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바닷속 자유로운 해파리다. 젤리처럼 반투명한 몸을 움츠렸다 펴며 물살에 몸을 맡기고 유영한다. 우아하고 단순하게 움직임을 반복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아니 애초에 앞이라는 개념이 있을까. 목적 없는 산책이다. 진화는 방향성이 없다. 생명의 목적은 목적 없는 산책 같다. 바닷속은 고요하고 푸르다. 어느 순간 몸이 녹아 더 큰 바다가 될 것만 같다.
해파리는 독특한 생명주기를 가지고 있다. 성체가 되면 다시 유생 단계로 돌아간다. 이를 ‘역노화’라고 하는데, 해파리의 세포가 변화하여 다시 어린 개체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능력 덕분에 이론적으로 불멸의 존재지만, 포식자나 환경에 의해 쉽게 죽는다. 최근 인간의 노화 관련 연구에 해파리가 활용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영원한 해파리의 삶을 꿈꾼다. 바다가 되기를 거부하는 닫힌 존재들이다. 나는 다양한 생명을 품은 푸른 바다를 꿈꿔본다.
‘크아아~’
너무 편했나 보다. 옆에서 추성준 님의 크레센도 코 고는 소리에 바닷속 해파리는 다시 육지로 돌아왔다. 세자트라 숲의 요가 수업 시간. 몸에 힘을 빼고 편하게 누워 눈을 감고 싱잉볼 명상 중이었다. 나는 꿈인지 상상인지 그 어디쯤의 바닷속에서 퍼뜩 건조한 현실로 끌려온 푸석한 해파리가 되었다.
요가는 몸의 감각을 깨우고 느끼며 공부하는 시간이다. 귀로 눈으로 코로 피부로 근육으로 명상을 통해 내 몸이 우주로부터 닫혀있는 온전히 떨어진 개별적 존재가 아니라, 여러 구멍들을 통해서 열려있고 연결되어 있는 존재라는 것을 배운다. 인간은 혼자 존재할 수 없다. 입으로 다른 생명을 섭취하고, 코로 숨을 들이키고, 피부로 빛을 흡수하고, 다시 숨을 뱉고, 흡수한 에너지를 배출해야 살아갈 수 있다. 요가는 우리가 우주의 일부로서 순환하며 존재한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
파리는 해파리가 육지를 탐험하기 위해 보낸 드론일까? (농담이다.) 바닷속의 아름다움을 볼 때면 살아있다는 것에 설렘을 느낀다. 다양한 해초로 이루어진 바다숲의 살랑거리는 움직임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헤아릴 수 없는 생명들의 꿈틀거림은 어떤 태초의 그리움을 불러온다. 언젠가 자연스럽게 투명해져 바다가 되는 말랑한 해파리처럼 물살에 몸을 맡기고 푸르름을 유영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