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뤼베크(Lübeck) 요약 독일 북부 슈레스비히홀슈타인 주인 발트 해에서 14㎞ 가량 떨어진 곳에 트라베 강과 바케 강을 끼고 있다. 독일에서 가장 큰 발트 해 항구로서 시에서 가장 많은 일자리를 제공하고 있다. 북유럽과 동유럽의 원자재생산 국가들과 서유럽의 제조국가들을 이어주는 주요 무역항으로서 발전해왔다. 1358년 한자동맹이 이곳을 행정 중심지로 채택됐고 1630년 한자동맹이 해체된 뒤에도 발트 해에서 가장 중요한 항구로서의 위치를 유지했다. 한자동맹 ( Hansa , (영) Hanseatic League )13~15세기에 북유럽의 중요한 경제적·정치적 세력이었다(독일어 Hanse는 '무리'나 '친구'라는 뜻의 고트어에서 유래한 중세 독일어로서, '길드'나 '조합'을 의미했음). 한자 동맹의 전신은 독일 상인들이 활동한 2개의 주요지역, 즉 북해 연안의 저지대 및 브리튼 섬과 교역 관계를 갖고 있던 라인란트, 독일인들이 유럽 북동부의 방대한 배후지와 서유럽 및 지중해 지역 사이에서 중개상 노릇을 한 발트 해 연안지역에 있던 지방의 상인단체들이었다. 1280년대에 이미 라인 지방의 다양한 상인 집단들은 그들의 공통된 이익을 지키기 위해 협력했고, 발트 해 무역을 지배한 뤼베크 및 그밖의 독일 북부 도시들과 동맹을 맺었다. 동맹의 목적은 해적 및 산적을 진압하고, 등대를 세워 항해의 안전을 촉진하며, 수로 안내인 등을 훈련시키고, 무역기지와 독점권을 확립함으로써 교역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많은 외국 도시(예를 들면 노르웨이의 베르겐, 러시아의 노브고로트, 영국의 런던)에 상업 지역(kontore)을 세웠다. 수십 년 뒤 한자 동맹의 공격적인 보호무역정책은 현지 상인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전쟁이 벌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1368~70년에 한자 동맹은 덴마크 왕 발데마르 4세의 단호한 저항에 부딪쳤다. 발데마르는 발트 해 남서부지역을 지배하여, 그곳에서 한자 동맹이 장악한 경제적 지배력을 종식시키려고 애썼다. 한자 동맹은 특별 회의를 소집하여 군대를 모집하기로 결정했는데, 이 군대가 그후 덴마크군을 결정적으로 무찔렀기 때문에 한자 동맹은 잠시 덴마크를 지배하게 되었다. 14세기에 한자 동맹은 대부분 독일 도시인 100여 개의 도시를 회원으로 거느렸다. 한자 동맹에는 정관도 없었고, 육군이나 해군의 상비군도 없었으며, 정기 집회(의회)를 제외하고는 관리기구도 없었다. 각 도시의 특유한 이해관계와 지역적인 이익이 공통된 관심사보다 비중이 커지기 시작하자, 15세기초부터는 정기 집회를 소집하는 일도 점점 뜸해졌다. 비(非)게르만족이 세운 발트 해 국가들의 세력이 점점 커진 것도 한자 동맹의 세력을 약화시켰다. 리투아니아·폴란드는 1368년에 통일되었다. 덴마크·스웨덴·노르웨이는 1400년경에 연방을 결성했다. 모스크바 대공국은 1478년에 노브고로트를 점령하고, 그곳의 독일 상인들을 추방했다. 16세기 중엽에 이르자 네덜란드인이 발트 해에서 서쪽으로 상품을 수송하는 해운업을 장악하게 되어 뤼베크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독일 자체에서도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같은 군주국 통합체가 한자 동맹을 약화시켜, 한자 동맹은 신대륙 발견 시대에 서서히 사라졌다. 한자 동맹의 집회가 마지막으로 열린 것은 1669년이었다. 함부르크 중앙역에서 열차를 타고 한시간 남짖 가면 뤼베크시가 나온다 함부르크 중앙역은 우리 서울로 치자면 서울역쯤 된다 이곳에서 독일의 도시나 외국의 가까운 도시를 연결하고 있다 *독일의 열차는 대부분 2층으로 되어 있다 높이는 우리 열차와 거의 같은거 같은데 2층으로 되어 있어서 많은 승객을 수용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뤼베크시에서 운영하는 유람선을 타고 강을 따라 도시를 구경한 장면이다 홀슈텐토어 전망대에서 뤼베크시를 바라본 전경이다 발트해로 연결되는 독일 북부의 항구 도시이다 앞에 두개의 표죽한 성문이 바로 홀슈텐 토어(Holsten-Tor)이다 뤼베크의 대표적 명소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이문은 하인리히 헬름스테데가 트라베 강쪽의 방어시설을 강화할 목적으로 건축되었고 내부에 들어가 보니까 뤼베크시 도시 역사 박물관으로 뤼베크시의 번성했든 옛모습을 재현해 놓았고 여러 다양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문 좌측의 벌집모양을 한 건물은 소금 창고로 사용한 건물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소금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니 한자동맹 시절에 소금이 무역의 중요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당의 내부 모습 뤼베크의 리더레거 초콜릿이 유명하다고 해서 가봤더니 말대로 줄을 서서 대기하고 있다가 매장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리더레거 초콜릿 매장 안의 모습이다 다양한 초콜릿이 진열되어 있고 많은 사람들이 구입하느라 정신이 없구나 얼마나 맛이 있길래 이런가 하나 사서 먹어 보았는데 맛을 잘 몰라 그런지 그게 그거 인거 같다 시내 모습 뤼베크의 발트해(독일에서는 동해라 일컷는다) 연안에 조성된 해수욕장인데 돈을 받고 출입을 시키고 있네 헬골란트(Helgoland) 독일 북부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주에 있는 섬
북해가 만입되어 이루어진 독일 만, 야데·베러·엘베 강 어귀들이 만나는 쿡스하펜 해안에서 북서쪽으로 65km 떨어져 있다. 이 섬은 오벌란트(가장 높은 지점이 56m)라고 하는 평평하고 절벽으로 둘러싸인 적색 사암고지, 매립하여 넓힌 운털란트라고 하는 남동쪽에 있는 보다 작고 지대가 낮은 모래지역, 뒤네라고 하는 약 0.4km 동쪽에 있는 지대가 낮은 모래섬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질학과 역사학적 증거를 보면 헬골란트와 뒤네가 800년에 그 둘레가 약 190km였던 단일 섬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곳임을 알 수 있다. 이곳은 동절기 기온이 온화한 해양성기후이다. 원래 프리슬란트 목동들과 어부들이 살고 있었던 이 섬은 1402년에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작령이 되었다가 1714년에 덴마크의 소유가 되었다. 1807년 영국 해군이 장악하게 된 이곳은 1814년 정식으로 영국에 넘어갔으며, 다시 1890년에 잔지바르를 포함한 여러 아프리카 영토와의 교환 조건으로 독일에게 양도되었다. 독일인들은 이 섬을 거대한 해군기지, 넓은 항구, 선거시설, 지하 요새, 해안 포대를 갖춘 '북해의 지브롤터'로 개발했다. 제1차 세계대전중 독일 해군이 계속 사용한 군사·해군 기지는 베르사유 협정에 따라 1920~22년에 폐기되었으며, 그후 이 섬은 유명한 관광 휴양지가 되었다. 그러나 나치 체제하에서 다시 해군기지가 되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에는 연합군의 무참한 폭격을 받았다. 파괴되기 전 헬골란트 시는 운털란트에서 오벌란트까지 확장되었는데 교회가 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었다. 독일이 패배함으로써 주민들은 모두 이 섬을 떠났으며, 영국 주둔군 당국이 지하에 남은 요새들까지 모두 파괴하여 이 섬의 외관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1952년 3월 1일 서독으로 반환되기 전까지 영국 공군에서 폭탄 투하 연습장으로 이용했다. 도시, 항구, 뒤네에 있는 온천휴양지 등이 복구되었다. 이 섬은 항해와 과학 연구, 특히 조류의 연구에 이용되고 있다. 면적 2.1㎢, 약 인구 1,800명 함부르크 란둥스부뤼켄에서 배를 타고 세시간 반을 항해해야 갈 수 있는 곳이다 자연이 숨을 쉬는 아름다운 절경이 가슴을 적셔온다 배에서 내리자 마자 접하는 곳이다 배에서 내려 자연으로 가는 길목에 이런 가옥들이 늘어 서 있다 갈매기들이 무리를 지어 서식하고 있는 곳인데 관광객들이 많이 드나드니 사람을 전혀 피할 생각을 않고 가까운 친구처럼 생각하나보다 자기가 갈매기인 줄 모르고 사람으로 착각하는가 보다 사람들이 구경하고 있는 길 옆에서 알을 품고 있는 갈매기들 내가 사람인지 갈매기인지 혼돈의 장소 함부르크 란둥스부뤼켄에서 이배를 타고 아침 아홉시에 출발하여 헬골란트에 도착한후 대기 했다가 관광을 마치고 돌아온 사람들을 싣고 네시에 함부르크로 다시 돌아간다 Sylt (질트섬) 독일인의 유명한 해변 휴양지 위치: 독일 북부 슐레스비히-홀슈타인주에 속하는 섬 독일 최북단, 덴마크 영토가 시작되는 부분과 인접하고 있어서 관문과 방패의 역활을 동시에 하고있는 이 작은 섬은 유행에 민김하고 세련된 함부르크사람들이 자신들의 신분을 확인 할 수 있는 곳이다. 덴마크에서 네덜란드까지 뻗어 있는 북해의 북프리지아 제도 가운데 가장 큰 섬인 질트섬에서 폭이 가장 좁은곳은 약 550미터밖에 되지 않는다. 모양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부드러운 모래로 이루어진 언덕과 64킬로미터의 모래사장 해변은 언젠가는 침식되어 이 지도상에서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하게 만든다. 이섬에는 상당히 많은 동성애자들이 살고 잇으며 유명한 누드 해변도 있다. 이섬의 교통수단은 주로 자전거와 말이며 걸어서 이동하는 사람도 많다. 98.8제곱킬로미터의 면적과 12개의 마을이 있는 이 섬에서도 카이톰(Keitum)은 녹지대에 위치하고 있으며, 인기 있는 해변 휴양지인 베스터란트(Westerland), 리스트(List), 베닝슈테트브라데루프(Wenningstedt-Braderup)이며 가장 인기있는 해변 휴양지는 베스터란트(Westerland)이다.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질트섬의 은하수와 夢遊廣桑山詩
사진은 최근 영국 더 선지에 실린 독일의 사진작가 토마스 짐머가 독일 북부 슐레스비히-홀슈타인주의 질트 섬에서 촬영한 은하수 아래에 선 한 인간의 고독을 담은 경이로운 사진이다.
마치 조선조 가인 허난설헌의 몽유광상산시(夢遊廣桑山詩)를 연상시키는
가을 달빛만 차가워라'
가을 푸른빛 아래에 모든 것이 성숙해지고 익어가는데 나의 삶과 마음은 언제쯤 더 성숙해 지고 이 가을의 기도처럼 고요해 질 수 있을까?
[UFO연구동호회] 내가 2일간 묵었든 숙소가 이 사진을 촬영한 곳에서 불과 500m 밖에 있는 곳인데 한국에서 삼각대가 무거워 짐이 되기 때문에 놓고 와서 밤에는 촬영을 아예 하지를 않아 좀 서운하고 이런 걸작을 촬영할 수 있는 곳에 있으면서도 그냥 지나친 것이 못내 아쉽다 함부르크 중앙역에서 열차를 타고 질트 섬까지두시간 남짖 걸린다 달리는 열차안에서 바깥 풍경을 스케치 하였다 질트역 집에서 아침 일찍 서둘러 함부르크 중앙역에 와 질트행 열차를 타고 종착역에 도착하고 보니 시계가 11시15분을 가리키고 있네 질트 섬은 북부 독일인들의 휴양 섬이라고 보면 될듯 싶다 북부 독일인들이 많이 찾고 있는 휴양지라 민박시설이라든지 숙박시설이 잘 조성되어 있었고 대부분 주택들이 옛모습으로 재현해 놓아 독일인들의 낭만을 자아 내도록 세심한 신경을 쓴 모습이 역력하다 관광객들이 섬을 둘러 보기 위해 셔틀버스를 타는 모습이다 질트섬의 토질이 모래도 아니고 그렇다고 일반적인 흙도 아니고 좀 이상하다 그러나 바다 주변은 고운 모래로 형성이 되어 있다 바람이 불면 고운 모래들이 날라서 불편감을 주기도 한다 이곳이 질트 섬의 가장 중심지이다 중심지 앞의 해수욕장 중심지의 야간 모습 우리는 이곳에서 2일을 묵었다 그리고 독일작가가 은하수를 촬영한 곳이 이 벌판의 가장 높은 구릉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아침 산책길에서 무지개를 만나 촬영한 것인데 어찌나 선명하고 땅끝까지 무지개 색깔이 뚜렷한지 감탄을 자아낸 기억이 새롭다 해수욕장의 모습 이런 해수욕장이 섬 전체를 돌려 가면서 다듬어 놓았다 이 주택이 전형적인 독일의 옛 가옥 형태이다 지붕은 짚으로 이어져 있어서 우리나라 초가집을 연상케 한다 산에는 이름 모를 꽃들과 바람이 잦으니 작은 나무들로 덮여있다
|
첫댓글 독일 북부 지역을 탐험한 기록을 역사와 사진으로 자세하게 이야기하듯 들려주어
공부하는 마음으로, 혹은 내가 직접 관광하는 마음으로 감상 잘 했습니다.
중세기에 뤼베크가 중심이 되어 도시 동맹을 맺어(한자동맹) 그렇게
큰 힘으로 영향력을 발휘했다니 놀라운 사실이네요.
정성스레 편집하여 올리느라 수고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