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괘(巽卦)는 〈서괘전(序卦傳)〉에 “나그네가 되어 용납될 곳이 없으므로 손괘(巽卦)로 받았으니, 손(巽)은 들어감이다.” 하였다. 나그네가 되어 친한 사람이 적을 때에 손순(巽順)이 아니면 어찌 용납될 수 있겠는가. 만일 손순(巽順)하면 비록 나그네로 곤궁한 가운데라도 어디를 간들 들어가지 못하겠는가. 손괘(巽卦)가 이 때문에 여괘(旅卦)의 다음이 된 것이다. 괘(卦)됨이 한 음(陰)이 두 양(陽)의 아래에 있어 양(陽)에게 손순(巽順)하니, 손(巽)이 되는 것이다.
괘(卦)의 재질이 조금 형통(亨通)할 수 있으니, 가는 바를 둠이 이롭고 대인(大人)을 봄이 이로운 것이다. 손(巽)과 태(兌)는 모두 강(剛)이 중정(中正)하고 공손(恭巽)함과 기뻐함은 뜻이 또한 서로 유사하나, 태(兌)는 형통(亨通)한데 손(巽)은 마침내 조금 형통(亨通)한 것은 태(兌)는 양(陽)이 하고 손(巽)은 음(陰)이 하며, 태(兌)는 유(柔)가 밖에 있으니 유순함을 쓰는 것이고 손(巽)은 유(柔)가 안에 있으니 성질이 유약함이니, 손(巽)의 형통(亨通)함이 이 때문에 작은 것이다.
손(巽)은 들어감이다. 한 음(陰)이 두 양(陽)의 아래에 엎드려 있으니 성질이 공손(恭巽)하여 들어감이요, 상(象)은 바람이 되니 또한 들어가는 뜻을 취한 것이다. 음(陰)이 주체가 되기 때문에 그 점(占)이 조금 형통(亨通)함이 되고, 음(陰)으로 양(陽)을 따르기 때문에 또 가는 바를 둠이 이로운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따를 바를 알아야 바름을 얻기 때문에 또 ‘대인(大人)을 봄이 이롭다’고 한 것이다.
중손(重巽)은 위아래가 모두 손(巽)인 것이다. 위는 도(道)를 순히 하여 명령을 내고 아래는 명령을 받들어 순종하여 상하(上下)가 모두 순하니, 이는 거듭 손순(巽順)한 상(象)이요 또 중(重)은 중복의 뜻이 된다. 군자(君子)가 중손(重巽)의 뜻을 체행(體行)하여 명령을 거듭하고 반복하니, 신(申)은 중복함이니, 정녕(丁寧)함을 이른다.
【本義】釋卦義也라 巽順而入하여 必究乎下는 命令之象이라 重巽故로 爲申命也라
괘(卦)의 뜻을 해석하였다. 손순(巽順)하여 들어가서 반드시 아래에 이름은 명령의 상(象)이다. 거듭된 손(巽)이므로 명령을 거듭함이 되는 것이다.
剛이 巽乎中正而志行하며 柔皆順乎剛이라 是以小亨하니
강(剛)이 중정(中正)에 손순(巽順)하고 뜻이 행해지며, 유(柔)가 모두 강(剛)에게 순종한다. 이 때문에 조금 형통(亨通)하니,
괘(卦)의 재질로 말하였다. 양강(陽剛)이 손(巽)에 거하고 중정(中正)을 얻었으니 중정(中正)의 도(道)에 손순(巽順)한 것이요, 양(陽)의 성질은 위로 올라가니 그 뜻이 중정(中正)한 도(道)로써 위로 행함에 있는 것이다. 또 상하(上下)의 유(柔)가 다 강(剛)에게 손순(巽順)하니, 그 재질이 이와 같으므로, 비록 안이 유약하나 조금 형통(亨通)할 수 있는 것이다.
손순(巽順)의 도(道)는 가는 곳마다 들어가지 못함이 없으므로 가는 바를 둠이 이로운 것이다. 손순(巽順)함이 비록 좋은 도(道)이나 반드시 따를 바를 알아야 하니, 양강중정(陽剛中正)한 대인(大人)에게 손순(巽順)하면 이롭다. 그러므로 대인(大人)을 봄이 이로운 것이다. 오이(五二)와 같은 양강중정(陽剛中正)은 대인(大人)이니, 손순(巽順)함을 대인(大人)에게 하지 않으면 반드시 허물이 되지 않지는 않을 것이다.
【本義】以卦體로 釋卦辭라 剛巽乎中正而志行은 指九五요 柔는 謂初四라
괘체(卦體)로 괘사(卦辭)를 해석하였다. 강(剛)이 중정(中正)에게 손순(巽順)하여 뜻이 행해짐은 구오(九五)를 가리킨 것이요, 유(柔)는 초(初)와 사(四)를 이른다.
象曰 隨風이 巽이니 君子以하여 申命行事하나니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따르는 바람이 손(巽)이니, 군자(君子)가 보고서 명령을 거듭하고 정사(政事)를 행한다.”
두 바람이 서로 거듭함은 따르는 바람이니, 수(隨)는 서로 잇는 뜻이다. 군자(君子)가 중손(重巽)이 서로 이어 순종하는 상(象)을 보고서 명령을 거듭하고 정사(政事)를 행한다. 따름과 거듭함은 상하(上下)가 모두 순한 것이다. 위는 아래를 순히 하여 명령을 내고 아래는 위를 순히 하여 따라서 상하(上下)가 모두 순함은 중손(重巽)의 뜻이다. 명령과 정사(政事)가 이치에 순하면 민심(民心)에 합(合)하여 백성들이 순종할 것이다.
육(六)이 음유(陰柔)로 비손(卑巽)에 거하고 중(中)하지 못하며 가장 낮은 곳에 처하고 강(剛)을 받들고 있으니, 지나치게 비손(卑巽)한 자이다. 음유(陰柔)의 사람이 비손(卑巽)함이 너무 지나치면 마음에 두려워하여 편안하지 못해서 혹 나아가고 혹 물러가 따를 바를 모르니, 이로운 바가 무인(武人)의 정(貞)함에 있다. 만일 무인(武人)의 강(剛)하고 정고(貞固)한 뜻을 쓴다면 마땅함이 되니, 힘써서 강함과 정고함을 행하면 지나치게 낮추어 두려워하는 잘못이 없을 것이다.
초(初)가 음(陰)으로서 아래에 거하여 손(巽)의 주체가 되었으니, 비손(卑巽)함이 지나치다. 그러므로 진퇴(進退)를 과감히 하지 못하는 상(象)이 된 것이다. 만약 무인(武人)의 정고(貞固)함으로 이에 처하면 미치지 못하는 바를 구제함이 있어 마땅한 바를 얻을 것이다.
象曰 進退는 志疑也요 利武人之貞은 志治也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나아가고 물러감은 마음에 의심하기 때문이요, 무인(武人)의 정(貞)함이 이로움은 뜻이 다스려진 것이다.”
【傳】進退不知所安者는 其志疑懼也니 利用武人之剛貞以立其志하면 則其志治也라 治는 謂修立也라
나아가고 물러가서 편안함을 알지 못하는 것은 마음에 의심하고 두려워하기 때문이니, 무인(武人)의 강함과 정고함을 써서 그 뜻을 세운다면 뜻이 다스려질 것이다. 치(治)는 닦고 세움을 이른다.
이(二)가 손(巽)의 때에 거하여 양(陽)으로서 음위(陰位)에 처하고 아래에 있으니, 손순(巽順)함을 지나치게 하는 자이다. 상(牀)은 사람이 편안히 여기는 곳이니, 공손(恭巽)함이 상(牀) 아래에 있다면 이는 공손(恭巽)함이 지나친 것이니, 편안한 바를 넘은 것이다. 사람이 비손(卑巽)함을 지나치게 하는 것은 두려워함이 아니면 아첨하여 기쁘게 하는 것이니, 모두 정도(正道)가 아니다. 이(二)는 실로 강중(剛中)이니, 비록 손체(巽體)로서 유(柔)에 거하여 비손(卑巽)함을 지나치게 함이 되나 사심(邪心)이 있는 것이 아니다. 지나치게 공손(恭巽)함은 비록 정례(正禮)가 아니나 치욕(恥辱)을 멀리하고 원망(怨望)과 허물을 끊을 수 있으니, 또한 길(吉)한 방도이다. 사무(史巫)는 성의(誠意)를 신명(神明)에게 통하는 자이며, 분약(紛若)은 많음이다. 만일 지성(至誠)으로 겸손(謙巽)함을 편안히 여겨 성의(誠意)를 통하는 자로 하여금 많게 한다면 길(吉)하고 허물이 없으리니, 정성이 남을 감동시킬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사람들이 그 성의(誠意)를 살피지 못하면 지나치게 겸손(謙巽)함을 아첨한다고 이를 것이다.
이(二)가 양(陽)으로서 음위(陰位)에 처하고 아래에 거하여 불안한 뜻이 있으나 손(巽)의 때를 당하여 낮춤을 싫어하지 않고 이(二)가 또 중(中)에 거하였으니, 너무 심함에 이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점(占)이 공손(恭巽)함을 지나치게 하여 말을 정녕(丁寧)히 하고 번거롭게 다하여 스스로 자신의 성의를 도달(道達)[말함]하면 길(吉)하고 허물이 없을 것이요, 또한 성의(誠意)를 다하여 제사(祭祀)하는 길점(吉占)이 된다.
이(二)가 유(柔)에 거하고 아래에 있어 지나치게 비손(卑巽)한 상(象)이 되나, 성의(誠意)를 통하는 자가 많아 분분(紛紛)함은 중(中)을 얻었기 때문이다. 양(陽)이 중(中)에 거함은 중실(中實)의 상(象)이 되니, 중심(中心)이 이미 성실하면 사람들이 스스로 믿을 것이다. 성의(誠意)로써 하면 아첨함과 두려워함이 아니니, 이 때문에 길(吉)하고 허물이 없는 것이다.
삼(三)이 양(陽)으로서 강(剛)에 처하여 중(中)을 얻지 못하고 또 하체(下體)의 위에 있으니, 강(剛)하고 높은 체하는 재질로 손순(巽順)의 때에 거하여 공손(恭巽)할 수 있는 자가 아니요 억지로 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여러번 잃는 것이다. 손(巽)의 때에 거하여 아래에 처하였는데, 위에서 겸손(謙巽)함으로써 임하고 또 사(四)가 유손(柔巽)으로 서로 친하며, 타고 있는 것이 강(剛)이고 위에 다시 중강(重剛)이 있으니, 비록 공손(恭巽)하지 않고자 하나 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여러번 잃고 여러번 공손(恭巽)함은 부끄러울 만한 것이다.
【本義】過剛不中하여 居下之上하니 非能巽者요 勉爲屢失하니 吝之道也라 故其象占如此하니라
지나치게 강(剛)하고 중(中)하지 못하면서 하체(下體)의 위에 거하였으니, 공손(恭巽)히 할 수 있는 자가 아니요 억지로 하여 여러번 잃는 것이니, 부끄러운 길이다. 그러므로 그 상(象)과 점(占)이 이와 같은 것이다.
삼(三)의 재질은 본래 공손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위에서 임하기를 손순(巽順)함으로써 하고 중강(重剛)을 받들고 강(剛)을 밟고 있어 세(勢)가 그 뜻을 행할 수 없다. 그러므로 여러번 잃고 여러번 공손(恭巽)하니, 이는 그 뜻이 곤궁한 것이니, 부끄러워할 만함이 심하다.
음유(陰柔)로서 응원(應援)이 없고 승(承)과 승(乘)이 모두 강(剛)이니, 마땅히 뉘우침이 있을 것이나 사(四)가 음(陰)으로서 음위(陰位)에 거하여 손(巽)의 바름을 얻고 상체(上體)의 아래에 있으니, 위에 있으면서 능히 몸을 낮춘다. 상체(上體)의 아래에 거함은 위에 공손(恭巽)함이요, 손(巽)으로써 아래에 임함은 아래에 겸손(謙巽)함이니, 잘 처신하기를 이와 같이 하기 때문에 뉘우침이 없어진 것이다. 뉘우침이 없어진 까닭은 사냥하여 삼품(三品)을 얻은 것과 같기 때문이니, 사냥하여 삼품(三品)을 얻으면 상하(上下)에 두루 미친다. 전렵(田獵)하여 잡은 것을 세 등급으로 나누어 하나는 건두(乾豆)를 만들고, 하나는 빈객(賓客)에게 공급하거나 군주(君主)의 푸줏간에 채우며, 하나는 도어(徒御)에게 나누어준다. 사(四)가 상하(上下)의 양(陽)에게 공손(恭巽)하니, 전렵(田獵)에 삼품(三品)을 얻은 것과 같으니, 두루 상하(上下)에 미침을 이른다. 사(四)의 처지는 본래 뉘우침이 있을 것이나 처신하기를 지극히 잘하기 때문에 뉘우침이 없어지고 다시 공(功)이 있는 것이다. 천하(天下)의 일을 만일 잘 처리한다면 뉘우침이 혹 공(功)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음유(陰柔)로 응(應)이 없고 승(承)과 승(乘)이 모두 강(剛)이니, 마땅히 뉘우침이 있을 것이나 음(陰)으로서 음위(陰位)에 거하고 상체(上體)의 아래에 처하였다. 그러므로 뉘우침이 없어지고 또 사냥을 점치는 길점(吉占)이 되는 것이다. 삼품(三品)은 하나는 건두(乾豆)를 만들고, 하나는 빈객(賓客)의 찬을 만들고, 하나는 군주(君主)의 푸줏간에 채우는 것이다.
象曰 田獲三品은 有功也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사냥하여 삼품(三品)을 얻음은 공(功)이 있는 것이다.”
【傳】巽於上下하여 如田之獲三品而遍及上下하면 成巽之功也라
상하(上下)에 공손(恭巽)하여 사냥하여 삼품(三品)을 얻어 상하(上下)에 두루 미치듯이 하면 손(巽)의 공(功)을 이룰 것이다.
九五는 貞이면 吉하여 悔亡하여 无不利니 无初有終이라 先庚三日하며 後庚三日이면 吉하리라
【本義】貞하여 吉하니
구오(九五)는 정(貞)하면 길(吉)하여 뉘우침이 없어져서 이롭지 않음이 없으니, 초(初)는 없고 종(終)은 있다. 경(庚)으로 3일을 먼저 하고 경(庚)으로 3일을 뒤에 하면 길(吉)하리라.
오(五)가 존위(尊位)에 거하여 손(巽)의 주체가 되었으니, 명령이 나오는 곳이다. 처함이 중정(中正)을 얻어 손(巽)의 선(善)을 다하였으나 손(巽)은 유순(柔順)한 도(道)이니, 이로운 바가 정(貞)에 있으니, 오(五)가 부족한 것이 아니요 손(巽)에 있기 때문에 마땅히 경계해야 하는 것이다. 이미 정(貞)하면 길(吉)하여 뉘우침이 없어져서 이롭지 않은 바가 없을 것이니, 정(貞)은 바로 중도(中道)에 맞는 것이니, 손(巽)에 처하고 명령을 냄이 모두 중정(中正)을 길(吉)함으로 삼는다. 유손(柔巽)하기만 하고 정(貞)하지 못하면 뉘우침이 있으니, 어찌 이롭지 않은 바가 없겠는가. 명령을 냄은 변경하는 바가 있는 것이다. ‘무초(无初)’는 처음에는 선(善)하지 못한 것이요, ‘유종(有終)’은 변경하여 선(善)하게 하는 것이니, 만약 이미 선(善)하다면 어찌 명령할 것이 있으며, 어찌 변경할 것이 있겠는가. ‘선경삼일(先庚三日) 후경삼일길(後庚三日吉)’은 명령을 내어 변경하는 도(道)가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하는 것이다. 갑(甲)은 일의 시작이고 경(庚)은 변경의 시작이다. 십간(十干)에 무기(戊己)가 중간이니, 중(中)을 넘으면 변한다. 그러므로 경(庚)이라 이른 것이다. 일의 변경은 마땅히 시초를 근원하고 종(終)을 맞추어 선갑후갑(先甲後甲)의 뜻과 같이 하여야 하니, 이와 같이 하면 길(吉)하다. 해설이 고괘(蠱卦)에 나와 있다.
구오(九五)가 강건중정(剛健中正)한데 손체(巽體)에 있기 때문에 뉘우침이 있으나 정(貞)이 있어 길(吉)하다. 그러므로 뉘우침이 없어져서 이롭지 않음이 없는 것이니, 뉘우침이 있음은 이는 시초가 없는 것이고, 뉘우침이 없어짐은 이는 종(終)이 있는 것이다. 경(庚)은 변경함이니, 일을 변하는 것이다. 경(庚)보다 3일을 먼저 한다는 것은 정(丁)이요, 경(庚)보다 3일을 뒤에 한다는 것은 계(癸)이니, 정(丁)은 변경하기 전에 정녕(丁寧)히 하는 것이요 계(癸)는 변경한 뒤에 헤아리는 것이니, 변경하는 바가 있으면서 이 점(占)을 얻은 자는 이와 같이 하면 길(吉)하다.
象曰 九五之吉은 位正中也일새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구오(九五)의 길(吉)함은 자리가 바로 중도(中道)에 맞기 때문이다.”
구오(九五)가 길(吉)한 것은 처함이 바로 중도(中道)에 맞기 때문이니, 바로 중도(中道)에 맞으면 길(吉)하여 뉘우침이 없어진다. 정중(正中)은 과(過)하지 않고 불급(不及)함이 없어서 바로 그 중도(中道)를 얻음을 이른다. 유손(柔巽)에 처함과 명령을 냄은 오직 중도(中道)를 얻음이 선(善)하니, 중도(中道)를 잃으면 뉘우치게 된다.
상(牀)은 사람이 편안히 여기는 곳이니, 상(牀) 아래에 있음은 편안한 곳을 지난 뜻이다. 구(九)가 손(巽)의 극(極)에 거하였으니, 공손(恭巽)함을 지나치게 하는 자이다. 자(資)는 가지고 있는 것이고, 부(斧)는 결단하는 것이다. 양강(陽剛)은 본래 결단함이 있으나 지나치게 공손(恭巽)하여 강단(剛斷)을 잃어서 가지고 있는 것을 잃으니, 이는 물자(物資)와 도끼를 잃은 것이다. 상(上)에 거하고 지나치게 공손(恭巽)하여 스스로 잃음에 이르면 정도(正道)에 있어 흉함이 된다.
공손(恭巽)함이 상(牀) 아래에 있음은 공손(恭巽)함을 지나치게 하는 것이요, 그 물자와 도끼를 잃음은 결단함을 잃은 것이니, 이와 같으면 비록 바르더라도 흉(凶)하다. 손(巽)의 극(極)에 처하여 양강(陽剛)의 덕(德)을 잃었기 때문에 그 상(象)과 점(占)이 이와 같은 것이다.
象曰 巽在牀下는 上窮也요 喪其資斧는 正乎아 凶也라
【本義】正乎凶也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공손(恭巽)함이 상(牀) 아래에 있음은 올라가 궁극하기 때문이요, 물자(物資)와 도끼를 잃음은 정도(正道)라 할 수 있겠는가? 흉하다.”
공손(恭巽)함이 상(牀) 아래에 있음은 공손(恭巽)함이 지나친 것이요, 괘(卦)의 위에 처함은 공손(恭巽)함이 궁극함에 이른 것이다. 상(上)에 거하여 공손(恭巽)함에 지나치게 지극하여 스스로 잃음에 이르면 정도(正道)라 할 수 있겠는가. 이는 흉한 길이다. 손(巽)은 본래 선행(善行)이기 때문에 의심하기를 ‘정도(正道)라 할 수 있겠는가?’ 하였고, 다시 결단하기를 ‘흉하다’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