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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을 교회와 독립운동과 사회개혁에 몸바치신 순교자
낙평 김응록(金膺祿)장로(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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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김응록장로 아들 김능백 목사 손자 김건철장로 와 가족
고창교회 출신인 김건철장로(순교자 김응록장로의 장손)는 高昌敎會 100년사 祝賀에서 고향을 떠나온지 반세기 50여 성상 離散의 아픔을 달래며 -- 先祖들이 悠久한 歲月을 두고 피땀으로 이룩한 고향마을 한가운데 우뚝 섰던 故鄕의 歷史를 담은 高昌敎會가 100년을 맞는 뜻깊은 해를 맞으며 고향교회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고 하면서 고창교회 후순들이 남한 전역과 해외에서 교회의 목사,장로,권사,집사의 중직을 맡아 헌신하고 있음을 감사하며 하루 속히 統一되어 무너진 敎會를 다시 再建해야 하겠다고 다짐했다.(4쪽-5쪽)
순교자 김응록장로의 후예
장남 김능백목사 장손 김건철 장로(서울동숭교회 장로, 김건철장로의 백부 김능억(金能億)(엘에이 서남교회우너로장로 현재생존) 고창교회100사 축하 글에서 따옴. (김건철장로의 가족은 뒤에)
아래 글은 김광식목사의 예화 이야기 249쪽에 김건철장로의 3代이야기에서 옮겨쓴 글이다.2010. 2. 5일 김종희 목사 입력)
1. 김건철 장로의 할아버지 금응록 장로와 105인 사건
1. 교회와 학교 건축
할아버지 김응록 장로는 平南江西 高昌敎會 장로다. 고창교회는 1896년에 창립되었고 吉善宙목사님께서 부흥회를 인도하시다가 세상을 떠난 교회다. 김응록 장로님께서 단독으로 교회를 건축할 재정적 능력이 있었으나 그러면 개인이 교회가 될 우려가 있어 신도들이 건축헌금을 하는 만큼 건축비 전체의 반을 담당하시기로 하여 신도들이 힘을 내어 교회와 학교를 동시에 벽돌로 건축하였다. 본래 있던 교회가 농촌교회 중에서도 기와집으로 큰 교회건물이었으나 헐고 교회와 학교를 연달아 건축하였다. 그래서 부흥회 때나 특별행사시는 교회와 학교 사이의 칸막이를 열고 학교교실을 이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예배당에서 전교생이 매일 아침마다 예배르 드리며 교회와 학교가 하나로 학생들을 신앙으로 교육을 하였다.
2. 도로(新作路)닦기와 생활개선 운동
마을 한 가운데로 도로를 닦았는데 마을 동쪽 끝에서 남쪽 끝까지 추럭이 넉넉하게 오고 갈 수 있을 만큼 직선으로 넓에 닦았다. 본래의 농로로는 구불구불 하고 좁아서 소달구지가 다닐 수 없어 불편하였다. 김응록장로님께서 도로를 닦기 위하여 도로 주변의 밭을 매임하여 신작로를 닦고 나머지 밭은 판 사람으로 경작케하여 더욱 존경을 받았다.
신생활 운동을 장려하기 위하여 집집마다 우물파기, 둘똑고치기, 화장실 개량 등 마을을 오나전히 살기 좋은 마을로 새마을 운동을 벌인 셈이다. 김장로님께서 해방 후에 공산당에 핍박을 받으면서 평양과 인근 교회초청으로 부흥회를 인도하시다가 6.25때 예비검속되어 순교하셨다.
장람 김능백 목사님은 평양신학교 제 32회 조업하여 월남후 제주와 예산에서 목회를 하셨으며, 차남은 월남하지 못하고, 3남 김능억장로는 미국 엘에이 서남교회 원로장로로 은퇴 하였고 4남 김능도는 평양신학교 재학 중 워남하지 못하였으며 5남 김능화는 월남하여 사시다가 세상을 떠났다. 장손 김건철 장로는 승동교회 원로장로로 은퇴후에 교계와 사회를 위하여 크게 활동하고 있다.
3. 세계 최초의 연합결혼식 10회 거행
교회가 주관하여 연합결혼식을 1935년부터 1944년까지 해마다10여 쌍씩 내외로 10년을 계속하였다. 그후 일본정부가 강제로 중단시켰고 이는 세계적으로 처음 있는 일이다. 그 당시 농촌에서 자녀들의 결혼은 경제적으로 부담이 컸다. 몇 년을 절약하여 모아도 부족하여 논밭을 팔아야 했으며 빚을 얻어야 했다. 이로서 농촌생활은 대대로 내려오면서 빈곤을 면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교회가 주관하여 신자의 가정은 물론 불신자의 가정도 연합으로 교회당에서 결혼식을 거행하면서 결혼비용르 절감하게 하였다. 결혼식 때 도지사, 군수, 유명한 인사들이 참석하여 성대하게 거행하였도 연합결혼식의 기사가 동아일보, 조선일보, 기타 신문에 크게 보도되었다. 1934년 11월 23일 제1회 연합결혼식이 10쌍으로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이 때 도산 안창호 선생님과 평양신학교 설립자 윤산온 박사가 참석하여 축사를 하였다. 숭실학교 관악단이 입장식과 퇴장시 그리고 특별 축하 연주를 하였다. 강서 군수, 경철서장 등 내외귀빈이 참것하였으니 지금부터 73년전의 일로 선구적인 놀라운 일이였다.
4. 미신타파 운동과 관혼상제
기독교는 유일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다. 그 외에 어떤 신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교회가 마을에 들어와서 제일 먼저 미신타파운동을 하였다. 우리나라 조선왕조 말엽에 부패로 사회가 미신이 성행하였다. 우상 만들기, 조상의 묘 쓰기, 굿하기,이사할 때 잡기, 관상, 손금 등으로 피해가 많았다. 산에 나무와 바위에 미신 단지를 매달아 아침저녁으로 빌며 물건을 바쳤다. 이는 물질적으로 손해요 시간적으로 낭비였다. 그래서 집안에는 물론 산과 강 마을의 여기저기에 미신이 가득하였다. 그러나 미신에 대하여 손을 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미신이 사람을 타락시키며 무지로 몰아넣었다. 사람이 어쩌다 병에 걸리면 치료보다 무당을 데려다 굿을 하여 병자를 더 고통스럽게 하여 죽는 경우가 많았다.
기독교가 이러한 시기에 들어와서 모든 우상과 미신을 타파하여 저속된 마을을 깨끗하게 소탕하여 새롭게 정리하였다. 미신은 문화와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 자애물이요 살맘의 마음과 정신을 좀먹게 하는 걸림돌이 되었다. 이렇게 타락한 마을에 기독교가 들어와 미신을 타파한 일은 마을을 발전시키는데 크게 공헌을 하였다.
사람이 죽었을 때에 장례를 치르는 일도 크게 문제가 되었다. 3일장, 5일장, 7일장 등을 치렀는데 상을 다하면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주야를 불문하고 상가 댁에서 먹고 마시고 잠을 자기 때문에 재산이 탕진되었다. 제사도 몇 대 조상부터 계속하여 지켜 내려오는 큰 문제였다.
교회가 장례와 제례에 있어서 종래의 구습을 타파하는 일에 앞장섰는데 이로서 사람들은 부모의 제사를 금한다는 반대와 비방이 있었으나 강력하게 이를 시행하였다. 조상 제사 때문에 서민들은 가산을 탕진하는 실례가 많았다. 몇 대를 내려오며 조상에게 제사를 하고 초하루, 보름,명절마다 제사를 했기 때문에 경제적 피해가 많았다.
농촌에서 결혼식 역시 문제가 많았다 우리나라 조선조에 소위 양반들이 10세가 되면 아이들을 결혼시키는 것을 가문의 명예로 삼는 풍습이 있었다. 그래서 기독교가 앞장서 만 16세 이상이 되어야 결혼을 시키도록 하였다. 만약에 그 전에 결혼을 시키면 부모에게 헌법으로 책벌을 주었다. 그리고 결혼 때문에 떡치고 국수 누루고 지짐을 부치고 되지를 잡고 소를 잡아 잔치를 치르는데 속된 말로 기둥뿌리가 뿝혀나갔다. 떡을 며칠을 계속하여 치는데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욕을 먹는다. 그래서 큰 일을 치르고 나면 밭을 팔거나 빚을 얻게 마련이었다. 기독교가 드러와서 장례식과 결혼식을 간소화 하였으며 이러한 일을 시정학 ㅣ위하여 착안한 분이 바로 김응록 장로의 소의 “연합결현식”이다.
5. 남녀 평등 운동
개화기 이전의 한국은 남존여비의 풍습에 젖어 여자는 일개 노동력에 불과하였다. 더구나 시골의 여성은 남성 앞에서 얼굴을 제대로 들지를 못하고 비굴한 삶을 살았다. 남 여 7세 不同席이라는 전통 때문에 여자들이 작지 가족이 아닌 다른 남자들 앞에서 얼굴을 마주 할 수가 없었다. 여자들은 결혼을 하여서도 아이를 낳아주는 도구에 지나지 않았으며 자녀도 하나 둘이 아니라 10여 자녀를 낳아서 키워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남자들은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를 취하여 여자는 남자의 반려자가 아니라 노예요 종속자요 한갓 쾨락의 대상에 불과하였다. 뿐만 아니라 여자는 법적으로 아무 권리가 없었으며 이름마저 없었다.
그러나 기독교가 들어와서 여성의 지위가 높아지기 시작하여 남존여비의 인식에서 벗어나 여성이 당당하게 지위를 찾아 남녀 평등을 찾게 되었다. 그때부터 여성들이 남자처럼 이름을 갖게 되었으며 그리고 교육을 제대로 받아 교회의 직분을 받게 되었고 심지어 지도자가 될 수 있었다.
한국교회 초창기에 선교사들이 세례를주는데 선교사는 남자요 게다가 외국인으로 여자들이 남자인 선교사 앞에 설수가 없어 휘장을 치고 그 사이로 선교사가 손을 넣어 세례를 주었다. 그리고 교회당을 건축하는데 남자와 여자의 좌석을 구분하기 위하여 기억(ㄱ)자 형으로 건축아여 한편을 남자석으로 하고 다른 한편을 여자석으로 하였다.
그후에 한 방에 휘장을 치고 남자와 여자의 좌석을 탈리하였다가 휘장을 거두고 좌석만 여자와 남자료 구분하였다 그러므로 교회가 남녀 평등을 이루는데 끼친 공로가 크다.
6. 105인사건은 106인 사건이다.
세칭 105인 사건은 1910년 11월 5일 우리나라 압록강 철교를 건설하고 개통식에 참여하기 위하여 초대 총독인 데라우찌(寺內)총독과 총독부 요직원이 참석하기 위하여 서울에서 신의주로 가게 되었다. 이때 기독교인들이 총독이 가는 도중에 살해하는 모의를 하였다는 조작이다. 그래서 데라우찌 총독이 기독교 세력을 뿌리뽑으려고 기독교 지도자 105명을 체포하여 재판에 기소를 하였는데 이 사건이 바로 105인 사건이다. 그런데 이 사건이 조작이라는 사실이 재판과정에서 들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재판장은 일방적으로 105인에게 실형을 선고하였다. 이때 105인 전원이 항소하여 1913년 3월 21이 96명은 무죄로 석방되고 그 외의 사람들은 6년형을 선고받았다. 105인 사건은 기독교 구겢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질랜드 선교사는 중국인 친구에게 사건의 진상을 서신으로 알렸는데 그 친구가 홍콩 데일리 뉴스 The Hong Daily News)와 영국의 타임지(The England Times)에 대대적으로 알려 세계적으로 들끓었다. 실은 독립운동을 못하도록 평안남도 행화도 서북지역에서 약700명을 검거하였다.
7. 김응록 장로 수감과 망명생활
이 사건으로 김응록 장로가 구속되어 그 당시 경성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 후에 김응록 장로의 재판 판결문에 있어서 주소,성명,연령을 페능로 지워져 있었으며 그리고 기소인 123명을 122명으로 고치고 무죄 17명을 제외한 106명에게 실형을 언도하였다. 바리 이때 김응록 장로가 변보석으로 고향에 있을 때 재판이 진행되어 궐석 판결로 5년형을 받았는데 그래서 106명을 105인으로 고치게 되었다. 그러므로 105인 사건은 김응록 장로를 포함하여 106인이라고 시정을 해야한다. 사건의 판결 사항은 다음과 같다.
판결일자 1911년 10월 18일 검거인 700명 검사국 송치인 123명 10년 징역 6명 7년징역 18명 6년징역 39명 5년 징역 42명 무죄17명 합계 122명, 그러름로 계산상으로 1명의 치이가 나는데 그 1명이 바로 김응록 장로이다.
김응록 장로는 살인적인 고문을 받아 갈비대가 부러져 호흡을 정상적으로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일본 형사가 취재를 하면서 죽기전에 “아브나이”(위험하다)하며 고문을 중지하였다. 그래서 병보속으로 고향에 와서 치료를 받고 있었다.
2. 김건철장로의 아버지 김능백(金能百)목사와 예산교회
김능백 목사는 고창교회 출신으로 최초의 목사다. 김응록 장롱의 장남으로 부친의 독립운동으로 만주에서 살았는데 1923년 북경대학교 상과를 졸업하였으며 그 후에 하나님의 특별한 소명을 받아 1937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신학교 재학시에 학생 신분으로 영어 교수를 하면서 졸업하여 1939년 4월에 평양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2. 도시교회를 마다하고 농총교회에서 무보수로
김능백 목사는 1941년 동경 루터교 신학교에서 연수를 하였으며, 그 후에 1942년 만주 대련 장로교회를 시무하였고, 1943년부터 1950년까지 대동군 중이리교회를 시무하면서 깊은 산속에 있는 농촌교회에서 사례금도 없이 무보수로 봉사하였다.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임종순 목사 후임으로 모시려고 하였으며, 산정현교회 주기철 목사가 옥중에서 순교하신 후에 모시려고 하였으나 평양의 대 교회는 모실 목사님이 많이 계시다고 하시면서 사양하시고 중이리교회를 계속하여 시무하셨다.
김능백 목사는 부친과 형제들이 부유하게 살기 때문에 의복, 구두, 모자, 가방 등을 좋은 것으로 보내 주었으나 농촌교회에서 목회하는 목사는 농촌 실정에 맞게 살아야 한다고 모든 것을 사양하고 언제나 검고하고 소박게 살았다.
3. 예산에서의 목회생활
김능백 목사는 6.25때 월남하여 제주, 부산등을 거쳐 충남 예산에서 장로교회를 개척하여 목회를 하였다. 교회당이 없음으로 유치원을 빌려서 장로교 교회를 개척하였으며, 사택이 없어 오막살이 움막집에서 생활을 하였다. 김능백 목사는 사모님을 이북에 두고 단신으로 아들 만을 데리고 월남하여 연세가 많은 할머님이 살림을 도와주었다.
이때 부산에서 사업을 크게 하는 동생 김능억 장로가 예산에 찾아와서 고생을 하지 말고 부산으로 가자고 하였으나 김능백 목사는 “목회는 나의 사명이니 염려 말라”하시며 그 대신 지금의 교회가 비좁고 초라하니 한옥 집을 사서 교회를 사요했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주택을 구입하여 교회당과 한편을 사택으로 사용하여 교회는 점점 부흥되었다. 김능백 목사는 성인군자의 모습으로 실력 있고 인격자로 언제나 겸손하여 많은 사람에게 존경을 받았다.
4. 미국선교단이 본 김능백 목사
김능백 목사가 예산에서 목회를 하고 있을때 충남지역에 주재하는 미국선교단체가 그 지역의 교회를 순방하게 되어 김능백 목사가 시무하는 예산읍교회를 방문하게 되었다. 선교사들이 통역관을 대동하여 교회에 대하여 설명할 때 김능백 목사가 영어로 유창하게 교회의 현실과 미래를 구체적으로 하였다 선교 책임자가 이렇게 초라하고 작은 교회의 목사의 영어실력에 놀라 무슨 일이든지 도와주겠다고 하여 김능백 목사는 교회의 건축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이때 선교단이 대지를 마련하면 미 8군을 통하여 교회를 건축하여 주기로 약속을 하였다. 그래서 예산교회 모 장로님이 교회 부지를 제공하여 교회를 잘 건축하여 현재까지 존재하고 있있다. 이 건축 사건으로 교회는 물론 예산 지역과 사회가 깜짝 놀라게 되었다. 김능백 목사님은 매사에 겸손하였으며 그리고 내실 있게 목회를 하였다.
5. 목회 은퇴와 소천
예순읍교회는 김능백 목사의 공노를 높이 평가하고 예산교회가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교회 정원에 “김능백 목사의 기념비”를 건립하여 그 뜻을 두고 둑도 기리도록 하였다. 한국교회 정원에 목사의 기념비를 세운 교회는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
3. 순교자 김응록 장로의 손자 김건철 장로와 동승교회
김건철 장로는 평남 강서 고창리(高昌里)가 고향이다. 나는 김건철 장로와 같은 마을에서 자라났으며 같은 고창읍교회에 다녔으며 은 보명학교(步明學校)에서 공부를 하였다. 나이 는 몇 살 치이 있으나 함께 밀려다니며 학교 운동장에서 공을 차며 놀이를 하고 빈장아래라는 대동강 줄기 샛강에서 멱을 감으며 어울려서 지냈다.
비록 농촌이기는 하나 비교적 평화로운 마을로 뒤에는 부흥산(復興山)이 평풍처럼 등지고 있으며 앞에는 유유히 흐르는 대동강이 있다.그 사이에 농촌이라기보다는 하나의 문화촌 같은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농토는 기름지고 퍽이나 넓은 평야로 대동강으 담수로 수리조합 이상으로 1년 내내 비가 오지 않는 가무는 해에도 논농사느 수확을 할 수있다. 주민이 200호가 넘는데 대부분 농사를 생업으로 마을 한 가운데 평남선 철도가 가로 질려 있어 하루에 도 수십 차례 밤낮없이 지나가는 기차의 기적소리는 온 동네를 진동시켰다. 이 마을에서 나서 자라 교육을 받고 특별히 교회를 통하여 신앙의 지도를 받은 竹馬知友이다. 하나님이 추상적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심을 확실하게 증명해주고 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로 신앙을 받았고 이삭은 아브라함의 신앙을 이어받았고 야곱은 이삭의 신앙을 이어받음으로 신앙이 계승되었다. 하나님께서 과거에 함께하셨으며 현재 함께 하시며 그리고 미래에 영원히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김건철 장로는 할아버지 이응록장로의 신앙과 아버지 김능백 목사의 신앙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성경적인 신앙, 보수적인 신앙, 그의 삶 전체가 신앙이다.
3. 몽골 북극성 대 훈장 받은 김건철 장로
그리고 군인 교회를 위하여 1억을 봉헌하였으며 그 외에도 여기 저기 봉사한 일이 많다.
4.교회와 사회에 봉사한 김건철 장로
김건철 장로가 몸으로 시간으로 돈으로 봉사한 사역은 글로 다아뢸 수가 없다.
1) 국내 협조/서울남선교회 60주년 기념교회, 남선교회 전국연합회 70주년 기념교회, 장로회신학교 건축, 고창교회100주년 기념행사, 몽골국내 어리이 심장수술.
2) 해외선교/옹골 근로자 자녀교육을 위한 문화원 건축
3) 교계봉사/ 남선교회 전국연합회장, 전국장로연합회회장, 한국장로신문사 사장 및 발행인, 서울노회 자올회장, 실로암아이센터 건축위원장.
4) 사회봉사/평안남도 중앙도민히회장, 평남민보사장,평양고보 총동문회 부회장, 평양축구단 단장, 이북5도 축구연합회 회장, 서경회 회장.
5) 표상/ 몽골 북국성 대훈장, 몽골국립교육대학에서 명에교육학 박사 학위수여, 국민훈장 목련장, 국민훈장 동백장, 국무총리 표창 등 다수
5. 웃음과 긍정적인 사고의 김건철장로
김건철 장로는 웃음의 사람이다. 웃는 사람은 행복하고, 웃는 사람이 만사형통하고 웃는 사람이 장수한다. 현 시대의 가장 탁월한 웰빙의 비결은 웃음이다. 좋은 것을 먹는 것도 운동도 중요하나 웃음이 더 중요하다.
웃음은 헬라어 케로스(Gelos)는 헬레(Hele)에서 나왔는데 그 뜻은 건강(Health)이라고 한다. 이는 웃음이 최고라는 뜻이다. 一笑一少 一怒一老는 한번 웃으면 한번 젊어지고 한번 화내면 한번 늙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김장로는 어떠한 경우에도 좌절하지 않고 불가능이 없는 긍정적이고 건전한 성품을 소유하고 있어서 만나는 사람마다 용기를 가지게 한다.
김건철 장로와 엄영선 권사의 슬하에
장남 동준 자부 김혜란 차남 동언 자부 황유선 삼남 동욱 자부 박선영 딸 동연 사위 안신기 손자3명, 손녀 4명 이 국내 구외에서 선조들의 신앙을 계승하여 신학을 전공하고 교회이ㅡ 중직으로 복된 삶을 이어가고 있다.
위 2010.2.4 예화이야기 김광식 목사 저 251~271에서 입력 김종희 목사
아래 高昌敎會100年史 79쪽~167쪽에서 김응록장로와 관련된 부분을 입력(2010.2.11 김종희 목사 입력
Ⅳ. 고창이 마을과 관계된 일들
1. 고창이 마을의 이름 전설
평남선 기차를 타고 평양을 출발하여 남포로 몇 정거장만 가면 대평역이고 그 다음이 강선역읻. 고창이는 태평역과 강선역 중간 지점에 있는데 멀리 북쪽으로 도산 안창호 선생의 산장이 있는 대보산(해발722미터)이 바라보이며 마을 바로 뒤에는 부흥산(해발74미터)과 달마산(해발265미터)이 평풍처럼 등지고 있으며 흐르는 대동강이 있는 그 사이에 농촌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문화촌같은 아담한 마을이 바로 ‘고챙이’이다.
3. 고창이의 지리적 관계
고향동 마을은 북쪽에서부터 시작하여 남쪽으로 늘어져 있는데 마을 한 가운데가 약간 높은 지형으로 마을 어디서나 잘 볼 수 있는 곳이다.앞에는 대동강이 유유히 흐르고 마으로가 대동강 사이는 퍽이나 넙은 논밭이 있다. 논농사는 대동강의 물로 소위 도수왕래(道水往來)가 잘 되기 때문에 1년 내내 비가 오지 않아도 논농사를 짓는데는 지장이 없다. 토질이 좋아 1년작 벼4근을 수확하는 비옥한 곡창이다. 김응록 장로는 한국에서 논농사를 짓는데는 낙동강과 대동강이 대표적인데 낙동강보다는 대동강이 유리하고 대동강 유역 중에서도 고창이가 제일이라고 하시면서 우리 마을이 한국에서 농촌치고는 제일 살기 좋은 곳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마을 한 가운데로 평남선 기차 철도가 가로 질러서 있는데 기차가 지나가면서 울리는 기적소리는 온 동네를 진동시킨다. 그래서 농촌이라기 보나는 하나의 이상촌 마을이다. 이 마을에서 우리가 낳고 자랐으며 그리고 교회에서 철저한 신앙교육을 받았다.
5. 島山 安昌浩 선생과 고창교회 대표적인 인물 김응록 장로
도산 안창소 선생은 강서교회 대표적인 인물로 고창교회와 깊은 관계가 있다. 고창교회와 거리가 가까운 곳에 거주하신 인연도 있으나 고창교회 대표적인 인물인 김응록장로와 친분이 두터워 자주 오셔서 강연을 하셨고 연합결혼식 때에는 축사를 하셨다(고창교회100년사 83쪽에서)
도산 안창호 선생이 대보산 밑 송태산장에서 지냈다. 그런데 송태산장이 준비되는 기간에 고창교회 김응록장로가 용강온천에 직접가셔서 안창소선생을 모셔다가 김응록 장로 댁에서 얼마동안 계시게 하면서 물심양면으로 도우셨다. 그래서 김응록장로가 착안하고 고창교회가 주관한 연합결혼식 때에 거의 빠짐없이 오셔서 축사를 하셨다.
김응록 장로는 105인 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병보석으로 나와서 치료하는 중에 만주로 망명하였다가 법벅공소기간이 지낫음으로 고향인 고창동에 오셔서 교회와 학교를 건축하고 도로를 직선으로 넓게 닦고 우물파기 운동 초가를 기와로 굴뚝과 화장실 개량 등 이상촌 마을을 만들었다. 안창호선생의 소원은 나라가 독립하려면 도시는 물론 농촌 전국 방방곡곡에 이상촌 마을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일을감응록자올가 제일 먼저 고창동에다 실천하였다. 김응록장로의 장손 김건철장로와 필자(김광식목사)와는 죽마지고우로 월남 후에도 현재까지도 사업도 함께 하였으며 군민회 도민회 등을 위한 봉사도 계속해 오고 있는데 현재 필자는 평안남도 도민회 부회자으로 협력하고 있다.그러므로 안창호 선생과 고창교회와는 오랜 옛날부터 깊은 인연을 가지고 있다. (고창100년사 85쪽에서)
Ⅵ. 일생을 교회와 독립운동에 몸바치신 낙평 김응록 장로(99쪽-
1. 항일 운동과 105인 사건의 한 사람
1) 김응록장로와 생일장치
2) 평남선 철도 부지 매입에 항거
김응록장로는 일찍이 기독교 신앙과 신교육을 통해 일본 제국주의의 비인도적이며 야만적인 처사를 깨달은 선각자로 20여세부터 투철한 민족정신과 탁월한 지도력으로 신망을 얻으셨는데 이는 다음의 일화로 알 수 있다.
1904년 일본이 우리 나라와 아시아 대륙을 침략하고 착취하기 위하여 경의선 철도를 부설할 때 일본이 경의선에 이어서 평양에서 지남포로 가는 평남선 철도를 부설하기 위하여 주변의 땅을 강제로 수용 할 때 대평역과 강선역의 중감쯤에 있는 김응록장로의 고향인 강서군 누차면 일대의 땅도 온갖 위협과 회유로 헐값 토지를 내도록 강요하였다. 이때 김응록 장로는 그 일대의 지주들을 모아 설득하고는 위임을 받아 일본의 철도부설에 절대로 헐값에 땅을 빼앗기지 않도록 투쟁하였다. 그리하여 타구간은 쉽게 토지를 매입했으나 누차면 일대의 땅은 매매가 되지 않아 철도 부설이 늦어지자 일본인 관리가 찾아와 말하기를 “정히 그렇다면 우리가 당신네 요구대로 땅을 사서 철도를 놓은 후에 당신들이 철길을 건너다니지 못하게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자, 이 때 김장로는 “그래, 그러면 지금 당신이 밟고 있는 땅은 어느 나라의 땅인가? 왜 남의 땅에 섰느냐 썩 가지 못해!”하며 일본인들을 꾸짖으셨다. 결국 이러한 강경함의 자세로 인해 땅 가격 문제는 김응록 장로의 계획대로 타결이 되었다.
3) 평양 평촌리 연변장 설치에 항거
일본이 한반도를 점령한 후 가장 중점을 두었던 것 가운데 하나가 일본 군인을 한국에 주둔하는 일이었다. 일인들이 평양역과 인접하여 있는 평촌리에 연병장을 설치하기 위하여 사방을 돌아가며 자기 마음대로 말뚝을 박고 있을 때 김응록장로는 몇몇 뜻있 맞는 동지들을 규합하여 일본 군인이 박은 말뚝을 모조리 뽑아 일본 헌병이 타고 있는 말의 엉덩이를 때리면서 이곳에 일본군인을 위한 연병장을 절대로 설치할 수없다며 항거하였다. 중 약 이러한 일련의 저항으로 김응록 장로는 일본 헌병들의 요시찰 대상자로 지목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때부터 일본에 저항하는 평안도와 황해도 등 종교계의 지도자와 민족주의자들을 구속하는 일들의 시작으로 일본에 저항하는 세력을 원천 봉쇄하는데 주력하였다.
4) 입록강 철교 준공식과 총독 살해 구실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 후 조선 주재군 헌병 초아령과 겸 총독부 경무총감인 야마가다 중좌와 무리이 대위 그리고 첩보계 고등경찰의 구니도모 경시 등은 조선인 애국지사들이 독립을 못하도록 평안도 황해도 등 서북 지역 각지에서 검거명령이 내려 약 700명이 잡혀 들어갔다. 검거령의 구실은 1010년 12월 27일 신의주 압폭강에 철교를 건설하고 그 준공식에 참석할 예정이었던 총독과 총독부 요인들을 암살하려 했다는 조작된 각보에 의해서 이러한 일대 검거 사태가 일어났다. 그 해 12월 25일부터 1911년 정초까지 검거작업이 이루어졌는데 이것이 이른바 날조된 105인 사건인 실은 106인 사건의 각본이었던 것이다. 이때 김응록 장로도 이들과 함께 구속되어 당시 경성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런데 그후 김장로에 대한 경성지방법원 형사부 판결문 기록은 누군가에 의하여 주소 성경 연영을 펜으로 그어졌으며 건사국에서 기소인우너을 123명을 122명으로 고치고 판결문에 대정원년 9월 28일에 (1912년 9월 28일) 무죄 17명을 제외한 106명에게 실형을 언도하는 일이 벌어졌는데 이는 김장로의 도피에 대한 책임추궁이 두려운 나머지 누군가에 의해 이러한 작업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또 한가지 이유는 김장로가 병 보석으로 고향에 오신 후에 재판이 되었음으로 궐석 판결 5년형을 받게 되었다.(이때 연세는 29세) 그래서 106명을 105명으로 고쳐졌다고 본다. 삼남 김응역장로(현재 미국 엘에이 거주)의 대학교 동창인 변호사와 다른 한 분의 변호사에게 판결문(총무처 정부기록 보존소에서 1989년 8월 18일 복새해 온 것)을 보였더니 어떤 판사도 판결문에 주문이나 이유서의 기록이 없이는 절대 고칠 수 없닥도 말하였다.
105인 사건은 106인 사건으로 해야
그러므로 105인 사건은 김응록장로를 포함한 106인 사건이라고 시정해야 한다고 본다. 김영삼대통령께서 역사 바로 세우기를 주장하시는 이 시점에 있어서 일본이 한국을 침략한 이래 최대의 사거인 이 사건의진상이 바로 밝혀저 이를 106인 사건으로 시정되야 된다고 본다.
판결사항은 다음과 같다.
“판결일자 1911년 10월 18일 전체 검거자 700명 검사국 송치자 123명중 10년 징역자 6명, 7년 징역자 18명, 6년 징역자 39명, 5년 징역자 42명 무좌자 17명 함께 122명”. 그러므로 계산상 1명의 차이가 생겼으니 이 1명이 바로 김응록 장로이시다.
5) 살인적인 고문을 당함
저들은 온갖 잔인하고 살인적인 고문을 하였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두 엄지손가락을 포송으로 묶어 한편 팔은 어때 위로 넘겨 등에 가게하고, 다른 한편 팔은 겨드랑이 밑으로 등에 가게하여 두손이 등 뒤에서 닿도록 바싹 당겨 졸라맨다. 그리고 문턱 위에 몸이 2척 가량 공중에 뜨도록 매달아 놓고 두 놈이 대막대 두 개를 마주 잡고 옆구리에서 허리까지 조이면서 훓어 내리면 몸이 두동강이가 나듯하면서 기력이 다 빠진다. 또 다른 두 놈은 채찍으로 머리에서 다리까지 숨 술 틈없이 난타하므오 숨이 하늘에 닿아 의식을 잃는다. 최조관들은 의식을 깨우고 고문도 하였다. 감각이 있는 가를 알기 위하여 부젓가라그로 다리를 지져 보거나 담배 불로 얼굴을 지져 보거나 물을 뿌린 백지를 두겹 세겹하여 얼굴을 붕창해서 호흡이 안 통하면 ‘아부나이’(위험하다)하며 줄을 늦추고 머리와 배를 주무른다. 그래도 의식이 들지 않으면 코에 물을 부어 배를 불룩하게 만든 뒤 거꾸로 세워서 물을 토하게 한다.
이러한 살인적이고 잔인한 고문으로 태국서관 김근형씨, 정주의 정희순씨는 숨이 지고 말았다.(1983년 12일자 중앙일보에 게재 되었음) 김응록 장로도 대막대 두 대를 두놈이 마주 잡고 옆구리에서 허리까지 죄이면서 훓터 내리는 고문으로 갈비대가 두 대 부러지고 두 놈이 머리에서 다리까지 숨 쉴 틈없이 난타하여 죽기전까지 고통을 당하였다.
6) 병보석으로 헌병대 감시하에 고향집에서 중국에 망명
김응록장로의 형제는 동생인 김응복장로인데 그 당시 경성(서울)에 계셨다. 김응록장로는 고문을 너무 심하게 받아서 곧 세상을 뜰것 같다는 소식을 들은 김장로의 동생 김응복자로가 경성 지방법원에 병보석을 시청 고향인 평남 강서군 누차면 3리 12번지로 보석지를 정하고 출감하는 길에 대동한 변호사와 의사가 화장실에 데리고 가서 두 장로에게 귀속말로 ‘좀 나으시면 독 중국으로 망명을 가라’고 하고 의사와 변호사는 사리원에서 차에서 내려 경성으로 돌아갔다. 고향집에 오자마자 기양헌병대(고향에서 20리 거리에 있는)에서 아침 9시에서 밤 8시까지 감시하는 중에 경성에서 재수감 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지만 헌병이 올때마다 죽는 시늉을 하고 망명할 기회를 찾았다.(후에 알고보니 궐석 판결로 5년형을 언도 받았다는 것이었다)
2. 만주로 망명
1)세밀한 망명 계획
헌병이 지키지 않는 시간은 밤중 11시간뿐인데 고창동에서 만주 안동(지금 단종)까지는 약18시간이 걸리는데 도저히 망명의 기회가 불가능했으나 일본인은 정월 1일 명절로 지켜 12월 31일에 대평역에서 마지막 밤차를 타기로 하고 야간에 평양역으로 가서 신의주행 기차로 갈아타고 안동까지 무사히 도착하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게 되었더. 정월 2일 아침에 헌병이 와 보니 김응록 장로가 피신하고 계시지 않음으로 사촌동생인 김로진씨를 수차례 헌병대로 연행하여 고문하였다. 김로진씨는 이 일로 죽도록 매를 맞고 고문에 견디다 못하여 만주로 피신하였다. 결국 김응록 장로의 행적을 찾을 방법이 없게 된 기양헌병대는 경성(서울)법원에 도피하였다고 보고를 할 수 밖에 없었다.
3) 이름은 오위기로 호는 낙평으로
압록강 철교를 기차로 건너가시면서 김응록장로는 성명을 바꾸셨는데 ‘吳爲基’로 하였다. 그 뜻은 吾(나‘오’) 字라야 하지만 그런 성이 없기 때문에 나라오자를 쓰고 귀(할 ‘위’)자는 독립운동을 계속한다는 뜻이고 基(터 ‘기’)자는 발음대로 쓰게 되었는데 ‘내가 독립운동을 계속할 터이다’라는 의미의 성명으로 變(변)설명하셨다. 후에 아호를 樂平으로 하셨는데 그 뜻은 ‘즐거운 손에 ㅂ마른길을 가면서 독립운동을 하신다’는 뜻이었다.
3. 만주 망명생활에서의 활동
1) 쾌대모자에서 군정장관 정취관을 만남
1905년 일본과 러시아가 만주 여순에서 전쟁을 하였는데, 일본이 만주 여순에서 평화 회담을 하는 당시에 러시아가 부설한 만주 철도의 운영과 사할린(구하태) 남부의 반을 일본이 인수하게 되었다. 만주 철도를 일본이 운영하기 때문에 기차를 타며 일본경찰에게 체포될 염려가 있음으로 1913년 30세 때에 안동서 포장마차를 타고 (제정)러시아로 가는 방법을 택하게 되었다. 그곳으로 가던 중 만주 봉천성(현재 요령성) 토오하현 쾌대모자(快大帽子)의 군정시대가 되어 쾌대모자에서도 군정장관이 정취관(官名)으로 되어 있었다. 정취관 군정장관이 김응록장로의 소식을 듣고 사람을 보내어 영대(군대내)로 오시도록 하였다 그러나 김응록장로는 중국어를 못하시므로 한문을 써서 의사소통을 하게 되었다.김장로는 한문에 능통하시므로 한문으로 자신의 독립운동 내용과 일본인의 잔인하고 살인적인 고문으로 갈비2대가 부러진것 그래서 헌병의 감시를 피하여 러시아로 망명가는 길에 몬 ㅁ치료를 위하여 쾌대모자에 들렸다고 자신의 상황을 밝히게 되었다. 이 때 구정장관 정취관은 당신을 군대 내에ㅐ서 잘 보호하면서 유명한 의사를 청하여 병을 치료하여 줄 터이니 러시아로 가지 말라고 하였다. 그리고 병이 다 나으면 이 곳에서 독립운동도 하고 사업도 하라는 배려를 하였다. 그 덕택에 김장로는 영내에서 병 치료도 하시고 중국어도 능통하게 잘 배울 수 있게 되었다.
2) 제1차 사업과 화폐발행
군정장관의 배려로 김응록장로는 군정장관 정취관과 친근하게 되었다. 그후 영내에서 나와 독립운동을 하기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2층에 살림집과 창고와 뜰이 넓은 집을 세로 얻어 사업을 시작하였다. 초대 부통령을 지내신 이시영씨와 남기댁씨등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머물며 독립운동을 추진하기 도 하였다. 사업이 잘 되어 봉천과 교역을 하였고 후에 여러 곳에 지점을 내게 되었다. 그 때 중국은 물론 만주 장작림 정권에도 개인이 화폐(자기상호로)를 발행할 수 있는 제도가 있어 군정장관 정취관이 만주 실권자 장작림에게 특별 허가를 얻어 김응록장로의 상점 상호로 화폐를 발행 할 수 있도록 도와 주었다. 이는 만주에서 화폐를 발행한 이는 김응록 장로뿐이었고 중국 본토 산동성 천진에 있는 거상 한곳에서 발행하여 만주까지 와서 사용하였다. 이 처럼 김장로와 군정장관과의 특별한 관계가 지속되던 중에 조선 사람과 만주 사람이 재판사건이 있었는데 조선 사람이 잘못 한 일이 없는데도 구정장관인 정취관이 조선 사람을 패소하게 하였다. 그는 너무 분하여 김장로에게 하소연을 하였다. 이 사연을 들은 김장로는 정취관을 찾아가서 재판이 잘못된 것을 말하게 되었는데 정취관은 자기가 김장로를 그렇게 많이 도아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에게 항의한닥도 하여 김장로가 발행한 화폐를 전부 압수하여 가위로 잘라버렸다. 그러나 그 후 군정장관인 정취관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김장로를 군대 내로 초대하여 자기가 잘못하였다고 사과하면서 화폐를 계속하여 발행하라고 하였지만 김장로는 화폐를 발행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여 다시는 화폐를 행하지 않았다.
제54회 총회장을 역임한 안광국목사가 만주에 있을 때 김응록 장로님 댁에 오래 있었는데 그후 안목사는 김응록장로가 독립운동으로 인한 고문으로 갈비뼈가 부러진 것과 한국사람으로는 중국에서 화폐를 발행한 분은 김장로 단 한분 뿐이라고 기독공보에 자세하게 개재하였다.(인천 제3교회의 원로목사이신 김광식 장로가 - 후에 안교회 부목사 당시 - 그 신문을 김건철장로에게 전해 주었다.)
3) 사업보다 독립운동과 전도에 주력
첫 번째 망명지인 봉천성(현재 요령성)을 통하면 쾌대모자는 산이 많은 관계로 밭은 많으나 논은 비교적 없는 지역으로 농장을 하기에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상업을 계속할 수 밖에 없었다. 이때 이곳에는 전선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피신하여 온 사람 사업에 실패하고 온 사람, 노름과 술 때문에 빚을 많이 지고 온 사람들 등이 있었는데 전부가 다 독립운도을 하다가 피신하여 왔다고 하였다. 그러나 김응록장로님의 사모님은 이유를 묻지 않고 모든 사람에들에게 하루 밥을 7번짜기 지어 내셨다고 한다.
이 후 김장로 댁을 찾는 이들이 점점 더 많아셔서 집에서는 다 수용할 수 가 없어 이를 위해 중국인 집을 하나 더 세를 얻어서 살게 하였다. 물론 그 세는 김응록 장로가 부담하셨으며 그 사람들의 먹을 식량과 부식을 쌓아 두는 창고까지 준비하여 자유롭게 가져다가 먹도록 하였다. 조건은 독립운동을 열심히 하면서 6일간은 일하고 주일은 반드시 김장로 댁에 와서 예배를 드리
는 조건 뿐이었다. 그러나 진실로 독립운동을 하다가 피신 온 사람들은 올바르게 사는데 그 외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곡식과 부식을 팔아서 노름을 하며 술을 마식며 올바르지 못하게 살았다. 그러나 김응록장로는 올바르게 가르쳐도 본래 잘못된 사람임을 알고는 있었으나 누구는 있게 하고 누구는 나가라고 할 수 없어 괴로워하던 에 창고에 화재가 일어났다.점원들이 창고에서 물건을 꺼재려고 하니까 꺼내지 말고 차라리 다 태워 버려야 된닥도 하시면서 창고문을 잠그고 다 태워 버렸다. 그 이유는 좋지 못한 사람들을 먹여 살림으로 내 재산을 하난미이 다 거두어 가시는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4) 제 2차 통자구농장, 제3차 동안공사, 제4차 동안농장
(1) 제2차 통자구 농장
김응록 장로는 만주에 망명하여 제2차로 하신 사업이 동생 김응복자로와 같이 싲가한 통자구 농장이다. 그때가 1926년 43세였다. 농사를 지을 수 있는 15가구와 함께 그 지역을 임대하고 물을 끌어오는 개천도 파서 좋은 여건을 마련하기 시작하였다. 평안농장주식회사는 만주에서 조선사람이 경영하는 농장으로는 제일 컸다. 요하강 서쪽 금주성 반산현 합마대에 평안농장주식회사를 설립하고 8.15해방이 될 때까지 약 350만평을 경영하였다. 이 농장을 시작할 때에 여러 동지들이 찾아와 같이 하자고 하여 결국 주식회사로 하였는데 김장로가 최고 주주이셨고 평에서의 독립운동 동지이자 105인 사건의 한 사람으로 초대 국회 부의장을 지낸 김동원장로가 세 번째 주주로, 윤원삼장로가 네 번째 주주셨다. 평안농장의 지배인은 김응락장로와 숭실중학교 동창인 강봉우선생이었는데 강선생은 숭실중학교 교무주임을 지냈으며 일본 동경 고등사범학교를 나오신 분이었다. 부지배인은 김응록장로의 둘째 사위로서 숭실전문학교 농과를 졸업하신 김학영씨였다.
(2) 제3차 동안공사
제3차사업은 동안공사(東安公司)이다. 만주에서 대련 항구 다음 가는 營口)시에 동안공사라는 상호로 정미소를 1928년 45세시에 시작하여 1942년까지 영영하였다. 영구시내에 일본인이 많이 살았으며 그리고 선박이 많이 항구에 들어오는 관계로 정미소가 아주 잘 되었다.
(3) 제4차 동온농장
제4차 사업은 봉천성 해성현 팔과수에 있는 동안동장(東安農場)이었다. 약50만평으로 이 농장을 개간하여 해방 될 때까지 경영하였다.
(4) 제5차 평안농사주식회사
1939년 56세에 금주성 반산현 함마대에 약350만평의 농장을 설립하여 1945년 8월 15일 해방될 때까지 경영하였다.
5) 만주에서도 요시찰 대상
1925년 42세 때에 만주 장작림 정권과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미쯔야도미마쓰가 만주에서 조선인이 독립운동을 못하게 하는 협정을 체결하였다. 그래서 만주에서는 점점 더 강경해져 가는 일본의 세력 때문에 독립운동의 거점을로 소문난 토오하현 쾌대모자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일이 점차 어렵게 되었다. 만주경찰 일본경찰이 합동으로 강력히 감시하므로 독립운동을 표면에 내세울 수 없었기에 김응록장로는 新生社를 조직하고 이곳에서 애국심과 민족 사상을 고취시켰다. 당시 김장로 집에는 큰 방이 두 개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주일예배를 드리고 신생 정신교육을 시켰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가끔 일본 정보원이 두 세명씩 짝을 지어 그 곳 동정을 살피려고 오곤 하였는데 늘 우측 옆구리에 작은 권총을 차고 있었다.
4. 귀국후 교회와 사회활동
1) 단신으로 일시 귀국
1912년 당시 29세의 나이로 망명을 떠난지 15년만인 1927년 44세 때에 공소시효가 지나자 우선 단신으로 귀국하여 교회를 중심으로 신교육 운동 관혼상제 개선 애국사상 고취 생활개선 등을 계획하여 추진하기 시작하셨다. 귀국하자 제일 먼저 평양에서 오윤선 장로와의 만남을 시작으로 독립운동의 동지들이 한 곳에 모이게 되었다. 이때 어떻게 알았는지 본 평양경찰서에서 김응록선생을 찾는 전화가 왔다. 이때 전화를 받고 있던 분이 ‘본 평양경찰서에서 어떻게 알았는지 김응록 선생님을 찾습니다’고 전했다.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두려워 했는데 정작 김응록장로는 ‘내가 여기 있다고 말하라’고 하였다. 그래도 겁이 나서 말을 못하고 있는데 김장로는 ‘염려말고 내가 여기 있다고 말하라’고 하였다. 전화 받던이가 ‘계신다’고 하였더니 ‘서장님이 인사하러 갈 터이니 어디 가시지 말고 잠시 기다리시라고 전해 달라’며 전화를 끊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더욱 겁이 날 수 밖에 없었다. 잠시 후에 오토바이 싸이드카(옆에 사람이 탈수 있는 것)가 왔는데 서장 대신 경보부의 사람이 들어서면서 김응록 선생님이 어느 분이냐고 물은 후 거수경례를 하고 ‘서장님이 친히 오실 계획이었는데 갑자기 일이 생겨서 제가 대리로 왔습니다. 서장님께서 어디를 가시든지 구애받지 마사고 자유롭게 여행을 잘 하시고 돌아가시라는 말씀이셨습니다’고 한후에 돌아갔다고 한다.
2)자택 건축 도중에 교회와 학교를 먼저 건축
평안남도 강서군 누차면 3리 746번지에 자택을 건축하던 시절이었다. 김장로는 자택을 짓다가 교회와 학교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고 도중에 이를 중단시키셨다. 평양에서 건축업자로 계신 김상도씨를 초빙하여 지금 LA영락교회 원로로 계시는 김종아장로와 그 외에 몇몇 분과 의논 한 후 교회를 새로 건축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구교회를 헐고 신축하는 교회와 학교를 연결하기 위해 보명학교 역시 붉은 벽돌로 건축하기로 하였다. 그후 건축이 다 되자 신축기념으로 고창교회가 소속된 평서노회 주최로 한국 장로교계의 제1인자이며 3.1운동 민족대표 33인중의 한분인 길선주 목사를 강사로 모시고 사경회를 가게 되었는데 길선주목사는 사경회 도중에 강단에서 쓰러지고 김종아장로 댁에서 운명하셨다.
교회와 학교를 함께 이용하기 위해 교회 강단 뒤편을 열고 닫는 장자(간막이)로 하였고 학교 교실도 전부 장자로 하였다. 그래서 교회 강단 뒤편 장자와 학교 교실 간막이 장자를 다 떼내면 교회에서 학교 끝까지는 엄청나게 넓어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 있었다. 그처럼 건축을 한 이유는 귀국 당시 계획하신대로 국민생활 개선과 계몽 교회부흥관계 관혼상제 개선 등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서 첫째 교회를 부흥시키는 문제 둘째 연합결혼식과 농촌을 부흥시키는 문제 셋째 생활개선과 계몽운동이 그 이유였다. 그 당시 전국에는 농민이 80%인데 농민의 생활개선이 없이는 한국에 발전이 없다고 생각하셨던 것이다.
3)연합결혼식 11회(세계최초)
농민들은 자녀들의 결혼식을 준비하기 위하여 몇 년간을 애써 모으고 절약하여도 감당치 못하여 심지어 많은 빚까지 지게 된다. 이러한 일은 자녀들을 결헌 시킬 때마다 반복되므로 대대자손에 이르기까지 소작농을 면할 수 없으며 빈곤한 생활도 면치 못하게 된다. 그래서 자녀의 결혼식에 많은 돈을 쓰지 않도록 결혼할 사람들이 연합하여 1년에 한번씩 합동결혼식을 하여 그 경비를 절약하며 농민이 잘 살 수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으로 김장로는 계획을 구상하셨다.
교회에서 결혼식을 치르고 피로연은 교회와 학교를 연결한 장자를 다 떼어낸 넓은 장소에서 하면 충분하다는 구상을 동리 사람들과 상의했으나 처음에는 200여호가 전부 반대하였다. 그러나 설득력이 강하신 김응록장로의 말씀을 듣고 마침내는 옳다고 모두가 동의를 하게 되었다.그러나 문제는 고창동의 자녀들과 약혼한 사돈이 되는 타동네 가정들이었다. 지금으로부터 63년전의 일이니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리 20리 30리 되는 먼 거리를 타는 것도 없이 걸어서 찾아가 한번 가서 안되면 포기하지 않고 두 번 세 번 네 번 계속해서 가서 기어이 설득을 시켰다. 이 연합결혼식의 뜻있는 일이 외부로 소식이 펴져 나가 동아일보 조선일보 중앙일보(지금의 중앙일보가 아님) 신문기자들이 찾아와서 세계에서 처음있는 일이라고 하며 신문에 보도를 하였다.
그 당시 마을의 도로는 좀고 구불구불하였기에 10쌍의 연합결혼식을 거행하기 위해서는 교회를 기점으로 하여 남쪽 끝에서 북쪽 끝까지 트력이 마음대로 교차할 수 있는 넓은 도로가 있어야 함을 생각하신 김응록장로는 도로와 관계된 주변의 밭을 당신의 사재로 매입한 후에 도로를 닦는 일을 추진하셨다. 그런데 도로를 닦은 후 도로에서 제외된 땅은 다시 그 땅주인에게 돌려줌으로써 마을사람들이 놀라워하며 김장로를 존경하였다. 또한 주민들의 생활양식에 있어서 초가를 기와로 교체하였고 초가라 하여도 벽돌을 굴뚝으로 개량하였다.
김응록 장로의 주관하에 드디어 1934년 11월 23일 51세때에 제1회 10쌍의 연합결혼식이 거행되게 되어 도산 안창호 선생과 평영신학교 설립자이신 윤산온박사가 숭실전문학교 악단을 대동하여 축사를 하였으며 도상만 강서군수 강서 경찰서장 외 일본인 귀빈들이 많이 참석하였다. 그런데 축사할려고 단상에 올라가신 안창호 선생이 숭실전문학교 악단에게 애국가를 연주하라고 하였다. 학생들은 흥이 나서 ‘동해물과 백두산이 ----’ 애국가를 연주하자 교회 밖에 있던 동리 어른들은 큰 일났다며 걱정이 태산같았다. 또한 안창호선생의 축사 도상만군수와 경찰서장의 축사후 답사를 하기 위하여 단에 올라간 김응록장로는 2천만 동초의 대표이신 도산 안창호 선생이라고 하셨으니 안팎으로 모든 이들의 걱정이 태산 같았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일본인측은 합동 결혼식을 장려하기 위하여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
연합결혼식은 1934년부터 매년 1회 10쌍내외로 10년동안을 거행하였으며 평양의 공회당에서 10쌍을 마지막으로 하여 총11회 합동결혼식을 거행하고 대동아 전쟁으로 중지되었다.
김응록장로는 김봉아 장로 및 기타 몇분과 상의하여 모든 일을 진행하셨는데 결혼식장에는 가족과 귀빈과 외부인만 입장하게 하였다. 그 이유는 외부사람들이 많이 구경함으로 이일이 알려지게된 때문이다. 합동결혼식 비용은 신랑 신부의 한 가정에 20원씩(동아일보에서는 30원이라고 기사가 남)을 염출하여 신랑 신부와 그의 가족들 귀빈들 식장에 입장한 외부에서 오신 손님드에게 평양에서 일류요리사를 초청하여 국수 떡 고기 기타 부식으로 푸짐게 대접하였다. 학교 교실에 책상을 마주놓아 신랑 신부를 앞자리에 앉히고 가족괴 귀빈과 외부에서 소신 손님들은 교회와 학교 강단 사이의 문을 통한 교실로 피로연장에 입장하게 함으로 모든 행사가 질서 있게 진행되었다.
4)우물파기 운동(수자원확보)
1936년 김응록장로 54세 때에 고창동은 뒷너머에 後洞 上洞 中洞 間洞 下洞 路上 路下 등의 부락으로 구성되었는데 한 부락에 우물이 한 개씩 있었다. 물이 적게 나오기 때문에 대동강 물이 조수로 올라오면 마을에서 떨어진 곳에 있는 속칭 개(開)울물을 막고 조수 때에 담아둔 물을 부녀자들이 물동이로 걸어다가 먹고 빨래도 하였다. 그러므로 부녀자들이 고생이 많았기에 고창동에 딸을 시집보내는 부모님들은 걱정이 태산같았다. 이 밀이 얼마나 심각했던지 다른 동리에서 물이 없는 고창리를 ‘깎아 말린 꼬챙이’라고 까지 별명을 지어 불렀다고 한다.
김봉아장로의 말씀에 의하면 옛날에 정씨가 먼저 고창동에 유랑민으로 와서 살 때에 상동에 있는 우물이 정주씨의 우물이었다. ‘정’은 성이요 ‘수’는 목숨수자가 아니었겠는가라고 말씀하셨다. 또 다른 설은 ‘고’씨 성이 고창동에 와서 살면서 많이 번창했던 것 같다고 하셨다. 그래서 ‘고씨가 창성한 곳’이라고 하여 고창동이 되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차츰 고씨는 다른 곳으로 이사가고 그 후에 상동에는 황주‘김씨’ 중동은 전주 ‘김씨’ 하동은 경주‘김씨’ 크게 삼성이 고창이에 와서 정착하여 살아온 것이 아닌가 한다.
물이 귀한 동네이니 김응록 장로는 식수난을 해결하기 위하여 평양에서 우물을 잘 파는 기술자를 데려다가 상동에 있는 정수우물울 헐고 더 깊이 파게 하였다. 그런데 작업 중에 반석이 나오기 때문에 강서 경찰서에서다이나마이트를 허가 받아 깊이 파는 일을 하였으나 더 이상은 파기가 곤란하여 쏠땅질(쇠로 돌구멍을 뚫는)로 며칠동안 둟었는데 정오 경에 뚫던 구멍에서 물이 막 솟아올라 쾌거를 이루었다. 그리고 김응록장로 댁 안뜰에 우물을 팠는데 또 성공하였다. 중동에 김봉아장로 댁 앞에 있는 우물을 헐고 팠는데 성공하였고 그 다음 하동에 우물을 파서 성공하였고 뒷너머에도 우물을 파서 성공하였기에 부락마다 우물이 있게 되었다.
그런데 처음 상동에 우물을 팔 때의 일이다. 이미 있던 우물을 헐고 다시 파던 중에 장마로 비가 많이 와서 파던 우물 주위가 무너져 마치 하나의 깊고 넓은 늪처럼 되어 버렸다. 그러자 김장로의 사랑방에서 숙식을 하던 기술자가 장마로 비가 많이 와서 자기는 망하였다고 울상을 하였다. 이때 김장로는 울지말라고 하면서 ‘내가 자네를 망하게 하겠느냐’하시며 평양에 가서 굻은 소나무 긴 것을 대동강물길로 떠내려 백약산(속칭 빼재) 빈장 아래로 끌어들여 못과 같이 된 그 위에 가로 건너놓고 집 짖고 남은 석가래를 이리저리 휘들어서 감탕과 물이 섞인 것을 다 퍼내고 다시 파기 시작하여 성공하였다.
5. 해방후 공산치하시 반공투쟁
1) 부흥집회 강사로
김응록 장로는 교회들로부터 초빙을 받아 설교를 부탁받으시는 일이 대단히 많았는데 설교를 하실 때에 반드시 하나님을 배반하는 불의의 집단은 망한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어느 집회든지 몇 명의 정보원이 반드시 미행하였다. 그런 관게로 경찰세에 자주 수감되었다. 그런데 어떤 경찰서에 수감되었을 때의 일이다. 서장이 아침 일찍 출근하여 김응록장로가 수감된 감방에 와서 “장로님 지난 밤에 과히 불편하지 않으셨습니까?라고 이사를 하였다. 그때 마침 내무서원이 아침 점명을 하면서 ‘김응록 동무’하자 서장이 서원을 복 ”말 좀 주의해“하고 책망하며 ”장로님 죄송합니다“라고 사과를 하였다.
그 중에도 대표적인 것은 서평양에 있는 기림 교횡서의 일이다.지형순 목사님이 이틀간 설교를 부탁하셨는데 그때가 1947년 가을 65세때였다. 지형순목사는 대부흥사로서 정보계로부터 주목을 받던 목사님인데다가 김응록장로를 모셨으니 정보원이 더 많이 올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교회 안은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지형순목사는 김응록장로를 소개하기를 ‘장차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실 김응록 장로님께서 나오셔서 말씀하시겠습니다’고 하였다. 김장로가 나와서 암송으로 성경 말씀을 읽고는 설교하기 시작하셨다. 그리고는 ‘하나님을 배반하는자 또는 불의한 자는 망한다’고 하면서 공산주의자를 공박하였다. ‘진짜 김일성장군은 내 나이 정도인데 젊은 녀것이 어떻게 자기가 김일성이라고 거짓말을 하는가’라며 호되게 꾸짖으셨다. 김응록장로의 말씀이 끝난 후에 池亨淳목사가 다 일어서서 애국가를 다같이 부르자고 선창하시니 전 교인과 참석자가 흥이 나서 ‘동해물과 백두산이----’를 부르고 예배를 마쳤다.
그 일이 있은지 삼일 후에 지형순목사가 교회에서 새벽기도히를 인도하고 집으로 오시는 길에 대기하고 있던 정보원의 의해 연행되어 평양감옥에 수감되셨다가 제동탄광으로 이송되어 1950년 10월 20일에 총살로 순교 당하셨다.
2) 도산 안창호 선생님과의 관계
항상 대동단결을 부르짖던 김응록 장로는 도산 안창호선생의 신앙과 사상 그리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언제나 일치가 되어 친분이 두터우셨기에 안선생을 자주 고창에 초대하여 교회와 마을 주민들에게 강연을 듣도록 하셨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기독교 신앙을 토대로 한 사랑과 화평과 정직을 강조하였다. 우리 민족의 두 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안창호선생과 김응록 장로는 친형제처럼 지내셨는데 지금은 세상에 계시지 않으나 그토록 다정다감하시고 교회와 나라를 끔직히 사랑하시던 두 분께서 정년 하늘나라에서도 같이 계시리라 믿는 바이다.
도산 안창소 선생은 강서군 초리면 7리 도롱섬에서 나셨고 고당 조만식선생은 강서군 반석면 1리 안동꼴에서 나셨고 낙평 김응록 장로는 강서군 누차면 3리 상동에서 나셨으니 그야말로 강서군은 축복받은 지역이 아닌가 싶다.
3) 수감 후 판사 앞에서 漢詩(한시)로 유언
김응록장로는 1947년 65세 때에 외출나가셨다가 미행하던 정보원에 의해 연행되셨다가 3개월후에 석방되었다. 그후 강서군 경찰서에 재수감되어 계시다가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판사가 최후 진수하실 말씀이 없느냐고 물으니 김장로는 판사에게 종이와 붓을 달라고 하시어 다음과 같은 漢詩(한시)를 쓰셨다.
白髮壓頭老益壯(백발압두 노익장) 熱誠湯血氣衝天(열성탕혈기충천)
三八壁破能幾日(삼팔벽파능기일) 運疇來事興無邊(운주래사흥무변)
이 시의 뜻은 다음과 같다
백발은 나의 머리를 내려 누르는데
나의 뜻은 더욱 장해지고
나라 사랑하는 피가 끓어 오르니
끓어오르는 기개가 하늘을 찌를 듯 하고나
3.8벽 깨질 날이 그 언제일고
다가올 그 날을 생각하니 한없는 흥이 솟는도다
김응락 장로는 금주 금연을 통해 부지런하고 절제하는 생활을 강조하셨고 우물에서 퍼 올린 물도 아낄 줄 알아야 큰 것도 아낄 수 있다고 하시며 작은 일에 몸소 실천하신 언행일치의 어른이셨다.
4) 공산당에게 총살 순교
북한의 공산정원이 同族相殘(동족상잔)을 일으킨 1950년 68세로 그 해의 9월 25일 김응락 장로는 납치되셨다가 공산군의 후퇴가 임박한 10월 20일에 총살(그 당시에 예비 검석된 사람은 모두 이 날 총살당하였음)됨으로써 시대의 선각자로 기독인으로 사업가로 독립운동가로 민족정기의 계몽에 앞장 선 지도자로서의 장한 삶을 마감하게 되었다.
Ⅶ. 유일한 산 증인 김봉아장로127쪽~중에서 김응록장로 관련 글
1. 김봉아장로와 고창교회
김봉아장로는 1950년 6.25사변 때에 평양에 거주하고 있던 가족과 함께 월남했다 고향 고창교회에서 27세시 장로장립하고 월남하여 제주도난민교회 부산구덕교회를 봉사하였으며 그 후에 서울낙산교회와 가락동교회를 손수 개척하여 크게 성장시켰는데 그 공이 크다. 이제 마지막 정착지를 미국 엘에이이 영락교회의 명예장로로 장년부장가 구역장 직을 1995년 말까지 20년 봉사하였다. 중약 김봉아장로는 고향인 고창교회가 낳은 위대한 신앙인으로 교회 장로로 교육가로 사회개발과 사회봉사자로 20세기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위대한 분이시다.
2. 김봉아장로가 본 고창교회
4) 기적적으로 교회와 학굘르 동시에건축
1896년 지금으로부터 꼭 100년전에 교회가 농촌에 세워졌다는 일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요 큰 축복이다. 그리고 교회가 마을 주민에게 미친 영향은 이루 다 형용할 수가 없다. 교회를 거쳐 나가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는 순전한 기독교 마을이 되었다. 김응록장로는 105인(실은106인)사건때 만주로 망명하였다가 20년이 지난 후에 즉 공소기간이 지난 1932년에 고햐으로 돌아왔다. 김응록영수는 고향에 계시면서도 만주에 있는 농장 때문에 자주 만주를 왕래하였는데 만주에서도 목사님을 모실 수가 없어 김응록 영수는 오순절 때처럼 성령이 인도하는 예배를 주관하고 찬송하고 기도하고 설교를 하였다. 그런데 교회오라고 해놓고 연보조래를 돌리면서 헌금을 내라는 격이 되니 헌금을 폐지하자고 하여 헌금이 제대로 되지 않아 교회가 어려움을 겪었다. 때때로 영수께서 설교를 하시고 끝나면 그때 교역자인 김인구목사가 시정할 것은 시정하고 보충할 것은 보충햐해야 하는 번거로움도 있었다. 그래도 교인 수는 점점 늘어나는데 헌금은 나오지 않았다 .
1924년 갑자견 이후에 논농사가 풍년이 되어 동민 전체의 생활이 향상되었다. 이를 계기로 교회은 예배당 창문 밑에서 천정까지 벽돌로 쌓아 올리기로 하고 전체 공사비를 추정하니 약800원이 소요된다고 하였다. 제직회를 열어 그해 가을에 이희섭목사를 모시고 부흥사경회를 하면서 수리헌금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교회에서의 중론은 수김응록영가 800원중에서 100원을 했으면 좋겠다는 뜻을 은 집안인 김희철(김동섭, 김동환부친 상동에 황주 ‘김씨’ 집안 어른이었다)씨가 전하였는데, 김응록영수도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나머지 금약700원은 어디서 나올지 궁금하였다. 부흥회 끝나는 날에 하나님의 은혜로 예상외의 헌금 800원이 나왔다. 이때 김응록 영수는 그 자리에서 강단으로 뛰어 올라 가시더니 “성령이 나에게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서 나왔습니다. 내가 500원을 헌금하겠습니다. 여러분이 현재 작정한 금액에 배를 하면 2,100원이 됩니다. 이 돈이면 예배당을 헐고 60평의 새 예배당을 벽돌로 지을 수가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모든 신도들은 성령이 충만하여 너도 나도 헌금을 작정함으로 김응록 영수의 주관으로 예배당을 새롭게 건축하게 되었다.
평양에서 건축가로 유명한 김상도씨와 계약을 하고 1934년 봄부터 건축을 시작하였다. 그 당시는 별도로가 자재를 평양에서 배 편으로 운반하였는데 대동강 물때따라 사리(만조)와 조금(간조)의 차이가 심하여 빈장 아래와 앞 맛터에 배가 들어오면 그 배가 다시 썰물을 따라 나가야 하믕로 교우는 물론 온 동네 사람들과 전교 학생이 서둘러서 벽돌을 배에서 내려야 했다. 벽돌을 배어서 푸는 일은 어른들이 하였고 선창에서 교회까지 나르는 일은 학생들이 하였다. 지게로 지고, 머리로 이고, 열장 수무장을 새끼로 묶어 작심이로 꿰어 둘이 서 메고 날랐다. 이때에 교회에서 종을 처서 온 동네 사람들이 집에서 밭에서 논에서 일손을 놓고 모이게 하였다. 벽돌을 옮기는데 단 한 장도 개인집으로 가져간 일이 없었다. 교회를 건축하는 벽돌이기 때문에 깨어질세라 소중하게 다루었으며 정성을 다했다. 이는 교회를 통해서 믿음을 배웠고 양심에 꺼리는 일은 절대로 해서는 안되는 것을 기보능로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예배당 건축이 한창 진행되는 중에 김응록영수가 나를 만나자고 하시더니 당신 집 문서를 주시면서 ‘신대평에 있는 금융조합에 가서 1,000원을 융자하여 오라’고 하였다. 이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하신 김응록 영수는 예배당을 짓고 이어 학교 교실 75평을 건축하여 그해 11월 3일에 완공하였다. 학교를 건축할 때 일부는 학부모들이 바치기도 하였다.
신축예배당을 다 건축하고 입당예배를 드릴때는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들이나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모인 가운데 성대하게 예배를 드렸다. 그런데 이렇게 믿음과 정성을 다하여 세워진 ‘고창교회’ 건물이 지금은 어떻게 디었는지 궁금하다. 공산당들이 제맘대로 쓰고 있을 바에야 차라리 폭격으로 없어지는 편이 낫지 않을까 싶다. 하루속히 통일이 되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빌론에서 돌아와 제일 먼저 스룹바벨성전을 건축한 것 처럼 우리도 고향을 찾아 바로 그 자리에 그 옛날 모습으로 ‘고창교회’를 재건하는 것만이 유일한 소망이다.
통일은 하나님께 달렸다. --- 중약 --- 이 책의 고창교회 역사가 말하듯 이 고창교회 출신 2세 3세가 신앙과 고창교회 뜻을 이어 고창교회를 찾을 때가 있으리라고 믿는 바이다.
5) 연합결혼식 10년
고창교회가 새 성전을 건축하고 1934년부터 1943년까지 10년동안 한 해도 거르지 않고 해마다 10쌍 내외로 연합결혼식을 거행한 일은 세계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제1회연합결혼식을 1934년 11월 23일 10쌍을 거행하였다. 이때는 일본 정부가 이러한 일을 장려하여 군청과 면에서 주선하여 사모관대를 모아닥다 주기까지 했다.
연합결혼식은 새로 지은 교회당에서 거행했느데 평양 숭실학교 교장인 윤산은 박사는 숭실학교 악단을 도원해서 예식을 더욱 웅장하게 해 주었고 안창호선생은 축사를 해 주셨으며 군수 군내 각 면장 경찰서장 인근교회 목사 신도들 그리고 유지들까지 약4000명이 모인 가운데 성대하게 거행하였다. 이 일이 모든 신문에 크게 보도가 되었다.
어떤 때는 김응락장로 댁에서부터 신랑 신부가 사모관제를 하고 군악대가 그 앞에서 행진곡을 부르며 약300미터가 되는 거리를 행진하면서 결혼식장이 교회당까지 입장하여 결혼예식을 하는 모습은 참으로 장엄하였다. 세계 역사상 처음있는 일이었다.
고창교회가 김응록 장로를 통하여 농촌마을에서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열어놓은 셈이다. 그리고 그후 평양시 공회당에서 평야성이 떠나갈 듯 거대한 예식을 또 한번 하였다. 그러므로 11회를 한 셈이다.
6) 트럭이 엇갈리는 도로닦기
농촌의 도로는 높은 곳을 깎아 내릴 수가 없고 깊은 골을 메울 수가 없기 때문에 지형에 따라 만들어졌다. 그래서 길이 꼬불꼬불하며 넓어도 우마차나 겨우 지날 만쿰에 불과하다. 조상 전래부터 만들어진 길을 불편한 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이용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러한 때에 김응록장로는 만주에서 고향에 돌아 오셔서 첫째로 먼저 하신 일이 교회다오가 학교를 새롭게 건축하였으며 두 번째로 하신 일이 연합결혼식이요그리고 세 번째 하신 일이 도로를 닦는 일이었다.
마을 이끝9상동)에서 마을 저끝(하동)까지 퍽이나 긴 거리였다. 그 중에 약간 높은 지형에 교회와 학교가 있었는데 마을 전체의 중심지다. 교회를 중심으로 하여 양쪽이 직선거리로 트럭이 서로 엇갈릴 수 있을 만큼의 넓이 8미터의 도로가 필요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도로를 닦기 위하여 수십개이ㅡ 크고 작은 밭들이 걸려 있었다. 이때 김장로는 밭이 크던 작던 그 많은 밭을 사재로 매입하여 직선으로 시원하게 신작로를 닦은후에 남은 밭은 밭 주인에게 돌려주어 농사를 하게 하였으며 창고를 지어 마을 주민이 공동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 도르는 김응록장로 개인만이 다니는 길이 아니고 온 동네 사람들이 다 함께 공동으로 사용하는 도로로 만든 것인데 어떤 사람은 밭을 팔아 수입을 얻고 돌려준 나머지 밭을 또 경작해서 이중으로 수입을 챙겼으니 ㄱ미장로가 보실 때에 얼마나 측은하게 여겼을 것인가 새삼 느껴진다. 이처럼 김장로가 교회와 마을의 발전을 위하여 헌신하신 일은 참으로 귀한 역사가 아닐 수 없다.
농촌에 이렇게 넓은 도로가 있는 곳은 오직 우리 고창마을뿐이었다. 그리고 만들어진 도로는 언제나 깨끗이 쓸었는데 겨울에는 눈이 많이 내려도 그날에 쓸어서 마을 사람들이 항상 자기 몸 가꾸듯 고로를 깨끗이 하였다. 종종 평양가는 나그데들이 어느 방향으로 가야 평양을 갈 수 있는고 물었다. 나그네들의 발길을 멀지감치 바라보던 기억을 회상하면서 지금도 그 도로만큼은 달라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지 않을까 한다. 그리고 초가를 벗기고 기와로 개량했고 초가지붕이라도 굴뚝을 벽돌로 개량하여 비록 농촌마을이지만 ‘고창마을’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이상촌 마을이 되었다
7) 태평동교회 재건
1910년 한일합병이후 일본은 우리나라를 말살시키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기독교가 중심이 되어 1919년 3.1운동을 일으킨 후부터 기독교를 더욱 박해했다. 학교에서 한국말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고 글도 한글대신 일본어만 쓰게 하였고 1940년에 성씨를 강제로 개명시켜 일본식 이름으로 바꾸어놓았다. 지원병을 강제로 시행했으며 학도병과 징병제를 실시하여 수많은 젊은이들이 전쟁터에 나가 희생을 당했다. 그리고 처녀들이 정신대 위안부로 끌려간 사건은 오늘에까지 국제적인문제로 이어져 오고 있다.
신앙의 자유를 박탈하여 1943년부터 장로교회를 일본 기독교장로교단이라는 명칭으로 바꾸고 1개면에 1교회만을 허양하였다. 이 때 고창교회에서 약 십리 정도의 거리에 있는 구태평교회를 일본인들이 헐어서 사무소 창고로 지었다. 구태평교회 출신인 김형진장로의 의하면 이로 인해 신도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었고 일부 새방성 마을 사람들은 고창교회에 참석하였다고 한다.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가 일제에서 해방되자 김응록장로는 헐린 구태평교회 재건운동을 벌였다 이때 공산당이 집권을 시작한 초기였다. 우리 고창교회가 이 일을 위하여 100일 특별새벽기도회를 가졌는데 각 동마다 조를짜서 새벽4시에 집집마다 다니며 깨워서 300여명이 꽉 찬 예배당에서 열심히 합심기도를 하였다. 그리고 고창교회 중직자들은 15리가 되는 구태푱교회까지 직접 가서 새벽기도히를 태평동교회 신도들과 합심하여 드렸다. 이렇게 김장로와 온 교회는 이웃교회의 재건을 위해 자신의 일처럼 기도하고 참여하여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나타냈다.
구태평교회 재건을 위하여 헌금을 하였으며 약20리 거리에 위치한 기양에서 건축용 벽돌을 운반하는데 3개면에 소재한 우마차105대를 도우언해서 가양에서 잠진까지 그리고 잠진10리벌을 한 줄로 들어서서 앞에서는 고창교회 관악대가 북치고 나팔을 불면서 행진하였는데 그 광경은 개선장군이 입성하는 장엄한 장명이었다. 이들은 모두 자비로 봉사하였으며 출발하는 지점에서 큰 엿을 하나씩 주었다.김응록장로는 항상 애국애족의 정신과 大同團結(대동단결)을 부르짓었다. 이런 노력 끝에 구태평교회는 다시 복원하였고 교회는 크게 부흥하였다.
Ⅹ. 고창교회 출신 목사
1. 정호찬 목사
2. 김능백 목사
3. 박정한 목사
4. 김봉서 목사
5. 김광식 목사
6. 김봉관 목사
7. 김운성 목사
2. 김능백 목사(金能百 牧師)
1, 출생과 소명
1912년 선친 김응록장로의 항일운동과 105인 사건으로 투옥후 병보석으로 고향에서 잠시 계시다가 만주로 망명하실 때 동행하였다.
1922년 독립운동으 선구자인 유홍조씨의 장녀 득명씨와 결혼하였다. 1923년 중국북경대학교 상과르 졸업한 후 하나님의 특별하신 소명에 의하여 1937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39년 4월에 평양노히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김능백목사는 신학교 재학시에 학생신분으로 영어교수를 역임하였다. 그리고 대동군 부산면 남궁리교히와 중이리교회 전도사로 시무하였다.
2. 대교회를 마다하고 농촌교회에서 무보수로 목회
1941년 동경루터신학교에서 연수를 하였으며 1942년 만주 대련장로교회를 시무하였으며 1943년부터 1950년까지 중리교히를 시무하셨는데 사례금도 없이 헌신 봉사하셨다.
대련교회를 시무할 때 중이리교회 장로가 찾아와서 우리교회는 재정상 정상적으로 사례금을 드릴 목사님을 모실 수 없으므로 김목사님을 모시면 좋겠다고 하여 쾌히 승낙후 대련교회는 친구목사를 모시도록 하고 중이리교회에 다시 부임하였다. 물론 사례금을 받지 않으며 김응록장로가 사택과 논과 밭까지 마련해 주어서 생활하도록 하였다. 그후 평양 서문밖에서는 임종순목사의 후임으로 산정현교회에서는 주기철목사가 감옥에서 순교하신 후에 김능백 목사를 모시려고 하였으나 평양의 대교회는 모실 목사님이 많이 계시다고 하시며 사양하였다.
김능백목사의 가정은 부유하여 의복, 구두, 모자, 가방 등을 동생되는 김능억장로(미국 LA선남교회 원로장로)가 좋은 것으로 마련해 드렸으나 ‘이처럼 생각해 준 동생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지만, 나는 농촌교회 목사임으로 농촌실정에 맞게 살아야 하네’하시며 언제나 검소하고 소박하게 사셨다. 이러한 일로 동생되는 김능억장로는 김능백 목사의 모습을 본 친구들로부터 오해를 받기도 했다.
3. 예산에서의 목회생활
1951년 1.4후퇴 때 월남하여 제주, 부산 등을 거쳐 충남 예산에서 목회를 하셨다. 예산에 장로교회가 없음으로 유치원을 빌려서 교회를 개척하고 산기숡 오막살이 움막같은 데서 생활하셨다. 김능백 목사는 사모님을 이북에 두고 단신으로 아들 하나를 데리고 월남하였다. 그래서 연세가 많으신 할머님이 살림을 해 주셨다. 부산에서 크게 사업을 하고 계 시는 동생 김능억 장로가 예산에까지 찾아와서 이런 고생을 하지 말고 부산으로 가자고 하였으나 김능백 목사는 ‘목회는 나의 사명이니 염려말게, 대신 지금 교회가 너무 비좁고 초라해서 한와집을 사서 교회를 사용했으면 좋겠네’ 하셨다. 몇몇 친척들이 돈을 모아 그 주택을 구입하여 교회당과 사택으로 사용하게 되면서 교회는 날로 부흥되어 갔다.
김능백 목사는 성인군자의 모습으로 겸손하셔서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4. 미국 선교단이 본 김능백 목사
미국선교단체가 충남지역의 교회를 순방하면서 김능백 목사가 시무하는 예산읍교회를 방문하였다. 이 교회는 개인사가나 다를 바 없는 작은 교회였다. 선교사들이 통역관과 함께 찾아와서 교회의 형편을 설명듣게 되었다. 김능백 목사는 유창한 영어로 교회의 현실과 미래의 계획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다. 선교책임자는 이렇게 초라하고 작은 교회 목사님의 영어실력에 놀라서 무엇을
5. 목회 은퇴와 소천
김능백 장로의 아들 김건철장로는 조부님의 애국애죽과 교회사랑과 부친 김능백 목사의 신앙과 생활을 본받아 아래 이력서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교회봉사는 물론 활발한 사회 봉사활동에 진력하고 있다.
순교자 김응록 장로 손자 김건철 장로 프로필
- 학력
평양제1고등학교
숭실대 통일정책대학원 고위 지도자 과정 수료
평신도 교육대학원 7기 수료
한국장로교육원 1기 수료
몽골 국립대학 명예 교육학 박사 취득
- 경력
동산유지공업주식회사 창업발기인
남선교회 전국연합회 회장
전국장로연합회 회장
장로회신학대학교 감사
모스크바신학대학교 이사
정신여자고등학교 이사
서울시 연합당회 부회장
서울노회유지재단 이사
평안남도 중앙도민회 회장
고당 조만식 선생 기념사업회 이사
現 한국장로신문사 발행인
現 서울노회장로회산악회 명예회장
現 실로암아이센터 건축위원장
現 평안남도 서경회 회장
現 몽골 문화 진흥원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