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초 지역의 문화유적을 찾아서
◇ 사도감 터(司都監址) : 서초구 서초2동 1359-12번지 (사도감공원 내)
- 조선시대에 사또들이 한양을 오갈 때 잠시 머물던 곳
서초동의 영동중학교 남쪽 일대에 옛날 사또들이 말죽거리를 거쳐 한양으로 왕래할 때 잠시 머물던 사도감(司都監)이 있었다고 전한다. 따라서 지금의 양재역 부근에는 "사도감 고개", "사도감 들", "사도감 개울", "사도감 다리" 등 사도감과 관련된 지명들이 많이 있었다.
현재 이 일대에는 영동택지개발로 지명들이 모두 없어지고, 현재 사도감 어린이공원(947㎡)이 있으며, 남부순환로 건너편에는 서초구청이 있다.
◇ 말죽거리(馬粥巨里) : 서초구 남부순환로 2610 (양재동) (서초종합사회복지관 앞)
-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피난하던 인조대왕이 팥죽을 들었다는 곳
말죽거리는 현재 지하철 3호선 양재역 부근을 말하는데, 이곳 주민들에 의하면 말죽거리(馬粥巨里)라고 불리게 된 내역은 3가지 설이 전해 온다.
말죽거리 지명 유래는 ① 제주에서 보내온 말을 이곳에서 최종적으로 다듬고 말죽을 먹인 곳이라는 설과 ② 조선시대 공무로 여행하는 관원들에게 마편(馬鞭)과 숙식을 제공하는 양재역이 있어서 이곳에서 여장(旅裝)을 풀고 말에게 죽을 먹였기 때문에 붙여졌다는 설이 있으며, ③ 이괄(李适)의 난 때 남쪽 공주로 피난을 하러 가던 인조가 이곳에서 유생(儒生) 김이(金怡) 등이 쑤어 올린 팥죽을 말 위에서 들었기 때문에 붙여졌다는 설이 있다.
예나 이제나 이곳은 대로가 나 있는 교통의 요지로 조선시대에는 사상(私商)들의 상업활동이 활발하던 지역 중의 하나였다.
조선시대에는 서울에서 충청도, 경상도로 가려면 한남동 나루터에서 한강을 건너야 했다. 말죽거리는 이 대로의 첫 길목이었다. 이와 반대로 지방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사람들도 한강을 건너기 전에 마지막으로 휴식하는 곳이 말죽거리였다.
조선 초부터 말죽거리에는 공무로 여행하는 이들에게 말과 숙식을 제공하는 양재역(良才驛)이 있었고 근처에는 주막도 적지 않았다. 이곳에 있던 양재역은 서울 이남의 경기도 전체 역을 통할하는 곳으로 종6품의 찰방(察訪)이 배치되어 있던 주요 역이었다. 찰방 아래에는 역장(驛長), 역리(驛吏), 역졸(驛卒) 등이 있어서 각종 정보를 수집하여 직접 중앙에 보고했다.
먼 길을 걸어 서울로 들어오려는 여행자들은 타고 온 말에게 죽을 끓여 먹이도록 하고 자신도 저녁을 먹은 뒤 이곳에 묵었다. 남쪽으로 떠나는 사람들도 압구정 등에서 전송하는 벗들과 마지막 주연을 나누고, 헤어져 저녁나절에 찾아 든 첫 숙소가 말죽거리에 있는 주막이었다.
이들은 이제부터 천릿길을 가야 할 말에게 죽을 끓여 먹이도록 이르면서 자신도 주막에서 여장을 풀었다. 이 때문에 이곳 일대를 말죽거리로 불렀다고 전해온다.
병자호란 때 인조가 청나라의 침입을 피해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자 청나라군은 산성을 포위한 후 말죽거리를 용골대가 지휘하는 우익 군의 병참기지로 삼았다. 그리고 청나라 기마병들이 교대로 이곳에서 말의 피로를 회복시키고, 말죽을 끓여 먹였다는 설 등이 있다.
또 다른 설로는 이괄의 난 때 인조가 피난을 하러 가는 길에 이곳에 이르러 유생들이 쑤어 올린 팥죽을 말 위에서 들고 갔기 때문에 유래 되었다고 전한다.
인조 2년(1624)에 평안 병사 이괄(李适)은 반정에 따른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켜 남쪽으로 내려왔다. 반군이 질풍처럼 개성을 지나 벽제관에 이르자 인조는 남쪽으로 황망히 피난하게 되었다. 이때 인조는 한강나루에서 배를 간신히 구해, 한강을 건너 신사동의 새말 나루터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곳 말죽거리에 이르자 인조는 목이 몹시 말랐다. 그러자 이곳에 사는 유생 김이(金怡) 등 6, 7명이 급히 팥죽을 쑤어 인조에게 바치자, 인조는 말 위에서 이 죽을 다 마시고 과천을 거쳐 공주까지 갔다는 것이다.
◇ 양재역 터(良才驛址) : 3호선 양재역 10번~11번 출구
- 조선시대에 찰방이 주재했던 주요한 역(驛) 터
이곳은 예전에 양재역(良才驛), 양재원(良才院)이 있었던 교통의 요지로 말죽거리로 불렸으며, 조선시대에는 상업활동이 활발하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역원(驛院)제도에 따라 30리마다 대로변에 역을 설치하였는데 양재역은 찰방(察訪 : 종6품)이 주재했던 주요 역(驛)이었다.
역은 중앙과 지방의 공문 전달, 보급품, 세곡 수송, 관리 사행의 마편(馬鞭) 급여와 숙식 제공, 변경 군정(軍情)의 보고와 민정 시찰, 비행 관리의 규찰 등을 담당하였다. 또한, 역은 교통의 요충지로 자유 상인들의 상업활동이 활발하였던 지역이다.
양재역에 예속된 역참은 12개인데, 낙생(樂生)ㆍ구흥(駒興)ㆍ금령(金嶺)ㆍ좌찬(佐贊)ㆍ분행(分行)ㆍ무극(無極)ㆍ강복(康福)ㆍ가천(加川)ㆍ청호(菁好)ㆍ장족(長足)ㆍ동화(同化)ㆍ해문(海門)이었다.
조선시대에 한양에서 남쪽으로 향하는 길은 청파역에서 출발하여 경기도 광주(廣州)까지가 제1구간이 된다. 이곳 광주에는 5개의 역(驛)과 5개의 참(站)이 배치되어 있었다.
즉 경안찰방도(慶安察訪道) 관할인 경안역(慶安驛, 마 10필, 노비 43명), 덕풍역(德豊驛, 마 7필, 노비 9명), 봉안역(奉安驛, 마 13필, 노비 9명)과 양재찰방도(良才察訪道) 관할인 양재역(良才驛, 마 5필, 노비 4명), 돌마역(突馬驛, 마 5필, 노비 4명) 이상 5개의 역에 62필의 말과 82명의 노비가 대기하고 있었다.
양재동 지역은 예로부터 전국 각지로 떠나는 사람들의 여정이 시작되는 곳이자 서울로 들어오는 마지막 관문이었다. 오늘날에도 지하철 3호선과 신분당선의 양재역이 들어서 있지만 부근애는 말죽거리[馬粥巨理]가 있어서 유명하였다.
◇ 삼봉 정도전묘(鄭道傳墓) : 서초구 서초동 산 23-1번지
- 조선의 개국공신이자 성리학자인 정도전의 묘소로 전해오는 곳
지하철 양재역에서 서남쪽으로 약 300m 떨어진 우면산 끝자락에는 여러 기의 묘가 있었는데, 이 중의 하나가 조선 개국공신 삼봉 정도전의 묘소로 추정되었다.
이곳은 풍수지리학상으로 학이 날개를 펴고 한강을 바라보고 있다는 명당으로 묘소는 학의 머리 부분에 있다. 이곳이 정도전의 묘소로 추정되는 이유는 각종 문헌 자료와 구전으로 내려온 이야기 때문이다.
『동국여지지』 과천현편에는 "정도전묘 재 현 동십팔리(鄭道傳墓 在縣東十八里)", "양재역 재 동십오리(良才驛 在東十五里)"라는 구절이 있고, <봉화정씨 족보> 에도 "정도전묘 광주 사리현(鄭道傳墓廣州四里縣)"이라는 기록이 있다. 또 마을 사람들로부터 대대로 전해 오는 구전에 의하면 정도전의 묘가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
봉화 정씨 종친회에서 1989년 한양대학교 박물관에 의뢰하여 정도전의 묘소로 추정되는 곳을 발굴조사가 있었다. 이 당시 발굴보고서에 따르면 제1호분은 우선 신분이나 계급이 높은 지배계층의 분묘형태를 띠고 있으며, 두꺼운 회벽(灰壁)과 그곳에서 나온 유물이 조선 초기의 백자였다.
또한, 목관에 안치된 피장자의 유해는 머리 부분만 남아 있고, 다른 부위는 발견되지 않았다. 이것은 『태조실록』 14권에 「정 삼봉이 참형되었다.」는 기록과 일치하고 있어서 이 무덤의 피장자(被葬者)가 개국공신 정도전일 가능성이 충분하였다.
성리학의 대가인 삼봉 정도전(1337~1398)은 1392년에 조준, 남은 등과 함께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고,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하는 일을 추진하였다. 삼봉 정도전은 조선의 1등 개국공신으로 군사, 외교, 성리학, 행정, 저술 등 다방면에 걸쳐 새로운 나라의 기틀을 마련하였으며, 숭유배불(崇儒排佛)을 국시로 삼게 하여 성리학의 발전을 기하였다.
그러나 태조 9년(1398년)에 삼봉 정도전은 신의왕후 한씨의 아들들이 일으킨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에 의해 참수되었다.
2013년 11월 8일에 서초구청에서 정도전의 묘소로 추정되는 곳에 「삼봉 정도전 산소터」비석을 세워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