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세 대사간 휘 기주(양간공파․의정공파)
1787년(정조12)-1859년(철종11) 조선 후기 문신. 자는 경문.
아버지는 부호군 노검, 어머니는 숙부인 전의 이씨.
1811년(순조12) 정시문과 병과에 16인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뽑혀 원릉별검이 되었다.
6품직의 예조 정랑, 감찰 등 여러 요직을 거쳐 헌종14년 좌통례가 되었다.
사간원 대사간이 되자 직위를 탐하는 자가 있어 춘천부사로 나갔다.
대사간 휘 기주 묘지명
공의 휘는 기주요, 자는 경문이다.
공은 용모가 준수하며 성품이 관인하며 공경하고 검애하여
어려서부터 어버이 성김에 지극한 정성이 있었다.
종족과 화목하며 이웃의 가난한 사람의
상사와 혼인에 시기를 맞추어 주선해 주었다.
사람을 대하면 효도하고 화목하라고 권하고
비복들에게도 은혜를 베풀고 보호해 주었다.
고을 원에게도 성명을 통할뿐 잘 출입치 않았고,
젊었을 때 친한 사람일지라도 현달하게 된 사람을 잘 찾지 않았다.
고을을 맡아 다스릴 때에도 정밀하고 청백하기를 근본으로 하고,
청탁을 엄금하며 송사를 공평하게 하였다.
국고를 완전히 지킨 사람이 무고를 당했으면
다시 조사하여 억울함이 없게 하였다.
훙금이 허탄하고 울적한 달 밝은 밤이면 거문고를 타게 하여
화창한 날이면 활 쏘는 광경도 구경하니 그 기개가 이러하였다.
아! 공은 젊은 시절에 벼슬에 나가 공경이 되어 그 지위에 떳떳할 뿐이요,
지위 다툼에 억척스러이 남과 다투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벼슬자리가 길지 못하였으니 사람들이 유감으로 생각하였다.
옛적에 임덕우의 말에 방정학지에 그 뜻의 아름다움을
칭찬할만한 일도 많았으나 넉넉지 못한 이가 많다 하였으니
이는 공에게는 맞지 않은 말이로다.
좌찬성 이돈우 찬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