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하느님의 이름/ 여호와와 예수
<여호와의 이름으로 온 하느님의 사자>
천사에게는 구원이 없다. 구원은 하느님께서 육체를 가진 인간에게만 베푸신 것이다. 천사는 한번 타락하면 구세주가 없고 절망뿐이다. 사탄은 회개할 기회가 없고 구원받을 기회도 없다. 천사들 중에서 천사장들은 특별한 위치에 있는 자들이지만, 그들보다 더 특별한 천사도 있었다. 이 천사는 하느님이 직접 부리시며, 하느님의 아들이 하늘에 들어오실 때까지 아들의 뜻을 받들도록 한 천사였다.
다시 말하면, 하늘에는 많은 천사들이 있었지만 하느님의 비밀한 뜻을 가지고 움직이는 특별한 지위가 부여된 천사가 있었다는 말이다. 그는 하느님의 비밀을 가지고 그때그때 지시를 받아 일하던 천사였다. 그를 성경은 “하느님의 사자” 또는 “여호와의 사자”라고 한다. 곧 하느님의 심부름꾼이란 말이다.
이 사자는 언제나 여호와의 이름으로만 활동했다. 그래서 구약에 여호와를 본 자들이 있지만 하느님을 본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도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으나 아들만 보았다고 말씀하신다. 이처럼 여호와 이름으로 온 이는 하느님의 사자이다. 곧 여호와의 사자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타난 것이다.
사람들에게 여호와의 이름을 나타내야 할 때는 여호와의 사자가 하느님의 이름으로 활동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다. 여호와의 사자가 하느님의 권위와 하느님의 이름으로 나타나 역사한 것이다. 아들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늘에 들어가실 때까지 여호와 이름이 영광을 받은 것이다.
하느님의 사자가 여호와 이름으로 현현할 때도 하느님의 뜻과 계시와 영광을 나타냈다.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타낼 때도 여호와의 사자가 그 이름으로 나타냈다. 그런데 이 하느님의 사자를 영접하는 것은 하느님을 영접하는 것과 같다. 곧 보내심을 받은 자를 대접하는 것은 곧 보내신 자를 대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요한13,20).
그러므로 하느님의 이름으로 온 이를 영접하는 것은 하느님을 영접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이렇게 여호와의 사자는 여호와 이름으로 나타났으며 그 여호와란 이름은 하느님의 이름이다.
탈출3,14-15절에 “하느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하느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너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삭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칭호)니라”고 말한다.
우리가 하느님을 직접 뵐 수는 없지만, 하느님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는 것은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과 같다. 아무도 하느님을 뵐 수 없지만, 하느님은 그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받으신다.
그 이름은 영원하신 하느님,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 하느님을 대신하여 하느님을 나타낸다. 하느님이 받으시기에 합당한 영광이 그 이름에 있다. 모든 영광은 그 이름이 받는다. 하느님은 만유보다 크시고 하늘 위에 계신 분이니 그에게 최고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여호와의 이름은 하느님의 사자가 나타냈다>
탈출기3,2-6절은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가로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는 동시에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느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느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느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삭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니라”고 말한다.
하느님의 사자가 “나는 너희 조상의 하느님 여호와니라”라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와서 이스라엘에게 보여 주었다. 이는 곧 천사가 하느님의 이름으로 왔다는 말이다. 사도행전 7장 30, 35, 38, 53절에서 스데반이 순교할 때 연설을 보면, “시내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 “사십년이 차매 천사가 시내산 광야 가시나무떨기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보이거늘,“ ”너희가 천사가 전한 율법을,“ 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하느님의 아들 예수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셨다>
히브1,3-4절에 “이는 하느님의 영광의 광채시오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저가 천사보다 얼마큼 뛰어남은 저희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얻으심이니”라고 말한다.
예수는 하느님의 본체이시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온 이는 하느님의 사자요, 예수 이름으로 오신 이는 하느님의 본체이시다. 곧 예수 이름으로 오신 이는 여호와 이름으로 온 이보다 높다. 여호와의 이름보다 높다는 것은 뛰어나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이름은 정죄는 할 수 있어도 심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정죄는 할지라도 구원하거나 대속할 수는 없다. 여호와의 사자가 하느님의 이름으로 왔으나, 아들이 천사가 받은 이름보다 더 뛰어난 이름으로 오셔서 승리하시고 하늘 보좌에 앉으셨다. 예수라는 이름은 본래 아버지의 이름인데 아들에게 주신 이름이다. 여호와는 하느님의 이름이고, 예수는 아버지의 이름이요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신 이름이다.
요한17,11-12절은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아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존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 뿐이오니(멸망의 아들외에는 그들 중 한 사람도 멸망치 않았는데)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라고 말한다.
요한14,26절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고 말한다.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예수는 하느님의 이름이다. 하느님이란 호칭은 이름이 아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이름을 알고 하느님의 이름을 믿는 자이다. 그리고 모든 능력은 예수 이름으로 말미암는다.
우리는 예수 이름을 안다. 또한 성령이 예수 이름으로 내 안에 계신다. 내 영 안에 계신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으로 예수 이름이 내 안에 계신다. 성령은 바로 예수 이름으로 오셨다(요한14,26). 예수 이름이 내 안에 계신다. 예수 이름은 오직 성령에 의해서만 사람의 영속에 들어오신다. 성령은 예수 이름으로 오신다. 성령으로만 예수 이름, 곧 하느님의 이름이 우리 영 속에 임하시는 것이다.
사람의 이름이란 그 사람의 모든 것이다. 그 사람의 이름은 바로 그 사람의 인격이다. 그 사람의 영(하느님과의 직관, 교통, 양심)과 혼(생각, 감정, 의지)이 그 이름에 녹아 있다. 예수 이름이 내 영 안에 있다는 것은 예수님의 인격이 내 안에 살아 계신다는 의미이다. 그 이름 안에 그 사람의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름이란 그 사람의 의미이며 상징이며 모든 것이다.
요한묵시록14,1절에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어린 양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이 같다. 곧 예수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의 이름을 가졌는가? 우리는 예수 이름을 가진 자이다>
우리는 예수 이름을 가진 자이다. 곧 아버지와 아들의 이름을 가진 자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주어서 세상에서 보존케 하옵소서. 내가 세상에 있을 때는 내개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여 지켰습니다. 이제 내가 아버지께 가오면 저희는 그대로 세상에 있을 텐데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주어 저희로 세상에서 보전되게 하옵소서”라고 말한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름은 예수이다. 우리에게 예수 이름을 주신 것은 우리를 보전하기 위해서이다. 예수 이름은 아버지의 이름이었는데, 아들에게 주신 것으로 예수께서 세상에 계실 때도 그 이름으로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을 보전하셨다. 지금은 그 이름을 교회들에게 주셔서 세상에서 그 이름으로 보전하고 지키게 하신다. 교회는 예수 이름의 권세가 있어야 하고, 이로써 세상을 이기고 대항할 수 있다.
요한5,43절에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치 아니하나”라고 말한다. 곧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실 때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셨다. 그 이름이 예수이다. 어떤 사람은 여호와는 아버지의 이름이고 예수는 아들의 이름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여호와는 그냥 하느님의 이름이며 표호이다(탈출3,15). 그러므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 육체는 거룩해지고 구원받아도 영혼은 구원받지 못한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께서 무엇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셔야만 했을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은 양을 잡고 수송아지를 잡아서 그 피로 거룩하게 하셨고, 예수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는 하느님의 아들의 피로 거룩하게 하셨다. 숫양과 수송아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고 받으시는 모형이다. 수컷은 죽어야만 피를 흘린다. 암컷은 죽지 않아도 피를 흘릴 때가 있다. 새끼를 낳고 싶으면 피를 본다. 그래서 암소나 암양은 불결하게 여긴다. 그러나 수송아지나 숫양은 죽어야 피를 본다.
그리스도가 목숨으로 내놓은 피에 의해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에 비유할 수 있다. 그래서 속죄를 위해 일 년 된 수송아지와 숫양을 사용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사자는 여호와 이름으로 왔기 때문에 아들이 하늘에 들어가시기 전에 이미 하늘에 있었다. 이 하느님의 사자가 보좌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다. 곧 보좌는 아들의 것이기 때문에 오직 아들만이 앉으실 수 있다. 보좌는 하느님의 아들이 오르실 때를 위해 예비된 것이고, 이 하늘은 다른 천사들보다 뛰어난 하느님의 사자가 통치하고 다스리고 있었다.
그러나 하늘에서 여호와 이름으로 하느님의 사자가 수행하던 일은 아들이 올라오면 중단된다. 그래서 여호와로서의 활동은 멈추는 것이다. 아들이 오르시기 전까지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사자가 역사한 것이다. 성경을 연구해보라. 신약에서는 여호와란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이 부분을 당신 나름의 신학적 기반과 성경 지식에 추가하여 묵상한다면, 성경의 막힌 부분들이 뚫리기 시작하면서 큰 은혜가 임할 것이다.
알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