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초의 서역 평정
서역에 출사한 반초가 선선(鄯善)국에 도착하여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에 들어가야한다(不入虎穴, 焉得虎子)는 결기로 북흉노 사절을 공격하려 하자
누군가가 "이 일은 응당 곽종사와 상의하여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반초는 대노하면서 “흉하고 길한 것은 이번 일에 달렸다.
곽종사는 평범한 문관으로 그가 이 일을 들으면 반드시 두려움 때문에 우리의 계획을 폭로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헛되이 죽게 되고 나쁜 평판을 얻게 될 것이니 이는 장사라고 할 수 없다
.(是凶是吉, 就在于此事. 郭从事是平庸的文官, 他听到这事必定会因为害怕而暴露我们的计划,
我们就会白白送死而落下不好的名声, 这就称不上是壮士了.)”라고 하였다.
이에 부하들은 모두 옳다고 하였다.
날이 어두워지자마자 반초는 부하들을 이끌고 북흉노의 사절이 머무르는 곳으로 향했다.
당시 하늘에서 큰 바람이 불자 반초는 10명에게 북을 들고 적의 주둔지 뒤에 숨으라고 명했고,
불길이 오르면 맹렬히 북을 두드리며 큰 소리로 외치도록 했다.
다른 부하들에게는 칼, 창, 쇠뇌를 들고 문 양쪽에 매복하도록 명령했다.
준비가 끝난 후 반초는 바람을 타고 불을 질렀고, 불길이 일자 일순간에 36명이 앞뒤에서 함성을 지르며 기세를 올렸다.
북흉노의 사자들은 혼비백산이 되었으나 도망갈 길이 없었다.
반초는 직접 세 명을 죽였고, 그의 부하들도 삼십 명 이상을 죽였다. 나머지는 모두 불길에 갇혀 죽었다.
다음날 반초가 이 사실을 곽손에게 알리자 곽손은 먼저 흠칫 놀라면서
이윽고 자신에게 사전에 알리지 않는 것에 대해 섭섭한 낯빛을 띠었다.
반초는 그에게 질투심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너는 설령 우리와 함께 행동하지 않았어도
나 반초가 어떻게 그 공을 독차지하겠느냐?"고 말했다.
이에 곽손의 얼굴에 희색이 돌자 반초는 선선왕을 불러 북흉노 사자들의 목을 보여 주었다.
선선왕은 대경실색하였고, 온 나라가 공포에 떨었다.
반초가 좋은 말로 위로하자 선선왕은 한나라 조정에 귀의할 뜻을 밝히면서 자신의 왕자를 한나라에 인질로 보냈다.
반초가 사명을 완수하고 두구의 진영으로 돌아가자 두구는 반초가 서역에 처음 출사하여 거둔 성과를 한명제에게 보고하였다.
그러면서, 은근히 조정에서 다시 유능한 사자를 서역에 파견하여
일거에 서역 각국을 장악하여 한나라의 판도에 편입시켜야 한다고 하였다.
영명한 한명제는 두고가 반초를 좋게 보고 그를 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한명제 스스로 반초의 담력과 책략을 좋아했고, 그를 얻기 어려운 인재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두구에게 "반초와 같은 사신을 보내지 않고 다른 사람을 고려해야 하는가?
반초를 군사마로 발탁하여 그로 하여금 출사의 임무를 계속 수행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두고는 반초의 부하가 너무 적다고 생각하고서는 반초에게 부하들을 더 주려고 하였다.
하지만 반초는 "나는 원래 데리고 갔던 30여 명만 거느리면 충분하다.
사람이 많아지면 만약에 사고가 생기면 오히려 부담이 더 늘어난다면서
원래의 36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다시 서역으로 출사하였다.
이번 출사의 첫 번째 목적지는 장소는 우전국(于阗国)인데, 오늘날 신장 화전(和田)일대이다.
그런데 이곳에서도 선선국에서와 유사한 상황이 발생하였다.
우전의 왕 광덕(廣德)은 사차(莎车)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천산이남을 제패하고 있었다.
하나편, 북흉노는 사자를 파견하여 대외적으로 광덕왕을 후견한다고 하면서 사실상 위전국의 대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렇게 흉노와 결탁하고 있었던 광덕왕은 반차오 일행이 도착하자 예의를 차리지도 않았고 냉담하였다.
우전국은 무속이 성행하였는데, 무당이 “천신이 노하셨다.
너희는 왜 한나라로 귀순하려 하느냐? 한나라 사절은 입이 검고 털이 누런 좋은 말을 가지고 있으니,
너희는 빨리 그것을 나에게 가지고 와서 천신에게 제사를 지내자!"라고 하였다.
이에 광덕왕은 재상을 반초에게 보내어 말을 달라고 요구했다.
광덕왕의 나쁜 마음을 간파한 반초는 곧 계략을 세워 화통하게 문제없다고 하였다.
다만, 무당이 직접 와서 말을 끌고 가라고 하였다.
무당이 도착하자 반초는 다짜고짜 그를 죽이고 재상을 체포하여 수백 대의 채찍을 휘둘렀다.
무당의 머리를 광덕왕에게 돌려보내고는 이해관계를 설명하고 도의로 그를 꾸짖었다.
광덕왕은 일찍이 반초가 선선에게 북흉노 사자를 주살한 것을 들었기에 매우 두려워하여
즉시 북흉노 사자를 죽이고 한나라에 복속하고자 하였다.
이에 반초는 광덕왕이 진심으로 신복하고자 하는 것을 보고는
그와 그의 신하들에게 상을 주어 성공적으로 우전국을 진무하였다.
이후 반초는 은혜와 위엄을 겸비하여 민첩하고도 슬기롭게 적을 제압하는 책략으로 신속하게 소륵국(疏勒国)을 평정하고,
원래 소륵국왕의 조카인 충(忠)을 소륵왕으로 세웠다.
그리고, 북흉노가 세운 구자(龟兹)인 두제(兜题)를 의리로 풀어주어(義釋) 한나라의 위엄을 크게 떨쳤다.
이 영향으로 서역 각국은 한나라에 귀속하면서 왕자들을 한나라로 인질로 보냈다.
이리하여 , 65년간 단절되었던 서역과 한나라의 관계는 비로소 회복되고 국교를 정상화하였다.
복과 화는 서로 의지한다는 "복화상의(福祸相依)"라는 말이 있듯이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이 따르는 법이다.
반초의 위세가 서역을 뒤흔든 바로 그 무렵인 서기 75년에 한명제 유장이 승하하여
한나라가 서역과 교류하면서 그들을 챙길 겨를이 없었다.
이에, 서역의 언기(焉耆; 카라샤르)족이 기회를 타서 서역도호부를 포위하여 공격하여 도호인 진목(陈睦)을 죽였다.
구자(龟兹), 고묵(姑墨) 등이 연합하여 소륵(勒疏)을 공격하자 반초는 고립무원의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서기 76년 한장제(汉章帝) 유치(劉熾)가 즉위하자 서역을 포기하고 반초에게 귀국을 명령했다.
반초가 어쩔 수 없이 명령을 받아 돌아가려고 하자 소륵국은 구자(龟兹)에 의해 멸망할까 걱정을 하였고,
우전국의 왕과 백성들도 반초가 남아서 외적을 막아달라고 울며 사정을 하였다.
이에 감동한 반초는 한장제에게 서한을 보내어 자신이 서역에 남아 사자의 역할을 계속하고,
"이이제이(以夷制夷)"의 도략으로 서역을 위무할 것이니 막대한 국력이 소모되는 조정의 지원이 필요하지 않다고 하였다.
한장제는 크게 기뻐하면서 반초로 하여금 계속 서역에 머무르게 하였다.
반초는 서기 100년까지 서역에서 분투했는데, 두 차례에 걸쳐 서역에 출사한 기간이 31년이나 되었다.
서기 94년에는 구자(龟兹), 선선(鄯善) 등 8개 국의 7만 여명의 병력으로
한나라에 대항하는 언기(焉耆)국 등의 통치자를 정벌하였다.
서역에 31년 간 출사하는 동안에 반초는 때로는 외교로, 때로는 무력으로 서역 50개 국을
한나라에 복속시켜 이역에서 공을 세우겠다는 "입공이역(立功異域)"의 이상을 실현하였다
. 서기 95년 한나라 조정은 반초의 공을 포상하여 식읍 천호의 "정원후(定远侯)"로 봉하였다.
그리하여 반초는 “반정원(班定远)" 으로 불리게 되었다.
서기 100년에 고령의 반초는 한장제에게 노환으로 귀경을 청하는 글을 올렸고,
그의 여동생 반소(班昭) 또한 오빠의 귀환을 상소하였다.
반초는 서기 102년 8월에 낙양에 도착하여 사성교위(射声校尉)가 되었다가
그해 9월에 향년 7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반초의 형 반고(班固)가 아버지 반표(班彪)의 유지를 받들어 《한서》라는 역사서를 썼다면, 반초는 서역을 개척하는 역사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렇게 탁월한 반고, 반초 형제에게는 반소(班昭)라는 여동생이 있었는데, 그녀는 중국 최초의 여성 사학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