 살펴볼 차례지요?
노우호: 예,
야고보서는 교회에서 잘 가르치지 않는 서신이고
인용하는 구절도 한 두절만 제한적으로 사용하고
마르틴루터도 야고보서를 안 좋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무슨 말이냐 하면
야고보서에서 믿음으로만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행함이 따라야 한다고 하니까
구원은 믿음과 행함으로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할 우려가 있지요?
김성윤: 예,
노우호: 그러나 야보고가 말한 것은
믿음과 행함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이 아니고
구원은 믿음으로 구원받는데
그 믿음은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생명력이 있고 살아있는 믿음을 강조한 것인데
루터가 오해를 조금 했던 것 같습니다
루터는 위대한 학자 이지만
야보보서와 요한계시록에 대한 이해는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요한계시록에 대하여도
요한계시록은 그 단어 수만큼이나 수수께끼가 많은 책이라고 할 정도로
요한계시록을 어렵게 생각 했습니다
루터는
야고보서에 대한 소중한 의미를 조금 놓쳤던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 봅니다
야고보, 베드로, 요한의 책이 연결되는데
야고보는 참 믿음을 이야기 합니다
교회를 다니고 있으면서도 거짓 믿음이 있고 참 믿음이 있는데
사도 바울은
디모데 마음속에 있는 거짓 없는 믿음을 보고 싶어 합니다
또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도
너희 자신들이 정말 참 믿음에 서 있는지
시험하고 확정해 보라고 권면 합니다
세상에 믿음에 무슨 참과 거짓이 있는가? 생각하겠지만
실제로 거짓 믿음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죠?
믿기는 믿었는데
그들은 예수님께 독사의 자식들아! 하는 말을 듣게 되고
또,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말씀을 듣게 되는 것을 봅니다
그동안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에 심취한 나머지
야고보서에서 행함이 있는 믿음을 소홀히 한 것은 사실입니다
특별히 한국의 교회들이 야고보서를 소홀히 했기 때문에
윤리적인 삶(실천적인 삶)이 따르지 못하고
믿음과 삶이 일치(信行一致)가 되지 않아
불신자들로부터 지탄을 받는 경우가 있는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따라서 야고보서는 재발견해야 될 책이고
온전한 믿음은 야고보서에서 제시하는 믿음으로
야고보서가 말하고 있는 믿음을 간략하게 정리 하려고 합니다
믿음의 길을 걷는다면
반드시 시험이 있고 시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기쁨으로 여기라고 시작합니다
신앙생활 하는데 시련이 없으면 좋겠지만 없을 수가 없습니다
학생들의 경우도
학교에서 시험만 없으면 학교 다닐만 하겠다고 하는데
학생들에게 시험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아브라함 같은 분에게도 반드시 시험을 해보시고
또 강하게 단련하기 위해서는 시련도 주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도 시험하신다는 사실을
마태복음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우리들이야 시험이 없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시험과 시련이 없는 믿음을 찾지 말고
참 믿음에는 시험과 신련이 반드시 따른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시험과 시련은 피하려고 해서 피해지는 것이 아니고
다만 늦춰지고 퇴보하는 것으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거든요
반드시 시험과 시련에 옳다 인정함을 받는 믿음!
모든 유혹을 이기고 견디는 믿음이
참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야고보는 행함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고
행함 있는 믿음을 강조하는 것인데
행함 있는 참 믿음이란?
첫째
시련과 시험을 능히 이겨내는 믿음을 말합니다
둘째
인간차별을 하지 않는 믿음을 말합니다
(부자나 가난한자를 차별한다는 것은 바른 믿음이 아님)
사람을 평등하게 대하는 믿음이 좋은 믿음입니다
셋째
윤리적 실천이 있는 믿음을 말 합니다
믿는 사람이 믿음을 지키려다 보면
불이익을 당하거나 어려움을 당하게 되는데
그런 사람들을 구체적으로 돕는
긍휼을 베푸는 믿음을 말 합니다
네 번째
자신의 혀를 제어 할 수 있는 믿음을 말합니다
참 믿음이 있다고 하지만
자신을 혀를 제어하지 못한다면
참 믿음이 아닙니다
진정한 믿음을 가졌다면
자신의 혀를 제어 할 수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혀를 제어하는 것을 굉장히 강조 합니다
만약 예수를 믿지만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분별 못하여
성도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거나
남의 자존심을 건드려서 교회를 어렵게 하든지
혹은 혀가 제어되지 않아서
말의 실수가 많은 사람들은
많이 다듬어야 할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
겸손하고 온유한 믿음을 말 합니다
참 믿음을 가졌다면
죄에서 구원받은 존재로서 겸손 할 수밖에 없지요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으로
이것은 신구약전체를 관통하는 만고불변의 기독교의 진리입니다
이 진리는 기독교 이외에서는 겸손을 강조하는 윤리가 없습니다
이슬람의 경우는
복수할 능력이 없으므로
겸손하고 용서하는 것이고
복수할 능력만 있다면 왜 용서하고 겸손하고 온유하겠는가 하면서
약자의 비굴한 변명으로 보는데
진리가 담긴 성경에서는
예수님께서 처음부터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여섯 번째
기도를 바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기적이고 정욕으로 쓰려고 하는 기도가 아니고
참 믿음은 바른 기도가 나옵니다
그 사람의 기도가 곧 그 사람의 신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기도를 들어보면
그 사람의 신앙을 예상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일곱 번째
세상과 짝하지 않는 신앙을 말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늘나라도 가고 세상도 즐기고
둘 다 추구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결코 참 믿음이라 할 수 없지요
만약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현저하게 줄어들게 될 것이고
세속주의에 물들게 되면
그 믿음은 파선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물질적이고 정욕적인 것을 추구하게 되면
우리 속에 거하시는 성령께서
시기하고 질투하기까지 근심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세상과 자꾸 벗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참 믿음을 가진 사람이 아니고
그 사람은 하나님과 스스로 원수 되게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런 소중한 말씀들이 야고보서에 안에 있는데
우리는 대부분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물론 이 구절은 야고보서의 전체를 대표하는 구절이라 할 수는 있습니다만
그러나 이와 함께 소중한 내용을 더 살피지 않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일곱 가지를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
1. 시험과 시련을 반드시 이겨내는 믿음
2. 절대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믿음
3. 사랑과 긍휼을 베푸는 윤리적 실천이 있는 믿음
4. 자신의 혀를 제어 할 수 있는 믿음
5. 겸손하고 온유한 믿음
6. 올바른 기도를 드릴 수 있는 믿음
7. 결코 세상과 벗하지 않는 믿음
이렇게 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기도의 응답된다는 것이죠
그 증거가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지만
그가 기도함으로 3년 6개월 비가 오지 않기도 했고
또 기도함으로 비가 오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의 기도가 응답이 없는가 하면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윤리적 실천적 삶이 없기 때문에
위의 7가지를 지키지 않으므로
우리의 기도가 온전치 못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올바른 믿음을 가질 것을 강조하고 있는 야고보는
예수님의 친동생인데
야고보는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의인 야고보라고 알려질 정도로
정말 경건한 삶을 살았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 친동생 야고보는
예수님께서 부활하기 전까지는 예수를 믿지 않았고
오히려 예수님이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처럼 느껴져서
예수님을 염려 할 정도로 경건한 사람인데
(예수님은 율법을 등한히 한 것이 아니고
바리세인들의 유전(전통)을 가감하게 무시해 버렸음)
수많은 사람들이
야고보 때문에 예수님께로 돌아오게 되었고
예루살렘교회에서 아주 기둥같이 여김을 받는 인물 이었습니다
나중에 이분은 순교하게 되는데
산헤드린에 끌려가서
끝까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강변하다가
돌에 맞아 순교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맨 처음 예루살렘 총회가 열렸을 때도
예루살렘교회의 대표격으로 일하는 모습을 봅니다
야고보서도
우리 성도들이 열심히 읽고 외울 만큼 읽어서
참 믿음!
살아있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고
베드로가 말하는 소망도 내다볼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성윤: 지금까지 노우호목사님이었습니다.
151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장
노우호: 지난시간에는 베드로전서에 관하여 살펴보았고
오늘은 베드로의 두 번째 편지입니다
베드로는 2개의 편지를 남겼는데
기록은 실로아노가 대필을 했다고 봅니다
두 번째 편지는 순교를 예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 자신이 떠날 날이 가까웠다는 내용도 있고
세상역사도 종말이 있다는 사실을 이야기 하면서
이 세상역사의 종말로 치닫게 될 때
몇 가지의 어려움이 있는데
첫째는
지난시간에 살펴 본대로 핍박과 박해가 있을 것이고
둘째는
거짓선지자와 이단들이 많이 활동하게 될 것이고
이러한 경우
성도들이 어떻게 이런 세상을 이기고 대처할 것인가 하는 것을 이야기 하면서
믿음도 필요하고 소망도 필요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성장해 갈것인가
이 성장의 단계를 이야기 합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사항인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믿습니다.” “믿습니다.”만 하지 말고
믿음이 자라야 되거든요
생명 있는 것의 특성은 2가지의 생명의 대사가 있습니다
첫째는
개체가 자라기 위한 개체 성장의 대사가 있고
나무를 심는다면 나무가 자라나죠?
두 번째
생식대사 있습니다
열매를 맺거나 새끼를 낳는 것을 생식대사라 하는데
물질대사는 생명을 성장하게 하는 것이고
생식대사는 종자를 퍼트리고 번식하는 것인데
믿음도 마찬가지로
참 믿음을 가졌으면
자라나야 됩니다
병들지 않는 정상적인 생명은
자라나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라난다고 할 때
믿음이 고무풍선처럼 자꾸 커지는 것이 아니고
베드로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믿음의 성장은
첫째는 믿음이고
믿음에 덕을 세우라는 것입니다
덕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덕은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더 많은 사람을 위하고 더 큰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개인 감정적인 것을 폭발해 버리면
개인이 스트레스는 해소 될지 모르지만
전체 공동체에는 해를 끼칠 경우가 많습니다
반드시 믿음에 덕을 세우라고 합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보면
믿음이 좋다고 하는 사람일수록
가정에서나 사회에서 덕을 세우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기도를 많이 하고 믿음이 좋다고 하는 사람이
동네에서 싸움을 더 많이 하고
싸울수록 기도는 더 열심히 하고
이런 사람은 믿음은 좋을지 몰라도
덕은 세우지 못합니다
직장에서나 가정에서나 마을에서나 집안에서나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덕을 세우는 믿음!
모든 것이 가하지만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다(바울이 한 말)
믿습니다! 하면서
믿음으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만
이 일이 하나님의 교회에 덕이 되는가!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가!
여러 사람에게 유익이 되는가!
여러 사람의 유익을 도모하고
더 많은 사람의 마음을 평안하게 하고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덕인데
이것을 너무 소홀하게 할 때
교회는 어려움을 격습니다
개인의 믿음의 성장도 멈추고
가족 전도도 안 되고
대개 가정에서 덕을 세우지 못하거나
집안 문중에서 덕을 세우지 못하거나
마을에서 덕을 세우지 못하거나
직장에서 덕을 세우지 못하면
전도가 되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믿음에 덕을 강조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데
이것을 오늘날 교회에서 많이 강조하지 않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가 신령한 은사를 많이 받은 것 같지만
문제는 덕을 세우지 못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하기를
모든 것이 가하지만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덕도 덕이지만
덕에 지식을 이야기 합니다
여기서의 지식은
세상 물정을 아는 지식이 아니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
진리를 아는 지식
성경을 아는 지식
영적인 세계를 아는 지식
이런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 외에도 그리스도인들이 무식하다는 말을 들어서는 안 되겠죠
그래서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이야기 합니다
지식이 없으면 이단과 사이비를 당할 수 없습니다
이단과 사이비는 고도의 맹훈련을 받아오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이 너무 좋아서인지
성경공부를 하지 않아
성경지식이 많이 부족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지적으로는 바울이나 마태보다는 못했을 것입니다
자신은 열심이 있어서 사도 중에 대표를 맡았지만
지식에 있어서 부족하다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후배들에게 글을 남길 때
열심히 공부할 것을 바라는 마음에서
덕에 지식을 강조합니다
그 다음에
지식을 추구하는 것이 주지주의가 된다면
무엇이든지 알려고 한다면
이것도 문제가 됩니다
그래서
지식에는 반드시 절제가 필요합니다
모든 것을 알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모르게 해 놓은 것은
모르는 것이 유익함으로 모르게 해 놓은 것이고
반면에 알게 해 놓은 것은
아는 것이 유익하기 때문에
열심히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하는 말을 보면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지식에서 자라가라!”고
맨 끝에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지식이 필요하지만
모든 것을 알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알게 하신 것을 알려고 노력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절제입니다
그리고
절제라는 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자기를 제어하는 능력인데
특별히 감정의 절제!
감정처리를 잘 할 수 있어야 성숙한 신앙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감정을 절제하지 못해
혀를 제어하지 못하고 말을 함부로 한다면
그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 된다고 말합니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잘 해오다가
한번 잘못된 감정이 폭발해 버리면
그동안 그의 경건을 무의로 돌아가게 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모세와 아론이 그렇게 온유하고 겸손하게 잘 인도 하다가
자신의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여
므리바에서 반석을 치는 일로
하나님께 큰 책망을 듣게 되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가 필요합니다
신앙생활에서 인내라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죠
믿음도 오래 참는 것이고
소망도 멀리 바라보는 것이므로 오래 참는 것이고
사랑도 오래 참는 것으로
인내가 없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아무것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면에서 인내가 필요합니다
그 다음
인내에 경건을...
항상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믿음을 돌아보는 경건함이 필요하고
경건에 형제우애를
주 안에서 형제자매가 된 사람들은
서로 우애 있게 지내는 것은
하나님을 참으로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신앙이 좋다고 할지라도
형제와 다투고 싸우면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것이죠
육신의 부모의 경우도
형제간의 잘 지내면
부모의 기쁨이 되는 것처럼
주 안에서 형제자매가 서로 사랑하게 될 때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형제우애를 넘어서 사랑을 공급하라!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이방인과 다른 것이 없기에
형제우애를 넘어서 원수까지 사랑하는 것이
신앙의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43-48절까지 보면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는데 까지 말씀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적어도 거기까지 가야 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았다고
그곳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되고
반드시 덕을 세우도록 노력해야 됩니다
그리고
덕을 세울 뿐 아니라
지식이 있어야 이단과 사이비를 이길 수 있으므로
지식이 있어야 되겠고
지식에는 절제가 있어야 되는데
지식 자체에도 절제가 필요하지만
자신의 감정을 제어하는 절제가 필요합니다
그 다음에 인내가 필요한데
그리스도의 삶 속에는 인내가 없으면 견딜 수 없습니다
환란과 핍박과 시련과 역경과 고난과
모든 어려움 가운데서
인내는 모든 것을 이기게 하는 것이죠
그리고 경건을 쌓아
날마다 하나님 앞에 서는 연습을 하고
형제자매를 사랑하며
아름다운 성도의 교재가 이루어지는 형제우애를 이야기 하면서
형제우애를 넘어서
예수 믿지 않는 세상 사람의 원수까지도 사랑 할 수 있는데 까지 가야 된다고
베드로 사도는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은 멀지 않아
언젠가는
지구가 뜨거운 불에 풀어지게 되고
체질이 녹아지고
온 세상의 물질세계는 해체 될 날이 온다고 하면서
썩어지고 쇠하고 깨지고 파괴되고 없어질 세상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면서
주님 오실 날을 바라며 굳게 설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잘못해석 할 위험이 있다고 하면서
바울이 쓴 편지에 어려운 부분도 있으므로
억지로 사사로이 풀지 말고
성경해석을 조심하라는 말씀도 하고 있습니다
혹독한 박해를 이기고
이단과 사이비를 이겨가면서
또 자기 자신과의 싸움도 하면서
믿음이 성장하면서
또 다른 사람에게 전도해야 하는
여러 가지 문제를 이 짤막한 서신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전후서나 야고보서
이런 서신들이 교회에서 단번에 한권 한권을 전체로 보고 이해하고
실천해야 될 텐데
교회에서 성경책을 한권 한권을 가르치지 않고
1-2절씩 뽑아서 설교하고는 것으로 그치기 때문에
성도들도 성경 한권 한권을 전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이것은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지만
다른 나라도 비슷합니다
앞으로 성경공부를 할 때
성경 전체 두루마리를 통째로 삼켜버리겠다는 욕심을 가지고
좀더 큰 기대를 가지고
성경 한권 한권을 공부하여 각 권을 통째로 이해하고
성경 66권 전체를 이해하는
통전적인 안목이 있기를 바랍니다
베드로전후서는 길지 않기 때문에
읽기 시작하면 단숨에 읽고
여러 번 반복해서 읽다보면
베드로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를
이해하게 될 줄 믿습니다
김성윤: 성경파노라마 지금까지 노우호 목사님이었습니다
152 진리 안에서 사랑(요한1서 파노라마)
노우호: 오늘은 요한 1서로 들어갑니다
요한1서는 잘 아시는 대로
사랑의 말로 가득차 있는 서신이죠?
김성윤: 예,
노우호: 사도요한을 사랑의 사도라고 일컫기도 하고
요한1서를 사랑의 서신이라도 합니다
요한사도는 연세가 90세가 넘어서
이 서신을 쓰지 않았나 생각 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너무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을 강조하다보니까
사랑에 관한 이야기와
요한에 관한 이야기는 잘 모르고 있고
요한복음은 많이 읽고 알지만
요한1서는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1서는 참으로 중요한 서신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이라는 것이 혼자의 신념이나 사상이 아니고
하나님과 관계이므로
관계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은 사랑이거든요
하나님과의 관계는 믿음으로 시작이 되고
(서로의 신뢰가 구축되어야만 관계가 시작됨)
그 관계가 지속되려면 소망이 있어야지요?
관계가 꾸준히 지속되려면 믿고 바라는 것이 있어야지
상대방에게 아무것도 바랄 것이 없으면
그 관계는 깨져버리는 것입니다
믿음과 함께 소망!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며
서로 바라보는 소망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완전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내일을 바라보는 소망은 아주 중요하죠?
그러나
소망만 가지고는 안 되고
역시 관계의 완성은 사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과 인간관계가 불신앙으로 말미암아
깨어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실과를 따서 먹으므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죄가 들어오게 되어
관계를 어렵게 만듭니다
그래서
관계를 깨뜨리는 것이 “죄”입니다
교제를 회복시키는 것은 “믿음”이고
관계를 완성시키는 것은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창세기부터 여기까지 달려왔는데
어디를 바라보고 달려왔느냐 하면
요한1서의 사랑의 교제!
하나님과의 코이노니아가 완전히 회복되는
바로 여기를 보고 달려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김성윤: 그래서 요한1서가 그렇게 중요한 것이군요?
노우호: 그렇죠.
만약 교회나 가정이나 천국이
사랑의 교제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교회라 할 수 없고
가정이라 할 수 없고
천국도 사랑의 교제가 없다면
우리가 천국에 갈 필요가 없지요
따라서
가정과 교회와 천국은
사랑으로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소중한 것이고
또 천국을 가고 싶어 하는 이유는
하나님과 우리의 사랑이 완성되는 곳이고
서로 사랑하는 곳이므로
천국을 가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곳이라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거죠?
요한1서는 신앙의 가장 아름다운 덕목인
사랑이 소개되는 곳으로
사랑의 교제를 2가지로 이야기 합니다
첫째
하나님과의 교제가 제대로 된 사람이라면
사람과의 교제도 사랑으로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면서
형제를 사랑하지 못한다는 것은
잘못된 것으로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보지 못하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 사랑의 증거가
형제의 사랑으로 나타나야만
제대로 된 믿음이라는 것이죠
바울도 할례나 무할례는 아무 의미 없고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 진짜 믿음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우리가 요한1서를 읽으면서
성도들이 한번 체크를 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사랑이란 말이 몇 번이나 등장하는지
그야말로 온통 사랑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하여 창조하셨고
사랑하시기 위해서 구원하셨고
영원히 사랑하시기 위하여
영원한 천국을 만들었다는 말씀을
말라기 공부하면서 들은 기억이 날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이 없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천사의 말을 다하고 온 세계 만국방언을 모두 한다고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음과 꽹과리에 불과한 것이고]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을 지라도
사랑이 없으며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고
또 모든 지식과 모든 비밀을 안다고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교만의 재료 밖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요한의 신학은
신학 중에 최고의 신학!
“사랑의 신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르틴루터라든지
바울이라든지
이런 분들은
믿음을 많이 강조했습니다
율법의 행위로서가 아니고
믿음으로서 의롭다함을 받는다!
이것은 굉장한(혁명적인)진리였죠
하지만 그것으로 신학이 끝난다고 하면
이상한 신학이 되겠죠?
이런 믿음으로 출발한 것이 소망으로 나아가서
마침내 사랑으로 완성되는 믿음을 가졌을 때
그것이 참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와 야고보서는
정말 살아있는 참 믿음을 이야기 하고 있고
베드로는 소망을 이야기하는가 하면
(그 소망은 하나님이 약속에 근거한 진짜 산 소망!)
그리고 요한은
다시 이것을 마무리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 신앙생활의 뿌리가 믿음이라고 한다면
줄기는 소망이 될 것이고
꽃은 사랑이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거기에 향기가 있는 것이고
거기서 열매가 맺는 것입니다
만약 나무의 뿌리가 아무리 깊어도
줄기가 없다면 꽃도 열매도 맺을 수 없지요?
반드시 줄기가 자라나서
소망을 가지고 위로 끊임없이 뻗어나서
사랑이 꽃을 피울 때
그곳에 향기가 있고 벌과 나비가 날아와서
열매가 맺히는 것처럼
사랑은 그야말로 우리 믿음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요한은
이 편지를 쓸 때쯤에는
그의 신학은 정점에 이르게 되었고
훗날 그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도
훌륭한 사람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사도요한이 에베소에 시무할 때
3사람의 특별한 제자가 있었는데
안티옥의 감독이 된 유명한 이그나티우스가 있고
히에라폴리스의 감독이 된 파피아스가 있고
서머나교회의 감독인 폴리캄(순교하게 됨)이 있습니다
김성윤: 이들이 모두 요한의 제자들이군요
노우호: 예,
요한의 직계제자입니다
이런 제자들을 사랑으로 잘 길렀기 때문에
기독교의 역사의 큰 업적을 남기는 인물들이 되었고
폴리캅이 시무했던 서머나교회는
아직도 든든히 서있는 것을 보았습니다(이슬람국가이지만)
예배당도 아주 보석같이 꾸며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처음에 위대한 사도들이 시무했던 에베소교회는
(바울이 개척했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함께 봉사했고
디모데 누가 요한이 섬겼던 에베소 교회)
계시록에 가면 예수님의 책망을 듣게 됩니다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책망을 듣게 됨)
결국 사랑 없는 교회는 무용지물이 됩니다
사랑이 없는 교회는 교회라고 할 수 없는 것이죠
교회는 그야말로 사랑이 충만한 교회여야 됩니다
우리는 그저 믿음 충만, 성령 충만을 강조하는데
진정한 믿음과 성령이 충만하게 된다면
그 결과는 사랑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는
인간관계의 바른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이죠
이렇게 사랑으로 똘똘 뭉쳐진 교회만
이단과 사이비를 이겨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사랑이 식어버리게 되면
금방 이단과 사이이비가 들어와서 영혼을 낚아채어가는 것을 봅니다
만약 음식이 차거나 덥게 되면
곰팡이가 서식하지 못하지만
차지도 덥지도 않아 미지근하면
곰팡이 서식하게 되고 식중독이 생길 수 있습니다
우리 신앙도 진리에 대하여는 냉철함이 있어야 되겠고
사랑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있는 교회야말로
계속 진리와 사랑을 불태우고 있기 때문에
감히 어떤 이단 사이비도 접근 할 수 없겠죠
사도요한은
사랑이 있는 교회
믿음과 소망을 가진 참 교회
하나님을 사랑하는 교회이면서
이웃을 사랑하되
정말 제 몸같이 사랑하고
더 나아가서 자기 몸을 희생하면서 까지 사랑하시던
예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라면서
요한1서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의 단계!
믿음으로 구원의 확신 단계를 넘어서지 못하기에
야고보서까지 가지 못하고
베드로 전서까지도 가지 못하고
요한1서까지도 가지 못하고
언제나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에만 머물거나
세상 복만 추구하는 안타까운 모습을 봅니다
누가복음 6장이나
마태복음 5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사랑!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새겨본다면
감히 교만할 엄두도 내지 못할 것입니다
신앙의 최고 경지가 사랑의 경지라는 것을
베드로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우애를 형제우애에 사랑을 하되
형제우애뿐 아니고 이웃사랑을 넘어서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 까지 이야기 합니다
우리가 만약
요한1서가 지시하는바 사랑을 이루지 못한다면
여전히 어린아이에 불과한 것이고
아주 이기적인데 머물러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장성한 사람의 분량은
요한1서에 제시한 사랑을 온전히 이루어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더 나아가서 이웃을 넘어서 원수까지 사랑하는
사랑의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김성윤: 지금까지 노우호목사님이었습니다
153 요한2서 3서
노우호: 예
오늘은 요한2서에 들어가겠습니다
요한2서는 오늘날 우리가 쓰는 편지처럼
1페이지 분량의 편지입니다
요한2서의 내용은 교리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니고
다만 요한이 어떤 교회를 방문하려고 하는데
방문에 앞서 방문하겠다는 전갈을 보낸 것첨
단순한 편지입니다
수신자는 어떤 부녀로 되어있습니다
여자로서
자신이 집을 개방하여 가정교회를 하고 있는 자매로 보입니다
문제는,
그 당시에 거짓선지자와 이단과 적그리스도들이 일어나서
온갖 유혹과 핍박으로 교회를 심히 혼란스럽게 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우리는 역사적인 사실을 1가지 발견하게 되는데
그럴 때
요한이 얼마나 중요한 인물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요한도 다른 사도들처럼 순교하고
속사도(예수님의 제자에게 배운 사도)들의 증언 같으면
큰 권위가 없겠지만
예수님께 직접 듣고 직접 배운 요한사도는 특별히 관찰력이 뛰어난 사람으로
예수님의 말 한마디도 헛되이 듣지 않고
세밀한 관찰력으로 진리와 사이비를 섬세한 부분까지 가려내는
그런 인물이 중요합니다
이런 경우 2가지가 필요한데
하나는 세밀한 관찰력과
또 하나는 깊은 애정을 가지고 살피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12사도 중에 가장 적절한 인물이 요한사도입니다
요한은 때가 제9시더라
때가 제10시더라
이런 것을 모두 살피는 사람이고
무덤에 달려갔어도 무덤에 들어가지 않고
현장을 살펴보면서
예수님을 쌌던 수의가 정돈되어 발편에 혹은 머리 편에 있는 것까지
자세히 살피는 인물로서
물고기가 많이 잡혔을 때
몇 마리인가 세어보는 성품을 가진 분이므로
이단과 사이비를 대처하는데 가장 적절한 인물이고
반면에
이단과 사이비를 척결하다가 자칫 사랑을 잃을 수 있는데
요한 누구보다도 예수님의 사랑에 깊이 젖은 사람이므로
이렇게 어려울 때에 꿋꿋이 교회를 지켜나갈 인물로서는
12사도 중에 가장 적절한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주 냉철한 진리를 가지고 세밀하게 살필 뿐 아니라
크고 넓은 주님의 사랑을 가지고
성도들을 품을 수 있는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이단들이 창궐할 때
사람들이 결국은 어디로 돌아오느냐 하면
사랑받은 곳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오늘날의 교회도
모든 신학적인 요소를 구비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최고의 법인 사랑이 충만한 가정이나 교회가 된다면
사람들이 떠났다가도 가정이나 교회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탕자가 집을 나갔다가 돌아오는 이유는
아버지의 사랑 때문에 돌아오게 됩니다
요한사도가 어떤 부녀에게 이 편지를 쓰면서
온갖 이단과 사이비가 유혹하고 핍박한다고 할지라도
흔들리지 않고 요동하지 않고
진리 안에서 행한다는 소식을 들을 때
요한이 눈물을 흘리면서 감격합니다
그렇게 많은 유혹과 핍박을 다 이겨내고
진리 안에서 행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얼마나 감사한지!
그리고 요한은 그때서야 자기가 순교도 하지 않고
노년에 이르기까지 교회를 이끈 보람을 느끼면서
감격의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은 먹과 붓으로 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 찾아 가서 진리 안에서 꿋꿋이 서있는 사람들을
보고 싶어 하는 내용을 적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 편지를 통하여 뭔가를 가르치려고 한 것이 아니고
곧 방문할 계획을 가지고 편지를 쓰면서
다른 무엇보다 지금 잘 하고 있으므로
하고 있는 일이 변함없이 유지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이상한 이단 사상이 난무하는 시대에
오직 진리를 쫒으며 계명을 쫒으며 사랑하며 살아가는 삶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나이 많은 사도를 기쁘게 한 것입니다
교만하여져서 그리스도의 교훈을 넘어서는 어떤 사람을 따르지 않고
진리 안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격려하기 위하여
이단과 교재를 하지 않기 위해서 이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연세가 많은 사도(90살이나 100살이 되었을 텐데)가
교회를 사랑하는 애타는 마음을 가지고
어느 교회의 부녀에게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사도 요한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여간하여 편지를 쓰지 않는데
(전화가 있기는 하지만)
종이를 펼쳐서 누군가를 가슴속에 사랑하면서
편지를 쓰고 있는 아름다운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요한3서도 이와 비슷한 시기에 함께 기록된 편지인데
요한1-2서와 수신자가 다르고
수신자가 살고 있는 교회 환경이 약간 다른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수신자가 가이오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기 때문에
추측하기 어렵지만
사도요한을 존경하고 따르는 사람이고
요한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나가며
교회를 맡아있는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사도요한이 수신자 가이오를 사랑한다는 표현을
4번씩이나 하고 있습니다
이 서신이 기록된 연대는 분명하지는 않지만
요한2서와 비슷한 시기에 기록되었을 것이고
그 당시에 ‘케린투스파’라는 영지주의 이단이 설치고 있었습니다
영지주의라는 것은
그리스철학과 기독교의 소스를 섞어서 만든 이상한 종교인데
초대교회의 최대 이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섞는 것을 싫어합니다
혼합주의나 종교를 혼합하는 것 등은 아주 싫어하십니다
심지어 구약시대의 레위기에 보면
옷 입는 것도 모직이나 견직을 섞어 짠 것조차도 입지 말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순수한 것을 좋아하신다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영지주의 이단들의 주장은
예수님께서 육체로 온 것이 이해 할 수 없다는 것이빈다
그리스 철학에서는 육체나 물질은 악한 것이고
영은 선한 것이라는 학설 때문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악한 육체가 되는가!
이것은 말도 안 된다! 하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온 것은 육체로 온 것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이들을 두고 요한1서에서 말하기를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신 것을 부인하는 자가 이단이고 곧 적그리스도라고
경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헬라철학 사상을 받아 들였기 때문에
이런 이단이 나온 것입니다
오늘날도 이상한 철학을 신학에 접목 시켜서 해석하려고 하면
위험을 초래하게 됩니다
요한 1서와 2서가 기록될 당시에는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있고
선지자라는 이름으로 교회를 순회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런 경우
거짓된 선지자를 분별해야 되고
교회에서는 이런 선지자나 전도자가 오면
숙식을 제공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되는 일인데
이런 봉사를 하지 못하게 하는 고약한 디오드래베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노력을 통해서 1등 되려는 것이 아니고
남을 못하게 해서 1등 하려고 하는 사람으로
으뜸 되기를 좋아 하면서 상대방을 못하게 하여 으뜸되려는 사람입니다
오늘날도 교회에 이런 사람이 가끔 있습니다
남이 잘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
남이 잘하여 자신을 앞서게 될까봐 남을 못하게 하는
디오드레베 영을 받은 사람들이 교회에 있는데
극히 삼갈 필요가 있습니다
이 책의 수신자가 되는 가이오라는 사람은
손님대접을 잘 하는 사람이었고
교회의 아주 큰 일꾼 이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영적으로 잘 되어 있으므로
그 영혼이 잘 됨 같이 네가 손으로 하는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간구한다는 내용으로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요한의 편지 중에 밝혀지고 보존된 것은 2개의 편지뿐이지만
소아시아 지방의 에베소교회를 중심으로 그 인근에는
수없이 많은 가정교회가 있었을 것인데
이런 편지를 보면서
요한은 이 편지 뿐 아니라 많은 편지를 썼다고 생각 됩니다
그 많은 교회를 돌아보면서 편지를 쓰고 격려하는 일이 계속 되었을 것인데
그 때 당시 3개의 편지만 남아 있습니다
요한이 편지를 3개만 썼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신약성경에 라오디게아에 보낸 편지도 지금은 찾지 못하고
그리고 그 외에도 많은 서신들이 있었겠지만
성경에 들어올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은
이단과 사이비가 어지럽히고 있을 때
그리스도의 교훈을 끝까지 지키면서
진리 안에서 행하는 권면의 말씀은 여전히 중요한 말씀이고
우리 한국에도 수많은 이단들이 설치고 있는데
우리는 끝까지 하나님을 사랑하고
겸손히 섬기는 마음으로 충성하는 것을 격려하는 편지는
여전히 필요한 것입니다
요한1서와 2서는 짧은 편지이므로
자주 읽어서
이 책에 기록된 격려가
우리 모두에게 격려가 되기를 바랍니다
김성윤: 지금까지 노우호목사님 이었습니다
154 이단을 경계한 유다서
노우호: 오늘 우리가 살펴볼 서신은 유다서가 되겠습니다
김성윤: 예,
노우호: 유다서는 예수님의 동생 중에 ‘유다’라는 분이 있었어요
예수님의 친동생입니다
유다서는 예수님이 친동생인 유다가 기록했는데
내용은
이단과 사이비를 경계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기록된 연대는 65년에서 70년 어간에 기록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벌써 그때
이단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요한 1서 2서는
예루살렘멸망 이후에 기록된 것이고
유다서는 일찍이 이단이 일어날 것에 대하여 염려하면서
이미 몇몇 사람이 교회에 들어 왔기 때문에
유다가 이것을 간파하고
내용을 치밀하게 쓰고 있습니다(짤막한 서신이지만)
이단을 연구한 사람들답게
이야기를 아주 치밀하게 쓴 흔적이 보입니다
유다는 자기 자신을 소개 할 때
예수님의 동생이라고 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라고 소개합니다
야고보는 야고보서를 기록한 예수님 동생 야고보
그러므로 학자들은
유다가 예수님이 친동생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때부터 이단들이 극성을 부리기 시작했고
유다는 이런 사람들을 가만히 들어온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교회 안에서 심상찮은 문제가 서서히 일어나는 경우는
누군가가 그기에 가만히 들어온 사람들 때문입니다
교회를 훼방하기 위해 가만히 들어온 사람들이
교회에서 오히려 은혜입고 회개하여 새사람이 되었다고
간증하는 경우를 보면서
이단들은 교회에 자기편 사람을 가만히 들여보내서
교회를 무너뜨리는 일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단들은 교회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서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괴롭게 하였습니다
유다는 이런 사람들을 말하기를
저주 받기로 예정된 사람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경건치 않은 사람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거리로 만든 사람이고
이 말은 무슨 의미이냐 하면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으므로
세상 죄는 모두 해결 되었으므로
하나님이 은혜를 색욕거리로 만든 사람들의 생각은
이제 죄는 아무리 지어도 문제가 없구나!
죄의 값은 충분히 지불되었으므로
죄 때문에 부담을 갖지 말고 마음껏 죄를 지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영지주의 중에 니골라당에 속한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홀로 하나이신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이 있었는데
이런 사람들을
꿈꾸는 사람들이며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며
육체를 더럽히는 사람들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다서]
1:10 이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그 알지 못하는 것을 훼방하는도다 또 저희는 이성 없는 짐승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느니라
1:11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 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좇아 멸망을 받았도다
1:12 저희는 기탄없이 너희와 함께 먹으니 너희 애찬의 암초요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요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요
1:13 자기의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이요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에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이라
그러므로
성적인 범죄인 경우를 생각 할 때도
육체는 어차피 멸망되는 것으로
육체의 욕구를 절제하다가 영혼까지 더럽힐 필요가 있는가!
육체는 마음대로 죄를 범해도 된다고
이렇게 헛된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거리로 만든 사람들입니다
권위를 업신여기는 사람들이었고
영광을 훼방하는 사람들 이었습니다
알지도 못하면서
알지 못하는 것을 훼방하는 사람들 이었습니다
이성 없는 짐승처럼 행동했다고 말 합니다
가인의 길을 걷는 사람들
가인의 길은
자기의 잘못을 두고 형제를 때려죽이는 길입니다
삵을 위하여 불의의 길을 달려가는 발람의 후예들이라는 것이고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 같은
모세를 대적했던 사람들이고
이 같은 사람들을 애찬의 암초 같은 존재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애찬의 암초라는 것은
밥을 먹는 중에 돌을 씹는 것을 말 합니다
자기 몸만 위하는 목자요
목자는 양을 잘 돌보는 일을 해야 되는데
목자가 자기 몸만 위한다면 잘못된 것이죠?
바람에 흘러가는 물 없는 구름이라
우리나라에는 구름과 비가 흔하기 때문에
구름이 지나가면서 비를 뿌리지 않아도
구름을 향하여 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이스라엘 나라는 비가 귀하므로
구름이 지나가면서 비를 내려주지 않으면
가증스럽고 거짓되다고 욕을 합니다
물이 없는 우물
비 없는 구름
열매 없는 가을 나무
이런 것은 모두 가증스러운 것으로 혐오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관용구로 사용합니다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요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요
이단에는 열매가 없습니다
이단 사이비 종교는 선한 열매가 없지요
이것이 곧, 거짓이라는 것이 증명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이다
물이 잠잠하면 찌꺼기가 가라앉아 있지만
물이 요동치게 되면
밑에 있는 찌꺼기가 떠오르는 것처럼
이단과 사이비는 잘 못된 것이므로
떠들면 떠들수록
자신의 부끄러운 부분이 더욱 드러나게 되는데
그러나 그런 사이비에도 빠지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놀라운 일입니다
어떻게 그런데 사람들이 빠져 들어가는지
이해 할 수 없는 일들이 우리 주위에도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이 사람들은 영원히 예비 된 캄캄한 흑암에 들어갈 유리하는 별들이다
오늘날 말하는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는
지옥행의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은 원망과 불만을 토하고 그 정욕대로 행하고
그러면서 입으로는 자랑하는 말을 내고
이익을 위해서 아첨하는 자들이고
당을 짓는 자들이며
육에 속한 자들이며
성령이 함께하지 않는 자들이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이 교회를 훼방하고 어지럽히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러한 사람들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토록
진리를 사수해 나가야 되겠고
성도들이 진리를 알므로
이런 사이비를 이길 수 있도록 영적으로 무장할 필요가 있습니다
에베소서 6장 10절 이하에 보면
바울 사도가 교회를 향하여 무장을 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요즘의 교회는 전혀 무장이 되어 있지 않아서
이단과 사이비가 들어와서
그 속에 쇼킹한 것이나 새로운 것이 있으면
너무 쉽게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국의 모든 교회들이 성경을 잘 살피고
성경과 진리를 바르게 알면
이단과 사이비가 발붙일 곳이 없게 되는데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잘 모르고
무지가 캄캄하게 마음을 어둡게 되어 있으면
이단과 사이비가 파고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사랑을 잃어버린 틈을 타고
사탄이 교회 안에 내분을 일으키게 되면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이 실망을 하게 되고
오히려 이단과 사이비에 빠지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람이 걸어가는 길이
천 갈래 만 갈래 길이 있는 것 같지만
따지고 보면
2가지 길입니다
하나는
육신을 따라 가는 길로
욕심, 정욕, 이익만을 위해, 사람, 주의, 세상, 선동, 유행. 습관, 관습, 풍속
이런 것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풍속은 대부분 사탄이 만든 것입니다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것
이데올로기의 신봉자
자기 자신을 추구하면서 체면을 따라 가는 것
그 결국은 이 세상 배후에서 역사하는 세상 신(神)
사탄을 따라가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을 통 털어서 ‘육신의 삶’이라 하고
반대로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성령을 따라 사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길이고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i아서 따라가는 길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여원히 명명백백하게 기록한 계명을 따라 살아가는 것
진리를 추구하는 것
믿음을 따라서 살아가는 것
양심을 따라 사는 것
질서를 따라서 살아가는 것
사도들과 거룩한 선진들의 모범을 따라가는 것
예수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아가는 것
윤리와 도덕을 따라가는 것
성령의 감화와 감동의 인도함을 받는 것
이런 길이 성령을 ?i아가는거룩한 길이 되겠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의지나 지성과 판단을 무시하거나 억압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양심과 지성과 직관력을 계발하셔서
자율적으로 판단하고 자원하여서 헌신하고 충성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들었던 것을 기억나게 하시고
생각나게 하시고 깨닫게 하셔서 이해 할 수 있도록 도우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일을 할 때는
각성된 인격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기쁨으로 일하기를 바라는데
잘못된 이단이나 사이비 신비주의는
어떤 신이 사람의 의지를 억압해버리고
신이 사람을 마음대로 부려먹어 버리는 상태로
어떤 사람은 그렇게 되기를 기도하는 사람들까지 있으므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성령을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성령은 우리를 자유하게 하고 편안하게 하고 기쁘게 하고
자원하는 마음이 일어나서
선을 행하되 억지로 하지 않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게 하는 것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보통의 귀신들은 사람이 원하던 원치 않던
사람 속에 들어와서 사람의 영혼을 완전히 억압해버리고
우리의 의지를 박탈해버리고
귀신들의 제멋대로 움직이는 것은
신비한 체험이 아니고 악령의 체험이므로
깊이 삼갈 일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어지러운 영적인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밝혀지기 원하고
이단과 사이비가 발붙일 틈이 없도록
성도들과 교회가 깨어서 하나님의 교회를 지켜나가야 할 줄 믿습니다
인류역사 가운데
한국교회처럼 짧은 기간동안에
이렇게 많은 이단과 사이비가 나타난 때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가 진리에 굳세지 못하고
하나님 말씀을 알지 못하는 틈을 타서
사탄이 우리를 속이는 것입니다
사탄은 언제나 속이는 영이고 거짓의 아비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속이는 영을 이기기 위해서
참된 진리의 말씀을 밝히 알 때
사탄을 대적하고 이기게 될 줄 믿습니다
김성윤: 지금까지 노우호목사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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