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진건玄鎭健 장편소설 적도赤道를 빼앗긴고향 제14호(2024년 2월호)부터 연재합니다.
[1] 출옥出獄
서울의 봄은 눈 속에서 온다.
남산의 푸르던 소나무는 가지가 휘도록 겨울다운 눈덩이로 함박꽃을 피웠다. 달려가는 자동차와 전차들도 새로운 흰 지붕을 머리에 이고 있다. 아스팔트 다진 길바닥. 펑퍼짐한 빌딩 꼭대기에도 하얀 천이 널렸다. 가라앉은 초가집은 무거운 떡가루 짐을 진 채 그대로 찌그러질 듯하다. 푹 꺼진 기와지붕은 흰 반석이 밟고 누르고 있다. 삐쭉한 전신주도 그 멋없이 큰 키에 잘 먹지도 않은 분을 발랐다.
이 갑자기 만들어진 흰 세상을 노래하듯이 바람이 인다. 어지러운 흰소리가 은가루 옥가루를 휘날리며 무리무리 흥에 겨워 줄곧 춤을 추어댄다. 길이길이 제 세상을 누릴 듯한 기세다.
그러나 보라! 이 상황에도 봄 입김이 도는 것을.
한결같은 흰 자락에 실금이 간다. 송송 구멍이 뚫린다. 동전만큼 커지고, 쟁반만큼 커지고, 대님(미주1)만큼 커지고, 댕기(미주2)만큼 커지고…… 그 언저리가 번져간다. 둥글넓적하고 아가리가 넓게 벌어진 질그릇만큼 검은 얼굴을 내놓은 땅바닥엔 김이 무럭무럭 떠오른다.
그 김은 겨울을 태우는 봄의 연기다. 두껍게 언 청계천淸溪川(미주3)에서도 그윽한 소리가 들려온다. 가만가만 자취 없이 기어가는 듯한 그 소리, 사르르 사르르 비단 조각에 풀물이 스미는 듯. 이따금 그 소리는 숨이 막힌다. 그 소리는 험한 고개를 휘어 넘는 듯이 헐떡인다. 그럴 때면 얼음도 운다. ‘쨍’ 하고 부서지는 제 몸의 비명을 내지른다. 진흙바닥이 말라 터지면서 넓게 벌어진 틈 사이로 파란 물결이 햇빛에 번쩍이며 제법 졸졸 소리를 지른다.
축축한 담 밑엔 풀들의 푸른 싹이 1.5cm나 자랐다.
하늘에 닿은 북악北岳(미주4)에 쌓인 눈도 그 새하얗던 흰빛을 잃고 석고 빛깔처럼 우중충하게 흐리다. 그 위를 싸고도는 하늘에는 벌써 하늘하늘 아지랑이가 걸렸다.
봄은 왔다. 눈길과 얼음 고개를 넘어 서울의 봄은 순식간에 오고 만 것이다.
이른 봄날 아침이다. 하늘은 말갛게 개었으되 사라질 듯 말 듯한 구름 흔적으로 말미암아 꿈꾸는 처녀의 눈동자처럼 게슴츠레하게 조는 듯하다. 추위가 덜 가신 쌀쌀한 공기를 뚫고 짙은 안개 낀 공중을 도금칠하며 명랑한 햇발이 내려와 닿는 곳마다 부드럽게 녹여서 고운 비단같이 포근한 느낌을 자아낸다. 물오른 나뭇가지에 깃들인 새들은 제 발부리에 새싹이 자꾸 닿자 푸념이라도 하는 듯이 작은 소리를 내다가 이 세상이 얼마나 넓고 자유로운지 알아보겠다는 기세로 포드득 날아오른다. 빛물결을 헤치며 헤엄치는 그 서리에 젖은 나래는 사금을 뿌린 듯이 점점이 번쩍인다.
S형무소 철문에 봄볕이 튄다. 철문에 박혀있는 무수한 쇠못들이 그 거뭇거뭇한 눈알을 부라린다. 번들번들하게 장사진을 친 듯한 벽돌담은 그 밝은 광선을 막느라 애를 쓴 탓인지 불쾌한 느낌의 핏빛으로 물들었다. 언덕배기 비탈길이 옛 모양을 감추고, 새로 손질이 된 넓은 길이 정문에서 엇비슷하게 부드러운 굽이를 지어 내려가다가 한길로 꼬리를 치뜨렸다. 앞길이 막혀 뒷걸음질을 치던 햇발은 이 대패로 민 듯한 길바닥 위에 구르는 듯이 보금자리를 친다.
늙은 아카시아 한 나무와 심은 지 몇 해 안 된 애송이 벚나무 몇 그루가 앙상한 가지를 떨며 이 따스한 보금자리에 끼어들려는 것같이 듬성듬성 흩어진 제 그림자들을 비스듬히 누인다. 아직 피어나지 못한 위령선威靈仙(미주5)은 검누른 잎사귀를 움츠리고 죄는 듯하다.
아침녘의 적막을 깨치고 화려한 자동차 한 대가 짓치는 듯이 올라온다. 정문 앞 가까이 와서 걸음을 멈추고, 신사복 윗막이에 아랫도리엔 승마복을 차린, 얼굴이 파리하고 몸이 여윈 듯하나 단단하고 굳센 기상이 있는 운전수가 운전대에서 빠르고 시원한 동작으로 내려와 揖읍하는(미주6) 듯이 고개를 숙이고 공손히 문을 열었다. 그 안에서 젊은 부인이 나타났다.
그 젊은 부인은 흰 아랫부분 두루막 자락을 조금 걷어 올리는 듯하면서 그림자같이 자동차에서 내려선다. 운전수는 자동차를 한쪽 옆으로 돌려세웠다.
그 부인은 자동차를 배경으로 형무소 문을 향해 선다. 나이는 스물너댓 된 듯 보인다. 키가 커 보이는 것은 몸이 가냘픈 탓일 것이다. 검은 듯 흰 듯 야릇하게 반들반들하고 매끄러운 기운을 흘리는 은빛 여우 목도리 위에 그녀의 흰 얼굴은 구름에 숨바꼭질하는 달처럼 떠오른다. 그 얼굴이 정녕 달이라면 아마도 새벽녘에 져 가는 달이리라.
그 한스러운 흰빛! 그녀의 얼굴은 그러한 흰빛이다. 도톰한 두 뺨도 자세히 보면 분명히 여윈 듯하다. 어수선하고 엉성한 트레머리(미주7)는 몇 올이 풀려 번듯한 이마 위에 나부끼는데, 그 중 호박색으로 빛나는 두어 카락은 코까지 내려와 남실남실 춤을 춘다. 여자가 갸름갸름한 손가락으로 귀찮은 듯이 머리카락을 치켜 올리자, 왼손 무명지에 끼인 백금 반지에는 제법 팥 낱알만한 보석이 반짝반짝 실 무지개를 일으킨다. 여자는 속눈썹 긴 눈을 잠깐 감는 듯하다가 다시 끝없이 줄기차게 감옥 문을 바라본다.
십 분! 이십 분! 굳게 닫힌 쇠문은 열려질 가망조차 없는 듯하였다.
검누른 길바닥은 가끔 바람을 따라 일어선다. 그 자욱한 먼지는 안개를 피우며 집과 사람을 뒤덮는다. 그 부인은 ‘우 ─’ 하고 자기에게 덤벼드는 먼지 떼를 피하느라 고개를 돌리기도 하고, 두 손으로 눈을 가리기도 한다. 지루한 듯이 몇 걸음씩 거닐다가 피난처를 찾는 사람처럼 또 다시 자동차 옆에 와 선다.
형무소 앞은 차차 부산해진다. 얼씬거리는 사람의 그림자도 늘어간다. 드나드는 간수의 자취도 잦아진다. 덤덤하던 큰 문도 가끔 아가리를 벌린다. 붉은 황도黃桃빛 옷에 쇠사슬을 서로 얽매인 죄수들도 몰려나온다. 그 부인은 죄수를 볼 적마다 놀라는 듯이 몸을 흠칫하면서도 누군가를 찾는 듯 그들의 얼굴을 자세히 보려고 애를 쓴다.
양복쟁이를 태운 자동차가 ‘뿡뿡-!’ 소리를 지르자 그 큰 문은 더욱 크게 열리는 듯하였다. 형무소 간부의 출근이리라. 물을 실어 나르는 초록 휘장 틈으로 어른어른 흉물스러운 용수를 보이며 피고를 태운 물차水車도 여러 차례 나왔다.
그 부인은 기다리기 지친 듯이 눈썹을 찡그린다. 눈과 간격을 두고 올라붙은 듯한, 가느다랗지만 숱이 많은 눈썹이다. 그녀가 자동차에 오른다. 앞길을 거닐고 있던 운전수는 황급하게 뛰어와서,
“돌아가시렵니까?”
하고 묻는다.
“아니에요!”
그 부인은 살짝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흔든다.
‘그 동안을 못 참아서!’
그렇게 속으로 뇌이면서 그녀의 얼굴이 더욱 빨개진다. 자동차 안에서도 날아갈 듯이 몸을 도사린 채, 감옥 문과 오십 전짜리 은화만한 브로치 또는 팔목시계를 번갈아 보았다.
정문 옆 작은 쇠문이 “덜커덩!” 소리를 내며 열렸다. 웬 장대한 청년이 조그마한 보퉁이를 해 들고 쫓기는 듯이 나선다.
감옥에서 나오는 청년을 알아보자 그 부인은 마치 무엇에 튕기는 모양으로 몸을 일으킬 겨를도 없이 굴러 떨어지듯 자동차에서 내렸다. 앞으로 거꾸러질 듯 거꾸러질 그녀는 그 청년을 향해 종종걸음을 쳤다.
부인은 다짜고짜 어리둥절하게 서 있는 그 청년의 손을 잡았다. 핼쑥하던 그 부인의 얼굴은 그 순간 더욱 파랗게 질린다. 온 몸이 사시나무 떨듯 떤다. 소나기를 만난 꽃잎처럼 갈기갈기 찢어질 듯하던 그 입술은 말 한마디를 내뱉는다.
“여해如海씨!”
그 부르짖음이 마치 무슨 신호를 보내기라도 그녀의 눈에서는 우박 같은 눈물이 쏟아진다. 푸르게 떠는 두 뺨은 뒤 이어 굴러 떨어지는 눈물방울에 놀라기나 한 듯이 한층 더 흔들린다.
그 청년은 아무 느낌도 없는 기색이다. 마치 부인의 고개를 호위하는 듯이 떡 벌어진 어깨판을 하고 서 있을 뿐이다.
여자는 더욱 흐느껴 운다. 눈물 젖은 얼굴을 그 청년의 가슴에 비비며 또 한 번 부르짖는다.
“여해씨!”
그 청년은 여전히 대꾸가 없다. (다음 호에 계속)
미주1 : 한복에서, 남자들이 바지를 입은 뒤에 그 가랑이의 끝 쪽을 접어서 발목을 졸라매는 끈
미주2 : 길게 땋은 머리 끝에 드리는 장식용 헝겊이나 끈
미주3 : 서울 중심부를 흐르는 개천
미주4 : 서울의 북쪽 산악 지대
미주5 : Clematis chinensis Osbeck
미주6 : 두 손을 맞잡아 얼굴 앞으로 들어 올리고 허리를 앞으로 공손히 구부렸다가 몸을 펴면서 손을 내리며 인사하는
미주7 : 가르마를 타지 않고 뒤통수 한복판에다 틀어 붙인 여자의 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