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천/ 예술작품의 아우라와 상상세계의 미학 *문창20년가을호
1.
정상에 오른 예술가들과 그들의 예술작품이 빚어내는 아우라는 시대와 국가를 뛰어넘어 또다른 예술가들의 예술작품에 영감을 불어넣는다. 그리고 이러한 재생산에 힘입어 새로운 후대의 예술가들이 탄생한다. 그러나 이 끝없는 은총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전력을 다해 저들을 흠모하고 파악하고 분석하는 한편으로는 시도때도 없이 자괴감에 빠져들 수밖에 없을 만큼 위험하기 일쑤다. T.S. 엘리엇이 말하는 사랑의 고통과 같다. 엘리엇은 사랑을 가리켜 ‘화염의 실로 짜아올린 불의 셔츠’라 한다. 몸과 마음에 달라붙을수록 화염의 열기가 더욱 뜨거워지면서 셔츠를 입은 사람은 불타오르는 둣한 고통을 받는다고 한다.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선대 예술가들의 은총을 입으면서 모든 예술가의 혈통은 자연스럽게 이러한 고통과 성취를 DNA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이번에 소개되는 나고음 시인의 신작소시집의 시편들 역시 이러한 경로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예술가의 풍모를 지니고 있다.
나고음 시인의 신작시들은 예술가들의 삶과 정신과 작품에서 빚어나오는 예술의 아우라가 새로운 시인의 새로운 작품활동에 어떻게 그러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모범 교본과 같다. 도예가 흙과 불과 물로 빚어지는 자연의 예술이라면 시는 다시 그 형상을 언어미학으로 재해석하면서 정신의 드높은 경지를 연출하는 시학이라 할 수 있다.
시인의 이력을 보면, 시인은 마산 출생으로 시보다 먼저 도예에 눈을 떴다. 교사를 겸하긴 했지만 학부에서 도예를 전공하고, 작품 활동 역시 활성화되어 된 전문작가다. 도자기 개인전과 해외전, 그룹전에 왕성하게 참여해온 현역이다. 시인의 도예작품을 보면 우연한 기회에 힘입어 도예에서 시로 확장된 한 시인의 예술적 아우라가 어떻게 형성되었냐를 짐작하게 만든다. 2002년 『미네르바』에 시로 등단한 이래 『불꽃가마』 『저, 끌림』 『페르시안 블루, 꿈을 꾸는 흙』 등의 시집과 에세이 『26&62』를 상재하고, 근무하던 초등학교 학생들의 작품을 지도해 동시집을 간행하기도 했다. 시인은 이렇듯 불과 물과 흙의 자연을 다루어온 작가답게 언어와 정신을 바탕으로 분출하는 상상력을 작품화하는 데 망설임이 없을 만큼 성공적으로 전방위예술가의 입지를 다지면서 서울시문학상, 숲속의 시인상, 제11회 바움문학상 등에 이어 2020년에는 한국시문학상을 수상할 만큼 예술적 성취도를 드높여 왔다.
나고음 시인은 대상을 매개로 하여 자신의 내면적 고뇌를 드러내는 데 능한 시인이다. 좁혀지지 않는 대상과의 거리에서 오는 그리움의 열정을 바탕으로 삶의 상처와 아픔을 드러내고, 대상의 자기화를 통해 삶의 깊은 의미를 명징한 이미지로 형상화한다. 이번 수상작들에서도 이러한 시적 특성이 잘 드러나고 있다. 수상작 「레드&블랙」에서 도자기를 굽는 과정을 감각적으로 묘사하며 그것을 삶의 숙성과정과 병치시킨다. 그릇의 색이 불과 바람의 요변으로 깊어지듯이 삶 역시 상처와 고통을 받아들이고 견디며 익어감을 보여준다. 수상작 「겨울 남천」은 ‘남천’이라는 식물과 ‘남천댁’이라 불렸던 어머니의 병치와 유비를 통하여 기쁨과 신산한 계절을 이겨내고 피워낸 아름다운 삶을 이야기한다. 엄혹한 시간 속에서도 기다림과 온기로 여섯 자녀를 길러내신 어머니를 “겨울에 피는 꽃”인 남천의 아름다움으로 추억하고 있다. 수상작 「흑임자 밥」에서는 일상적인 밥 짓는 과정을 매개로 하여 흑임자라는 사물을 생동감 있게 묘사한다. 특히 “파랗게 굴리는 눈 속에 작은 호랑이가 숨어 있었던 걸까”라는 표현에서 사물을 바라보는 화자의 깊은 시선을 느낄 수 있다. 이번 수상을 계기로 더욱더 깊은 예술성과 상징성을 지닌 언어로 삶을 해석해 주기를 기대한다. (2020년 한국시문학상의 심사평 부분인용)
2.
시인은 자전거타기를 즐긴다. 일반적인 취미활동을 넘어서서 사나흘씩 몰아붙여 자전거여행을 할 만큼 격렬한 활동성이다. 시인이 자전거로 4대강 종주를 시작하다가 섬진강 하류에서 만난 작품이 「섬진강 문장」이다. 시인은 시작노트에서 “하동 벚꽃이 만발한 강의 하류는 강폭이 상류에 비해 넓고 흐름이 완만하여 나도 강물처럼 느리게 페달을 밟았다.”고 서술한다.
강물의 흐름은 하염없다. 강물을 보면 따라 흘러가고 싶다. 노자의 말마따나 다투지 않고, 함께 흘러가는 것들과 물을 즐기고 싶다. 시인은 문득 “뒷 여울이 앞 여울을 밀어 한 단 한 단/ 은빛 페달을 밟아가”는 섬진강을 바라보며 그 강물이 보여주는 문장을 따라 읽는다. “강물 위에 솟은 검은 바위들이 점점이 말없음표 부호로 떠 있”는 풍경과 한몸이 되면서 “저 말없음표 안에는/ 어떤 문장이 숨어 있을까” 생각에 잠긴다. “강물 속에서 팔딱팔딱 숨 쉬고 있는/ 수많은 문장”들, “강물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 바위처럼 단단한 문장이 자라고 있는 걸까 “ 시인의 몰입과 도취와 깨우침이 정신의 “은빛 바퀴‘를 “물 밖으로” 드러내 “매화 터널 속 강물에 목을 축인다” 아름답기 그지없는 미학의 형상화라 할 수 있다.
섬진강이 자전거 페달을 밟고 있다
뒷 여울이 앞 여울을 밀어 한 단 한 단
은빛 페달을 밟아가고
강물 위에 솟은 검은 바위들
점점이 말없음표 부호로 떠 있다
저 말없음표 안에는/ 어떤 문장이 숨어 있을까
강물 속에서 팔딱팔딱 숨 쉬고 있는
수많은 문장
강은 드문드문 가슴을 열고 속살을 보일 듯
흰 느낌표를 보일 듯하면서
끝내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
바위처럼 단단한 문장이 자라고 있는걸까
물 밖으로 드러난 은빛 바퀴가
매화 터널 속 강물에 목을 축인다
―「섬진강 문장」 전문
시와 도예의 만남은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한편의 시를 빚어내는 과정은 저마다 다르지만 도자기는 건너뛸 수 없는 몇 가지 단계를 반드시 거쳐야만 한다. 시인은 초벌괴 유약과정에 더욱 애정을 쏟는데 그 중에서도 ‘기물전체를 유약에 덤벙 담그는 시유’가 덤벙시유다. 덤벙시유가 끝나면 작품도 완성된다, 시인은 그 덤벙시유마저 마친 “투명유 겨울강”을 보여준다.
얼어붙은 바닥으로 매끈하게 흐르는
태초의 숨소리에 귀를 여는 투명한 겨울강
초벌 도판 위에
투명 칼라 메이크업을 한다
눈에는 타는 노을색을, 뺨에는 노래하며 튀어 오르는 봄색을,
입술에는 투명한 석류색을, 면도칼 같은 겨울바람색을 바다에 빠진 하늘색을…
도판은 립스틱처럼 색을 빨아들이며 촉촉이 젖은 빛을 낸다
마지막 단계는 물광 메이크업으로 탱탱함을 유지하는 일
숨을 가다듬고 조바심을 가라앉힌 후
에어쿠션으로 마무리하듯 유리질 코팅제 투명유약에 덤벙시유*를 한다
완벽하게 메이크업이 끝난 겨울강,
보고싶은 대로 보여주는 투명물감이 그대 가슴으로 흘러든다.
―「투명유 겨울강」 전문
”완벽하게 메이크업이 끝난 겨울강,/ 보고싶은 대로 보여주는 투명물감이 그대 가슴으로 흘러”드는 겨울강이지만, 시인이 보여주고 싶은 겨울강의 참얼굴은 따로 있다. “눈에는 타는 노을색을, 뺨에는 노래하며 튀어 오르는 봄색을,/ 입술에는 투명한 석류색을, 면도칼 같은 겨울바람색을 바다에 빠진 하늘색”이다. “물광 메이크업으로 탱탱함을 유지하는” 겨울강이다. 시인이 “가슴 조이며” 완성시키는 사랑이다. 뜨거운 그대 가슴으로 흘러드는 시인의 사랑이다.
마인강변 벼룩시장에서 등燈 하나를 샀다
금방이라도 ‘야옹’ 하며 걸어 나올 것 같은
햇빛에 반짝이는 검은 알루미늄 고양이 등
몸을 열어 배 속 심지에 불을 붙이자
기다렸다는 듯 검은 눈 반짝 뜨며 몸을 일으킨다
금세 요염이 온몸으로 점화된다
숨소리 가릉 가릉
뜨거운 눈빛으로 누군가를 부르고 있다
낮도 되고 밤도 되었던 긴 시간동안
도도함을 잃지 않고 기다린 침묵의 끝
작은 초 하나에 온 몸이 점화되는
아직은 불꽃
―「아직은 불꽃」 전문
여행은 지리적인 이동만 뜻하는 것이 아니다. 하늘과 산과 강과 바람마저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과 만나 나누는 대화야말로 여행의 참맛이다. 그 사람들 세상에서 사람들 손때가 묻은 귀물을 만나는 것은 그야말로 신의 선물이 아닐 수 없다. 시인은 “마인강변 벼룩시장에서 등燈 하나를 샀다” “금방이라도 ‘야옹’ 하며 걸어 나올 것 같은/ 햇빛에 반짝이는 검은 알루미늄 고양이 등”이다.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로 세상에 마음을 연 시인의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시다. “몸을 열어 배 속 심지에 불을 붙이자/ 기다렸다는 듯 검은 눈 반짝 뜨며 몸을 일으킨다/ 금세 요염이 온몸으로 점화된다” 고양이는 참으로 육감적인 동물이다. 고양이의 척추 뼈는 53개로 이루어져서 자유자재로 유연하게 움직인다. 고양이 액체설이 나올 정도다. “숨소리 가릉 가릉/ 뜨거운 눈빛으로 누군가를 부르”는 고양이, 어둠 속의 고양이를 세상에 환하게 보여주는 “작은 초 하나”, “온몸이 점화되”어도 “아직은 불꽃에 불과한 고양이의 호명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시인의 모습은 처연하고도 아름답기 그지없다.
까맣게 옻칠한 작은 사발에서
별빛 쏟아진다
총총히 떠 있는 하늘 숨구멍에서/ 겨울 입김 하얗게 쏟아진다
작은 가슴에
저 별빛
저 입김
어찌 다 담았을까.
―「별무늬 사발」 전문
옻나무에 상처를 내면 진이 흐른다. 이를 모아 정제한 것이 옻이다. 옻은 우루시올(urushiol)이란 화학성분을 가지고 있어서 일단 굳으면 산(酸)이나 알칼리에 안전하고 수분을 차단하는 특징이 있기에 각종 목재나 도기를 비롯한 모든 공예품에 사용된다. 우리나라에서도 청동기시대부터 옻칠 유물이 출토된다. 옻은 우유빛이지만 여기에 약품을 넣어 색을 우려낸다. 작품의 사발은 “까맣게 옻칠”을 했다. 깜깜한 하늘이다. 그 하늘, 별무늬에서 별빛이 쏟아진다. 마치 “총총히 떠 있는 하늘 숨구멍에서” 쏟아지는 “겨울 입김”같다, 시인의 “작은 가슴에” 담겨진 별빛의 입김을 통해 시인은 밤하늘의 우주와 하염없는 속삭임을 나눈다. 소품의 완성도가 뛰어난 작품이다.
어린이를 위한 그림책을 본다
첫 장을 열자 27세 젊은 샤갈의 자화상이 나온다
깊고 그윽한 눈매와 우뚝 솟은 코가 그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다른 페이지엔 넓은 어항에 5개의 눈이 둥둥 떠 있다
그림을 잘 관찰한 후 이 중에서 샤갈의 눈을 낚시로 건지는 거다
첫 단추를 제대로 끼워주는 예술가와의 만남이 흥미롭다
그림을 찬찬히 살피는 나에게
어항 속의 물고기가 빤히 보고 말한다
무얼 망설이세요?
물의 결 속에 자신을 감추고 옅은 그늘에서 기웃거리는 저 눈도
싱싱하고 푸르렀던 기억에 기대어 내밀한 외로움을 더 외롭게 하는 저 눈도
긴 속눈썹을 내리깔고 그늘을 타고 앉아 나르시시즘에 빠진 환상적인 저 눈도
조용한 파도가 흘러나와 주변을 촉촉이 적시는 그윽한 저 눈도
다 내 눈이어서.
―「다섯 개의 눈」 전문
마르크 샤갈은 피블로 피카소와 함께 20세기를 대표하는 화가다. 그의 그림은 대체로 몽환적이고 동화적이면서도 상상세계를 마치 눈앞의 현실처럼 생동하게 만드는 색감이 특색이다. 이 작품은 도입부에서 말하는 그대로 “어린이를 위한 그림책”을 보면서 시작된다. 프랑스에서 기획된 어린이를 위한 미술교육용 그림책이다. 놀이를 통해서 혹은 관찰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명화의 세계에 빠져들게 한다는 멋진 기획물이다.
시인은 그 중에서도 “넓은 어항에 5개의 눈이 둥둥 떠 있”는 그림을 선택한다. 그 중에서 “샤갈의 눈을 낚시로 건지는 거다” “그림을 찬찬히 살피는” 시인에게 “어항 속의 물고기가 빤히 보고 말한다/ 무얼 망설이세요?” 물고기의 질문에 시인은 말이 막힌다. 어항 속에 떠다니는 눈들을 바라볼 수록 샤갈의 눈이 되고, 그 눈 속에서 다시 다시 시인의 눈으로 바뀌곤 했다. 어항 속 다섯 개의 눈은 샤갈의 눈이자 시인의 눈이었다. 그러니 무엇을 선택한단 말인가. 시인은 어느새 샤갈과 함께 어항 속에 들어가 떠다니고 있었다. 정점의 예술은 언제나 창조자와 향수자를 하나로 묶는다는 예술철학의 원리가 다시 한번 증명된 셈이다. 27세 젊은 샤갈의 자화상이 보여주는 “깊고 그윽한 눈매”에서 “내밀한 외로움을 더 외롭게 하는” 눈을 찾아낸 시인은 아마도 샤갈의 연인 벨라를 떠올리며 가슴을 “촉촉이 적시” 리라.
나고음 시인의 신작소시집 5편은 그 발상이나 주제는 다 다르지만, 시인이 대상에서 하나의 시세계를 읽어내고, 그 시세계를 통해 세계의 존재와 대화를 나누는 방법론은 동일하다. 시인은 자전거여행을 떠나서나, 그보다 먼 이국의 여행지를 떠돌면서도 이세상 곳곳에서 시를 만난다. 혼자서 밤하늘에 별을 송송송 찍어놓은 옻사발을 들여다보거나 그와 마주한 겨울강을 통째로 덤벙시유에 넣었다 꺼낸다. 자연이 시인의 색감 속에 편입되는 순간이다. 아이들 그림책에서도 시를 찾아내고 의미를 덧입히고, 그 안에 숨은 물간과 형상을 뽑아내는 시인의 세밀한 직업은 형체 하나나에 이름을 지어주고 개성을 부각시키기에 바쁘다. 스페인 철학자 오르테가 이 가세트가 “시인은 이미 존재하는 현실에 상상의 세계를 더해줌으로써 우리의 세계를 풍부하게 해준다.” 말하듯이 시인은 상상세계와의 합일을 통해 새로운 미학적 경지를 개척해 우리 시문학사의 위의와 내용을 갖추어준다. 바라건대 시인의 상상세계가 연출하는 오색 무지개의 아우라, 언어미학의 드높은 경지에 더해, 시인이 만나는 사물마다 제 안에 하나의 여백이 자리했으면 좋겠다.